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1월 7일, 한국의 시인 홍사용 (洪思容, 1900 ~ 1947) 별세
홍사용 (洪思容, 1900년 5월 17일 ~ 1947년 1월 7일)은 일제 강점기의 시인, 극작가, 수필가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 홍사용 (洪思容)
.출생: 1900년 5월 17일, 대한제국 경기도 화성
.사망: 1947년 1월 7일(46세), 미 군정 조선 서울 마포 공덕동
.국적: 대한제국
.직업: 시인, 극작가, 수필가
.학력: 경성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경력: 토월회 문예부 부장
.필명: 호(號)는 노작(露雀)·소아(笑亞)·백우(白牛)
.활동기간: 1922년~1947년
.장르: 시, 희곡, 수필
.배우자: 원효준
호는 노작 (露雀), 소아 (笑亞), 백우 (白牛)이다.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경기도 수원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훗날 경기도 용인에서 성장하였으며 경성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민족주의적 의식을 갖고 있던 낭만파 시인으로 평가된다. 극단 토월회와 산유화회에서 희곡 창작 활동도 하였다.
항일 시인으로 분류되는 이육사, 윤동주, 이상화 등을 제외하면 일제 강점기 후반에 대부분이라 할 만큼 많은 시인들이 친일 작품을 남기게 되는데, 홍사용은 이 시기에도 친일시를 창작하거나 친일 활동을 하지 않은 시인 중 한 명이다.
작품으로는 〈나는 왕이로소이다〉가 잘 알려져 있다.
1984년 5월 26일 홍사용의 고향에 있는 그의 무덤 옆에 시비가 세워졌다. 2002년에는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경기도문학인과 화성시 문학인 인사들이 주도해 노작문학상이 만들어졌다.
○ 생애 및 활동
홍사용 (洪思容, 1900년 5월 17일 ~ 1947년 1월 7일)은 생후 100일 만에 서울 재동 (齋洞)으로 옮겨 자랐으나,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경기도 화성으로 이사하여 휘문의숙 (徽文義塾)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곳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919년 휘문의숙을 졸업, 기미독립운동 당시 학생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된 바 있다. 얼마 뒤 풀려나 귀향하여 정백 (鄭栢)과 함께 수필 「청산백운 (靑山白雲)」과 시 「푸른 언덕 가으로」를 썼는데, 이 두 작품은 유고로 전해지다가 근래에 공개된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최초의 작품이 되고 있다.
문단 활동으로는 박종화 (朴鍾和) · 정백 등 휘문 교우와 함께 유인물 「피는 꽃」과 서광사 (曙光社)에서 『문우 (文友)』를 창간한 것을 비롯하여, 재종형 사중(思仲)을 설득하여 문화사 (文化社)를 설립, 문예지 『백조 (白潮)』와 사상지 『흑조 (黑潮)』를 기획하였으나, 『백조』만 3호까지 간행되었다.
그의 시작 활동은 『백조』 창간과 함께 본격화되어 『개벽』·『동명 (東明)』·『여시 (如是)』· 『불교』·『삼천리』·『매일신보 (每日申報)』 등에 많은 시·소설·희곡 작품을 발표하였다.
『백조』 창간호의 권두시 「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를 비롯하여 「나는 왕 (王) 이로소이다」· 「묘장 (墓場)」·「그것은 모두 꿈이었지마는」 등 20여 편과 민요시 「각시풀」· 「붉은 시름」 등 수편이 있다.
소설로 「저승길」· 「뺑덕이네」· 「봉화가 켜질 때」, 희곡 「할미꽃」· 「출가 (出家)」· 「제석 (除夕)」 외에도 수필 및 평문이 있다. 극단 활동으로는 1923년 토월회 (土月會)에 가담하여 문예부장을 맡은 것을 비롯하여 1927년 박진 (朴珍) · 이소연 (李素然)과 함께 산유화회 (山有花會)를 조직하였다. 또 1930년 홍해성 (洪海星) · 최승일 (崔承一)과 함께 신흥극장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이 손수 희곡작품을 써서 직접 출연하는 등 연극 활동에 정열을 쏟기도 하였다. 1929년경부터 친구 박진의 집에서 기거하는 등 한동안 방랑생활을 하다가 돌아와 자하문 밖 세검정 근처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였다. 그 뒤 8·15광복을 맞아 근국청년단 (槿國靑年團)운동에 가담하였으나, 그 뜻을 펴지 못하고 지병인 폐환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시세계는 감정의 과잉으로 표출되는 비애의 눈물과 허망감을 형상화한 초기의 사설적 (辭說的)인 장시 (長詩)와 민요의 율조를 바탕으로 하여 민족관념을 노래한 민요시로 구분된다.
대표작 「나는 왕이로소이다」와 「그것은 모두 꿈이었지마는」 등 일련의 시작들은 장시를, 그리고 「봄은 가더이다」·「해저문 나라에서」 등은 민요시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시문학사적 위치로 볼 때 1920년대 초 낭만주의운동의 선두에 섰던 그의 공적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보인 ‘어머니’와 동심적 비애, 향토적 서정, 자전적 전기 등의 감상적 색채는 그의 시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비애의식을 민족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유해는 유년시절을 보낸 경기도 화성시 노작로 (구 동탄면 석우리) 노작홍사용문학관 뒤 노작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생존시에는 작품집이 나오지 않았고 1976년 유족들이 시와 산문을 모아 『나는 왕 (王) 이로소이다』를 간행하였다.
○ 나는 왕(王)이로소이다 (‘백조’ 3호, 1923.9.)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맨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은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받은 것은 사랑이었지요마는 그것은 눈물이더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지요마는······.
“맨 처음으로 네가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은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드린 말씀은 ‘젖 주셔요’ 하는 그 소리였지마는, 그것은 ‘으아!’하는 울음이었나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마는 ······.
이것은 노상 왕에게 들리어 주신 어머님의 말씀인데요
왕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어머님의 흘리신 피를 몸에다 휘감고 왔더랍니다.
그 날에 동네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은 모두 ‘무엇이냐?’고 쓸데없는 물음질로 한창 바쁘게 오고 갈 때에도
어머니께서는 기꺼움보다는 아무 대답도 없이 속 아픈 눈물만 흘리셨답니다.
발가숭이 어린 왕 나도 어머니의 눈물을 따라서 발버둥치며 ‘으아!’ 소리쳐 울더랍니다.
그 날 밤도 이렇게 달 있는 밤인데요,
으스름 달이 무리 서고 뒷동산에 부엉이 울음 울던 밤인데요,
어머니께서는 구슬픈 옛 이야기를 하시다가요, 일없이 한숨을 길게 쉬시며 웃으시는 듯한 얼굴을 얼른 숙이시더이다.
왕은 노상 버릇인 눈물이 나와서 그만 끝까지 섧게 울어 버렸소이다. 울음의 뜻은 도무지 모르면서도요.
어머니께서 조으실 때에는 왕만 혼자 울었소이다.
어머니의 지우시는 눈물이 젖 먹는 왕의 뺨에 떨어질 때이면, 왕도 따라서 시름없이 울었소이다.
열한 살 먹던 해 정월 열나흗날 밤, 맨재더미로 그림자를 보러 갔을 때인데요, 명(命)이나 긴가 짜른가 보랴고.
왕의 동무 장난꾼 아이들이 심술스러웁게 놀리더이다. 모가지가 없는 그림자라고요.
왕은 소리쳐 울었소이다. 어머니께서 들으시도록, 죽을까 겁이 나서요.
나무꾼의 산타령을 따라가다가 건넛산 비탈로 지나가는 상두꾼*의 구슬픈 노래를 처음 들었소이다.
그 길로 옹달우물로 가자고 지름길로 들어서면은 찔레나무 가시덤불에서 처량히 우는 한 마리 파랑새를 보았소이다.
그래 철없는 어린 왕 나는 동무라 하고 쫓아가다가, 돌부리에 걸리어 넘어져서 무릎을 비비며 울었소이다.
할머니 산소 앞에 꽃 심으러 가던 한식날 아침에
어머니께서는 왕에게 하얀 옷을 입히시더이다.
그리고 귀밑머리를 단단히 땋아 주시며
“오늘부터는 아무쪼록 울지 말아라.”
아아, 그때부터 눈물의 왕은!
어머니 몰래 남모르게 속 깊이 소리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누우런 떡갈나무 우거진 산길로 허물어진 봉화(烽火) 둑 앞으로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며 어슬렁거릴 때에, 바위 밑에 돌부처는 모른 체하며 감중련(坎中連)*하고 앉았더이다.
아아, 뒷동산 장군 바위에서 날마다 자고 가는 뜬구름은 얼마나 많이 왕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백조’ 3호, 1923.9.)
- 시왕전 : 저승에 있다는 10여 명의 왕을 모신 절간의 법당
- 상두꾼 : 상여를 메는 사람
- 감중련 : 팔괘의 하나인 감괘의 상형. 방위는 정북. ‘물’을 상징. 여기서는 ‘태연히 함’의 뜻.
○ 작품
– 시
<푸른 언덕가으로>(1919) <크다란 집의 찬 밤>(文友.1920.5) <비 오는 밤>(동명 7.1921.10) <백조(白潮)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백조 창간호.1922.1) <꿈이면은>(1922) <봄은 가더이다>(백조 2.1922.5) <시악시 마음은>(백조 2.1922.5) <별, 달, 또 나, 나는 노래만 합니다>(동명 17.1922.12) <희게 하얗게>(동명 17.1922.12) <바람은 불어요!>(동명 17.1922.12) <키스 뒤에>(동명 17.1922.12) <그러면 마음대로>(동명 17.1922.12) <노래는 회색(灰色)>(동아일보.1923.1) <그것은 모두 길었지마는>(1923) <해저문 나리에>(개벽 37.1923.7) <어머니에게>(개벽 37.1923.7) <그의 화상(畵像)을 그릴 제>(동명 37.1923.7) <흐르는 물을 붙들고>(백조 3.1923.9) <막장(幕場)-커다란 무덤을 껴안고>(백조 3.1923.9) >막장(幕場)-시악시 무덤>(백조 7.1923.9) <그것은 모두 끔이었지만>(백조 3.1923.9) <나는 왕이로소이다>(백조 3.1923.9) <한탄>(時調.신조선 6.1934.10) <월병(月餠)>(月刊每申.1934.11) <각시풀>(삼천리문학 1.1938.1) <시악시 마음이란>(삼천리문학 1.1938.1) <붉은 시름>(삼천리문학 1.1938.1) <이한(離恨)>(삼천리문학 2.1938.4) <감출 수 없는 것은>(삼천리 131.1939.4) <고초 당초 맵다한들>(삼천리 131,1939.4) <호젓한 걸음>(삼천리 131.1939.4)
– 소설
<저승길>(백조 3.1923.9) <봉화(烽火)가 켜질 때>(개벽 61.1925.7)
– 희곡
<회색의 꿈>(번역 연출.토월회.1924.1) <산유화(山有花)>(토월회 공연.1924.1) <향토심(鄕土心)>(산유화 창립공연.1927.5) <태자(太子)의 출가(出家)>(藝天座.1928.5) <벙어리굿>(불교 49.1928.5) <할미꽃>(如是 1.1928.6) <흰젖>(불교50ㆍ51 합병호.1928.9) <오남매(五男妹)>(토월회 번안연출.1928.10) <제석(除夕)>(불교 56.1929.2) <모란등기(牧丹燈記)>(신흥극장.1930) <명성(明星)이 빛날 시>(藝天座 공연.1936.1)
– 수필
<그리움 한 묶음>(백조 3.1923.9) <귀향(歸鄕)>(불교 53.1928.11) <산거(山居)의 달>(매일신보.1938.7) <우송(牛頌)>(매일신보.1938.8.7) <진여(眞如)>(매일신보.1938.8.9) <궂은 비>(매일신보.1938.9.4) <추혹(秋惑)>(매일신보.1938.10.16) >처마의 인정>(매일쇼보.1938.10.27) <뺑덕이네>(조선일보.1938.12.2) <향상(向上)>(매일신보.1938.12.5) <정총대(町總代)>(매일신보.1939.2.9) <궁(窮)과 달(達)>(매일신보.1939.3.12) <두부만필(豆腐漫筆)>(매일신보.1939.4.25)
– 수필집
<청산백운(靑山白雲)>(鄭栢과 합동수필집.1919)
참고 =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