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6월 19일, 미얀마의 사회운동가, 아웅산 수 치 / 아웅산수찌 (Aung San Suu Kyi, 1945 ~ ) 출생
아웅산 수 치 / 아웅산수찌 (Aung San Suu Kyi, 1945년 6월 19일 ~ )는 미얀마의 정치인, 외교관, 작가이자 2016년부터 2021년까지 미얀마의 국가고문과 외무부 장관을 수행했던 노벨평화상의 수상자이다.

– 아웅산 수 치 / 아웅산수찌 (Aung San Suu Kyi)
.출생: 1945년 6월 19일 (76세), 미얀마 (버마) 양곤
.배우자: 마이클 아리스 (1972 ~ 1999)
.자녀: 알렉산더 아리스, Dannian Kim Arundel Aris
.학력: SOAS 유니버시티 오브 런던 (1985 ~ 1987), St Hugh’s College (1968) 등
.수상: 노벨 평화상, Bhagwan Mahavir World Peace, MTV 유럽 뮤직 프리 유어 마인드 어워드 등
1947년 6월에 암살된 아웅 산 장군과 킨 치 전 인도 대사의 딸로 당시 버마의 수도 랑군 (현 양곤)에서 태어났다. 델리 대학교 정치학 학사, 옥스퍼드 대학교 세인트 휴스 칼리지 정치철학경제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 런던 대학교 동양 아프리카 연구 학원에서 박사 학위했다.
그녀는 민족민주연맹에서 1988년부터 2011년까지 총재를 맡았고, 2011년부터 당수를 맡고 있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코무 지역구의 하원 의원이었고, 비폭력 민주화 운동 지도자로서 오랜 기간 활동하였다.
또한, 2010년까지 미얀마 군사 정권에 의해 가택 연금을 당했고, 2010년대의 군사 정권으로부터 부분적 민주주의로의 이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불교 신자이며, 라프토상, 사하로프상을 받았다.
현재 그녀는 2021년 2월 1일 ‘2021년 미얀마 쿠데타’로 인해 억류되어 있다.

○ 민주화의 상징에서 방관자로
미얀마(버마)는 2011년 민주화 개혁이 시작되기 전까지 군부 통치를 받았다.
2015년 미얀마에서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치러진 공개 선거에서 아웅산 수치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권좌에 올랐다. 그는 무자비한 군 장성들에게 도전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했던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미얀마 국내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불교 신자들에게 수치는 여전히 매우 인기가 높다.
그러나 로힝야 위기에 대한 수치의 대응은 그의 국제적인 위상을 실추시켰다.
– 권좌에 오르기까지
아웅산 수치는 1989년부터 2010년까지 15년 가까이를 연금 상태로 살았다.
1991년 그는 가택 연금 상태에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에게는 “힘 없는 이들의 힘을 보여주는 위대한 사례”라는 찬사가 따라다녔다.
군부 통치를 받고 있던 미얀마에 민주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한 수치의 투쟁은 그를 억압에 대한 평화로운 저항의 국제적 상징으로 만들었다.
2015년 11월 그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을 이끌고 25년 만에 처음 열린 공개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미얀마 헌법상 수치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 외국 시민권을 가진 자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 75세의 수치는 사실상 미얀마의 지도자로 인식되고 있다.
수치의 공식 직함은 국가고문이다. 윈민 대통령은 수치의 측근이다.
수치는 미얀마 독립의 영웅 아웅산 장군의 딸이다.
아웅산 장군은 미얀마가 영국 식민통치로부터 독립을 얻기 직전이었던 1948년, 수치가 불과 2살이었을 때 암살당했다.
1960년 그는 인도 대사로 임명된 어머니 도 킨 치를 따라 인도로 갔다.
4년 후 그는 영국 옥스포드대학교에서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이곳에서 나중에 그의 남편이 되는 학자 마이클 애리스를 만난다.
일본과 부탄에서 생활하다 두 자녀 알렉산더와 킴을 키우기 위해 영국에 정착했지만 수치는 늘 미얀마를 생각하고 있었다.
1988년 임종을 앞둔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수치가 랑군 (현 양곤)으로 돌아왔을 때 미얀마는 정치적 격변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수천 명의 학생, 직장인, 승려들이 거리로 나와 민주주의 개혁을 요구했다.
수치는 1988년 8월 26일 랑군에서 가진 연설에서 “내 아버지의 딸로서 나는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독재자 네윈 장군에 대한 저항을 이끌었다.

– 가택 연금
미국의 마틴 루터 킹과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투쟁에 영감을 받은 수치는 미얀마 전역을 돌며 집회를 열어 평화로운 민주주의 개혁과 자유 선거를 촉구했다.
그러나 1988년 9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는 시위를 잔혹하게 탄압했다. 수치는 이듬해 가택 연금을 당하게 된다.
군부는 1990년 5월 총선거를 치렀고 수치의 NLD당은 큰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군부는 권력 이양을 거부했다.
수치는 랑군에서 6년간 가택 연금을 당했고 1995년 7월에 연금이 해제된다.
그러나 2000년 9월, 이동 금지 조치를 거부하고 만달레이를 방문하려 했다가 다시 가택 연금에 놓인다.
가택 연금은 2002년 5월 조건 없이 해제됐으나 불과 1년 후 수치는 자신의 지지자들과 정부의 지원을 받은 폭력배들 사이의 충돌이 발생한 이후 투옥된다.
이후 귀가가 허락됐으나 다시 사실상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다.
때때로 NLD 당 관계자나 소수의 외교관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연금 초기에는 거의 독방 신세였다. 두 아들과 남편도 만날 수 없었다. 그의 남편은 1999년 3월 암으로 숨졌다.
군부는 수치의 남편이 위독해지자 수치의 영국 방문을 허락하겠다고 제의했으나 수치는 미얀마로의 귀국이 허용되지 않을 것을 우려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 정계 재입문
수치는 2010년 11월 7일 미얀마에서 20여 년만에 처음으로 열린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지만 선거 엿새 후 가택 연금에서 해제된다. 그의 아들 킴은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새로운 정부가 개혁을 실시하자 수치와 그의 당도 정계에 복귀했다.
수치의 NLD는 2012년 4월의 보궐선거에서 45석 중 43석을 획득했고 수치 본인은 의원으로 당선됐으며 야당의 당수가 됐다.
같은해 5월, 수치는 24년만에 처음으로 국외로 나섰다. 새로운 정부가 그의 귀국을 허용할 것이란 믿음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로힝야 위기
미얀마의 국가고문이 된 이후 아웅산 수치의 리더십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이 무슬림인 소수민족 로힝야족에 대한 대우에 집중된다.
2017년 라킨주의 경찰서에서 발생한 폭력사태로 촉발된 군의 탄압으로 수십만의 로힝야족이 이웃 방글라데시로 도피한다.
국제사법재판소는 로힝야 위기가 미얀마의 집단학살이라는 소송을 진행 중이며 국제형사재판소는 미얀마의 비인도적 범죄에 대해 수사 중이다.
과거 외국에서 수치를 지지했던 이들은 수치가 여전히 강력한 군부를 처벌하거나 강간, 살해, 그리고 집단학살에 대한 증언들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막기 위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비난한다.
일각에서는 수치가 복잡한 역사를 가진 다인종 국가인 미얀마를 통치하기 위해 실용적인 노선을 취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수치가 작년 국제사법재판소 심리에서 군부의 행위를 옹호한 이후 얼마 남지 않았던 그의 국제적 위상은 사라지게 됐다.
그러나 미얀마 국내에서 아웅산 수치는 대다수가 불교도이며 로힝야족에 대해 거의 동정하지 않는 국민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 멈춰선 개혁
권좌에 오른 이후 수치와 그의 NLD 정부는 식민지 시절의 법을 사용해 언론인과 활동가들을 기소한 데 대해 비판을 받았다.
일부 분야에서는 진보가 있었으나 군부는 여전히 의회 의석의 25%를 보유하고 있으며 국방, 내무, 국경 등을 비롯한 주요 부처를 통제하고 있다.
2018년 8월 수치는 내각의 장성들이 “상냥한 편”이라고 표현했다.
전문가들은 미얀마의 민주주의 이행이 정체된 것 같다고 말한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