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3월 9일, 러시아와 소비에트 연방의 페미니스트•소설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Aleksandra Mikhailovna Kollontai, 1872 ~ 1952) 별세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콜론타이 (Aleksandra Mikhailovna Kollontai, 러: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Коллонтай, Aleksandra Mikhailovna Kollontai, 1872년 3월 31일 ~ 1952년 3월 9일)는 러시아 제국과 소비에트 연방의 노동 운동가, 정치인이자 외교관, 소설가, 사회주의자이다.

○ 생애 및 활동
어릴적 이름은 슈라 (shura), 본명은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도몬토비치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Домонтович, Aleksandra Mikhailovna Domontovich)이다.
별명은 ‘러시아 혁명의 붉은 장미’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이다.
1896년 스위스로 유학, 취리히 대학에서 수학하였고, 그해 일시 귀국하여 크론호름 직물공장의 여자 노동자들의 참상을 보고 여성 해방 운동에 투신하였다.
이후 멘셰비키 운동에 참여하여 여성 노동 계층을 구성하고, 여성 노동조합 운동과 여권 신장 운동, 자유 연애론 등을 펼치며 여성 해방과 복리후생 운동을 추진하여 성사시켰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에도 가담하고, 이후 소비에트 연방 정부와 인민위원회에도 참여하였다.
1917년 11월 후생복지담당 인민위원, 1919년 여성담당 인민위원, 1922년 외무인민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그는 남성으로부터의 해방은 경제적 독립에 있다고 보고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역설하였으며, 자유 연애론을 주장한 여성주의자였다.
콜론타이는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 과거의 가족 모델들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가사노동이나 자녀 양육을 사회가 맡아 여성들의 부담을 국가가 덜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자유 연애론은 남성 볼셰비키들의 반대에 부딪쳤고, 1923년 주 노르웨이 공사가 되면서 소련에서 사실상의 추방을 당했다.
이후 주 멕시코 공사, 주 스웨덴 공사, 초대 주 스웨덴 대사를 역임하였고, 여성해방 운동에도 참여하여 활동했다.
블라디미르 레닌, 이오시프 스탈린과의 갈등 및 알력으로 만년에는 외교관 생활과 소설 창작, 해외 강연 활동을 주로 하였다.
콜론타이는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의 틀 안에서 여성의 경제적, 정치적 평등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결혼과 연애, 성의 문제를 노동자 여성의 관점에서 제기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역사상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녀가 제시한 연애와 성, 결혼에 관한 새로운 도덕은 러시아 공산당 내에서도 큰 논란을 야기하였다.
한국의 여성 해방 운동가 허정숙, 정칠성, 박정애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녀는 1952년 3월 9일에 별세했다.
대표작으로는 《삼대의 사랑》, 《자매들》, 《붉은 사랑》 등이 있다.

○ 작품성
콜론타이의 소설은 그녀의 여성해방론을 문학적 형식으로 구현한 결과물들이었다.
붉은 사랑의 여성노동자 바실리사는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당 활동을 하면서 여성의 위치를 주장했다.
콜론타이가 크나큰 대중적 반향을 일으킨 것은 1930년대에 조선에 유입된 그녀의 소설 붉은 사랑 (Vasillisa Maligina)(1923)과 삼대의 사랑 (Liubov trekh pokolenii)(1924) 덕분이었다.
붉은 사랑은 러시아 혁명기를 배경으로 한 프롤레타리아 계층 출신의 공산당원 바실리사의 사랑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삼대의 사랑은 소비에트 공화국 거립기에 올가 집안의 여성들의 사랑과 성의식의 변화를 다루고 있다.
콜론타이의 소설은 그녀의 공산주의 여성해방론을 문학적 형식으로 구현한 결과물들이었다.
이 작품들은 엘렌 케이나 하쿠손의 주장과는 달리 낭만적 연애를 부정하고 가족제도의 해체로까지 나아가는, 사랑과 결혼에 대한 실험적이고 급진적인 의식을 제시한다.

- 붉은 사랑
붉은 사랑의 여성노동자 바실리사는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당 활동을 하면서 혁명에서 여성의 위치를 주장하고, 공산주의 공동체의 설립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인물이다. 이 작품에서 바실리사와 볼로다의 사랑은 콜론타이가 말하는 ‘동지애적 사랑’이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제시한다. 이들은 사랑하지만 결혼으로 얽매이지 않고, 사랑보다는 일을 더 중시하는 연인들이다.
붉은 연애에서는 사랑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사랑하더라도 함께할 수 없는 상황이 있음을 조리있게 묘사하였다.
“함께 사는 것이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홀로 사는 편이 훨씬 나아. 연인이 곁에 있으면 생각이 흩어지고 일의 진전을 더디게 해. 이제 그녀는 다시 일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붉은 사랑에서 여성 노동자 바실리카는 남녀 간의 연애가 일의 진전을 더디게 하기 때문에 오히려 연인과 떨어져 사는 편이 낫다고 주장한다. 이는 연애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연애를 통해 필연적으로 결혼에 이르게 된다는 기존의 연애지상주의적 관점과는 완전히 다른 시각이었다.

- 자매들
그는 이상적인 사랑이 현실에서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1920년대 당시에는 실현되지 않고 있다고 판단했다.
소설 자매들에서 소설의 여주인공은 결혼한 노동자 여성으로서 아이의 병 때문에 직업을 잃게 되었다.
머지않아 그녀의 아이는 죽고, 이 때문에 남편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남편은 술을 마시고 바람을 피우며 집에 들어오지 않기도 하였다.
하루는 남편이 집에 매춘부를 데리고 왔는데, 술 취한 남편이 잠든 밤에 우연히 두 여인은 부옄에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알고보니 이 매춘부도 처지가 자신과 비슷했다.
갈 데 없는 이 여인의 처지를 바라보며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 소설을 ‘자매들’이라 부른 것이다.
당시 소비에트의 여성들이 전통적 관계의 도덕적 포로상태에서 해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성들로부터 과거의 경제적 종속에서도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콜론타이는 인정하고 있었다.
특히 1920년대 초에는 이러한 현상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새로운 경제정책의 전환기를 겪으며 수많은 여성들이 직업을 잃고 합법적으로나 비합법적으로 자신의 육체를 팔아 물질적 필요를 충족해야만 했던 시기였다.

- 삼대의 사랑
삼대의 사랑은 전통적인 일부일처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할머니, 전통적 결혼에서 벗어나 복수의 남성을 사랑하는 어머니 올가, 그리고 낭만적 사랑을 아예 부정하고 연애에서 성을 분리하는 딸 제니아 등 삼대에 걸친 여성들의 성, 연애, 결혼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특히 딸, 제니아는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에 빠지는 것을 거부하고 심지어 임신하고서도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상관하지 않으며, 어머니의 애인과도 성관계를 맺는 파격적인 인물이다.
제니아는 콜론타이가 여성들의 낭만적 사랑 없이 동지애적 삶을 살 수 잇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고안한 가공의 인물이었다.
콜론타이의 삼대의 사랑에서도 열렬한 연애 자체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선을 보낸다.
여기에서도 붉은 사랑에서처럼 오히려 연애가 개인의 일을 방해하고 집중을 흐리게 한다고 보기도 했다.
“열렬한 사랑을 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전 소설을 많이 읽어 열애에 빠진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열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시간이 없어요. 구역 안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해결해야 할 중요 사업이 저토록 많은데, 쏜살같이 지나가는 현재와 같은 혁명기에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요?”
여기에서 ‘쏜살같이 지나가는 현재와 같은 혁명기’에 해야 할 사업이 너무나 많은데, 열애에 시간과 정열을 투자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지나치게 대의명분적이고 업무에만 중독된 것이 아닌가 하는 비평도 존재한다.
콜론타이의 소설에서는 일상적 노동이나 정치적 활동에 방해받지 않도록 연애와 일정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는 여성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를 두고 자전적이라는 시각도 있다.
‘콜론타이는 소설 작품을 통해 여성에게 사랑은 단지 부수적인 것이며, 여성의 주요 임무는 노동임을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그녀의 소설은 저자 자신의 실제 체험, 즉 고립과 외로움, 질투와 시기 등 사랑이 유발하는 감정적 괴로움과 실연의 고통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실존적 고투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이다.

○ 사상과 신념
- 자유로운 사랑
그녀는 ‘자유연애’ 또는 ‘자유결합’을 옹호했다. 부르주아 사회의 소유 관념에서 벗어난 참다운 사랑은, 콜론타이에 따르면, 남성이기주의와 여성의 노예적 억압을 끝장낸 평등한 관계 속의 사랑이어야 했다.
그는 어떠한 장벽도, 어떠한 방해도, 어떠한 조건도 대가도 없는 남자와 여자 당사자간의 진정한 사랑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이 가능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순결을 잃은게 죄악이 아니라는 견해를 공공연히 언급하기도 했다.
여성 해방에 대한 콜론타이의 관심은 그저 사회적 지위에만 머무르지는 않았다. 그녀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새로운 성 윤리를 주장했다. 여성이 해방되는 다른 방편으로는 “자유로운 사랑”론을 주장했다. 그는 ‘자유로운 사랑’의 근거로 자유로운 연애, 자유로운 성관계, 자유로운 결혼을 내세웠다.
이는 당대에도 ‘물 한 잔 이론’으로 폄하된 이론이었다. ‘자유로운 사랑’에서 콜론타이는 인간의 성욕은 당연한 것이며, 여성 역시 성욕을 가진 존재라는 점을 주장했다. 또한 섹스라는 것도 인간의 본능적 욕구라는 점을 역설하였다.
콜론타이는 1918년의 저서 『새로운 도덕과 노동계급』에서 남녀간의 성적 애정을 당연하다며 ‘에로스적인 동지애’를 통해서만이 남녀관계를 갈등, 경쟁자 관계에서 사랑과 동지의 연대로 바꿀수 있으며, 이렇게 형성된 사랑과 동지의 연대는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규정했다.
진정한 공동체는 차별없는 완전한 자유와 평등하고 동지적인 연대라는 두 가지 원칙이 보장되어야 가능하다고 봤다.

- 여성 해방론
콜론타이는 여성해방의 조건으로 경제적 자립을 주장하였다.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남자들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리하여 여성에게도 남성들과 똑같은 의무와 노동권 등을 부과할 것을 요구했고 1921년 여성에 대한 노동권 부여와 노동권 보장안을 인민위원회에서 통과시키게 했다.
혁명과 여성 해방에 대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기본 생각은 이 두 가지가 별개가 아니고 하나로서 혁명이 이루어질 때 여성 해방도 함께 완전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존의 남성 공산주의 이론가들은 평등과 자유를 말하면서 남성보다 더 고통을 겪는 여성 노동자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1918년 11월 16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1차 ‘러시아 여성 노동자·농민대회’에서 콜론타이는 여성이 경제력을 갖추고 가정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신 가정을 비전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남성에게 기댈 필요도, 남성들에게 예속될 필요도 없는 새로운 인생의 가능성에 마음을 여십시오. 가정은 여성을 종속시킬 뿐 아니라 비생산화함으로써 집단의 발전을 방해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노동자 국가는 남성과 여성, 두 평등한 노동자가 자유롭게 결합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국가는 여성에게 일자리를 주고 아이를 돌볼 것입니다. 유치원과 탁아소에서 집단 활동은 아이들로 하여금 ‘내 것’ ‘네 것’보다 ‘모두의 것’을 깨쳐 사유재산 관념을 갖지 않도록 해줄 것입니다.”
그는 여성이 적극적으로 가사를 부양할 수 있는 가정을 새로운 가정, 여성이 가장인 가정을 신 가정, 새로운 형태의 가족의 모델로 제시했다.
그녀는 결혼만이 정답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전통적인 혼인관계를 맺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했다. 결혼에서 자유로워질 때만이 사회와 남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여성은 남성의 부속물도, 가정의 부속물도 아니요 결혼에 얽매이지 않는 노동력의 일부이자 국가, 인민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 여성의 자립론
콜론타이는 1918년에 발표한 《새로운 도덕과 노동계급》에서 ‘에로스적인 동지애’를 통해서만 사랑과 동지의 연대로 형성된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완전한 자유와 평등하고 동지적인 연대라는 두 가지 원칙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콜론타이는 독신으로 살 권리를 주장하기도 했다. 결혼을 반드시 정답으로 여기는 것은 자본의 논리 혹은 봉건주의적인 가치관의 유습에 불과하며 결혼하지 않고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도덕과 노동계급》에서는 전통적인 혼인관계를 맺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했다. 새로운 여성은 결혼에 얽매이지 않는 노동력의 일부이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립하는 여성상을 제시하였다.
“남녀 사이에는 예전 관계 대신에 새로운 관계가 발전하고 있다. 애정과 동지애의 결합. 더는 여성에게 가사의 굴레는 없다. 더는 가족 안에서 불평등은 없다. 더는 여성이 아무런 지원 없이 남아서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더는 남편에게 의존하지 않고 그녀의 일에 의존한다. …(이하 중략)… 결혼은 서로 사랑하고 믿는 두 사람의 결합이 될 것이다.”
그녀는 여성이 종속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까닭을 ‘가사 노예’로 보는 시각과 여성을 그저 어머니나 애인로 보려는 생각, 여성을 그저 아내나 연애 대상으로 여기는 ‘감정적 종속에 의한 제한성’으로 여겼다. 그는 1898년 스위스에서 귀국한 이후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갈 때까지 꾸준히, 여성을 여성이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할 것을 당당하게 요구했다. 남성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며 공산주의를 만들려면 여성은 먼저 가정을 떠나는 ‘죄’를 이겨내야 한다. 이것이 콜론타이가 주장하였다.

- 날개달린 에로스와 날개없는 에로스
콜론타이의 새로운 성도덕관은 1923년에 발표한 그녀의 소설 위대한 사랑과 논문 날개달린 에로스에게 길을에 잘 나타난다. 반(半) 자전적 성격을 띈 위대한 사랑에서는 콜론타이 자신과 멘셰비키 계열의 경제학자 마슬로프의 연애관계가 투영되어 있는데, 나타샤라는 미혼의 여성혁명가와 당원이면서 기혼 남성인 세묜의 사랑이 그려진다.
그는 진정한 사랑, 조건 없는 사랑과 연애를 가리켜 순수한 사랑으로 보고 ‘날개달린 에로스’로, 조건이 있는 사랑과 연애, 성매매를 모두 ‘날개없는 에로스’로 분류하였다. ‘날개 달린 에로스’와 ‘날개 없는 에로스’는 어떻게 구별되는가에 대해 콜론타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성산업을 ‘날개 없는 에로스’의 대표적 예로 꼽았다. 성애의 구매자와 판매자는 불평등한 관계에 있는 것이 예사이다. 그리고 곧이곧대로 일부일처제를 구현한 사랑도 ‘날개 없는 에로스’으로 봤다. 그 사랑은 배타적 사랑이었다. 또한 조건과 대가를 바라는 사랑, 연애 등도 날개없는 에로스로 보았다.
이에 대해 당시 소련의 페미니스트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프리섹스는 ‘날개 달린 에로스’인가?”라고 되물었다. 콜론타이는 자유롭고 우연한 성적 결합이라 해서 그것이 다 ‘날개 달린 에로스’는 아니라고 방어했다. 공산주의 사회라고 해도 여자에 대한 성적 착취가 존재하리라고 내다봤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남녀 불평등 때문에, 그런 섹스는 여성을 착취하고, 자녀 양육의 의무와 함께 내팽개칠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콜론타이가 ‘날개 달린 에로스’라고 부른 사랑은 육아의 사회화를 전제한 것이었다. 어린아이의 양육을 사회가 책임지게 되면, 아이를 둔 여성도 남편에게 심리적으로 종속되지 않게 돼 상호 존중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콜론타이는 조건이 없는 사랑, 대가가 없는 사랑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보았다. 그러한 사랑은 반드시 남녀간의 사랑, 남녀간의 육체적인 사랑만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콜론타이에 따르면 “노동자-어머니는 네 자식, 내 자식을 구별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단지 우리 자식들-공산주의 노동자들의 자식들-이 있다는 것만을 기억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녀가 후일 쓴 소설 중의 하나인 <붉은 사랑>의 주제는 조건과 대가가 없는 사랑이었다.
그녀는 거기서 더 나아갔다. 소설 <삼대의 사랑>에서 그녀는 어머니의 연인과 섹스를 한 여자를 윤리적으로 면책함으로써 에로스의 배타성을 가족 관계 내에서도 거부했다. 그녀의 ‘날개 달린 에로스’에는 질투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 성욕 자유론
그는 성욕은 당연한 것이며 꺼리거나 숨길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콜론타이는 성욕이 배고픔이나 목마름처럼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본능이며 성욕의 충족은 물 한 잔을 얻는 것처럼 간단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는데, 레닌은 이를 물 한잔 이론이라 희화화하며 비판했다. 그러나 콜론타이는 인간에게는 누구나 성욕이 있으며 그것을 없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성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자 반역이라고 보았다.
그는 성욕도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보았다. 콜론타이는 사랑의 감정에서 출발하는 성적인 관계를 ‘날개 달린 에로스’라고 명명하며 찬미했지만, 자유로운 성에 대한 이슈는 공산주의 혁명을 함께 도모한 볼셰비키당 내부에서도 끝내 승인하지 않았다.
- 성욕 존중론
콜론타이는 성욕 역시 존중받아야 할 하나의 권리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성욕을 부정하는 것을 위선으로 간주하였다. 그녀는 <혼인관계 영역의 공산주의 도덕에 관한 테제>에서 “성욕은 배고픔이나 목마름처럼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성욕의 충족은 한 잔의 물을 얻는 것처럼 간단해야 한다.”라고 왜곡돼 퍼져나갔다. 그래서 콜론타이의 에로스 이론은 ‘물 한 잔 이론’이라고 불렸다. 레닌 역시 이 ‘물 한 잔 이론’을 격렬히 비판했다. 혁명 초기의 젊은이들에게 콜론타이의 ‘자유결합’론이 널리 퍼지고 있는 것을 레닌은 위험스럽게 여겼다.
그는 성욕에 대한 지나친 부정과 통제는 가부장제,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 통제, 억압의 수단이라며 여성의 성욕도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는 성욕이 없는 어머니, 순결한 여인상이야 말로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행하고 강요해온 최대의 정신적 폭력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는 여자들에게 순결을 강요하면서도 남자들은 여러 여자들을 희롱하고 성관계 갖기를 좋아하는 것이 그 증거라고 지적하였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발걸음을 맞춰 성적 관계와 혼인 영역에서 하나의 혁명이 시작되고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또 젊은이들에게 금욕적 자기 부정을 설교하는 것이 귀족적, 부르주아적 위선이라는 점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레닌은 성생활의 방종이 프롤레타리아에게 어울리지 않는 퇴폐적 악습이라고 비판했다. ‘물 한 잔 이론’은 비마르크스 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반사회적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정상적인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시궁창에 드러누워서 흙탕물을 마시려고 하겠습니까? 또는 많은 사람들의 입술로 가장자리가 더럽혀진 유리잔으로 물을 마시겠습니까?”라고 비판했다. 콜론타이는 오히려 일부일처제라던가 남성 중심의 성 관념, 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금기와 기피야 말로 남성의, 남성 위주의 성 정책이라며 반발하였다. 콜론타이는 성욕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이며, 추하고 지저분한 것이 아니라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하나의 권리이자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현상의 하나라고 반박했다.

- 낭만적 연애에 대한 비판
바실리사는 볼료다가 ‘니나’라는 다른 여성과 사랑에 빠졌을 때 질투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의연하게 공동체를 위한 사회적 임무에 매진하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콜론타이는 친밀감에 바탕을 둔 남녀간의 낭만적 사랑에 반기를 들었는데, 특히 연애나 결혼에서 발생하는 성적 위기가 원천적으로 여성의 사랑이 지니는 의존적인 성격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이때 여성이 심리적으로 사랑에 의존하는 상황은 경제적 의존과 맞물리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남편의 외도나 실연은 여성에게 경제적인 손실이나 실직과 마찬가지 상황이기에, 남편의 배신은 더 큰 절망과 질투와 증오심을 낳게 되는 것이다.[34] 즉 낭만주의 사랑이나 연애지상주의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금전 문제 때문에 여자가 의존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 출산 미화에 대한 비판
콜론타이는 출산은 곧 아픔이자 통증이라며 ‘출산의 신성함’ 혹은 임신과 출산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접근을 비판하였다. 콜론타이에 의하면 여성의 임신과 출산은 부르주아지가 자랑스럽게 찬양하는 ‘출산의 신성함’이 아니라 여성에게는 ‘고통’일 뿐이었다. 특히 ‘노동과 생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서민층 여성에게는 강요되는 하나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에게 있어서 임신기는 초조하지만 감미로운 기대의 시기가 아니라 육체적 통증과 고통을 수반한 ‘형극’의 시기이다. 더구나 빈민, 서민층 여성의 경우 부르주아층이나 상류층 여성의 몇 배에 달하는 고통을 추가로 겪는다고 했다. 콜론타이는 “가난과 질병과 빈곤에 쫓기고 가혹한 공장장과 작업감독들”에게 쫓기는 서민, 빈민 여성 임신부는 할 수 있는 한 마지막까지 공장에서 일을 했다. 오히려 임신을 이유로 해고를 당할 수도 있어서, 임신 사실을 숨겨야 하기도 했다며 임신과 출산에 대한 무조건적인 낭만주의를 비판하였다.
더구나 그는 서민과 하층민 여성들이 임신했을 때 산모가 임신기간 동안 건강에 나쁜 조건과, 좋지 않은 유해한 환경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 아기가 ‘파리처럼 죽어갔던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며 비판했다. 그는 대책없는 임신, 출산에 대한 낭만주의 보다는 임신과 출산은 고통임을 인정하고, 하층민 여성들이 마음놓고 임신, 출산할 수 있는 환경, 여건을 우선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콜론타이는 인민위원회에 출산휴가 라던가, 임신 중 고용을 유지하는 것 등의 폭넓은 산전 (産前) 보호체제를 요구하느라 끝까지 싸웠고, 1922년 이를 얻어냈다.

- 부르주아 여성운동에 대한 비판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기존의 부르주아 여성들이 펼치는 여성 평등 운동에도 비판적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권, 권익을 찾는 것이 목적이지 진정한 남녀평등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즉 남성을 짓밟고 올라서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니 이는 진정한 양성 평등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비계급투쟁적인 여성 운동을 반대하였고 여성 노동자들이 여성 운동보다는 노동자 해방 운동에 함께 참여하여 이를 함께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참다운 해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여성들도 남성들과 같은 조건에서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하지 않는다면 남성의 부속물, 노예로 전락할 것이라고 봤다.
1908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여성 문제의 사회적 기초라는 팜플렛을 작성하고 부르주아 여성 해방론자들이 여성 노동자들의 해방을 위해 싸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부르주아 여성 해방론자들은 그들의 계급적 지위 때문에 여성 해방에서 필수적인 현재의 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엎는 운동을 펼칠 수는 없다고 파악했다. 그녀는 부르주아 여성 운해방론자들은 기존 사회 계급 틀은 유지한 채 그 안에서 남녀평등을 주장할 뿐이고, 결국은 자신들의 계급을 보호하기 위해 싸울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부르주아 여성 운동가들은 자신보다 낮은 계급의 남성들을 짓밟는 것에 대한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점도 지적, 비판하였다.
콜론타이는 여성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여성들과 한 편이 아니라 남성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임을 거듭 주장했다. 그리고 여자가 아닌 한 사람의 동지로 평등하게 대우해줄 것을 항상 당부했다.
1917년 혁명 정국에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혁명이 여성들의 시위로부터 일어난 사실을 간과하려는 남성 볼셰비키들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켰으며 여성 노동자들의 잠재력을 인정하고 혁명의 동지로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 부르주아 결혼관에 대한 비판
그는 부르주아 여성들은 남성들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 뿐만 아니라, 법적 재산상속자 생산과 가사 노동이라는 세 가지 의무를 지고 있다고 보았다. 즉 부르주아 도덕이란 경제적 이익이 존재하는 곳에서만 부부사랑이 존재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녀간의 만남을 신성한 만남이 아니라 금전거래와 같은 것으로 변질시킨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결혼의 신성함과 가족의 소중함이라는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미화시키기 바쁘다는 것이었다.
그는 문란한 성관계나 성매매보다도 결혼과 만남을 거래로 생각하는 부르주아식 결혼, 연애야 말로 결혼 제도와 연애를 파멸로 몰고 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대안으로 그는 자유 연애, 자유 결혼론을 제시하였다.

- 사랑과 섹스의 무관론
.영육 분리 문제
그는 사랑과 섹스가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여러가지로 논란이 되었다. 1930년대 한국에 이것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되었다. 삼천리 1931년 11월호에 실린 콜론타이주의란 어떤 것인가?라는 글은 콜론타이의 급진적 성해방의 관점을 쟁점으로 제시하였다.
이 글은 콜론타이의 연애론이 당시 연애론의 상식으로 알고 있었던 엘렌 케이와 하쿠손의 영육일치의 연애를 부정하고 영육 분리의 관점을 제시했다는 점, 연애의 의의를 육체와 정신의 조화가 아니라 본능과 향락에 두고 있다는 점을 문제시하였다. 또한 연애에 많은 시간과 정력이 소모되기에 성적 본능을 기계적으로 충족하는 편이 오히려 효율적이며, 사회의 관점에서도 더욱 유용하다는 점이 당시 조선 사회에 흥미롭게 소개되기도 했다.
.조선 사회의 수용론
콜론타이의 사랑과 섹스가 무관하다는 관점은 1920년대 1930년대 조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27년에 조직된 항일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정칠성은 ‘적연비판, 콜론타이의 성도덕에 대하여 (삼천리, 1929.9)에서 기자가 ‘콜론타이의 “연애와 성욕은 별문제”이며, 사회운동을 하느라 연애하기 힘든 상황에서 필요에 따라 성욕을 해소해야 한다는 입장에 대해 의견을 물었을 때, 정칠성은 “현실을 잘 본 말이외다. 성욕과 연애는 당연히 갈라져야 하겠지요. 그러고 결혼의 자유, 이혼의 자유가 아주 완전하게 없는 곳에서는 그렇게 밖에 더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또한 “입센의 인형의 집의 노라의 해방과 붉은 사랑의 여주인공 왓시릿샤(바실리샤)의 해방이 어떤 차이를 지니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정칠성은 ‘노라는 ‘개인주의적인 자각’으로서 개성에 눈을 떠 남편의 집을 뛰쳐나갔지만 거리에서 얼어 죽은 ‘공상적 여성’인 반면, 바실리사는 노라와 달리 경제적으로 해방되어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자유로워진 여성이라 대답한다. 이렇게 당시 공산주의 조선 신여성들에게 콜론타이는 “계급의식을 바탕으로 성적, 경제적으로 해방된 진정한 자유를 얻은 여성”의 상징으로 수용되었다.
신여성 담론의 여성 필진이었던 김옥엽(金玉葉)은 청산할 연애론 (신여성 1931.11)에서 콜론타이즘을 반성적으로 고찰하는 면모를 보였다.
“연애는 사사(私事)다. 매력을 감하면 서로 육체적으로 결합되는 것을 자유다. 그러나 우리들은 연애에 있어서 우리들에게 용기와 능력을 일층 고도의 것으로 함에 의하여 일반사회 진보에 있어서 공헌할 수 있는 것이다.”
김옥엽은 “연애는 사사다.”라는 콜론타이의 선언을 통해 남녀 간 성적 결합의 자유를 주창하는 콜론타이의 시각을 일면 긍정하면서도, 연애에 용기와 능력을 일층 강화하여 일반 사회의 진보에 공헌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한다. 위 글에서 김옥엽은 “그저 일시적인 육체의 결합이 합리화하여 이것이 실행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에 있어서 아무런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 것이 아닌가?”라고 하여 과연 성해방이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해방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 우려를 표명하였다.
콜론타이는 사랑 없는 결혼이 가능하다, 사랑 없는 섹스도 가능하다; 연애가 아닌 섹스도 가능하다. 라고 규정했다. 사랑과 결혼, 연애와 섹스는 각각 별개의 것이라고 봤다. 그는 성매매나 재산이 있어야만 결혼이 가능한 부르주아식의 결혼을 그 대표적인 예로 제시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당대 러시아에서도 심한 비난과 논란을 불러왔다.
- 일부 일처제 비판
그는 일부 다처제는 여성의 권리를 침해하는 극악한 형태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콜론타이는 일부일처제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였다.
콜론타이는 일부일처제를 지향하는 부르주아적 연애관을 정면 부정했다. 공산주의와 가족에서 그녀는 이제 공산주의 사회에서 가족경제가 국가경제에도 이익을 주지 않으므로 낡은 부부관계, 남녀관계는 해체되어야 하고 그 대신에 새로운 남녀관계가 등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사유재산을 폐지하기 위해 부르주아 계급의 핵가족이 해체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스탈린 체제 이전 볼셰비키들의 기본적인 사고였지만, 콜론타이는 여기에 새로운 여성, 즉 가족의 보호로부터 자유로우며 결혼에 얽매이지 않고 노동력의 일부이자 소비에트의 구성원으로 일할 수 있는 여성의 목소리를 강조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러한 가족제도가 향후 백년쯤 경과되면 공산주의국가가 아니더라도 자본주의 국가나 왕정, 군주정이 유지되는 다른 국가로도 전이될 것이라고도 내다봤다.
콜론타이는 계급의 틀 안에서 사랑과 결혼의 문제를 고민한 공산주의사상가였을 뿐 아니라, 철저하게 여성의 관점에서 성적 도덕과 연애, 결혼의 플롯을 재구성한 페미니스트 운동가였다.

- 성 담론
연애에서 성을 분리하는 성의식이나 연애에서 결혼을 분리하는 가족 해체론 등 콜론타이의 연애론은 당시 사회에서 큰 논란을 야기했다. 엘렌 케이와 하쿠손의 사랑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연애에서의 성행위를 정당화하는 도덕적 근거를 제시했다면, 콜론타이의 연애론은 인간의 성적 본능 자체를 아예 연애와 분리하여 독자적으로 인정했다.
- 노동조합의 독립적 기능론
콜론타이는 또 혁명 초기에 노동조합의 역할을 두고 레닌을 비롯한 당의 남성 지도자들과 대립했다. 남성 지도자들은 혁명 이후의 노조를 공산주의 훈련소로 여겼고, 따라서 국가기관이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콜론타이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노조가 경제를 관리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당과 국가에서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가담한 볼셰비키당내 ‘노동자반대파’ 그룹은 노동자들의 자발성과 창의력을 중요시했다.
- 콜론타이스트
콜론타이스트란 콜론타이의 사상을 따르는 여성이라는 의미로 쓰였고, 사랑이나 정조 관념 보다는 정치적 지향을 우선하는 공산주의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단순한 자유로운 연애, 사랑, 성교 외에도 이들은 사랑이나 연애 보다 정치나 자신의 자기 개발에 중점을 두는 여성이기도 했다.
콜론타이는 1927년 무렵부터 주로 소설 붉은 사랑과 삼대의 사랑(1925)을 통해 세계에 소개되었는데, 콜론타이가 생각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새로운 원리는 완전히 자유로운 두 주체의 동지적 결합이었고, 그 핵심은 여성의 자율성, 사랑은 여성의 삶 속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해야 하고, 여성의 주요 임무는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저널리즘에서 콜론타이는 주로 성도덕과 관련하여서만 조명을 받았고, 특히 삼대의 사랑에서 제3세대인 게니아의 경우가 충격을 주어 콜론타이의 연애론을 노라이즘에 비견하여 게니아이즘으로 부르기도 했다.

○ 평가
콜론타이는 스탈린을 비판한 간부급 공산당원 가운데 숙청 재판을 면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스탈린의 이런 예외적 관용은 그가 여성이라는 점과도 관련이 있었을지 모른다. 여성 해방의 선구자라는 평가와 시대의 반역자, 시대의 이단아 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급진적인 여성 공산주의자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일제강점기의 일부 공산주의 남성이나 신여성들에게 콜론타이의 사상(콜론타이즘)은 부르주아적 연애지상주의, ‘노예적 연애론’을 극복하고 여성 해방을 성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연애론으로 인식되었다.
‘무시무시한 1930년대 ‘모스크바 재판’ 때 콜론타이라는 이름이 피고인 명단에서 빠졌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라는 시각도 있다.
○ Awards
Order of Lenin (1933)
Order of the Red Banner of Labour (1945)
Order of St. Olav (Norwegian highest award at the time)
Order of the Aztec Eagle (1944)

○ 저서
– 주요 저서
『새로운 도덕과 노동계급』(1918)
《붉은 사랑 Vasilisa Malygina》(1923)
《경제진화에 있어서의 노동 Trgdzhenshchinyv Evolyutsii Khozyaistva》(1928)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1969)
『공산주의와 가족』(1920)
『사회와 모성』(1913)
『성적 관계와 계급투쟁』(1972)
《홀로된 사람 홀로된 이별 The Great Love》
- 소설
붉은 사랑 (1925)
자매들 (1927)
삼대의 사랑 (1925)
- 논문
『1905년 제1차 러시아혁명에 대해서』
– Works
“The Social Basis of the Woman Question” (“Социальные основы женского вопроса”), a pamphlet, 1909
“New Woman” (“Новая женщина”), Modern World (Современный мир), 9, 151–185, 1913 (republished in New morality and working class (Новая мораль и рабочий класс), Moscow, 1919, pp. 3–35).
“The Attitude of the Russian Socialists,” The New Review, March 1916, pp. 60–61.
Vasilisa Malygina (Василиса Малыгина). novel, 1923
Red Love [English translation of Vasilisa Malygina, 1923]. New York: Seven Arts, 1927.
Free Love. London: J.M. Dent and Sons, 1932.
Communism and the Family. Sydney: D. B. Young, n.d. [1970].
The Autobiography of a Sexually Emancipated Communist Woman. n.c. [New York]: Herder and Herder, n.d. [1971].
Sexual Relations and the Class Struggle: Love and the New Morality. Bristol: Falling Wall Press, 1972.
Women Workers Struggle for their Rights. Bristol: Falling Wall Press, 1973.
The Workers’ Opposition. San Pedro, CA: League for Economic Democracy, 1973.
International Women’s Day. Highland Park, MI: International Socialist Publishing Co., 1974.
Selected Writings of Alexandra Kollontai. Alix Holt, trans. London: Allison & Busby, 1977. New York: W.W. Norton & Co.
Love of Worker Bees [novel]. Cathy Porter, trans. London: Virago, 1977 [new translation of Vasilisa Malygina plus two short stories]
A Great Love [novel]. Cathy Porter, trans. London: Virago, 1981. Also: New York: W.W. Norton & Co., 1982.
Selected Articles and Speeches.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84.
The Essential Alexandra Kollontai. Chicago: Haymarket Books, 2008.
The Workers Opposition in the Russian Communist Party: The Fight for Workers Democracy in the Soviet Union. St. Petersburg, FL: Red and Black Publishers, 2009.
A comprehensive bibliography of Russian-language material by Kollontai appears in Clements, pp. 317–331.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