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3월 20일, 대한민국의 모더니즘 시인 박인환 (朴寅煥, 1926 ~ 1956) 별세
박인환 (朴寅煥, 1926년 8월 15일 ~ 1956년 3월 20일)은 한국 1950년대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이다.
본관은 밀양 (密陽). 강원도 인제 출신. 아버지 박광선 (朴光善)과 어머니 함숙형 (咸淑亨)의 4남 2녀 중 장남이다.

– 박인환 (朴寅煥)
.출생: 1926년 8월 15일, 대한민국 인제군
.사망: 1956년 3월 20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부모: 함숙형, 박광선
.배우자: 이정숙 (1948년–1956년)
.자녀: 박세형, 박세곤
.저서: 선생님 이 말이 맞아요?
1926년 강원도 인제에서 출생하였고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평양의전을 중퇴하였다. 1946년 〈거리〉를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광복 후 서울에서 서점을 경영하였고, 1947년부터 경향신문 기자로 미국을 시찰하였다.
1949년 동인그룹 ‘후반기’를 발족하여 활동하였다. 1949년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모더니즘의 기수로 주목받았다.
1955년 《박인환 시선집》을 간행하였고 1956년 소설가 이상의 기일때 4일 동안 폭음한 것이 급성 알콜성 심장마비로 이어져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향년 29세. 묘소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다. 1976년에 시집 《목마와 숙녀》가 간행되었다.

○ 생애 및 활동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박광선 (朴光善)과 어머니 함숙형 (咸淑亨)의 4남 2녀 중 장남이다.
1939년 서울 덕수공립소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41년 자퇴하고,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해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8 · 15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그 뒤 상경하여 마리서사 (茉莉書肆)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김광균 (金光均) · 이한직 (李漢稷) · 김수영 (金洙暎) · 김경린 (金璟麟) · 오장환 (吳章煥) 등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다.
1948년 서점을 그만두면서 이정숙 (李丁淑)과 혼인하였다. 그 해에 자유신문사, 이듬해에 경향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48년에는 김병욱 (金秉旭) · 김경린 등과 동인지 『신시론 (新詩論)』을 발간하였으며, 1950년에는 김차영 (金次榮) · 김규동 (金奎東) · 이봉래 (李奉來) 등과 피난지 부산에서 동인 ‘후반기 (後半紀)’를 결성하여 모더니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51년에는 육군소속 종군작가단에 참여한 바 있고, 1955년에는 직장인 대한해운공사의 일 관계로 남해호 (南海號) 사무장의 임무를 띠고 미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955년 첫 시집 『박인환선시집 (朴寅煥選詩集)』을 낸 뒤 이듬해에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46년에 시 「거리」를 『국제신보 (國際新報)』에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1947년에는 시 「남풍」, 영화평론 「아메리카 영화시론」을 『신천지 (新天地)』에, 1948년에는 시 「지하실 (地下室)」을 『민성 (民聲)』에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시작 활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1949년 김수영 · 김경린 · 양병식 (梁秉植) · 임호권 (林虎權) 등과 함께 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광복 후 본격적인 시인들의 등장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었다.
1950년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 「밤의 미매장 (未埋藏)」 · 「목마와 숙녀」 등을 발표하였는데, 이런 작품들은 도시문명의 우울과 불안을 감상적인 시풍으로 노래하여 주목을 끌었다.
1955년에 발간된 『박인환선시집』에 그의 시작품이 망라되어 있으며 특히 「목마와 숙녀」는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서 우울과 고독 등 도시적 서정과 시대적 고뇌를 노래하고 있다.
1956년 작고 1주일 전에 쓰여진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기도 하였다. 1976년 그의 20주기를 맞아 장남 박세형 (朴世馨)이 『목마와 숙녀』를 간행하였다.

– 연보
1926년 강원도 인제 출생
1944년 황해도 재령 명신중학교 졸업.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 3년제 입학
1945년 광복 후 학교를 중단하고 상경. 종로 3가 2번지 낙원동 입구에 서점 [마리서사]를 개업
1946년 12월, [국제신보]에 <거리>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시인으로 데뷔
1948년 입춘을 전후하여 [마리서사]를 폐업. 김경린, 양병식, 김수영, 임호권, 김병욱 등과 동인지 [신시론] 제1집을 발간. 자유신문사에 입사
1949년 김경린, 김수영, 임호권, 양병식 등과 5인 공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발간. 경향신문사에 입사. 동인 그룹 [후반기] 발족.
1951년 경향신문사 본사가 있는 부산과 대구를 왕래 종군 기자로 활동. [후반기] 동인 활동.
1952년 경향신문사를 그만두고 대한해운공사에 취직
1953년 환도 직전. 부산에서 [후반기]의 해산이 결정됨
1955년 화물선 남해호의 사무장으로 미국을 여행. 귀국 후 [조선일보]에 <19일간의 아메리카>를 기고. 대한해운공사 퇴사. <박인환선시집(選詩集)>간행
1956년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사망

○ 작품 경향
후반기 동인으로 모더니즘 경향의 작품을 발표하면서도 자신만의 도시적인 비애와 인생파적인 고뇌를 그려내고 있다.
1949년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모더니즘의 기수로 각광을 받았다. 1940년대의 모더니스트로 알려진 이들의 모더니즘 운동은 김기림이 제창한 반자연(反自然)ㆍ반서정(反抒情)의 기치에 1940년대 후반의 시대고(苦)가 덧붙여진 것으로 확대되었다. [후반기] 동인으로 모더니즘 운동을 계속하면서도 도시적인 동시에 인생파적인 비애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기타 동인의 시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김기림을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을 계승한 1950년대의 후기 모더니즘의 대표적 존재이다. 이러한 후기 모더니즘의 형식적 새로움은 새로운 현실 인식과 새로운 사회적 실천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현대 서구문학의 학습을 통해서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소재는 주로 해방 후의 혼란, 6ㆍ25, 도시생활에서 취했으며, 현대 도시 문명의 퇴폐적인 모습과 그에 따른 우수(憂愁)를 표현하였다.
해방 후 <신시론>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후반기] 동인을 주도하며 1950년대 전후문단의 총아로 군림했던 박인환, 10년간의 문단 생활을 통하여 숱한 일화와 화제를 뿌리다가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 박인환에 대해서 우리는 그 풍문들에 갇혀 그의 시세계의 실상을 소홀히 해온 것이 사실이다. 1950년대 풍운아, 앙팡테리블, 문단의 게릴라 명동 백작 등등 박인환에게 부여된 수많은 익명의 형상들에 의해서 시인으로서의 박인환의 참모습이 오히려 가려진 형국이다.
박인환은 가장 1950년대적인 삶을 산 사람이다. 그가 고백했듯이 어떤 시대보다 혼란하고 불안정한 연대에 살다가 31세의 짧은 나이로 비극적 생애를 마감했다. 젊은 나이에 청소년기를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보내고, 해방 후의 극심한 좌우익의 혼란 상황을 겪었으며, 동족상잔의 비극의 현장을 종군 기자로 생생하게 체험했다. 박인환의 30년간의 삶은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압축해 놓은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박인환의 시세계는 격동의 현대사를 조망하는 하나의 관측구의 의미를 갖는다.
박인환의 시세계는 두 가지 베일로 가려져 있다.
하나는 문단사적인 베일이고, 또 하나는 모더니즘의 베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가 문단의 풍운아였던 만큼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르나 문단의 화제에 의해서 박인환의 시가 재단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문단인과 시인은 다르다는 점이다. 경박한 포즈로 문단 주변에 화제를 뿌렸을망정 시세계 역시 경박하라는 법은 없다. 또 하나는 박인환의 시를 모더니즘의 자로만 평가하려는 경향이다. 이 역시 모더니스트의 기수로 자처했던 박인이었던 만큼 자연스런 결과였는지 모르나 분명 또 다른 시세계가 그의 시에 자리 잡고 있다. 그의 댄디한 풍모 뒤에 깊은 우수가 숨어 있었던 것처럼 암울한 리얼리즘의 시세계가 모더니즘의 이면에 펼쳐져 있다.
따라서 박인환의 시를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가려진 이러한 두 가지 베일을 벗겨내야 한다. 그 동안 박인환에 대한 기존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모더니즘 쪽에 관한 것이었다. 분명 후반기 동인을 중심으로 전개된 1950년대 모더니즘 문학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난 것은 사실이다. 심지어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은 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평이 나올 정도이다.
그러나 박인환은 모더니즘의 세계로만 매달린 것은 아니다. 박인환이 모더니즘의 기수로 자처했지만 실로 모더니즘의 정신과 기법에 훨씬 못 미치고 있다. 다시 말해 박인환 역시 모더니즘에는 실패한 시인이었다. 그러나 8ㆍ15 직후에 씌어진 비판적 리얼리즘 시나 6ㆍ25 체험을 바탕으로 한 현실 인식의 시에서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아울러 1950년대적인 한계 상황을 인식하고 절망과 좌절의 불안과 고독 등 실존적 포즈를 취함으로써 1950년대 전후문학의 당대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박인환의 시세계는 도시 문명을 소재로 한 모더니즘 계열의 시, 해방 현실과 6ㆍ25 체험을 형상화한 리얼리즘 계열을 시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축이 박인환 시세계를 형성하는 기본 구도이다.
일제 강점기 8ㆍ15와 6ㆍ25로 이어지는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온몸으로 문학과 예술의 혼을 불태워 한국 문학사의 새 길을 밝히고자 했던 박인환. 만 30세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그의 삶과 문학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늘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해방과 함께 찾아온 새시대의 문화 공간과 정신사적 지표의 중심에 서서 화전민 세대로서 이 땅의 척박한 문화 풍토를 개간코자 했던 의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 문학사는 그만큼 풍요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1950년대를 한국 문학사의 뒤안길에서 숱한 화제와 풍문들을 뿌려 한국 문학의 신화를 잉태했던 박인환, 그래서 그의 문학은 그의 삶과 뗄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에 놓여있다. 그의 시에 보이는 도저한 허무의식과 죽음 의식은 1950년대를 풍미한 실존적 정신 상황에 그대로 직결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문학은 가장 당대적인 것이고 박인환 자신 역시 전문 문단의 대표적인 개인이요, 문제적인 개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위안으로서의 문학, 박인환 문학의 본질은 그것이다. 전쟁의 극한 상황과 허무와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당대인들에게 한줄기 눈물과 위안의 악수를 건넴으로써 조그마한 정신적 안식처를 마련해 준 것이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이었다.
시인의 역할이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주고 삶의 등불을 밝혀 주는 일이라면 박인환은 시인으로서 그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해 냈던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1950년대 정신 풍토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분단의 질곡과 정신적 아노미 상황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가 지금도 정서적 공감 속에서 잔잔한 울림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박인환의 꿈과 좌절 뒤에는 이카로스의 신화가 자리잡고 있다. 초날개를 만들어 비상의 날갯짓을 하다 지중해 바다에 추락한 이카로스의 꿈과 좌절 그래서 그는 한국문단의 이카로스일 수밖에 없다. [후반기]의 열망과 만 30세의 요절이 박인환의 꿈과 좌절을 상징하고 있다. 박인환의 꿈과 문학은 완료형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 있다. 그가 살던 시대와 정신이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삶과 문학을 살피는 일은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현재와 미래를 점검하는 일이 된다.

○ 작품
<거리>(1946.국제신보)
<남풍>(1947)
<군상(群像)>(1947)
<나의 생애에 흐르는 시간들>(1948)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1948.신천지)
<지하실>(1948.민성)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5人 합동시집)
<열차>(1949.개벽)
<인천항>(1949)
<종말>(1952)
<눈을 뜨고도>(1954)
<밤의 미래장>(1954)
<목마와 숙녀>(1955)
<투명한 버라이티>(1955.현대문학)
<죽은 아포롱>(1956.동아일보)
<뇌호내해>(1956.문학예술)
<침울한 바다>(1956.현대문학)
–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의 합창>(1949.합동시집)
<박인환선시집>(1955.산호장)
<목마와 숙녀>(1976.근역서재)


참고 =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