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2일,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피에트로 마스카니 (Pietro Mascagni, 1863 ~ 1945) 별세
피에트로 마스카니 (Pietro Mascagni, 1863년 12월 7일 ~ 1945년 8월 2일)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이다.
레온카발로와 함께 베리즈모 오페라 (verismo)의 대표적 작가이다.

– 피에트로 마스카니 (Pietro Mascagni)
.출생: 1863년 12월 7일, 이탈리아 리보르노
.사망: 1945년 8월 2일 (81세), 이탈리아 로마
.부모: 도메니코 마스카니, 에밀리아 마스카니
.배우자: 리나 카르보냐니 (1888 ~ 1945년)
.자녀: 디노 마스카니, 도메니코 마스카니, 에밀리아 마스카니
.대표작: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친구 프리츠 (it), 이사보 (Isabeau), 이리스 (Iris), 굴리엘모 라트클리프 (Guglielmo Ratcliff) 등
자신의 첫 오페라이자 대표작이 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베리스모 오페라의 효시로 불리고 있으며 이 작품이 성공한 이후 비슷한 유형의 베리스모 오페라가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27살의 젊은 음악가 마스카니는 이 작품을 통해 잠재력을 인정받았지만 이 작품 이후에는 이렇다 할 문제작을 내놓지 못하는 바람에 결국 베리스모 오페라의 대표주자의 자리는 5살 선배이자 친구였던 자코모 푸치니에게 내주어야 했다.

○ 생애 및 활동
피에트로 마스카니 (Pietro Mascagni, 1863년 12월 7일 ~ 1945년 8월 2일)는 1863년 12월 7일, 이탈리아 리보르노의 빵집 아들로 태어나, 법률계로 진출시키려던 아버지의 의사에 반하여 음악에 친근, 드디어 초지를 관철하여 음악의 길에 들어섰다.
밀라노 음악원에서는 폰키엘리에게 사사하여 푸치니와 동문이 되었고 고학생으로 공동생활을 영위한 일도 있다.
그러나 지방순회의 오페라단에 가담하여 그 지휘자로 있으면서 오페라와 친해졌다.
1889년 로마의 음악출판사 손초뇨 (Edoardo Sonzogno)가 공모한 1막짜리 오페라 현상에 이러한 경험을 살려 작곡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출품하여 1등상을 획득했다.
이 오페라는 다음해인 1890년에 로마에서 초연되어 기록적인 대성공을 하여 당시 26세의 청년음악가 마스카니는 일약 이탈리아 오페라계의 스타 자리에 올랐다.
이탈리아 이외의 각국에서도 이 작품은 성공을 거두어 곧 마스카니의 명성은 세계적인 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이후 작곡된 오페라는 어느 것도 큰 성공을 못 하였고, 겨우 <친구 프리츠 (L’amico Fritz)>가 알려진 데 불과하다.
만년은 불우하여 무솔리니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전 재산이 몰수되었고, 1945년 8월 2일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을 앞두고 로마에서 81세의 생을 마쳤다.

– 서민들의 삶을 그린 베리스모 오페라 걸작
19세기 후반 이탈리아에는 낭만파의 색채에 젖어 있던 예술계에 반기를 들고 현실주의를 내세우는 예술계의 거센 파도가 일기 시작한다.
이 조류는 음악계에도 밀려들어 베리스모 (verisimo) 운동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 선봉에 선 작품이 바로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이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라는 뜻은 “시골기사도”를 뜻하는 것으로 시골 사나이들의 결투나 사교의 교범을 일컫는다.
그때까지 무대는 대부분 왕이나 귀족이 주인공이었으나 이 베리스모 연극과 오페라의 출현으로 그들의 배경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서민들이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고 속어나 사투리로 말하거나 노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혁명, 산업화, 전쟁 등으로 서민들의 삶이 궁핍해져 가면서 화려한 오페라 소재에 회의를 느끼던 청중들이 고상한 취미에 호응하기보다는 진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려는 현실주의 사조를 받아들이게 된다.

○ 평가
자신의 첫 오페라이자 대표작이 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베리스모 오페라’의 효시로 불리고 있으며 이 작품이 성공한 이후 비슷한 유형의 베리스모 오페라가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27살의 젊은 음악가 마스카니는 이 작품을 통해 잠재력을 인정받았지만 이 작품 이후에는 이렇다할 문제작을 내놓지 못하는 바람에 결국 베리스모 오페라의 대표주자의 자리는 5살 선배이자 친구였던 자코모 푸치니에게 내주어야 했다.
21세기 이후 클래식계는 잊혀진 작품의 발굴에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마스카니의 작품에 대한 발굴은 2010년 이후에도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이렇게 된 것은 그가 무솔리니를 지지했다는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그의 작품 전반에 나타나는 매너리즘이다.
즉, 카발레리아의 성공 이후 그의 작품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이 작품의 작법을 답습하고 있으며 그 이상의 성취를 보여주지 못했던 것.
지속적으로 새로운 수법을 도입하고 음악적 실험을 추구했던 다른 유명 작곡가들과 달리 마스카니는 초반의 성공에 안주하면서 더 이상의 모험을 하지 않았던 탓에 그의 작품은 후기로 갈수록 오히려 작품성이 떨어지는 기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나마 카발레리아를 제외하고 관심을 받았던 친구 프리츠나 이리스도 모두 초기에 속하는 작품들이며, 급기야 파시즘을 노골적으로 찬양하고 있는 마지막 오페라 네로네는 내용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정말 눈뜨고 보기 힘든 망작이 되어 버렸다.
대작곡가가 될 수 있는 훌륭한 잠재력을 갖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첫 성공에 머물러 버린 안타까운 경우라고 볼 수 있다.

○ 작품
주요 작품으로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친구 프리츠 (it), 이사보 (Isabeau), 이리스 (Iris), 굴리엘모 라트클리프 (Guglielmo Ratcliff) 등이 있다.
교향곡 C단조 (1879)
바이올린을 위한 멜로디 (1880)
교향곡 F장조 (1881)
플루트, 바이올린, 피아노, 첼로를 위한 사랑의 노래 (1882)
피아노곡 ‘농부의 노래’ (1882)
4중주를 위한 왈츠 (1887)
영광의 미사(Messa di Gloria) F장조(1888)
교향곡 F장조(1890)
가곡 ‘해학’ (1890)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1890)
오페라 친구 프리츠(L’amico Fritz,1891)
오페라 란차우(I Rantzau)
오페라 구글리엘모 라트클리프(Guglielmo Ratcliff)
오페라 실바노(Silvano),
오페라 차네토(Zanetto)
오페라 이리스(1898)
관현악곡 ‘가보트 인형’ (1900)
오페라 가면(Le maschera)
오페라 아미카(Amica)
오페라 이사보(Isabeau)
오페라 파리시나(Parisina)
오페라 로돌레타(Lodoletta)
오페레타 시(Si, 1919)
오페라 작은 마라트(Il piccolo Marat)
오페라 피노타(Pinotta),
네로네 (1935)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