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6월 16일, 헝가리의 정치인 너지 임레 (Nagy Imre, 1896 ~ 1958) 별세
너지 임레 (헝: Nagy Imre, 1896년 6월 7일 ~ 1958년 6월 16일)는 헝가리의 정치인으로 두 차례에 걸쳐 헝가리의 수상을 지냈다.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스탈린주의에 반대해 소비에트 연방의 침공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항쟁은 실패로 끝났고 너지는 비밀 재판에 회부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 너지 임레 (Nagy Imre)
.출생: 1896년 6월 7일, 헝가리 왕국 쇼모지주 커포슈바르
.사망: 1958년 6월 16일 (62세), 헝가리 인민 공화국 부다페스트
.배우자: 에게퇴 마리어 (Égető Mária)
.자녀: 딸 너지 에르제베트 (Nagy Erzsébet)
*헝가리 인민 공화국 제44대 수상
.1953년 / 1956년
*군 경력
.복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1914 ~ 1916년), 노농적군 (1918년)
.최종 계급: 상병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헝가리의 공산주의 정치인. 헝가리를 공산화시킨 스탈린주의자 라코시 마차시(Rákosi Mátyás)의 후임으로 헝가리 인민 공화국 수상이 된 후, 강제수용소 폐지 등 여러 개혁 정책을 실행하지만, 결국 소련이 침공해 너지는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한다 (헝가리 혁명).
하지만 대사관을 잠시 나온 사이 소련에게 체포당하게 되고 루마니아로 압송당해 헝가리 인민 공화국에서 비밀 처형당한다.
오늘날 헝가리 공산 지도자 중에는 가장 호평받는 인물이자 민주화 인사로 대우받고 있다.

○ 생애 및 활동
- 제2차 세계 대전 전
너지는 헝가리 서부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도시 커포슈바르 (Kaposvár) 출신으로, 날품 농가에서 태어났다.
1896년 당시 출생지 커포슈바르 (Kaposvár)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방 소도시로 너지는 대장장이로 교육받았다.
석공 견습을 거쳐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동부 전선에 가담했지만, 러시아의 포로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소속으로 동부전선에서 싸웠으나 공산주의에 심취한 나머지 러시아 혁명 이후 붉은 군대에 입대했다.
너지는 1921년 헝가리로 귀국했으나 호르티 미클로시 정권 하에서 탄압받은 후 다시 소련으로 건너가 소련 시민권을 취득하여 공산당에 입당한다.
쿤 벨러가 이끄는 헝가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립에 관여했지만, 소비에트 연방으로 돌아와 농업 조사와 관계되면서 코민테른의 헝가리 대표를 맡았다.
이후 공산주의 교육을 받던 너지는 1946년 헝가리가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원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공산화되자 재귀국하여 농업부 장관과 의회 대변인 등을 역임한다.
이 과정에서 너지는 공산주의 신념을 유지하긴 했으나 스탈린주의에 갈수록 염증을 느껴 개혁적 성향을 보이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당 내에서 불이익을 받는다.
그러나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니키타 흐루쇼프가 소련의 권력을 장악하자 소련의 위성국이었던 헝가리에서도 해빙 바람이 불어 너지는 다시 당 내에서 힘을 회복하고 제한적이나마 자유화 정책을 펴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공산당 내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던 라코시 일파에 의해 일련의 개혁들은 계속 방해받게 된다.
이러한 라코시 파의 훼방은 1956년에 들어서면서 라코시의 스탈린주의 정책에 큰 불만을 품고 있던 헝가리인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 제2차 세계 대전 후부터 헝가리 봉기까지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소련군에 의해 헝가리가 점령돼 라코시 마차시가 인솔하는 헝가리 근로자당이 실권을 잡고 있는 중, 근로자당 간부로서 농림수산부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1953년 6월에는 라코시의 후임으로서 수상으로 취임하였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사후, 느슨해지기 시작한 헝가리의 공산주의에 대해 헝가리 민중은 저임금 문제나 식량난에 허덕이는 조직적인 파업을 결행하였다.
또 부다페스트 중공업, 경공업 지대에서도 파업이 잇따랐는데, 이러한 자국의 위기 상황을 중요하게 본 그는 정책 노선을 새롭게 바꾸었다.
우선은 곤궁한 국민의 생활을 개선하려는 방법으로 공산주의 상징의 하나이기도 한 농업 집단화 제도를 폐지했고, 그 밖에 종교적 관용과 강제 수용소 폐지를 실행하였다.
그러나, 너지의 이같은 시장경제 진영적인 방식은 곧바로 스탈린주의자들과의 대립을 불렀다.
그 결과, 1955년 4월에 실각에 몰렸고 같은 해 11월, 근로자당으로부터 제명되었다.
그런데, 헝가리에서 서서히 민주화, 자유화를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져 가던 중, 다시 너지를 정권에 복귀시키자는 국민들의 의견이 높아지면서 1956년 당에 복귀하였고, 같은 해 헝가리 봉기가 발발하면서 다시 수상이 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이나 반공 민족주의자들과의 연립 정권을 조직해, 일당 독재 체제의 해체와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서의 탈퇴, 코메콘에서의 탈퇴 그리고 헝가리 중립의 표명 등 차례 차례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소비에트 연방의 간섭권 이탈로 간주되었고, 소련군이 헝가리를 침공해 수도 부다페스트를 점령하는 긴박한 사태에 이르렀다.
이 일로 인해 너지는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대피하였다. 그 후에 신변 안전을 보장 받고 대사관을 나왔지만, 소련군에 체포되었다. 너지는 루마니아로 신병이 옮겨져 국가보안위원회 (KGB)에 의한 비밀 재판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시신은 부다페스트 교외의 시립 묘지에 매장되었다.

- 처형 후
너지를 대신한 카다르 야노시 정권은 전면적인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헝가리 봉기가 끝난 후, 카다르 정권은 자주 관리의 도입 등 융화 정책을 취했지만, 너지는 어디까지나 공산주의를 배반한 반당 분자로 다루어졌다.
너지의 명예가 회복된 것은 소비에트 연방에서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그 영향에 의한 헝가리 민주화 운동 이후였다.
1989년, 너지 시체의 재매장식이 치러져 당시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너지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현재는 부다페스트의 머르티르시 광장에는 그의 동상이, 프랑스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는 그의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 기타
공산 헝가리 당시 학생 운동의 주도자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1989년 너지 임레의 장례식에서 선언문을 낭독하며 전국적으로 인지도를 얻은 학생이 있었다. 이 학생은 민주화 이후 헝가리의 지도자가 되었고, 독재자로 장기 집권을 하다 너지의 동상을 철거하라는 명령을 내리며 자신의 타락을 보여주게 된다. 이 학생이 현 헝가리의 총리이자 현 유럽의 몇 안 되는 독재자인 오르반 빅토르이다.
한동안 마오쩌둥 정권을 비롯한 급진 공산주의 정권에서는 정적을 공격할때 인용되곤 했다. 티토주의자라 욕하듯이 임레주의자라 욕하는 것이다.
반면 개혁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순교자,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헝가리는 말할 것도 없으며 동독, 폴란드의 반정부 시위에서는 으레 ‘임레 너지 만세!’의 구호가 나왔으며 이 때문에 개혁정책이 자신의 나라로 스미는 것에 경기를 했던 동독의 발터 울브리히트, 루마니아의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알바니아의 엔베르 호자, 체코슬로바키아의 안토닌 노보트니 등은 너지를 원망하면서 자국의 개혁운동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다.
너지의 재판 당시 재판장으로 근무한 판사 비더 페렌츠(Vida Ferenc, 1911 ~ 1990)는 정치 지도부 앞에서 타협하지 않는 가혹함과 1956년 헝가리 혁명에 가담한 20명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것으로 유명했고, 나치 독일의 롤란트 프라이슬러처럼 피고들에게 ‘종종 통제되지 않은 분노와 고함의 폭발’ 하는 모습을 보였다. 카다르 야노시 정권은 이러한 그의 ‘공로’를 인정해 그에게 헝가리 자유 메달을 수여했다. 이후 비더는 죽을 때까지 공산당 지도층과 카다르 야노시가 자신에게 너지에 대한 사형 선고를 내리라고 명령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비더는 헝가리가 민주화되고 너지가 재매장된 1989년에 대중의 분노를 두려워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같은 해에 인터뷰를 하면서도 너지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고 1990년 11월 7일 향년 79세로 사망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