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3월 5일, 러시아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Sergei Prokofiev, 1891 ~ 1953) 별세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프로코피예프 (Sergei Prokofiev, 러: Серге́й Серге́евич Проко́фьев, 1891년 4월 27일 ~ 1953년 3월 5일)는 우크라이나의 작곡가이다.

–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Sergei Prokofiev)
.본명: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프로코피예프 (Sergei Sergeyevich Prokofiev)
.출생: 1891년 4월 23일, 러시아 제국 손초프카
.사망: 1953년 3월 5일 (향년 61세), 소련 러시아SFSR 모스크바
.국적: 러시아 제국 → 소련
.직업: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
.수상: 소련 국가상 (1943, 46, 47, 51; 6개), RSFSR에서 수여한 인민예술가 (1947), 레닌상 (1957), 노동적기훈장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프로코피예프 (1891년 4월 23일 ~ 1953년 3월 5일)는 러시아 제국/소련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다. 쇼스타코비치와 더불어 소련 시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후기 낭만파, 러시아의 대표적인 작곡가다. 손촙카 마을 (현재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출생. 농업 엔지니어인 아버지는 유대인 대지주이며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남.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음악과 친숙해져 5살 나이에 특출한 음악적 재능을 보였고 6살 때는 체스를 배웠다. 9세 때 피아노반주가 딸린 오페라를 작곡하면서 1902년에는 작곡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1904년에는 페테르부르크음악원에 입학, A.K.리아도프, A.N.체레프닌, N.A.림스키코르사코프 등에게 스승으로 섬기면서 작곡 · 음악이론 · 피아노 · 지휘 등을 배우고 1910년에 피아노협주곡으로 루빈시타인상 (賞)을 받았으며, 1914년에는 음악원을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그후 1918년, 러시아 혁명을 피해 그는 시베리아와 일본을 거쳐 외국으로 망명했으며 ‘현대음악의 저녁’이라는 모임에 참여하여 이때부터 유럽 근대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근·현대 작곡가 중 한 명으로, 그의 음악은 대중성과 혁신성을 골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에 현재에도 자주 연주되고 있다.

○ 생애 및 활동
손촙카 마을 (현재 우크라이나지역)에서 농업 엔지니어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프로코피예프는 이미 5살의 나이에 특출한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6살 때는 체스를 배웠다.
음악과 마찬가지로 체스는 프로코피예프 일생 동안 열중하였으며, 그 당시 세계 챔피언들과 견줄 정도로 충분한 실력을 갖추었다.
아들이 확실히 음악에 재능이 있음을 간파한 어머니는 1902년에 당시 모스크바 음악원 원장을 맡고 있었던 작곡가 세르게이 타네예프에게 조기 교육을 시켜줄 것을 부탁했는데, 타네예프는 자신의 대위법 제자였던 작곡가 라인홀트 글리에르에게 손초프카로 가서 피아노와 작곡 교습을 해주도록 했다. 글리에르는 어린 프로코피예프를 음악적으로 충실하게 지도하였으며, 기꺼이 그의 체스 상대가 되어준다든가 놀이도 함께 하는 등 많은 교감을 쌓았다. 그 결과 프로코피예프는 소년 시절에 습작 교향곡을 글리에르의 지도 하에 작곡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1902년에 이르러 프로코피예프는 작곡에 있어서 개인적인 레슨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혁신적인 작품을 이미 작곡하였다.
그러나 프로코피예프의 부모는 손초프카가 아들이 음악 교육을 받기에는 너무 낙후되고 고립되어 있다고 판단했고, 1904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그 곳 음악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에게 아들이 쓴 작품의 악보를 보여주면서 입학 시험을 치르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글라주노프는 제안을 받아들여 프로코피예프에게 시험을 보게 해 입학시켰다.
하지만 프로코피예프는 여기서도 그다지 만족하지 못했고, 학생들이나 교수들도 프로코피예프의 도발적인 행동과 무례함에 당혹스러워했다. 여기서 쓴 작품들에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반음계 어법과 불협화음이 자주 사용되었고, 이는 보수적인 성향의 음악원에서 자주 논쟁을 유발했다.
음악원 졸업 후 프로코피예프는 젊고 도발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러시아 음악계에 일찌감치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는데, 특히 처음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들에서 보수파와 혁신파 사이에 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어쨌든 일찍부터 주목받은 프로코피예프는 1911년 러시아의 유력 음악 출판사인 유르겐손과 계약해 자신의 작품들을 출판했고, 1913년부터는 해외 연주 여행도 다니기 시작했다.

여행 중 프로코피예프는 프랑스 파리에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를 비롯한 젊은 작곡가들과 손을 잡고 신작 발레들을 공연하던 흥행주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를 만났고, 디아길레프는 이 젊은 작곡가의 똘끼에 감탄했는지 발레를 써보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그의 첫 무대음악인 ‘알라와 롤리’는 내용이나 음악이나 직전에 공연되었던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과 많이 유사했기 때문에 디아길레프는 결국 공연을 포기했으며 이 때부터 프로코피예프의 공연음악 수난사가 시작된다.
1차대전으로 인해 유럽의 음악 활동 전반이 위축되자 프로코피예프는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전쟁 중에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음악원에 재등록해 오르간을 배우기도 했으며, 이 시기 작곡된 교향곡 1번과 바이올린 협주곡 1번 등에서는 신고전주의적 성향을 도입하면서 그간의 파격 일변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917년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가지고 오페라 ‘도박사’를 완성해 초연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 초연 계획은 같은 해 발생한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무기한 연기되었고 그 대신 프로코피예프는 고전주의 양식을 응용한 첫 교향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등을 작곡하면서 혼란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혁명 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프로코피예프는 음악 활동을 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을 했고 당시 교육인민위원장이었던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의 허가를 받아 1918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프로코피예프는 피아니스트로 꽤 성공을 거두었지만, 여기서도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의 초연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빚만 잔뜩 지고 큰 고충을 겪어야 했다. 미국에서도 실망한 프로코피예프는 다시 프랑스 파리로 옮겨갔고, 여기서 전쟁 전 만난 디아길레프에게 두 번째 발레 작품을 위촉받아 ‘어릿광대’를 작곡했다. ‘어릿광대’는 1921년에 파리에서 초연되어 대박을 쳤고, 스트라빈스키와 모리스 라벨, 장 콕토를 비롯한 진보적 문예 인사들로부터도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에는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을 시카고에서 초연해 역시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후 뉴욕에서 재연했을 때는 전보다 못한 반응을 보였으며 이에 프로코피예프는 또 한 번 미국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프로코피예프는 1923년에 파리로 이주해 오페라 ‘불의 천사’의 작곡에 주력하는 한편 두 번째 교향곡과 발레 ‘강철 계단’으로 모더니즘 작곡가라는 이미지를 굳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프로코피예프는 자신의 도발적인 작풍에도 점차 싫증을 내기 시작했고, 이후 작곡 스타일을 조금씩 바꾸어갔다. 오랜 시간 공들여 완성한 ‘불의 천사’도 1927년에 베를린에서 브루노 발터의 지휘로 시립 오페라단이 초연하기로 일정을 잡았지만, 악보 발송에 차질이 빚어지는 바람에 취소되어 또 물을 먹었다.

같은 해에는 1918년 출국한 이래 거의 9년 만에 소련에서 연주 여행을 했는데, 레닌그라드에서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이 소련 초연되어 절찬을 받고 자신도 피아니스트로 호평을 받는 등 예전과는 다른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 때부터 프로코피예프는 다시 소련으로 귀국하는 것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소련 정권이 보여주던 억압과 통제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했다.
1929년에 디아길레프가 발레 ‘방탕한 아들’을 공연한 것을 끝으로 사망하자, 프로코피예프는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소련 문화예술계와 작업을 시작해 발레와 영화음악 등을 소련에서 발표했다. 결국 1936년에 프로코피예프는 영구 귀국을 선언했고, 곧 전년도에 쓴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의 초연을 위해 당국과 교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때부터 소련의 문화 정책은 소위 ‘사회주의 리얼리즘’ 노선을 따라가기 시작했고 프로코피예프의 작품 역시 초기의 독기와 똘기가 상당히 빠졌음에도 불구 하고 형식주의에 빠졌다며 비판을 받게 되었다.
결국 프로코피예프도 여타 소련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정권의 노선에 영합하는 소위 ‘접대용’작품들에 주력하는 쪽으로 창작 노선을 바꾸었고, 10월 혁명 20주년 기념 칸타타나 소련 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집, 음악 동화 ‘피터와 늑대’등을 작곡해 선보였다. 하지만 칸타타의 경우 지나치게 거대하고 난잡하다는 당국의 비판을 받아 이후 프로코피예프 생전에 연주되지 못했고, 그 반대로 1937년에 작곡한 노골적인 쇠돌이 아저씨 써킹 작품인 ‘우리 시대의 노래’는 반대로 너무 단순하고 밋밋하다는 이유로 디스당했다. 부르주아 정신을 인민에게 깃들게 하지 않으려는 정책과 충돌한다고 했다나. 다만 피터와 늑대는 어린이를 위한 우화로서, 그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세계적으로 널리 사랑받는 작품이 되었다.
이 시기 이후로 프로코피예프의 해외 여행은 크게 제한을 받았고, 1938년에 마지막으로 미국 순회 공연을 가진 뒤에는 당국으로부터 여권을 압수당해 이후 평생 동안 소련에 있어야 했다. 게다가 소련 정주 선언 이래 의욕적으로 작곡한 오페라 ‘세묜 코트코’도 초연에 심하게 애를 먹었는데, 초연 직전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독일과 관계가 개선되면서 독일을 악역으로 설정한 대본을 급히 수정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이 오페라의 초연을 같이 준비하던 연출가 브세볼로드 메이에르홀드가 대숙청에 쓸려나갔고, 프로코피예프는 자신도 마찬가지로 살해당할 수 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프로코피예프는 1939년에 스탈린 동무의 60번째 생일에 맞추어 ‘건배’라는 제목의 한층 더 노골적인 칸타타를 발표했고, 이 작품은 폐기된 이전의 두 교성곡들과 달리 공식적으로 환영받았다. 그리고 당시 소련에서 가장 주목받던 영화 감독들 중 한 사람이었던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이 프로코피예프에게 자신의 신작 영화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오리지널 스코어 (영화음악)을 작곡해 달라고 부탁해온 것도 ‘명예회복’에 큰 역할을 했다.

예이젠시테인은 프로코피예프에게 가능한 모든 편의를 베풀었고, 심지어 몇몇 전투 장면에서는 프로코피예프의 음악 리듬에 영상을 맞추어 촬영하는 등 매우 긴밀한 협업으로 걸작을 만들어냈다. 프로코피예프는 영화 발표 후 음악의 일부를 연주회용 칸타타로 다듬어 내놓았고, 이 칸타타는 프로코피예프의 후기 작품들 중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외에도 피아노 소나타 6-8번 (흔히 ‘전쟁소나타’라고 부름) 같은 순수 기악 작품들도 호평을 받았다.
독소전쟁이 터진 뒤에는 다른 주요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동부로 피신했고, 거기서도 정권 영합성 작품들 외에 바이올린 소나타나 현악 4중주 등을 계속 작곡했다. 전쟁 후반기인 1944년에 작곡한 교향곡 5번은 이듬해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고,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하차투리안의 교향곡 2번 등과 함께 전쟁 중 작곡된 소련 교향곡들 중 최고의 작품으로 널리 선전되었다.
하지만 그 즈음 프로코피예프는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낙상 사고로 뇌진탕을 겪었고, 이후 건강이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종전 이후 스탈린의 심복인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문화예술계에 대한 비판 운동을 개진하기 시작하여, 소련 음악계에서 가장 명망이 높았던 프로코피예프와 쇼스타코비치는 그들을 질시해 온 당국자와 작곡가들에 의해 맹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애매한 분위기로 종전의 승리감을 잘 표현하지 못했던 교향곡 6번과 피아노소나타 9번이 당국으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프로코피예프는 굴욕적인 자아비판서를 발표해야 했다.
“나는 선율의 중요성에 대해 의심을 품어본 적이 없다. 나는 선율을 사랑하며,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간주한다. (…) 나 역시 무조성에 빠졌었다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그러나 조성으로 음악 작품을 구성하는 것은 단단한 토대 위에 건물을 세우는 것과 같은 반면, 조성 없이 구성한다는 것은 모래 위에 세우는 것과 같다는 것을 명백히 깨달은 이후, 나는 오랜 시간에 걸쳐 조성 음악에 대한 애정을 느껴왔다고 말해야겠다. 뿐만 아니라, 조성과 온음계적 음악은 무조성과 반음계적 음악에 비해 훨씬 더 많은 가능성을 부여한다. 이는 쇤베르크와 그 제자들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만 봐도 자명하다. …”
간신히 숙청은 면했지만 프로코피예프의 많은 작품들은 소련에서 연주 금지조치를 당했고, 이에 수입은 메마르기 시작했다. 전쟁 중 흐지부지되었던 ‘세묜 코트코’를 대신할 새로운 대작 오페라였던 ‘전쟁과 평화’도 초연되지 못했고, 예이젠시테인과 작업한 《이반 뇌제》의 2부도 상영금지를 당하는 등 계속 불운이 이어졌다. 1948년에 예이젠시테인이 사망하고 1950년에 먀스콥스키가 사망하는 등, 프로코피예프는 예술적 동지들을 잃어가는 가운데 서서히 자신의 건강을 잃어갔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는 가운데에도 프로코피예프의 창작열은 식지 않고 있었다. 검열과 탄압, 그리고 악화된 건강에 시달리는 상황에서도 1952년에는 자신의 첼로 협주곡을 대규모로 개작한 협주 교향곡을 초연하였고, 교향곡 7번도 발표했다. 그리고 6번째 피아노 협주곡을 구상하는 등, 프로코피예프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한 듯 마지막 대작들을 쏟아내려는 노력을 했다. 그러나 시간은 그를 도와주지 않았고, 이듬해인 1953년 3월 자동차 드라이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직후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직전 프로코피예프는 자신은 더 많은 곡을 썼어야 했다며 부르짖었다고 한다.
1953년 3월 5일 사망하였지만, 소비에트 연방 정치인이자 국가원수였던 이오시프 스탈린 (ИОСИФ СТАЛИН)의 사망과 겹쳐서 아무도 그의 사망을 알지 못하였다.
기가 막힌 우연의 일치로 프로코피예프가 죽은 날에 이오시프 스탈린 역시 사망하였다. 엄혹한 스탈린 시대를 딛고 살아남은 쇼스타코비치와 달리 프로코피예프는 결국 스탈린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한 셈이다. 모든 언론들이 스탈린의 사망 소식을 대서특필하고 군중들이 몰려오는 가운데 프로코피예프의 사망 소식은 완전히 묻혔고 그는 모차르트만큼이나 초라한 장례식을 치러야 했다. 하필 프로코피예프의 집이 붉은 광장에서 가까웠던 탓에 프로코피예프의 관은 스탈린을 조문하기 위해 몰려든 수십만 명의 군중들을 피해 골목을 전전하며 한참을 돌아나가야 했다. 심지어 조화마저 스탈린의 장례식에 총동원되어서 프로코피예프의 장례식에는 꽃이 별로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나마 소련 시절 오랜 라이벌이었던 쇼스타코비치가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는 게 위안거리였다.

- 사후 복권
이처럼 프로코피예프는 말년에 매우 힘든 시기를 보냈으며 운명의 장난처럼 스탈린과 같은 날에 죽는 바람에 장례식마저 초라하게 치러야 했다. 하지만 사후 프로코피예프는 소련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금새 복권되었는데,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957년의 레닌상 수상이다. 이처럼 소련 내에서 평가가 바뀐 것은 스탈린 사후 스탈린 격하운동과 더불어 문화 예술 분야에서 각종 해금조치가 이루어진 덕분인데, 한편으로는 쇼스타코비치나 하차투리안과 같이 암흑시기를 견디고 살아남은 동료 작곡가들의 노력도 그의 음악이 다시 빛을 보는데 한 몫 했다.
소련 시절에는 주기적으로 프로코피예프 기념 우표가 발행되었으며 당시 소련 연방이었던 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 국제공항은 1973년에 재공사를 마치고 개항하면서 ‘도네츠크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국제공항’으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한편 공산국가와 서방국가의 냉전이 한창이었던 시절 프로코피예프는 스트라빈스키나 쇤베르크와 같이 서방에서 활약했던 음악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음악적 평가가 높지 않았지만, 양쪽 진영 사이에 해빙기가 찾아오면서 그에 대한 관심과 평가가 다시 높아졌다. 그리고 21세기 현재,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은 현대음악 중에 가장 자주 연주되는 레퍼토리 중 하나로 정착하였다.

○ 음악 성향
“피아노는 타악기다.”
초기에는 그야말로 ‘앙팡 테리블’이라는 수식어가 딱 어울릴 정도로 도발적이고 대담한 작풍으로 수많은 논쟁을 유발했는데, 특히 자신의 주요 악기였던 피아노곡에서는 지금도 처음 듣는 이들에게 꽤 충격적일 정도로 불협화음의 난타, 복잡한 조바꿈, 대담한 화성 진행이 수없이 쏟아져 나온다. 피아노 협주곡 2번 (프로코피예프) 같은 경우는 난이도 높은 화성전개로 초연 당시 “고양이 우는 소리가 더 낫다”는 평까지 들었다. 낭만주의 시대에 자주 쓰인 분산화음, 노래하는 듯한 레가토 등은 그의 작품에서 대놓고 무시되고 있으며, 낭만성과 거리가 먼 타악기적인 울림과 선율 대신 음향과 구조에 주력하는 그의 피아니즘은 20세기 피아니즘의 대표격으로 인정받고 있다.
프로코피예프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음악 성향에 대해 다음과 같은 5가지 단어로 정리를 했다. 본인의 주장에 의하면 이미 음악원에 다니던 20대 초반부터 이런 작곡 방향을 확립해 놓았다.
고전적 (Classical) – 조성과 3화음 체제의 유지, 고전적인 형식 (소나타/론도/변주곡 등)의 응용
현대적 (Modern) – 반음계, 불협화음, 급격한 전조나 도약
토카타적 (Toccata) – 강렬하고 역동적인 리듬, 타악기적인 피아노 음향
서정적 (Lyrical) – 선율, 조용하고 명상적인 분위기
기괴함 (Grotesque) – 유머와 해학, 풍자, 기묘한 리듬과 음색

○ 주요 작품
- 오페라
막달레나 Op.13(1911~3)
도박사 Op.24(1915~6, 1927 개정)
3개의 오렌지를 향한 사랑 Op.33(1919)
불의 천사 Op.37(1919~27)
전쟁과 평화 Op.91(1941~52)
- 발레
어릿광대 Op.21(1915~21)
로미오와 줄리엣 Op.64(1935~6)
신데렐라 Op.87(1940~4)
돌꽃 Op.118(1948~53)
- 교향곡
1번 라장조 “고전” Op.25(1916~7)
2번 라단조 Op.40(1924~5)
3번 다단조 Op.44(1928)
4번 다장조 Op.47/112(1929~30(초판), 1947 개정판)
5번 내림 나장조 Op.100(1944)
6번 내림 마단조 Op.111(1945~7)
7번 올림 다단조 Op.131(1951~2)
- 관현악곡
.모음곡
로미오와 줄리엣 모음곡 1~3번(1~2번-1936, 3번-1946)
신데렐라 모음곡 1~3번 Op.107~9(1946)
돌꽃 모음곡 Op.126~9(Op.129는 미완성)(1951)
스키타이 모음곡 Op.20(1914~5)
여름밤 Op.123(1950)
키제 중위 모음곡 Op.60(1934)
.기타 관현악곡
가을 소묘 Op.8(1910)
교향 노래 Op.57(1933)
1941년 Op.90(1941)
푸시킨 왈츠 Op.120(1949)
- 협주곡
.피아노
1번 내림 라장조 Op.10(1911~2)
2번 사단조 Op.16(1912~3-소실, 1923-다시 작곡)
3번 다장조 Op.26(1917~21)
4번 내림 나장조 Op.53(1931)
5번 사장조 Op.55(1932)
.바이올린
1번 라장조 Op.19(1916~7)
2번 사단조 Op.63(1935)
.첼로
첼로협주곡 마단조 Op.58(1933~8)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적 교향곡 마단조 Op.125(1950~2)

- 실내악
히브리 주제 서곡 Op.34(1919)(클라리넷 5중주)
5중주 사단조 Op.39(1924)(오보에, 클라리넷, 바이올린, 비올라, 더블베이스)
현악 4중주 1번 나단조 Op.50(1930)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다장조 Op.56(1932)
현악 4중주 2번 바장조 Op.92(1941)
바이올린 소나타 바단조 Op.80 (1946)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라장조 Op.115(1947)
첼로 소나타 다장조 Op.119(1949)
플루트 소나타 라장조 Op.94(1943)
- 피아노
피아노 소나타 1번 바단조 Op.1(1907~9)
4개의 연습곡 Op.2 (1907-11)
4개의 소품 Op.3(1907~8)
4개의 소품 Op.4(1908)
10개의 소품 Op.12(1906~13)
피아노 소나타 2번 라단조 Op.14(1912)
토카타 라단조 Op.11(1912)
피아노 소나타 3번 가단조 Op.28(1907~17)
피아노 소나타 4번 다단조 Op.29(1908~17)
찰나의 환영 Op.22(1915~7)
4개의 소품 Op.32(1918)
피아노 소나타 5번 다장조 Op.38/135(1923-초판, 1952~3-개정판)
6개의 소품 Op.52(1930~1)
3개의 소품 Op.59(1933~4)
아이들을 위한 음악 Op.65(1935)
피아노 소나타 6번 가장조 Op.82(1939~40)
피아노 소나타 7번 내림 나장조 Op.83(1939~42)
피아노 소나타 8번 내림 나장조 Op.84(1939~44)
3개의 소품 Op.96(1941~2)
피아노 소나타 9번 다장조 Op.103(1947)
- 해설과 관현악
피터와 늑대 Op.67(1936)
- 합창
2개의 시 Op.7(1909~10)
6개의 노래 Op.66(1935)
- 가곡
미운 아기 오리 Op.18(1914)
5개의 시 Op.23(1915)
3개의 아이들의 노래 Op.68(1936)
7개의 노래 Op.79(1939)
12개의 러시아 민요 Op.104(1944)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