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 29일, 대한민국의 시인 김영랑 (金永郞, 1903 ~ 1950) 별세
김영랑 (金永郞, 1903년 1월 16일 / 1902년 음력 12월 18일 ~ 1950년 9월 29일)은 대한민국의 시인으로 본명은 김윤식 (金允植)이다. 본관은 김해 (金海)이다.
전라남도 강진에 있는 대지주의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한학을 배우며 자랐다. 강진보통학교를 다니면서 13세의 나이에 결혼하였으나 1년 만에 사별하였다.
졸업 후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 운동 때 학교를 그만두고 강진에서 의거하다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다음해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 영문학과에서 공부하다가 간토 대지진 때 귀국하였다. 1926년에 두 번째로 결혼하였다.
1930년 정지용, 박용철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에 가입하여 동지에 여러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이 무렵 쓴 시이다. 이 때이 문학사조를 문학사학자들은 순수서정시라고 부른다.
1935년 첫째 시집 《영랑시집》을 간행하였고,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뚜렷해지자 《독 (毒)을 품고》 등의 저항시를 썼다. 이후 신사참배, 창씨 개명등에 저항하여 두어차례 붓을 꺾기도 하였으나 해방 후에는 시작 활동에 전념하다가 고향인 강진에서 제헌국회의원에 출마 했다가 낙선하였고, 공보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 수복 전투 중 서울을 탈출하지 못하고 포탄 파편에 맞아 48세로 사망하였다.
– 김영랑 (金永郞)

.본명: 김윤식 (金允植)
.아호: 영랑 (永郞)
.출생: 1903년 1월 16일, 전라남도 강진
.사망: 1950년 9월 29일 (48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부모: 김종호, 김경무
.배우자: 김귀련 (1925 ~ 1950), 김은하 (1916 ~ 1917)
.학력: 강진공립보통학교 (졸업),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 (영어과 / 졸업 여부 불명), 휘문의숙 (졸업), 아오야마학원 (중학부 / 졸업),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영문학 / 중퇴)
.상훈: 건국포장
.저서: 모란이 피기까지는, 영랑시집, 찬란한 슬픔의 봄 등
본관은 김해 (金海). 본명은 김윤식 (金允植). 영랑은 아호인데 『시문학 (詩文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전라남도 강진 출신. 아버지 김종호 (金鍾湖)와 어머니 김경무 (金敬武)의 5남매 중 장남이다.
○ 생애 및 활동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혼인하였으나 1년반 만에 부인과 사별하였다.
그뒤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난 다음 1917년 휘문의숙 (徽文義塾)에 입학, 이 때부터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휘문의숙에는 홍사용 (洪思容) · 안석주 (安碩柱) · 박종화 (朴鍾和) 등의 선배와 정지용 (鄭芝溶) · 이태준 (李泰俊) 등의 후배, 그리고 동급반에 화백 이승만 (李承萬)이 있어서 문학적 안목을 키우는 데 직접·간접으로 도움을 받았다.
휘문의숙 3학년 때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 [靑山學院]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하였다. 이무렵 독립투사 박렬 (朴烈), 시인 박용철 (朴龍喆)과도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향리에 머물면서 1925년에는 개성출신 김귀련 (金貴蓮)과 재혼하였다. 광복 후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하였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하기도 하였다.

1949년에는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국악이나 서양명곡을 즐겨 들었고, 축구 · 테니스 등 운동에도 능하여 비교적 여유있는 삶을 영위하다가, 9·28수복 당시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시작활동은 박용철 · 정지용 · 이하윤 (異河潤) 등과 시문학동인을 결성하여 1930년 3월에 창간된 『시문학』에 시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등 6편과 「사행소곡칠수 (四行小曲七首)」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후 『문학』 · 『여성』 · 『문장』 · 『조광 (朝光)』 · 『인문평론 (人文評論)』 · 『백민 (白民)』 · 『조선일보』 등에 80여편의 시와 역시 (譯詩) 및 수필 · 평문 (評文) 등을 발표하였다. 그의 시세계는 전기와 후기로 크게 구분된다. 초기시는 1935년 박용철에 의하여 발간된 『영랑시집』 초판의 수록시편들이 해당되는데, 여기서는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이나 인생태도에 있어서의 역정 (逆情)·회의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슬픔’이나 ‘눈물’의 용어가 수없이 반복되면서 그 비애의식은 영탄이나 감상에 기울지 않고, ‘마음’의 내부로 향해져 정감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요컨대, 그의 초기시는 같은 시문학동인인 정지용 시의 감각적 기교와 더불어 그 시대 한국 순수시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940년을 전후하여 민족항일기 말기에 발표된 「거문고」 · 「독 (毒)을 차고」 · 「망각 (忘却)」 · 「묘비명 (墓碑銘)」 등 일련의 후기시에서는 그 형태적인 변모와 함께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죽음’의 의식이 나타나 있다.
광복 이후에 발표된 「바다로 가자」·「천리를 올라온다」 등에서는 적극적인 사회참여의 의욕을 보여주고 있는데, 민족항일기에서의 제한된 공간의식과 강박관념에서 나온 자학적 충동인 회의와 죽음의식을 떨쳐버리고, 새나라 건설의 대열에 참여하려는 의욕으로 충만된 것이 광복 후의 시편들에 나타난 주제의식이다.
주요저서로는 『영랑시집』 외에, 1949년 자선 (自選)으로 중앙문화사에서 간행된 『영랑시선』이 있고, 1981년 문학세계사에서 그의 시와 산문을 모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있다. 묘지는 서울 망우리에 있고, 시비는 광주광역시 광주공원에 박용철의 시비와 함께 있으며, 고향 강진에도 세워졌다.
○ 문학 세계
김영랑은 사회주의 문인들인 카프 문인들이 쓴 목적의식이 담긴 시를 거부하고.이상적인 순수서정시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아름다운 시어 속을 흐르는 조용한 저항의식이 담긴 민족주의적 시를 쓰기도 하였는데,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뚜렷해진 일제강점기 말에 쓴 《독 (毒)을 품고》가 그 예이다. 주로 ㄴ, ㄹ, ㅁ, ㅇ같은 부드러운 소리 (유음, 흐르는 소리), 남도 방언등으로써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살린 섬세한 시적 표현을 사용하였다.
○ 작품
– 시집
《영랑시집》 (1935)
–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참고 =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