1944년 6월 12일, 항일전쟁중 마오쩌둥 (毛澤東, 1893 ~ 1976)이 국민당의 지도자 장개석 (蔣介石, 1887 ~ 1975) 지지 선언
1926년 장개석 (蔣介石, 1887년 10월 31일 ~ 1975년 4월 5일)은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북벌을 시작하였으며 1927년 4월에는 상하이 쿠테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축출하고 1928년에 베이징을 점령하여 북벌 완수를 선언했다.
이후 난징에 수도를 정하고 국민정부를 선포, 국민정부 주석과 육군, 해군, 공군 총사령이 되어 정당과 정부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1930년부터 공산당 토벌에 나섰으며, 1937년 일본의 침공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는데도 이를 항일전쟁보다 우선시 하였다.
그러나 1936년 공산당 토벌작전을 독려하기 위해 시안에 갔다가 그의 부하인 장쉐량과 그의 군대에 의해 감금당한 시안 사건을 계기로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을 결성하여 공산당과 함께 항일전쟁 (중일전쟁)에 나섰다. 공산당과 대립하면서도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이끌었다.

1944년 6월 12일, 마오쩌둥 (毛澤東, 1893년 12월 26일 ~ 1976년 9월 9일)은 국민당의 지도자 장개석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중일전쟁에서 중국 (당시 중화민국)을 승전국으로 만들지만, 1946년부터 다시 공산당과 내전을 벌였으며, 1949년 중국 공산당에 밀려 타이완으로 이전하였다.
1945년 일본 제국이 패망하여 항복한 이후,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미국의 중재로 공동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하였으나 실패했고, 이어 본격적인 내전이 개시되었다. 초기국면에서 국민당군은 병력수에 있어서 공산군보다 월등히 우세했고, 미국의 지원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초기에 유리한 국면을 선점하였다.
그리하여 1947년에는 후쭝난 지휘하의 20만명의 병력이 중국공산당의 본부가 있던 옌안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리하게 점령지를 늘린 국민당군은 지나치게 병력이 분산되는 전략적으로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게다가 중화민국 정부의 총체적 부패,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붕괴, 그리고 이미 떠난 민심이 어우러져 1948년부터는 공산당측에 유리하도록 전세가 기울었다. 군인들이 민중들에게 폐를 끼치지 못하게 한 군율도 공산당 군대가 국민당 군대와의 전쟁에서 이긴 이유중 하나였다.

1948년 가을 린뱌오가 지휘하는 동북인민해방군이 만주에서 국민당군을 격파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1949년 2월에는 베이징이 함락되었고, 이어 파죽지세로 4월에는 창 강을 건너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켰다.
이어 5월에는 최대도시 상하이를 함락시켰고 12월에는 중화민국의 영역에 남아있던 최후의 대도시인 청두마저 함락되어 결국 중화민국의 대륙 영토는 완전히 상실하였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정부의 수립을 선포하고 국가주석에 취임하였다.
장개석은 1949년 중국 공산당에 밀려 타이완으로 이전하였다.
중화민국의 총통과 국민당 총재로 장기 집권하다가 1975년 사망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