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6월 8일, 조지 오웰 (George Orwell, 1903 ~ 1950)의 소설 ‘1984년’ 발간
1949년 6월 8일에는 조지 오웰 (George Orwell, 1903년 6월 25일, 영국령 인도 비하르 주 ~ 1950년 1월 21일, 46세, 영국 런던)의 소설 ‘1984년’이 발간됐다. 소설 ‘1984년’ (Nineteen Eighty-Four)은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 1984 (Nineteen Eighty-Four)
.저자: 조지 오웰
.국가: 영국
.주제: 디스토피아
.장르: SF
.출판사: 세커 앤드 와버그 출판사(런던)
.발행일 1949년 6월 8일
1984년을 전체주의가 극도화된 사회로 상정하고 쓴 미래 소설인 작품 속에서 세계는 거대한 초국가들로 분화되어 있고 이들은 영구적인 전쟁 상태이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곳은 영국으로 소설 속에선 “제1공대” (第一空帶, Airstrip One)로 불리며 오세아니아에 포함되어 있다. 오세아니아는 전체주의 정치 이데올로기인 영사 (英社, Ingsoc)의 지배를 받으며 최고위 지배자는 대형 (大兄, Big Brother)이다. 소설 속 국가는 기록을 조작하고, 개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며, 언어와 사고를 통제하여 영구적인 집권을 기획한다. 소설은 이러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기록조작을 담당하던 주인공이 전체주의와 갈등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1984년’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의 ‘우리들’과 더불어 디스토피아를 다룬 소설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히며, 이후 많은 예술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소설의 영향으로 사회나 국가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고 전체주의, 권위주의와 같은 비민주적 정치체제에 반기를 드는 사람을 오웰족 (Orwellian)이라고 부른는 경우도 있다. 1989년 집계 당시 ‘1984년’은 65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는 조사 당시 다른 어떤 영국 소설 보다 많은 숫자이다.
작품의 제목인 1984는 작가가 작품을 탈고한 1948년의 뒷자리 년도를 뒤집은 것이다.
– 저술 배경
조지 오웰은 1943년 12월에 있었던 테헤란 회담의 경과를 보면서 세계가 초강대국과 그들의 영향권으로 재편되는 것을 직감했다. 로저 센하우스는 1948년 조지 오웰이 보낸 편지를 통해 그가 이 장면을 “잊히지 않을 소설의 핵심에 각인”하였다고 회상하였다. 조지 오웰은 1947년에서 1948년 사이 스코틀랜드의 주라 섬에서 소설을 집필하였고, 마지막 원고는 1948년 12월 4일에 출판사로 송고되었다. 당시 오웰은 아내를 잃고 주라 섬에서 폐결핵으로 요양중인 가운데 집필에 몰두하였다. 세커 앤드 와버그 출판사는 1949년 6월 8일 《1984년》의 초판을 출판하였다.
러시아의 작가 자먀찐의 1921년 작품 《우리들》은 《1984》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리들》은 학문과 종교, 예술이 도그마가 될 때 개개인의 사유가 제약당하는 “사고의 엔트로피화”를 겪게 될 것이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1946년 오웰은 《우리들》의 프랑스어 번역서를 읽고 짧은 서평을 남겼다.
오웰은 《동물 농장》처럼 이 소설의 배경 역시 스탈린 시대의 소련에서 차용했다. 빅 브라더는 스탈린이고 임마누엘 골드슈타인 (Goldstein)은 트로츠키를 묘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아나키스트였던 조지 오웰이 특별히 공산주의만을 반대한 것은 아니며 나치, 파시즘과 함께 전체주의 전체를 비판한 것으로 평가된다. 조지 오웰은 스페인내전 당시 참전 경험에서 코민테른의 공산주의자들의 교조적 행동이 오히려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적이란 것을 발견하고 《카탈로니아 찬가》를 저술한 바 있다. 오웰은 자신이 겪었던 참호전, 식량배급에 대한 경험과 스탈린의 강제노동수용소, 미국의 핵폭탄 투하 등을 보면서 냉전 세계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책에 담았다.
– 세계관
.초국가 사이의 영구 전쟁
소설 속에 등장하는 1984년의 세계는 오세아니아, 동아시아, 유라시아의 세 초국가로 나뉘어 있다. 이 세 국가는 끊임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때에 따라 서로 동맹을 맺기도 하고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소설 속에서 임마누엘 골드스타인이 지은 것으로 등장하는 가상의 책 《과두정치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제》에서는 《1984》의 세계관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소련이 유럽을 병합하여 유라시아가 되고 미국이 영국을 병합하여 오세아니아가 된 뒤 동아시아는 10년간의 복잡한 내전 끝에 등장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들 초국가는 유라시아의 광대한 토지, 오세아니아의 대서양과 태평양을 근거로한 이점, 동아시아의 다산과 근면성과 같은 이유로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굴복시킬 수 없는 평형상태에 있어 끊임없는 전쟁을 계속한다. 오세아니아는 1950년대 이전 어느 시점에 혁명이 일어나 영사를 지배 이념으로 하는 일당 독재가 시작되었다. 유라시아는 신볼세비즘을 지배 이념으로 하고, 동아시아는 죽음 숭배를 지배 이념으로 하지만, 세 초국가들은 내세우는 이념의 차이와 달리 너나 할것 없이 극단적 전체주의 국가이다. 이들의 전쟁은 오히려 자원의 독점, 노동의 소비, 내부 통제 이데올로기의 지속과 같은 것에 목적이 있다. 이러한 초국가간의 전쟁은 결국 국가의 지속을 위해 언제나 적을 필요로 하는 적대적 공생이라고 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은 《1984》를 통해 냉전을 예견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세아니아
1984의 무대이자, 주요 국가이다.
– 주요 등장 인물
.윈스턴 스미스 – 주인공. 진리성 기록관리국에서 근무하는 외부당원이다.
.줄리아 – 주인공의 연인. 진리성 소설창작국에서 근무하는 외부당원이다. 소설창작국은 만화경과 같은 기계를 돌려 싸구려 통속소설을 자동생산한다.
.오브라이언 – 진리성의 내부당원으로 주인공에게 반체제단체를 소개한다.
.빅브라더 – 실제하는지 만들어낸 허상인지 조차 모호한 오세아니아의 최고지도자.
.임마누엘 골드스타인 – 영사를 반대하는 반체제인물로 영사의 공식적인 배신자이자 주적이지만, 이 역시 실재하는지 만들어낸 허상인지 조차 모호하다. 소설의 묘사에 따르면 레프 트로츠키와 모습이 흡사하다고 한다.
– 오웰의 언어관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의 참전 경험을 담은 르포 《카탈루냐 찬가》를 쓴 저널리스트였고, 파리의 부랑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어휘를 취록하기도 하였다. 조지 오웰의 작품이 사변적이거나 구태의연하지 않은 것은 그의 다양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조지 오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BBC에서 근무한 바 있다. 그가 근무했던 BBC의 방 번호 101호는 《1984》에서 주인공이 처형을 당하는 방의 번호로 등장한다. 이 근무 경험과 스페인내전에 대한 르포 출판, 파리의 부랑자들과의 생활 등을 통해 언론과 언어에 대한 자신만의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조지 오웰은 특히나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좋아하였으며, 스위프트의 감정, 통찰력, 언어 절약 등에 공감을 표했다.
전작 《동물농장》에서 조지 오웰은 스퀼러가 일곱 계명을 조금씩 바꿔나가며 조작하는 대목을 넣었다. 부패한 권력이 우매한 대중을 언어 조작을 통해 지배하는 것은 조지 오웰의 오랜 관심사였다. 조지 오웰은 1946년 《호라이즌》에 〈정치와 영어〉라는 에세이를 발표하여 “사람이란 스스로 실패작이라 여겨 술을 마신다. 그리고 술때문에 더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영어에서 나타나는 현상도 마찬가지다. 어리석은 사고 때문에 언어가 꼴사납고 흐리멍텅해진다. 그리고 언어가 단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고를 하기가 더 쉬워진다.”라고 썼다. 《1984》에서 조지 오웰은 신어 체계를 도입하여 언어와 사고, 정치 선전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더욱 발전시켰다. 《1984》 속 진리성의 주요 과업은 신어 사전 11판의 제작이었으며, 이 사전이 나오게 되면 더 이상 구어는 사용하지 않게 된다.
신어에는 두 가지 문법적 규칙이 있다. 첫 번째는 어휘의 수를 줄이는 것으로 ‘춥다 (cold)’의 반대인 ‘덥다 (hot)’를 ‘안 (un)’을 붙여 ‘안춥다 (uncold)’로 한다든지, 훌륭하다를 ‘더 (plus)’를 붙여 ‘더좋다. (plus good)’, ‘더더좋다. (double plus good)로 대체하는 것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명사 ‘칼’로 ‘자르다’를 대신하며, 모든 ‘명/동사’의 파생어가 변형을 할 때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규칙 또한 포함된다. 두 번째는 어휘의 길이를 줄이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영국 사회주의 (England Socialism)를 ‘영사’ (INGSOC)로 부른다든지, 선사 (善思, goodthink), 앞에서 말한 네 성을 각각 ‘평성’, ‘애성’, ‘풍성’, ‘진성’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이유는 ‘영국 사회주의’라는 것보다 ‘영사’라는 표현이 더 사고의 폭을 줄이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의 신어에 대한 통찰은 당시 이미 사용되고 있던 각종 축약어, 이를 테면 나치, 코민테른, 인프레코르와 같은 언어에 대한 경고이다. 그는 부록 〈신어의 원리〉에서 국제 공산당 (International Communist Party)는 마르크스, 파리 코뮌, 인터네셔널과 같은 공산주의 운동의 흐름이 떠오르지만 코민테른 (Comintern, Communist International)이라는 말에서 떠오르는 것은 엄격히 짜여진 단체, 명백히 정의된 강령체만이 떠오를 뿐이라고 일갈하였다.
– 번역
대한민국에서 《1984》가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1949년 10월 5일 《태양신문》이 원작을 각색한 만화의 줄거리를 소개한 것이다. 《태양신문》은 독립운동가 노태준이 사장으로 있었으며 1949년 2월 25일 창간된 종합일간지이다. 신문 기사는 줄거리를 간추린 것으로 조지 오웰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었으나 책이 출판된 그 해에 소개된 것으로, 당시에는 1948년 10월 31일 김길준에 의해 번역되어 대건인쇄소에서 출간한 《동물 농장》과 마찬가지로 반공주의를 선전할 목적으로 소개된 듯 하다. 번역본은 1953년 3월 15일을 번역일자로 하여 3 종이 출판되었는데 모두 동일한 번역자의 것을 가져다 출판만 따로 한 것으로 보인다. 1951년 문예서림에서 출판하였고, 뒤를 이어 1953년 청춘사, 1957년 정연사에서 출판하였다.
.번역서들
조지 오웰, 김병익 역, 《1984년》, 문예출판사, 2014년
조지 오웰, 박경서 역, 《1984년》, 열린책들, 2009년
조지 오웰, 권지아 역, 《1984년》, 을유문화사, 2012년
조지 오웰, 정회성 역, 《1984》, 민음사, 2003년
– 영향을 준 작품
마이클 앤더슨, 1984(1956)
스탠리 큐브릭, 시계태엽 오렌지(1971)
마이클 래드포드, 1984(1984)
테리 길리엄, 브라질(1985)
커트 위먼, 이퀼리브리엄(2002)
무라카미 하루키, 1Q84(2009~2010)
1985년:빅브라더는 죽었다
2084(2017)
백남준, 굿모닝 미스터 오웰
Osmotic studios, 오웰 (비디오 게임)

○ 서적소개 : 조지 오웰의 ‘1984’ (민음사, 2003)
‘동물농장’과 함께 조지 오웰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전제주의라는 거대한 지배 시스템 앞에 놓인 한 개인이 어떻게 저항하다가 어떻게 파멸해 가는지, 그 과정과 양상, 그리고 배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작품의 무대인 오세아니아는 전체주의의 극한적인 양상을 띠고 있는 나라. 오세아니아의 정치 통제 기구인 당은 허구적 인물인 빅 브라더를 내세워 독재 권력의 극대화를 꾀하는 한편, 정치 체제를 항구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텔레스크린, 사상경찰, 마이크로폰, 헬리콥터 등을 이용하여 당원들의 사생활을 철저하게 감시한다.
당의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과 동시에 당원들의 사상적인 통제를 위해 과거의 사실을 끊임없이 날조하고, 새로운 언어인 신어를 창조하여 생각과 행동을 속박함은 물론,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성욕까지 통제한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이런 당의 통제에 반발을 느끼고 저항을 꾀하지만, 오히려 함정에 빠져 사상경찰에 체포되고, 혹독한 고문 끝에 존재하지도 않는 인물 ‘골드스타인’을 만났다고 자백하고, 결국 당이 원하는 것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무기력한 인간으로 전락한다.
– 목차
제 1부
제 2부
제 3부
부록 : 신어의 원리

– 저자소개 : 조지 오웰 (George Orwell, 본명: Eric Arthur Blair)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er Blair. 1903년 6월 25일, 인도의 벵골 주 모티하리에서 하급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8세 때 사립예비학교에 들어갔으나, 이곳에서 상류층 아이들과의 심한 차별을 맛보며 우울한 소년시절을 보냈고, 장학생으로 들어간 이튼교에서의 학창시절 역시 계급 차이를 뼈저리게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졸업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922년부터 5년간 미얀마에서 대영제국 경찰로 근무했으나 점차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느껴 직장을 그만두고 파리로 건너가 작가수업을 쌓았다. 유럽으로 돌아와 파리와 런던에서 부랑자 생활을 하고 잠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거쳐 영국 노동자들의 삶에 관한 조사 활동에 참여했다. 이때를 토대로 한 소설이 1933년의 첫 소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생활’과 1935년 ‘버마 시절’이다.
전체주의를 혐오한 그는 스페인 내전에도 참가했는데, 그 체험을 기록한 1936년 ‘카탈로니아 찬가’는 뛰어난 보도 문학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2차 대전 직후인 1945년에는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의 배신을 우화로 그린 ‘동물농장’으로 일약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해 그는 아내를 잃고 자신도 지병인 폐결핵의 악화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그 와중에도 작품 활동을 계속하여 전체주의의 종말을 기묘하게 묘사한 디스토피아 소설 ‘1984년’을 출간했다. ‘1984년’은 전제주의라는 거대한 지배 시스템 앞에 놓인 한 개인이 어떻게 저항하다가 어떻게 파멸해 가는지, 그 과정과 양상, 그리고 배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작품의 무대인 오세아니아는 전체주의의 극한적인 양상을 띠고 있는 나라이다. 오세아니아의 정치 통제 기구인 당은 허구적 인물인 빅 브라더를 내세워 독재 권력의 극대화를 꾀하는 한편, 정치 체제를 항구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텔레스크린, 사상경찰, 마이크로폰, 헬리콥터 등을 이용하여 당원들의 사생활을 철저하게 감시한다. 당의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과 동시에 당원들의 사상적인 통제를 위해 과거의 사실을 끊임없이 날조하고, 새로운 언어인 신어를 창조하여 생각과 행동을 속박함은 물론,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성욕까지 통제한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이런 당의 통제에 반발을 느끼고 저항을 꾀하지만, 오히려 함정에 빠져 사상경찰에 체포되고, 혹독한 고문 끝에 존재하지도 않는 인물 ‘골드스타인’을 만났다고 자백하고, 결국 당이 원하는 것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무기력한 인간으로 전락한다.
‘1984년’은 오웰을 20세기 최고의 영향력 있는 작가로 만들었다. 하지만 날로 악화되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작품을 발표한 이듬해인 1950년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지 오웰은 지난 1999년 영국 방송 BBC가 조사한 ‘지난 1천 년간 최고의 작가’ 부문에서 셰익스피어, 제인 오스틴에 이어 3위에 선정되었다. 게다가 영문학에서는 ‘오웰주의’, ‘오웰주의자’라는 뜻의 Orwellism이나 Orwellian이라는 표현이 따로 있을 정도이니, 이 정도면 그가 서양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주로 당대의 문제였던 계급 의식을 풍자하고 이것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하였으며, 또 일찍이 스탈린주의의 본질을 꿰뚫고 거기서 다시 현대사회의 바닥에 깔려 있는 악몽과 같은 전체주의의 풍토를 작품에 정착시켰다. 그는 ‘나는 왜 쓰는가’라는 글에서, 글을 쓰는 이유를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자신의 글 중에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쓴 글들만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 책 속으로
윈스턴은 어머니의 꿈을 꾸었다.
어머니가 사라진 것은 그가 열 살인가, 열한 살 때였다.
어머니는 탐스러운 머릿결에 키가 큰 데다 조각처럼 몸매가 아름다운 조용하면서도 행동이 침착한 여자였다. 그리고 그가 어렴풋이 기억하기로 아버지는 피부가 검고 야윈편이었는데, 언제나 검정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는 안경을 끼고 다녔다. 그런데 이들 두사람은 50년대의 제 1차 대숙청때 희생된 게 틀림없다.
꿈속에서 어머니는 어린 여동생을 껴안은채, 그가 있는 곳의 아래쪽 깊숙한 곳에 앉아 있었다. 여동생에 대해서는 자그맣고 허약한 아이로, 언제나 말이 없는 가운데 커다란 눈망울만 깜빡이고 있었다는 것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지하였다. 정확하게는 샘 바닥이나 깊은 무덤 속 같은 데였다. 그런데 그곳은 그와 멀찍이 떨어진 아래쪽인데도 계속 더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둘은 침몰하는 배의 일등 선실에 앉아서 시커먼 물을 통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p. 45~46
– 출판사 서평
.조지 오웰 탄생 100주년, 그의 작품을 통해 오늘을 되돌아보다
조지 오웰의 대표작 ‘1984’는 1949년에 발표된 디스토피아 소설로 ‘동물농장’과 함께 60여 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는 작품이다. 당시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소련의 전체주의를 비판하면서 미래에 대해 예언한 소설이라고 평했다. 1949년 6월 12일자 뉴욕타임스에는 “올해 출간된 작품 중 ‘1984’는 가장 동시대적인 작품”이라고 실렸을 정도로 작품에 담겨 있는 시사적인 함의도 뚜렷했다. 그렇다면 소련이 붕괴된 오늘날, 작품이 갖는 의미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가? 물론 그렇지 않다. 사회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이 ‘1984’를 스탈린주의의 잔학함에 대한 묘사로만 해석하고 그것이 서구 사회에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면 정말 불행한 일일 것이라고 말했듯이, 작품의 제목인 ‘1984년’(오웰은 이 작품을 1948년에 완성했는데, ‘1984년’이라는 제목은 ‘48’을 뒤바꾼 것이라고 한다.)이 거의 20년이나 지난 오늘 우리 사회에까지도, 그의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는 충분한 의미를 담고 있다.
.21세기, 사생활 침해가 문제되는 고도의 정보사회에 던지는 경고
‘1984’에서는 빅 브라더라는 인물의 독재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텔레스크린이라는 장치를 이용한다. 텔레스크린은 수신과 송신을 동시에 행하여 어떠한 소리나 동작도 낱낱이 포착할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다. 사상경찰(思想警察)은 텔레스크린을 통해 개개인을 감시하며, 사람들은 오랜 세월 그렇게 지내다 보니 그런 삶에 익숙해져 버린다. 작품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도 하루 종일 텔레스크린의 감시를 받으며 생활한다. 이런 상황은 조지 오웰이 작품을 썼을 당시에는 단지 미래에 대한 공상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몇 년 전부터 은행, 백화점, 관공서 등 곳곳에 몰래 카메라가 설치되어 우리는 일거일동을 감시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언제 얼마의 현금을 인출하는지, 어떤 물건을 사는지, 어떤 문서를 발급받는지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노출된다. 심지어 지구를 도는 인공위성의 초정밀 카메라로는 우리가 안방에서 무엇을 하는지조차 찍을 수 있다. 더불어 도청 장치를 통해 통화 내용이 새어나갈 수도 있고, 휴대폰의 전원을 켜놓은 동안에는 다른 사람이 우리의 위치를 파악할 수도 있다.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우리의 신상정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흘러들어갈 수도 있다. 그리하여 작품이 출간되었던 1949년 당시보다도 정보 기술의 발달로 개개인의 사생활과 신상정보가 쉽게 노출될 수 있는 오늘날, 오웰의 작품이 보내는 경고는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여진다.
.독자들의 비판 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정치적 소설
조지 오웰은 1946년에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해 1948년에 완성했다. 조지 오웰은 소설뿐만 아니라 에세이로도 유명한데 1947년에 쓴 그의 에세이’나는 왜 쓰는가’를 보면 작품을 통해 조지 오웰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가 더욱 뚜렷해진다.
평화 시대였다면 나는 화려한 책 혹은 단순한 묘사 위주의 책을 썼을 것이 틀림없고 나의 정치적 충성이 어느 쪽에 있는 건지도 모르는 상태로 살았을 것이다. (……) 스페인 전쟁과 1936-1937년의 기타 사건들은 정세를 결정적으로 바꿔놓았고 그 이후 나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1936년 이후 내가 진지하게 쓴 작품들은 그 한 줄 한 줄이 모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기 위해’ 쓰여졌다. 우리 시대처럼 소란한 세월을 살면서 이런 문제들을 회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난센스이다. (……) ‘동물농장’은 내가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융합해 보고자 한, 그래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충분히 의식하면서 쓴 첫 소설이었다. 지금 몇 년째 나는 소설에 손대지 않고 있으나 곧 하나 쓸까 한다. 물론 실패작일 것이고 모든 책은 실패작이지만 내가 쓰려는 책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에리히 프롬이 언급했던 것처럼 오웰은 단순히 암울한 미래상을 예언하려 했던 것이 아니다. 그의 에세이를 통해서도 미루어볼 수 있듯이 오웰의 ‘1984’는 명백히 정치적이다. 그는 거대한 지배 체제 하에서 저항을 기도하지만 결국 체제의 벽을 넘지 못하고 파멸해 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 세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탁월하게 형상화하면서 독자들의 비판적 의식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 조지 오엘 / 조지 오웰 (George Orwell, 1903~1950)의 생애
영국의 저술가 ‘조지 오엘(George Orwell,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으로 널리 알려진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 1903년 6월 25일 ~ 1950년 1월 21일)는 인도에서 태어난 영국 작가이자 언론인이다. 명료한 문체로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고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과 민주사회주의에 대한 지지를 표한 것으로 이름나 있다.
– 조지 오엘(George Orwell, 조지 오웰)
.생사: 1903년 6월 25일(영국령 인도 비하르 주)~1950년 1월 21일 (46세, 영국 런던)
.본명: 아서 블레어 (Eric Arthur Blair), 필명: 조지 오웰
.직업: 작가, 언론인
.언어: 영어 (국적: 영국)
.모교: 이튼 칼리지
.장르: 디스토피아, 르포
.주제: 반파시즘, 반스탈린주의, 마르크스주의
.대표작: 동물농장, 1984 외 다수
오엘 (오웰)은 문학 평론, 시, 평론, 소설과 같은 작품을 남겼으며, 동물 농장 (1945년)과 1984년 (1949년)으로 특히 유명하다. 논픽션 작품 중에는 위건 부두로 가는 길 (1937년), 카탈로니아 찬가 (1938년) 등이 있다. 2008년 타임스는 1945년 이후 위대한 영국 작가 50선에 2위로 조지 오웰을 꼽았다. 반공주의자로 잘못 알려져있으나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사회주의자중 한명이다.
조지 오웰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대중 문화와 정치에 영향을 주고 있다. 조지 오웰이 만든 신조어인 빅 브라더, 사상 경찰 (思想警察, Thought Police), 신어, 이중 사고 (二重思考, doublethink)와 같은 언어와 그가 예견한 냉전 체제 등은 여전히 영향력있는 개념이다.
조지 오웰은 1950년 1월 21일에 오랫동안 앓아 온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 성장기
에릭 아서 블레어는 1903년 6월 25일에 당시 영국의 식민지이던 영국령 인도의 벵갈(오늘날 비하르 주)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찰스 블레어는 부유한 젠트리로 토머스 페인 백작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의 주요 수입원은 자메이카의 플랜테이션 농장이었다. 할아버지 토머스 리처드 아서 블레어는 성직자이었다. 젠트리 신분은 세대를 걸쳐 상속되었으나 제물은 그렇지 못하여 에릭은 자신의 집안을 “상류 중산층의 하층”이라고 표현하였다. 에릭의 아버지인 리처드 월머슬리 블레어(Richard Walmesley Blair)는 인도 식민국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어머니 이다 블레어 (Ida Mabel Blair)는 에릭이 두 살이 되던 해 그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생가는 비하르 주의 역사 유적으로 지정되었다.
에릭은 어머니 이다와 함께 옥스포드셔의 헨리온템즈에 정착하였다. 아버지가 3개월간 영국에 돌아왔던 1907년을 제외하면 1912년까지 가족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에릭에게는 마조리라는 이름의 누나와 에이브릴이라는 이름의 여동생이 있었다. 1905년에 쓰인 어머니의 일기에는 활발한 사회 활동과 예술에 대한 관심이 보인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에릭의 가족은 옥스포드셔의 쉽레이크로 이주하였다. 에릭은 여기서 버디컴 집안과 어울렸는데 특히 딸인 제신타 버디컴 (Jacintha Buddicom)과 친하게 지냈다. 이들의 우정은 이후로도 계속하여 이어졌고, 1974년 제신타는 이 때의 일을 적은 ‘에릭과 우리들’을 출간하였다.
에릭은 다섯살이 되어 헨리온템즈의 수녀원 부속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곳은 1903년 이후 프랑스에서 종교 교육이 금지되자 영국으로 건너 온 우르술라 수녀회가 운영하는 로마 가톨릭 계열의 학교였다. 어머니 이다는 에릭을 퍼블릭 스쿨에 보내고자 하였으나 그러기엔 학비가 부담이 되었다. 이다의 형제인 찰스 리무진이 이스트서식스에 있는 세인트 시프리언즈 스쿨을 추천했는데 프로 골퍼였던 리무진은 그 학교 교장과 몇 차례 골프를 친적이 있었다.
학교 교장은 학비의 절반을 감해주기로 하고 에릭을 입학하도록 하였다. 1911년 에릭은 세인트 시프리언즈 스쿨에 입학하였고 집에는 방학 때에만 갔다. 그는 등록금 이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으나, 학교에선 에릭이 “가난한 집안”이란 소문이 번졌다. 그는 훗날 회고록 ‘정말, 정말 좋았지’ (Such, Such Were the Joys)에서 학교가 싫었다고 썼다. 에릭은 이 학교에서 사이릴 코널리와 친구가 되었다. 코널리는 많은 해가 지나 호라이즌의 편집장이 되었고 조지 오웰의 여러 에세이를 잡지에 수록하였다. 오웰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자신의 가족에 대해 묘사하기를 ‘상류 중산층의 하급 계층’ (lower-upper-middle class)이라고 표현하곤 했다.
세인트 시프리언즈 스쿨을 다니는 동안 에릭은 헨리온템즈의 지역 신문인 헨리 앤 사우스 옥스퍼드셔 스탠다드에 두 편의 시를 기고하였다. 에릭은 코널리와 함께 할로우 스쿨이 지급하는 할로우 역사 장학급 2등급에 선정되었다. 이로서 윌링턴 스쿨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지만 이튼 스쿨에 들어가고 싶었던 에릭은 이튼 스쿨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 세인트 시프리언즈에 남아 있기로 결정하였다. 에릭은 1916년 12월까지 세인트 시프리언즈에 있었다.
1917년 1월 에릭은 웰링턴 스쿨로 옮겼다. 그러나 5월에 이튼 스쿨에서 입학 허가서가 도착하자 이튼으로 옮겼다. 에릭은 1921년까지 이튼 스쿨에 다녔다. 그는 어린 시절 친구 버디컴에게 웰링턴이 “더럽다”고 말했고, 이튼은 “흥미롭고 행복한 곳”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이튼 스쿨의 교장은 엔드류 시든햄 페러 고우로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우쉽 교수였다. 그는 에릭의 진로를 조언하는 편지를 써 주었다. 에릭은 당시 이튼 스쿨을 함께 다니고 있던 올더스 헉슬리, 스테번 런시먼과 같은 이들에게서 간략한 프랑스어를 배웠다. 사이릴 코널리가 에릭을 쫓아 이튼 스쿨에 왔지만 몇 해 동안 해어져 있었던 이유로 관계는 소원해졌다.
이튼에서의 그의 학업에 대한 평가는 바보 같은 학생이었다는 것과 훌륭한 학생이었다는 것이 공존하고 있다. 자신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분개하는 몇몇 교사를 에릭은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훗날 조지 오웰을 필명으로 사용한 뒤 쓴 ‘정말, 정말 좋았지’에서 에릭은 학창 시절 동안 학교가 가르친 것은 단순한 암기식 수업이며 그 속에서 자신은 계급 차별로 인한 따돌림을 당했다고 썼으며 이튼의 교육에 대해 ‘(아는 척 할 줄 아는) 신용 사기를 향한 과감한 준비’만을 시켰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약하고 못생겼다는 것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스스로를 실패한 인생으로 생각했다. 어려서 형성된 실패한 인생이라는 감각은 그가 평생 동안 가졌던 것이었다. 에릭을 직접 만나본 사람들은 그가 추남이었으나 맑고 푸른 눈을 가졌다고 회고한다.
결국 그가 이튼을 졸업할 무렵에는 167명중 138등을 할 만큼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는 이튼 스쿨에서 로저 마이너스와 함께 대학 잡지를 편집하는 일을 하였고, 대학 진학 선발 시험인 킹스 스콜라를 통과하였지만 부모의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은 이튼에서 훗날 자신의 지기들이 되는 친구들을 몇몇 사귀었다. 그중 싸이릴 코놀리는 잡지 ‘호라이즌’의 편집자가 되어 오웰의 유명한 에세이 대부분을 출간해주었다. 훗날 오웰은 상당한 자율을 허용했던 이튼스쿨 시절을 ‘그런대로’ 행복했다고 회고했지만, 입학 후 공부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신경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이튼의 생활에 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가 제국주의와 영국의 식민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은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처럼 식민 관료의 길을 선택했다. 당시 이튼의 교육은 학생들을 식민 관료, 군인, 제국주의자로 만드는 것이었고, 아직 에릭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런시먼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에릭 블레어가 동양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썼다. 에릭의 아버지는 서퍽의 사우스월드에서 퇴임하였고, 가족은 에릭이 인도의 제국 경찰이 되기를 희망하였다.
– 버마 시절
에릭 블레어의 외할머니는 버마의 모울메인에 살았다. 에릭은 버마에세 경찰을 하기로 하고 1922년 10월 SS 히어포드셔 호를 타고 수에즈 운하와 스리랑카를 거쳐 버마로 갔다. 한달 후 그는 양곤에 도착하였고, 만달레이에서 훈련을 받았다. 핀우린에서 잠시 복무한 후, 1924년 초 에야와디 관구의 미야웅미아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의 동년배들이 대부분 영국의 대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갈 때 그는 에야와디 관구의 트완테에서 20만명의 치안을 책임지게 되었다. 1924년 말이 되어 그는 양곤 인근의 시리암 (탄리인) 경찰서의 부서장으로 승진하였다. 시리암에는 버마 오일의 정유 공장이 있었다. 공장 주변은 드럼통 쓰레기가 뒹굴고 뿜어져 나오는 이산화 황으로 주변 식물들이 죽어가는 곳이었다. 그러나 관할지가 양곤과 가까웠기 때문에 에릭은 종종 시내로 나가 항구에 나가거나 서점과 카페를 들리면서 경찰 업무의 지루함을 달랬다. 당시 버마는 90명 정도의 영국인 경찰 간부가 13000명 정도의 현지인 경찰을 관리했고 그들이 1300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장악했다.
1925년 에릭 블레어는 버마에서 두 번째로 큰 감옥인 인사인 형무소로 발령받았다. 인사인에서 근무하는 동안 에릭은 엘리사 마리아 랭포드레를 알게 되었고 그녀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주제”로 끝없는 대화를 나누곤 하였다. 그녀는 훗날 인도 시킴 주의 초대 수상인 카지 렌두프 도르지와 결혼하였다. 랭포드레는 에릭이 “매우 공정하고 사소한 것까지 세세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고 적었다.
에릭은 미얀마에서 다른 영국인 간부들이 영국식 사교생활을 즐기던 것과는 달리 고독하게 지냈고 가끔 사창가를 찾았다. 다른 푸카(펀잡어로 식민지배자들을 이르는 말)와 달리 카인족과 같은 소수 민족을 찾아다니거나 버마어를 읽었다. 당시 동료였던 로저 비든은 1969년 BBC에 출연하여 블레어는 매우 빨리 버마어를 습득하였으며 버마의 승려들과 유창하게 소통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에릭이 가혹한 식민통치자는 아니었으나 불교 승려들과 매춘부들에 대해 경멸하는 태도를 취했고 이는 훗날 제국주의자임을 거부했던 글에서도 확인이 가능할 정도로 체화되어 있었다.
1926년 에릭은 외할머니가 사는 모울메인으로 옮겼다. 그해 말 그는 다시 상부 버마 사가잉 관구의 카타로 발령되었고, 1927년 그곳에서 뎅기열에 걸렸다. 에릭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다. 1927년 9월 영국의 콘월에서 가족을 만난 그는 버마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하고 가족들의 반대에도 사표를 제출하였다. 그는 5년간이나 식민 관리 생활을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에 대한 깊은 자기혐오에 빠지게 되었다. 아버지가 35년간 근무하여 가족이 ‘중류 생활자’로 지내게 해준, 그리고 자신이 5년간 영국 신사로 지낼 수 있도록 해준 신분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에릭은 작가가 되고자 했다. 그는 버마에서의 경험을 살려 1931년 에세이 ‘교수형’ (A Hanging), 1934년 소설 ‘버마 시절’ (Burmese Days), 1936년 수필집 ‘코끼리를 쏘다'(Shooting an Elephant)를 발표하였다.
오웰의 두 번째 저서인 ‘버마 시절’은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비극적인 로맨스가 제국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고 반제국주의적 정서가 강하게 드러나 있다. 주인공 플로리는 식민 경찰로 있던 오웰의 페르소나로 읽히며 그는 어떻게 자신이 제국주의를 혐오하게 되었는가를 실감나게 묘사한다. 그는 버마에서 보낸 시간들의 이미지가 너무도 강해서 그것을 어딘가에 쏟아붓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영국에 돌아온 에릭 블레어는 가족이 살고 있는 사우스월드에 자리 잡았다. 그는 작가로서의 삶에 대한 조언을 듣기 위해 옛 은사인 고우가 있는 캐임브리지를 방문하였다. 1927년 에릭 블레어는 런던으로 거처를 옮겼다. 가족과 안면이 있던 시인 러스 피터가 숙소를 잡는 것을 도와주었고, 블레어는 그 해 말 노팅힐의 포르토벨로 가에 방을 얻었다. 이 집에는 조지 오웰을 기념하는 블루 플래크가 부착되어 있다. 블레어의 어머니는 러스 피터가 이사를 도운 것에 적잖이 안심을 하였고, 피터는 블레어가 시에는 그다지 재능이 없다는 걸 지적하며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을 써 보라고 권유하였다. 에릭 블레어는 경험을 쌓기 위해 이스트엔드오브런던의 생활상을 살폈다. 에릭 블레어는 이스트엔드오브런던의 밑바닥 삶을 서술한 ‘밑바닥 사람들’을 출간한 잭 런던을 동경하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가 가난한 계층의 사람인양 차려입고서 이스트런던의 라임하우스코스웨이에 있는 하숙집을 빌렸다. 에릭 블레어는 이 시기 겪은 일을 정리하여 1931년 첫 수필 ‘스파이크’를 발표하였다.
1928년 초 그는 파리로 이주하여 노동자들의 밀집 거주 지역이었던 파리 5구의 루두포드페 (Rue du Pot-de-Fer)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이모 넬리 리무진이 파리에 살고 있어서 필요한 사회적 지원과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 에릭 블레어는 ‘버마 시절’의 초고를 쓰며 작가 생활을 했지만, 벌이가 될 만한 것은 못되었다. 에릭 블레어는 프랑스의 국제공산당 잡지인 몽드에 투고를 하면서 작가로서 보다는 언론인으로서 더 알려지게 되었다. 에릭 블레어가 전업 작가로서 쓴 첫 글인 ‘영국의 관료 체제’ (프: La Censure en Angleterre)는 1928년 10월 6일 실렸다. 영어로 된 첫 글은 1928년 12월 29일 지케이스 위클리 (G.K.’s Weekly)에 실린 ‘서푼짜리 신문’ (A Farthing Newspaper)이었다. 에릭 블레어는 프랑스의 좌파 잡지인 르 프로그레 시비크 (Le Progrès Civique, 진보 시민)에 정기적으로 투고하여 런던의 부랑자와 거지의 삶을 다룬 글들을 썼다. 밑바닥 삶에 대한 그의 이런 관심은 훗날 ‘카탈로니아 찬가’가 집필되기 전까지 에릭 블레어의 주된 평론 주제였다.
1929년 2월 에릭 블레어는 중병이 걸려 파리 14구의 코신 병원에 입원하였다. 이 병원은 의대 학생의 교육을 위해 운영되어 무료로 진료를 하였다. 당시의 경험은 1946년에 발표된 ‘빈자가 죽는 법'(How the Poor Die)의 바탕이 되었다. 그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이 하숙방에 도둑이 들어 가진 돈을 모두 훔쳤다. 블레어는 생계를 위해 뤼드리볼리 가의 호텔에서 접시를 닦아야 했다. 1933년 출간 된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는 그의 접시닦이 생활, 구빈원에서의 생활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있다. 밑바닥 생활을 거치면서 에릭 블레어는 상류층의 자본가들은 프롤레타리아의 폭동을 두려워 할 뿐, 그들의 생활 개선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보잘 것 없는 노동자들에 대한 밑바닥을 관통하는 본능은 단지 폭도에 대한 공포이다. 폭도는 저급한 동물이기 때문에 여가 시간이 생긴다면 위험해질 것이다. 너무 바빠서 생각할 시간도 없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다.” _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1929년 8월 에릭 블레어는 뉴 아델피에 ‘스파이크’를 투고하였다. 뉴 아델피는 대중적 사회주의를 불러일으킨 주요 잡지 중 하나였으며 1935년까지의 오웰의 글 대부분이 이 잡지를 통해 발표되었다. 1929년 12월 에릭 블레어는 2년 여간의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부모들이 살고 있는 사우스월드의 집으로 돌아갔다. 가족은 지역에서 평판이 좋았고 여동생 에이브릴은 찻집을 운영하였다. 그는 지역의 많은 사람들과 친분을 쌓았고, 그 가운데에는 사우스월드의 세인트펠릭스 여학교의 체육 교사였던 브랜다 샐켈드도 있었다. 성공회 신부의 딸이었던 그녀는 블레어의 청혼을 거절하기는 하였지만, 친구로 남아 여러 해 동안 주기적으로 편지를 주고 받았다.
1930년 블레어는 여동생 마조리와 그녀의 남편이자 어릴 때부터 격의없이 알고지내던 험프리 데킨과 함께 리즈의 브램리에 잠시 머물렀다. 블레어는 여기서 뉴 아델피에 투고를 하며 사우스월드의 개인 교사로 생활하였다. 당시 가르쳤던 학생들 중에는 훗날 철학자가 된 리처드 스텐리 피터스가 있었다. 이 즈음 블레어의 생활은 이중적이었다. 사우스월드 블레어 가의 아들인 에릭은 예의바르고 별다른 일 없이 지내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당시 필명으로 사용한 버튼은 런던의 이스트앤드 싸구려 숙소와 길바닥을 거닐고 켄트의 들판에서 홉을 주었다. 그는 해변에서 그림을 그리고 수영을 하며 지내다 훗날 그의 경력에 영향을 미친 마블 피어즈와 프란시스 피어즈를 만나게 되었다. 일년 뒤 블레어는 이들을 런던에서 다시 만났고, 그들의 친구인 막스 플로우먼과도 자주 만났다. 또한 블레어는 루스 피터와 리처드 피터의 집에서도 자주 머물렀는데, 그 덕에 블레어의 간헐적인 밑바닥 생활에는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당시 블레어의 하루 임금은 하프 크라운(8분의 1 파운드) 정도였다.
1931년 8월 블레어는 ‘교수형’을 투고하면서 뉴 아델피의 정규 기고자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이스트앤드와 켄트의 홉 밭에서 막노동을 하였고 이러한 경험을 일기로 기록하였다.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1935년 소설 ‘목사의 딸’을 발표하였다. 블레어는 여러 출판사에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의 출간을 의뢰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931년 말 조지 오웰은 순전히 투옥 경험을 쌓을 목적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1931년 12월 19일 위스키 한 병을 들이킨 뒤 병을 들고 배회하다 베스널 그린 경찰서에 체포되었다. 거기서 블레어는 당시 사용하던 필명인 에드워드 버튼으로 자신의 인적사항을 기재하였다. 경찰서는 인적 사항이 확인 되지 않자 몇 차례의 추가 조사를 하고는 블레어를 석방하였다.
1932년 4월 블레어는 웨스트런던의 남자 고등학교였던 하우스론 고등학교의 교사로 채용되었다. 하우스톤 고등학교는 열 살에서 열여섯 살쯤 되는 열대여섯 학생이 다니는 작은 사립 학교였고 블레어 외에도 다른 교사 한 명이 더 있었는데, 학부모는 무역상이나 상점 주인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교사 생활을 하는 동안 마블 피어즈는 빅토르 골란츠가 운영하는 출판사가 ‘천한 것의 일기’ (A Scullion’s Diary,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의 초고 제목)를 40 파운드에 출판할 의사가 있다고 알려왔고 블레어는 이를 수락하였다.
1932년 여름 끝무렵 에릭 블레어는 사우스월드로 가서 부모가 집을 장만한 것을 축하하였다. 휴가 기간동안 에릭과 여동생 에이브릴은 집 단장을 하였고, 에릭은 ‘버마 시절’의 집필을 계속하였다. 이 동안 블레어는 엘리너 자크와 교재하였다. 하지만 블레어가 보다 깊은 관계를 희망하는 사이 그녀는 데니스 콜링스에게 애정을 보였다. 1932년 8월 블레어는 그의 실패한 투옥 경험담을 담은 ‘유치장’을 뉴 아델피에 기고하였다. 블레어는 다시 교사 생활을 시작했고 그 사이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의 출간을 준비하였다. 그는 가족들이 자신의 부랑자 생활을 알 게 될까 염려되어 새로운 필명을 고심하였다. 블레어는 1932년 11월 15일 무어에게 편지를 보내 필명을 추천해 주길 부탁했고, 나흘 뒤 무어와 골란츠는 기존의 필명이었던 버튼과 함께 케네스 마일즈, H. 루이스 얼웨이스, 조지 오웰 등의 이름을 추천하였다. 블레어는 조지 오웰을 필명으로 선택했는데, 엘리너 자크에게 그 이유를 “부드럽게 들리는 영국 이름”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그가 작가로서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고 가족들이 놀라지 않도록 고려해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서포크의 오웰 강을 좋아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한동안 기고문에는 계속 에릭 블레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저자를 조지 오웰이라고 밝힌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은 1933년 1월 빅토르 골란츠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책은 평판이 좋았고, 뉴욕의 하퍼 앤 브라더스 출판사가 다음 판을 인쇄하였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는 그의 접시닦이 생활, 구빈원에서의 생활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있다. 첫 번째 저서임에도 불구하고 사회 모순들을 묘사함에 있어 매우 신랄한 필치를 구사하고 있다. 밑바닥 생활을 묘사하는 것 뿐 아니라 그 와중에 런던의 속어와 욕설을 정리해둔다거나 구빈원 시스템의 모순을 치밀하게 폭로하는 등 다층적이면서도 종합적인 글쓰기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오웰다운 위트가 곳곳에 넘친다. 잭 런던의 ‘밑바닥 사람들’ (1903)로부터 영향받은 작품이다. 그동안 블레어는 ‘버마 시절’의 집필을 계속하였다. 1933년 중반 블레어는 하우스론 고등학교를 떠나 힐링턴 구에 있는 억스브리지의 프레이스 컬리지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이전 학교와 달리 그 곳은 200 명이 넘는 학생이 있었고 교직원도 모든 부서가 편성되어 있는 학교였다. 블레어는 오토바이를 구입하여 인근을 돌아다녔다. 그는 추운 날씨에 밖을 돌아다니다 폐렴에 걸렸고 억스브리지 코테이지 병원에 입원하였다.[51] 중태에 빠져 사경을 해매던 그는 1934년 1월이 되어서야 간신히 퇴원하였다. 그는 사우스월드의 부모 집으로 돌아갔고 교사직을 영영 그만두었다.
1933년 말에 블레어는 ‘버마 시절’을 탈고하였으나 골란츠가 명예 훼손에 휘말릴 것을 염려하여 출판을 거절하자 낙담하였다. 그러나 하퍼 앤 브라더스는 미국에서 출간을 추진하였다. ‘버마 시절’은 출간 이후에도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 비해 호의적이지 못한 평가와 판매고를 올렸다.
그외에도 ‘엽란을 날려라’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카탈로니아 찬가'(스페인 내전) ‘동물 농장'(제2차 세계대전) ‘1984년’은 명저

– 오웰 리스트
조지 오웰은 병상에 있을 때 친소주의 작가 명단을 작성하여 ‘백주의 암흑’의 작가 아서 케스틀러의 처제였던 정보조사원 셀리아 커원을 통해 영국 정부 외무연방성 산하의 정보연구국 (Information Research Department)에 제출하였다.
이 리스트에는 38명의 명단이 적혀 있었고, 영국은 이를 메카시즘 선전 활동에 활용하였다. 오웰 리스트는 54년간 비밀로 묶여 있다가 2003년이 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오웰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실제 소련 KGB에 포섭된 친소파로 밝혀졌다.
오웰 리스트는 후일 격론을 불러 일으켰다. 아일랜드계 미국 언론인 겸 작가 알렉산더 코번 (Alexander Cockburn)은 이를 “당치않은 고자질”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명단을 넘겨받은 셀리아 커원은 오웰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옹호하였다.
– 작품
주요 저서로는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버마의 나날』, 『목사의 딸』, 『엽란을 날려라』,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카탈로니아 찬가』, 『숨쉬러 올라오기』, 『고래 뱃속에서』, 『사자와 일각수』, 『동물 농장』, 『비판적 에세이』, 『영국 사람들』, 『1984년』 등이 있다.
- Novels
1934 – Burmese Days
1935 – A Clergyman’s Daughter
1936 – Keep the Aspidistra Flying
1939 – Coming Up for Air
1945 – Animal Farm
1949 – Nineteen Eighty-Four
- Nonfiction
1933 – Down and Out in Paris and London
1937 – The Road to Wigan Pier
1938 – Homage to Catalonia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