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3월 26일, 대한민국의 (인권) 변호사 조영래 (趙英來, 1947 ~ 1990) 출생
조영래 (趙英來, 1947년 3월 26일 ~ 1990년 12월 12일)는 대한민국의 인권 변호사였다.
조영래는 대한민국의 인권변호사로, 『전태일평전』 의 집필자이자 1980년대 노동·여성·환경 관련 사건의 변론을 맡았던 인물이다. 1972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1년 6개월간 복역하고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6년간 도피 생활을 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1983년 시민공익법률사무소를 개설하여 망원동 수재집단의 소송사건, 이경숙사건 (여성조기정년제 철폐사건),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상봉동 진폐소송사건 등을 맡았다.
“지금까지 충분히 실천은 못하였으나 4개월 동안 내가 수행하려고 하는 제일보는 피의자 또는 참고인, 가족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친절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도록, 어떤 경우에도 조금이라도 권력을 가진 자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상대방을 위축시키거나 비굴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다른 것은 다 못하더라도 이것만 해낼 수 있다면 더 이상 좋은 수가 없겠다. 만약 친절히 해서 일이 안 된다는 것을 내가 마침내 승인하게 되는 일이 만의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것은 나에게 더할 수 없는 심대한 패배가 될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아도 좋다고 한다면, 혹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인간성에 거는 우리의 모든 신뢰와 희망은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 1981년 12월 검사시보 시절 일기에서

– 학력
1958년 서울수송초등학교 (졸업)
1961년 경기중학교 (졸업)
1964년 경기고등학교 (수석졸업)
1969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학사)
1971년 서울대학교 일반대학원 법학과 (석사)
– 약사
1947년 3월 26일 대구에서 출생
1965년 3월 서울대 법대 입학
1969년 3월 서울대 대학원 입학
1971년 10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1983년 변호사 개업, 전태일 평전 집필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등 변론
1990년 9월 폐암 3기로 입원
1990년 12월 12일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운명

○ 생애 및 활동
조영래 (趙英來)는 1947년 3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나 1953년 대구국민학교에 입학하였고, 5학년 때인 1957년 상경하였다. 서울 수송국민학교,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1965년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1969년 2월에 졸업하였다. 1990년 12월 12일 폐암으로 사망하였다.
– 주요 활동
조영래는 경기고 3학년 시절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주동하여 정학처분을 받았고,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해서도 1965년 한일회담 비준 반대 시위와 1967년 6 · 8부정선거규탄시위 등에 앞장섰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자살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조영래는 전태일의 죽음을 사회에 알리는 역할에 나섰다. 11월 20일 서울대에서 열린 전태일 추도식에는 “전태일을 죽인 박정희 정권, 기업주, 어용 노총, 지식인, 모든 사회인 등 5대 살인자”를 고발하는 시국 선언문을 초안하였다.
1971년 사법시험 합격 후 사법연수원 생활을 시작한 그는 11월에 발생한 ‘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에 장기표 · 이신범 · 심재권과 함께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1972년 9월 항소심에서 조영래는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 (민청학련사건)에서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수배되었고, 1980년까지 도피 생활을 해야 했다. 1980년 사면 복권된 후 1982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변호사가 되어 1983년 8월 11일 시민공익법률사무소를 개설하였다. 7년이라는 짧은 기간 변호사 생활을 하였지만, 노동 · 여성 · 환경 관련 사건을 맡아 인권변호사주1로 활동하였다.
조영래가 맡은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1984년 서울 망원동 수재사건의 집단소송, 1986년 이경숙사건 (여성조기정년제 철폐사건), 1986년 부천경찰서성고문사건, 국내 최초의 공해병 피해보상 소송 사건인 1987년 상봉동 진폐소송사건 등이 있다.

– 학문과 저술 · 사상과 작품
전태일분신자살사건 이후 조영래는 그의 삶을 추적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민청학련사건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도피 생활을 하면서도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을 만나거나, 평화시장을 방문하여 전태일의 삶을 기록하였다.
1974년 장기표로부터 전태일 육필 수기를 전달받은 것을 계기로 『전태일 평전』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1976년에 『전태일 평전』 원고 집필을 마쳤으나, 유신체제하에서 국내 출판사들이 출간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이 원고는 1978년 일본의 다이마쓰 출판사에서 『불꽃이여 나를 감싸라: 어느 한국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먼저 출간되었다.
한국에서는 1983년 돌베개출판사에서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발간되었다.
당시 책에 저자명은 ‘조영래’로 기재되지 않았고,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엮음’으로 표기되었다.

○ 기념사업회의 조영래 소개
조영래 변호사는 서울대 재학중 한일회담 반대, 삼성재벌 밀수 규탄, 6.7부정선거 규탄, 삼선개헌 반대, 교련반대, 공명선거쟁취 등의 학생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된 후 6년 가까이 피신생활을 하던 중 민주화운동에 주력하였고, 특히 3년여에 걸친 각고 끝에 전태일 평전 (어는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집필하는가 하면,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망원동 수재사건, 대우어패럴사건, 이경숙 사건 (여성 조기정년제 철폐)등을 변론하였고, 변호사협의회 인권보고서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또한 보도지침사건, 박길재 사건 (상봉동 진폐증 보상문제)을 담당하였으며, 기타 노동, 빈민, 공해, 학생운동 관련사건 등 인권변호에 전력하던 그는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을 만들고나서 지병인 폐암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뒤로 한채 운명하였다. 동지를 생각하며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아름다운 변호사 조영래 – 민주유공 96년 10월호 中 65년 서울대 전체수석으로 법학과에 입학하고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를 6개월만에 끝내버린 ‘시험도사’로서의 지적인 재능, 경기고 시절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반대해 ‘공부선수’들로 이뤄진 경기고 학생들을 거리로 이끌어낸 탁월한 대중선동력, 78, 80년대 인권변호사로서 최고의 승소율을 가능케 한 논리정연한 변론, 판검사와 방청객을 침묵케한 유려한 변론문 등, 한 인간이 가진 참으로 다양한 재주에 시기심까지 잠재우는 그의 놀라운 재능은 정작 따로있다. 다양한 세속적 재주를 넘어서는 실로 위대한 그의 재능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인간을 사랑할 줄 알고 그 사랑을 관철하기 위해 결연한 투혼을 불태울 수 있는 재능, 이것이야말로 실로 범인들을 고개 숙이게 하는 위대한 재능이다. 조영래라는 이름 석자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란 영화가 개봉되면서부터. 1970년 스물둘의 젊음을 불길 속에 내던졌던 청년노동자 전태일의 삶과 투쟁을 그린 ‘전태일 평전’, 이 책은 이후 전태일 동지의 죽음을 노동운동의 불꽃으로 타오르게 하면서 한국노동운동사의 새 지평을 열게 했지만 정작 글쓴이가 알려진 것은 90년 말의 일이다.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엮음’으로 나오던 이 책은 90년 개정판을 내면서 조씨의 지우 장기표씨에 의해 원저자가 밝혀지게 됐다. 그러나 조씨는 자신의 생전에 이 사실이 알려지기를 끝내 거부라도 하듯 개정판 발간을 열흘 남짓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95년 전태일 평전이 영화화됐다, 조영래 변호사는 영화속에 나레이터인 70년대 고뇌하는 지식인으로 그려지면서 평전의 저자로서 관심을 끌게 됐다. 그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73년에 1년 6개월간의 복역을 마치고 만기출소하지만 다음해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면서 그 후 79년까지 6년 가까운 피신생활을 시작한다. 피신생활 중에도 조동지는 사회의 민주화를 향한 투쟁의 불꽃을 삭이지 않았고, 특히 3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으로 ‘전태일 평전’을 집필한다. 그는 암울하기만 한 수배의 시간조차도 자포와 체념이 아닌 투쟁의 기회로 활용한 것이다. 청년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을 노동운동을 부활시키는 횃불로 승화시킨 불후의 걸작 ‘전태일 평전’은 단순한 글재주의 산물이 아니다. 당시 젊은 그는 혈관을 관통한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결연한 투혼 , 그리고 어떤 순간에서도 자신은 물론 남들에게까지 희망의 빛을 던져주는 타고난 낙천성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조영래 변호사는 기본적으로 이상주의자다. 새날을 꿈꾸며 우리 사회의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대개가 그렇듯이 그 역시 이상주의자다. 훨씬 낙관적인 이상주의자였다. 어둠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도리어 남들에게 빛을 던져 주는 사람, 인간 조영래는 타고난 낙천적 기질에 바탕한 이상주의자다. 조변호사는 동시에 현실주의자다. 어떤 순간에도 현실에의 끈을 놓지 않는다. 가장 현실적으로 상황을 분석하고 가장 현실적인 대안을 찾는 인물, 그리고 그 대안을 목숨 걸고 이루려 하는 인물이 바로 조영래 변호사이다. 조영래 변호사는 이토록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다중적 성격의 소유자다. 그러나 그의 삶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는 일관된 주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조영래 변화사의 역작 ‘전태일 평전’에 그려진 동지 전태일을 두고 혹자는 예수의 순교자적 삶을 떠올린다. 그러나 인간 조영래 자체가 그런 삶을 살지 않았나 싶다. 한 인간이 평생을 통해 이뤄낼 수 있는 모든 인간적 순수의 결정체로서 마흔넷 그의 삶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환하게 타오르는 빛이 사랑이다.
○ 상훈과 추모
1991년 ‘조영래 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이 유고집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를 엮어 발간하였다. 2020년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 저서
《전태일 평전》, 조영래, 돌베개, 1991.

참고 = 위키백과,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기념사업회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