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2월 21일, 미국의 장군 조지 S. 패튼 (George Smith Patton Jr.) / G. 패튼 장군 (Gen. G. Patton, 1885 ~ 1945) 별세
조지 스미스 패튼 (George Smith Patton Jr.) 또는 G. 패튼 장군 (Gen. G. Patton, 1885년 11월 11일 ~ 1945년 12월 21일)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3년 ~ 1945년, 북아프리카, 시실리, 프랑스, 독일에서의 전투를 지휘한 미국의 육군 대장이다.
– 조지 스미스 패튼 (George Smith Patton Jr.) / G. 패튼 장군 (Gen. G. Patton)
.출생: 1885년 11월 11일, 미국 캘리포니아 샌게이브리얼
.사망: 1945년 12월 21일, 독일 하이델베르크
.묘지: 룩셈부르크 뤽상부르 Luxembourg American Cemetery
.배우자: 베아트리스 배닝 에이어 (1910 ~ 1945년)
.자녀: 조지 패튼 4세, 베아트리체 스미스, 루스 엘렌
*미합중국 육군 대장
.복무 기간: 1909 ~ 1945
.최종 계급: 대장
.주요 참전: 멕시코 혁명,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서훈 내역: 수훈십자장, 은성 훈장, 훈공장,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프랑스 북부에서 하루에 110km를 진격하기도 하였다. 프랑스와 나치 독일에 걸친 야전군인 제7군을 지휘하였다.
1945년 12월 9일 자동차 사고로 독일 하이델베르크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본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보다 일찍 부임하였으나 진급심사에서 그에게 밀렸고 또한 유럽 전선에서는 아이젠하워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저돌적인 작전과 욕설을 잘 쓰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 생애 및 활동
– 유년기와 청년기
1885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레이크 비니어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스코틀랜드계열로 대대로 군인 집안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스미스 패튼’은 남북 전쟁 당시 남군 기병대의 대령으로 활약했던 인물이었다.
조지 패튼은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받아 성장하였고, 유복하게 지냈다고 한다.
12살 나이에 패튼은 학교에 들어갔다.
학창시절 패튼은 수학을 제외한 나머지 학업 성적은 항상 상위 클래스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가장 취약했던 과목인 수학때문에 훗날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입학시험에서 한번 낙방하게 된다.
웨스트포인트(미국 육군사관학교) 1909년 졸업생이며 동기생으로 제이콥 데버스, 로버트 에이첼버거, 윌리엄 후드 심슨, 존 클리포드 하지스 리, 델로스 에몬스와 비록 중퇴하기는 했지만 코트니 하지스 등이 있는데 모두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상급부대 지휘관으로서 활약한 인물들이다.
– 군생활
.멕시코 내전과 제1차 세계 대전 활약
소위 임관 직후 터진 멕시코 내전에서 토벌군 사령관 존 퍼싱의 부관으로 참전, 판초 비야의 반란군 지휘소를 기습하여 장군 하나를 권총으로 사살한 뒤 자동차 본네트에 매달고 개선하는 기행활약을 벌여 일약 유명해졌다.
그가 말하길 처음으로 실전을 봤을때에 긴장과 겁에 질려 몸이 얼어붙어서 죽기 일보직전이였는데, 갑자기 하늘에 그를 데리러온 기라성같은 조상님들이 노려보는 것을 보고 죽어서 그들을 대하는게 더 무서워져서 용기를 내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한다.
그리고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군 참전이 결정되자 역시 원정군 사령관이 된 퍼싱 장군의 발탁으로 미군 최초의 기갑부대 지휘관이 된다.
이후 그는 철저한 기동전의 신봉자가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기동전의 신봉자로 알려져있으며 동시대에 활약했던 영국군의 버나드 몽고메리와의 의견 다툼은 늘 말썽거리였다.
둘의 지휘성향은 확연히 달랐는데, 연설에 욕설을 즐겨 쓰며, 불같은 정열을 드러내는 패튼과 달리 몽고메리는 외양에서 두드러지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전투계획자로 불리는 신중한 타입의 몽고메리에 비해서 패튼의 지휘관은 적의 약점을 즉시 공략하여 신속한 기동으로 적을 제압하는 방식이었다.
이 둘은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진격하여 독일로 진입하려는 시도에서 자주 부딪혔으며, 아이젠하워는 이 둘의 중재자로서 최대한 공평한 기회를 주고자 노력했다.
결국 어느 누구도 소련보다 베를린에 먼저 갈 수 없었다.
.아프리카 전선 활약
횃불 작전에서 패튼은 프레덴덜 장군과 함께 참전했지만 튀니지에서 시디 부지드 카세린에서 롬멜에 의해 패배를 당해 조롱 받게 되자 3월 6일 로이드 프레덴덜을 2군단장직에서 경질 시키고 패튼은 중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2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패튼 장군은 아프리카 전투 직전, 이기지 못하면 한 사람이라도 돌아오지도 말라고 부하들에게 말했고 엘 게타르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패튼이 원하던 롬멜과의 대결은 병으로 인해 본국에 가 있었기 때문에 대결이 무산되어 아쉬워 했다.
북아프리카 작전 (1942 ~ 1943)을 마친 뒤 시칠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제7군을 지휘했으며, 휘하의 기갑부대를 신속하게 움직여 팔레르모를 점령했다(1943).
– 제2차 세계 대전
1944년 여름 조지 패튼은 대담한 발상과 거침없는 전진 그리고 통상적인 군대의 규칙을 무시한 작전을 벌여 휘하의 제3군을 이끌고 북부 프랑스 지역을 순식간에 점령함으로써 군대에 몸담은 이래 최고의 순간을 맞이했다.
8월 1일부터 작전에 들어간 패튼의 기갑부대는 그달 말에 마옌·라발·르망·랭스·샬롱을 함락시키고, 12월에는 대규모로 벌어진 벌지 전투에서 바스토뉴를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5년 1월말 패튼의 부대는 독일 국경선에 이르렀고 3월 1일 트리어를 점령했다. 그 뒤 10여 일 동안 모젤 강 북쪽 지역을 완전히 연합군의 수중에 넣고 수천 명의 독일군을 포로로 잡았다.
또한 패튼의 군대는 제7군과 합류해 독일군 10만 명을 포로로 잡으며 자르와 팔츠 지방을 점령했다.
이러한 군사적인 성공으로 인해 군당국은 민간인들이 패튼의 행동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제기했음에도 이를 무마하고 넘겨버렸다.
예를 들어 조지 패튼은 1943년 8월 전투신경증에 걸려 병원으로 후송되어가던 병사를 때린 일이 있었다.
뒤에 패튼이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지만 이 일은 널리 보도되었다.
전후 패튼은 연합국들이 독일에서 벌인 탈나치화 정책에 공공연히 반대하다가 1945년 10월 제3군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
– 사망
꽤나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던 그는 아우토반을 달리다 만하임 근처에서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
이후 하이델베르크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 어록
Then there’s one thing you men will be able to say when this war is over and you get back home. Thirty years from now when you’re sitting by your fireside with your grandson on your knee and he asks, “What did you do in the great World War Two?” You won’t have to cough and say, “Well, your granddaddy shoveled shit in Louisiana.” No sir, you can look him straight in the eye and say “Son, your granddaddy rode with the great Third Army and a son-of-a-goddamned-bitch named George Patton!”
이제 제군은 전쟁이 끝나 고향에 돌아가면 이것 한가지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30년 뒤, 난롯가에서 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손자가 “할아버지는 2차 대전 때 뭐 했어요?”라고 물어보면 헛기침이나 하면서 “응, 할애비는 루이지애나에서 삽으로 똥이나 펐단다.”라고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지, 제군은 손자를 당당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해주거라! “아가, 네 할애비는 위대한 3군, 그리고 조지 패튼이라는 빌어먹을 개새끼와 함께 용맹하게 진군했단다”라고 말이다! (1944년에 유럽 침공이 시작되기 직전에 미 제3군 장병들에게 한 연설인데, 초반에는 차분한 논조로 “제군과 함께 싸우게 되어 영광이다” 같은 멘트를 하더니 갑자기 이렇게 급발진해버렸다고 한다. 워낙 인상적이었는지 패튼과 함께 전투에 참전한 용사들은 연설의 다른 부분은 다 잊었어도 패튼이 스스로를 빌어먹을 개자식이라고 지칭한 대목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고 밝혔다.)
나는 지금 진심으로 우리와 싸우게 될 저 불쌍한 거지새끼들한테 애도를 표하는 바이다! 우리는 그냥 쏴 죽이지 않을 것이다. 산채로 내장을 빼서 우리 탱크가 지나가는 길에 기름칠을 할 것이다.
죽은 자들을 위해 슬퍼하는 것은 멍청한 짓일 뿐더러 잘못된 일이다. 그러기보다는 그러한 사람들이 살아갔다는 사실을 주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나라를 위해 죽지 마라, 적들이 나라를 위해 죽게 만들어라.
지금 당장 실행할 수 있는 좋은 계획이 다음 주에 실행할 수 있는 완벽한 계획보다 낫다.
신께서 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길 빈다.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멍청한 놈도 스스로 나라를 위해 죽음으로써 승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 놈은 다른 머저리들이 제놈들의 나라를 위해 죽게 만듦으로써 이겼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지시하지 마라. 뭘 해야 할지만 지시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창의력으로 당신을 놀라게 할 것이다.
병사의 눈은 예지로 빛나야 하며 완전히 전투에 열광케 하여 왕성한 기백과 공격정신으로 승리의 길로 전진토록 하라.
공격해오는 적 전차에 성난 늑대같이 달려드는 용기가 필요하다.
공포와는 타협하지 말라, 아니 상의조차도 하지 말라.
공격하라, 공격하라, 피로가 극심할 때까지 공격하라. 피로가 극에 도달해서 쓰러졌을 때 바로 그때 다시 공격하라.
휘발유가 있는 한은 어디든 간다.
내 부하들은 벨트를 씹어먹을 수 있지만, 탱크는 기름이 필요하단 말이다.
두려움은 1분간 참으면, 용기가 된다.
전쟁에 비하자면 인간이 이룩한 다른 것은 하찮은 것이다. 나는 전쟁이 좋아 견딜 수가 없다.
내게는 전쟁보다도 평화가 지옥이다.
나는 하루를 살아도 사자로 살고 싶다.
나를 이끌든지 따르든지, 이도저도 아니면 내 길에서 비켜라.
상관에 대한 충의는 흔히들 말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부하에 대한 충의다. 위대한 사람들에게 빈번히 발견되는 특성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며, 그것이 그를 위대하게 남을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용기는 1분을 더 버티게 하는 두려움이다.
용기는 잠시 동안 공포를 억누르는 것이다.
전쟁은 무질서가 난무하는 곳이다.
항구적인 평화는 쓸데없는 꿈이다.
“내 부하들이 저 따위로 쫄보 새끼처럼 싸운다면 내가 직접 내 부하들을 조졌을 거요.”
“이거, 죽는 방법 치고 참 더럽군.”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