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1월 9일, 헝가리 태생 독일의 사회학자 ‘지식사회학의 창시자’ 카를 만하임 (Karl Mannheim, 1893 ~ 1947) 별세
카를 만하임 (Karl Mannheim, 1893년 3월 27일 ~ 1947년 1월 9일)은 헝가리 태생 독일의 사회학자이다.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에는 독일에서 활동했으나, 유대인이기 때문에 나치의 핍박을 피해 영국으로 망명했다.
‘지식사회학의 창시자’ 혹은 ‘지식사회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며, 사회조직 밖에서 사회학적 영향을 미치는 과학에 대한 연구, 지도력과 합의의 문제들에 관한 연구활동으로 유명하다.
– 카를 만하임 (Karl Mannheim)
.출생: 1893년 3월 27일, 헝가리 부다페스트
.사망: 1947년 1월 9일, 영국 런던
.학력: 외트뵈시 로란드 대학교 (1911 ~ 1916),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영향을 준 인물: 게오르크 지멜, 프리드리히 니체, 빌헬름 딜타이, 카를 마르크스, 막스 베버
.영향을 받은 사람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리처드 호프스태터, 찰스 라이트 밀스
만하임은 부다페스트, 프라이부르크, 베를린, 파리, 하이델베르크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공부했으며 특히 인식론을 전공하였다. 독일의 대학에서 공부한 후, 잠시 헝가리에 돌아와 1919년 벨라 쿤이 지도하는 사회주의 혁명운동에 참가하였으나 백일 남짓해서 반혁명군에 의해 혁명정부가 붕괴하였으므로 다시 독일로 돌아가야만 했다. 1922년에서 1925년까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막스 베버의 동생인 알프레트 베버를 사사하여 하빌리타치온을 얻었다. 1926년 사강사 (Privatdozent)가 되었고, 1930년에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대학교의 사회학 교수가 되었다. 1933년 나치 정권 수립과 함께 그의 사상 경향 때문에 독일에서 추방되어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의 자질과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런던 대학교의 모리스 긴즈버그 (Morris Ginsberg)와 해럴드 래스키 (Harold Laski)의해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의 사회학 강사로 추천되었다. 그의 연구는 경력에 의해 관심이 규제되고 있는 면이 강하나, 제1기는 학위논문 ‘인식론의 구조분석’에서 볼 수 있듯이 철학, 인식론에 중심이 있고, 제2기는 지식사회학 (知識社會學) 연구, 그 성과인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망명 후의 만하임은 현대사회의 진단 및 교육·사회계획에 중심을 두고, 나치즘에 대한 민주주의 옹호의 관점을 명백하게 내세우게 되었다. ‘재건기 (再建期)에 있어서의 인간과 사회’가 이 시기에 개정 (改訂) 영어판으로 간행되었다. 그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계획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교육을 중요시하였고 1945년에는 런던 대학교 교육학 주임 교수가 되고 또한 유네스코의 유럽 부장으로 사회적 실천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으나 1947년 1월 9일 53세로 별세했다.
○ 생애 및 활동
만하임은 헝가리 부다페스트 (Budapest)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헝가리계 유대인, 어머니는 독일계 유대인이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안정된 중산층 집안에서 부다페스트의 인문계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다페스트, 베를린, 파리, 하이델베르크 등지에서 공부하였다.
당시는 정치적 혁명과 문화적 개혁의 사상이 일고 있었고, 만하임은 사회과학회 (Social-Science Society)에 가담하였다. 또 여러 지도적 사회개혁가들과 정당 지도자들을 포함한 급진적 지식인 모임인 프리메이슨단 (Freemasons)에도 참여하였다. 1914년 게오르크 지멜 (Georg Simmel)에 의해 출강한 만하임은 죄르지 루카치 (Lukács)의 영향을 깊이 받았는데, 군주제적 봉건질서를 배격하는 1918년 혁명으로 수립된 중도파 사회주의 가톨릭 정권이 1919년에 붕괴되자 많은학생들이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하지만 만하임은 공산당에 입당하지 않고, 헝가리에서 폭정이 일어나자 1920년 독일로 망명하였다.
1922년 만하임은 ‘Structural Analysis of Epistemology’이라는 제목의 글로 박사학위를 받고, 1922년부터 1925년까지 유명한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 (Max Weber)의 형제인 독일의 사회학자 알프레트 베버 (Alfred Weber) 밑에서 일하였다.
1926년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게 된 만하임은 이후 1930년에는 요한 볼프강 괴테 (Johan Wolfgang Goethe) 대학교에서 사회학 교수가 되었다. 1933년 나치 통치를 피해 영국에 정착했는데, 런던경제학회 (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사회학 강의를 맡기도 하였다.
1946년 교육연구소에서 교육부장을 역임한 만하임은 1947년 런던에서 사망하였다.
만하임은 사고방식과 진리에 대한 기준이 개인마다 다른 데서 사회갈등이 발생한다고 인식했고, 이런 차이점들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이 강조하는 경제적 불균형과 계급의식보다 더 근본적이라고 믿었다. 그는 이런 생각들을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Ideologie und Utopie, 1929)에서 상술했다. 또 입증할 수 있는 사실 보다는 주관적 믿음 (이것은 그에게 ‘지식’을 의미)을 지지했다.
사후에 출간된 ‘자유, 권력, 민주주의적 계획’ (Freedom, Power, and Democratic Planning, 1950)에서 만하임은 전체주의에 대한 혐오와 점점 더해가는 사회계획의 필요성에 대한 신념을 양립시키기 위해 애썼다.
○ 영향
만하임이 중점을 둔 것은 미래사회의 계획화로, 그의 일대기는 주로 헝가리 체류 시절 (1919년까지), 독일 체류 시절 (1919 ~ 1933년), 영국 체류 시절 (1933 ~ 1947년)로 나누어 이야기한다.
만하임은 자신의 연구를 통해서 독일의 역사주의, 마르크시즘, 현상학, 사회학, 실용주의 등을 통합하려는 다양한 방법의 노력을 하였다.
또한 당대의 어떤 정치적 이념에도 찬성하지 않고 기본적 평등과 자유를 사회 전체 수준에서 계획하는 제3의 길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만년에는 종교적 신상 문제와 미래계획 사회에서의 종교의 역할, 사회변동과 기독교 정신의 변화양상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영국에서 서구문명으로 전파된 전후 자본주의 사회의 설계자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 세대 문제
만하임은 ‘세대’라는 개념을 사회적 현상으로 주목하고 학문적으로 정립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의 ‘세대 연구’ 이후, 세대 문제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전파되었고 지금도 세대 갈등과 관련한 연구에 있어서 끊이지 않고 인용되고 있는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세대의 분류를 위해 ‘세대 위치’, ‘실제 세대’, ‘세대 단위’ 등으로 구분하였다. 세대 위치는 가장 폭넓은 분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저 동일한 역사적 생활 공동체에 속한다는 특징으로 엮인다. 동일한 시기를 살고 있어도, 영국의 청년과 대한민국의 청년은 같은 정신적 이상이나 경험을 공유하지는 못한다. (통신의 발달이 이 간극을 점차 좁혀가고 있지만, 여전히 영국과 대한민국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같은 세대위치에 있다는 것은 적어도 동일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지역적 영향력 안에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실제 세대’는 동일한 세대위치에 속해 있으면서 서로 동일한 경험이나 사건을 공유하여 유대감이 형성될 수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 만하임은 그 예시로 동시대를 살면서도 농촌의 청년과 도시의 청년은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도시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정신적 영향을 폐쇄적인 농촌에서는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촌 청년과 도시 청년은 같은 세대위치에 있지만, 실제 세대가 될 수 없다고 본다. (물론, 통신이 발달한 현재는 이 예시가 부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의 사회적 그리고 정신적 내용들이 해체되어 새롭게 정립되는 영역들 속에서 동일한 세대위치에 있는 개인들 사이의 실질적인 유대를 만들어낸다면, 우리는 이를 하나의 실제 세대라고 말할 것이다.” – ‘세대 문제’ 중에서, 책세상
‘세대 단위’는 더 세분화된 개념이다. 흔히 청년세대는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라고 뭉뚱그리지만, 실제로는 ‘진보적인 경향의 청년’과 ‘보수적인 경향의 청년’이 존재한다. ‘삼포세대’라는 의미도 불우한 청년세대를 묶어 부르는 말이지만, 이후 ‘흙수저론’이 등장하여 설령 같은 청년이라 하더라도 동등한 환경이나 생각을 가지는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
‘세대 단위’는 바로 양극화된 차이점 속에서 형성되는 보다 동질적-유대적 관계의 구체적인 집합을 의미한다.
“동시대의 낭만적-보수적 청년과 자유주의적-합리주의적 청년은 동일한 실제 세대에 속하지만 두 가지 다른 세대단위들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 세대단위들은 단순한 실제 세대가 구성했던 유대보다 더 훨씬 더 구체적인 유대다. 동일한 역사적-실제적 문제에 정향하고 잇는 이와 같은 청년은 동일한 ‘실제 세대’ 속에서 살고 있다. 동일한 실제 세대 내에서 이러한 경험을 각각의 서로 다른 방법으로 소화하는 이러한 집단들은 동일한 실제 세대의 범주 내에서 각각의 다양한 ‘세대단위’들을 구성한다.” – ‘세대 문제’ 중에서, 책세상
카를 만하임의 세대 개념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는 같은 세대, 세대 현상이라고 하더라도 공통된 것으로 묶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발현하는 ‘차이점’에 주목했다. 이것은 현대 사회가 각종 사회문제를 구체적으로 파악하지않고, ‘세대’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단순히 풀어내려는 허점을 정확히 찌르는 부분이다. 흔히 우리는 ‘세대’ 라는 개념 속에서 ‘공통점’을 찾아 단순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만하임은 공통된 경험을 서로 어떻게 소화하는가 그 ‘차이점’을 중심에 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 저서
주요 저작으로는 《사유의 구조》, 《지식사회학》,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재건기의 인간과 사회》, 《정치 교육으로서의 사회학》 등이 있다.
* Selected works
Mannheim, K. ([1922-24] 1980) Structures of Thinking.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Mannheim, K. ([1925] 1986) Conservatism. A Contribution to the Sociology of Knowledge.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Mannheim, K. (1929), Ideologie und Utopie
Mannheim, K. ([1930] 2001) Sociology as Political Education. New Brunswick, NJ. Transaction.
Mannheim, K. (1935 (English 1940)) Man and Society in an Age of Reconstruction. London: Routledge.
Mannheim, K. (1936) Ideology and Utopia. London: Routledge.
Mannheim, K. (1950) “Freedom, Power, and Democratic Planning.” Oxford University Press
Mannheim, K. (1971. 1993) From Karl Mannheim. New Brunswick, NJ. Transaction.
참고 = 위키백과,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