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3월 2일, 호치민 (胡志明, 1890 ~ 1969)을 북베트남의 대통령으로 선출
호찌민 / 호치민 (胡志明, 베: Hồ Chí Minh, 1890년 5월 19일 ~ 1969년 9월 2일)은 베트남의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 초대 국가 주석이다.
그는 1946년 3월 2일에 북베트남의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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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찌민 / 호치민 (胡志明)
.출생: 1890년 5월 19일
.사망: 1969년 9월 2일, 베트남 하노이
.매장: 1969년 9월 9일, 베트남 하노이 호찌민 묘소
.정당: 베트남 공산당
.부모: Nguyen Sinh Sac, 호앙 티 로안
.학력: 국제레닌학교 (1934 ~ 1935), Cao Thang Technical College (1911 ~ 1911)
원래 이름은 응우옌신꿍 (阮生恭, 완생공, 베: Nguyễn Sinh Cung)이며 자 (字)는 떳타인 (必成 필성; 베: Tất Thành), 호 (號)는 아이꾸옥 (愛國, 애국; 베: Ái Quốc), 투옹 (秋翁, 추옹; 베: Thu Ông)이다.
가명으로는 응우옌 아이꾸옥 (阮愛國, 완애국; 베: Nguyễn Ái Quốc), 리투이 (李瑞, 이서; 베: Lý Thụy) 등을 사용하였다.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호 아저씨 (伯胡, 백호; 베: Bác Hồ)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호찌민이라는 이름은 깨우치는 자라는 뜻을 지녔다.
호찌민은 중국어 독음 이름 후즈밍을 비롯하여 생전에 가명과 필명이 모두 약 160여 개 이상 되었다.
호찌민은 판보이쩌우 이후 베트남 독립운동의 주요 인물로 일생을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바쳤으며, 베트남 공산당, 베트남 독립연맹 등을 창건하였고, 1945년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선포하고 총리 (1946 ~ 1955)와 국가주석 (1955 ~ 1969)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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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및 활동
호찌민은 프랑스가 식민 지배를 하던 시기인 1890년 5월 19일 베트남 중북부 지방의 응에안 성 호앙쭈 (베: Hoàng Trù)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응우옌 신삭 (베: Nguyễn Sinh Sắc, 阮生色)은 가난한 유학자였고, 어머니 호앙띠로안 (베: Hoàng Thị Loan) 역시 농사를 짓고 서당 훈장도 하였던 유학자의 딸 이었다.
이는 1908년 8월 7일 당시 그가 옥중에서 쓴 편지에도 밝혔던 내용이었다.
그에게는 세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누나의 이름은 밧리엔 (베: Bạch Liên / 白蓮, 후일 응우옌띠탄 (베: Nguyễn Thị Thanh)으로 개명)이었고 프랑스 육군의 사무원으로 일하였다.
형 응우옌 신키엠 (베: Nguyễn Sinh Khiêm, 후일 응우옌 땃닷 (베: Nguyễn Tất Đạt으로 개명)은 흙점도 치던 점성술사였고, 베트남 전통 의학으로 진료도 하였다.
또 다른 형 응우옌 신뉘안 (베: Nguyễn Sinh Nhuận)은 어려서 죽었다.
호찌민의 아명은 신꿍 (Sinh Cung)이었다.
일설에는 그가 하카족의 혈통이 섞인 혼혈인이라는 설이 있고, 일설에는 그가 지주 집안 후손이었다는 설도 있다.
그의 집은 훼이 시내에서 북방 360km에 떨어진 북쪽 시골 지역이었고, 주변 시설은 열악하였다.
지식인 출신의 아버지 응우옌 신삭은 오랫동안 관직에 오르지 못했지만 유교적 소양이 있어 동네 훈장으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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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찌민은 아버지 밑에서 한자와 유학을 공부하였고, 일상에서 베트남어 구어 (口語)를 표기하기 위해 널리 사용되었던 꾸옥응으도 익혔다.
10세 때 그의 아버지 응우옌신삭은 그에게 응우옌 닷 탄 (Nguyễn Tất Thành)이라는 다른 이름을 지어주었다.
1900년 8월 아버지가 후에의 말단 공무원이 되었지만, 1901년 2월 어머니가 병으로 사망하였고, 그의 아버지도 관직에서 오래 가지 못하고 얼마 뒤 면직되었다.
아버지 신삭은 자신의 활동이 프랑스에 봉사하는 것으로 여겨 요직을 거절했다 한다.
어린 시절의 호찌민은 가난한 집안형편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읽는 습관을 들인 탓에 정식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는데도 역사와 고전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였다.
호찌민은 베트남인 관리를 양성하는 프랑스-베트남학교에 입학했지만, 재학 중 반프랑스 민족주의적 사상을 가졌다고 하여 퇴학당하였다.
1904년 휴에 있는 프랑스어 문법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봄에 졸업했다.
청년기의 그는 베트남의 국학 (quốc học)에도 심취하였다.
졸업 직후인 1908년 5월에는 베트남의 노예 제도에 반대하는 농민 집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 뒤에 판티에트에서 프랑스 총독부 소학교 (Paris Colonial Administrative School)의 교사로 부임했으나 월급이 박봉이라서 1911년 1월 그만두고 사이공으로 올라가 6개월간 기술훈련원 견습생이 되었다.
그 후 1911년 6월 5일, 응우옌 바 (베: Nguyễn Ba)라는 가명으로 가명을 프랑스의 6000톤급 증기선 아미랄 라투슈 트레빌 호의 견습 요리사로 승선, 프랑스에 건너갔다.
그러나 7월 5일 마르세이유에 도착 하자마자 곧 그만두고, 선원으로 르아브르, 덩케르크 등에서 화롱하다가 아프리카의 여러 항구와 프랑스와 알제리, 튀니지, 콩고 등의 프랑스 식민지와 미국, 유럽 제국을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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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그해 9월 중순 마르세이유로 돌아왔다.
이때 그는 프랑스 식민지인 자격으로 행정학교 입학을 신청했지만 프랑스 문부성으로부터 거절당했다.
이후 그는 배를 타고 세계일주를 시작, 1911년부터 1917년 무렵 프랑스 주변의 여러 나라를 방문하였다.
호찌민은 1911년 대 초 사이공에서 프랑스 선적의 배에 선원으로 취직하여 미국을 거쳐 프랑스로 가 유학하던 중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30년에는 중국에서 베트남 공산당 (현 베트남 노동당의 전신)을 창건하여 이끌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베트남으로 돌아와 항일 독립 전쟁을 하였다.
전쟁이 종결된 1945년 9월 2일 프랑스 의 괴뢰로 전락한 응우옌 왕조의 황제 바오다이를 폐위시키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1946년, 프랑스와 독립 협상을 추진하였으나 프랑스가 협상 전에 베트남 남부에 임시 정부를 설치한 뒤 이를 코친차이나 공화국으로 발전시키자 이에 반발, 협상을 결렬시킨 뒤 반프랑스 전쟁을 감행하였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최종 승리하여 프랑스군을 몰아냈다.
그러나 미국, 소련 등이 가담하고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면서 북베트남의 최고 군사 지휘관으로서 전쟁을 지속하였다.
호찌민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9월 2일 베트남의 통일을 보지 못한 채 심장질환으로 사망하였다.
호찌민은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피식민지 독립국가의 정치지도자의 한 사람이자 저명한 공산주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베트남어뿐만 아니라 영어, 중국어의 여러 방언과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으며 태국어, 스페인어, 독일어, 러시아어에도 능했다.
종전 후 베트남 공화국의 수도였던 사이공은 그의 이름을 따 호치민 시로 개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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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과 그 이후
1966년 7월 17일 그가 발표한 성명서 가운데 ‘베트남 국민의 가슴에 독립과 자유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라는 구절은 북베트남인들의 통일전쟁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는 주제, 구호가 되었다.
만년의 그는 심장병으로 1940년대 중반부터 오래도록 고생하였고 제대로 된 진료를 받지 못했다.
호찌민은 생전에 남베트남을 정복하고 통일을 달성하는 데 최소한 3~5년 이상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그가 죽은지 7년만에 1975년 4월 남베트남은 몰락하고 만다.
미군이 베트남과 협상을 시작하면서 전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즈음인 1969년 9월 2일, 24번째 독립선언 기념일을 앞두고 호찌민은 갑작스런 심장 발작으로 9시 47분경 사망했다.
그의 나이 79세가 되던 해였다.
그의 사망 소식은 다음날인 9월 3일에 발표됐다.
장례식에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고, 재를 3등분하여 도자기 상자에 담아 북부, 중부, 남부에 뿌려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나, 그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거대한 묘에 전시되었고, 베트남 국민은 4일부터 11일까지 7일간을 전국민 애도 기간을 정하고 그를 추모했다.
당시 캐나다 종군 기자 출신이자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의 저자인 마이클 매클리어는 호치민의 장례식을 지켜본 유일한 서방 기자였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남겼다.
“위대한 지도자를 잃은 비탄과 감동, 혼란이 함께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넋을 잃은 듯이 행동했다. 한 사람의 훌륭한 정치 지도자를 잃고 애도하는 그런 슬픔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슬픔을 꾹 참고 견디는 모습이었다. 호치민의 인민들은 ‘호 아저씨’가 부르기만 하면 누구라도 달려와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순간들이었다.”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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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그는 물려줄 사람이 없다 하여 유산을 남기지 않았다.
그가 죽을 당시 유산으로는 옷 몇 벌과 낡은 구두가 전부였으며 사적으로 재산을 축재하지 않았다. 그가 사망한 뒤에도 베트남 전쟁은 6년을 더 지속되었다.
그가 죽은 지 6년 후인 1974년 12월 북베트남의 지도자들은 ‘호치민 켐페인’이라는 이름아래 남베트남 통일을 위한 작전을 수행했고, 1975년 3월 남베트남 전역에서 진격을 개시하여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베트남을 통일을 이룩했고, 1976년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이 최종적으로 성립되었으며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은 호찌민 시로 개칭되었다.
○ 저서
옥중일기
은박지에 새긴 사랑 (옥중 시집 한글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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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