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월 29일, 미국의 시인 로버트 리 프로스트 (Robert Lee Frost, 1874 ~ 1963) 별세
로버트 리 프로스트 (Robert Lee Frost, 1874년 3월 26일 ~ 1963년 1월 29일)는 미국의 시인이다.
– 로버트 리 프로스트 (Robert Lee Frost)
.출생: 1874년 3월 26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사망: 1963년 1월 29일
.직업: 시인
.국적: 미국인
.배우자: 엘리노어 프로스트 (1895 ~ 1938년)
.저서: 눈 내리는 밤 숲가에 멈춰서서, Poems, The poetry of Robert Frost, 담장고치기, 자작나무
.자녀: 레슬리 프로스트 밸런타인, 엘리엇 프로스트, 마조리 프로스트, 엘리노어 베티나 프로스트
뉴햄프셔의 농장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그는, 그 지방의 아름다운 자연을 맑고 쉬운 언어로 표현하였다.
그는 자연 속에서 인생의 깊고 상징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한 시인이었으며, 20세기 미국 최고의 국민 시인으로, 전후 4회에 걸쳐 퓰리처상을 받았다 [New Hampshire (1923), Frost’s Collected Poems (1930) A Further Range (1936) A Witness Tree (1942)로 4회 수상].
작품으로 시 <소년의 의지>, 시집 《보스턴의 북쪽》, 《시 모음집》등이 있다.
○ 생애 및 활동
로버트 프로스트는 뉴잉글랜드 (New England)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1874년 3월 26일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뉴잉글랜드 태생이었으며, 어머니는 스코틀랜드 여자로 에든버러에서 이주해 왔다. 어머니 이사벨 무디 프로스트 (Isabelle Moodie Frost)는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에서 상당한 교육을 받은 뒤 교사가 되었고, 펜실베니아 주 루이스타운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그 곳에서 같이 교편을 잡고 있는 윌리업 프레스콧 프로스트 (William Prescott Frost)와 결혼했다.
이사벨은 시 쓰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아들의 이름을 시인 로버트 번즈의 이름을 따서 로버트라고 지었으나 아버지는 남부의 탁월한 장군 로버트 E. 리의 이름을 따서 아들 이름을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프로스트의 아버지는 고향인 뉴잉글랜드에 강한 혐오감을 갖고 1872년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자 서부로 옮겨 루이스타운에서 1년간 교편을 잡다가, 다시 행운을 찾아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그의 뉴잉글랜드에 대한 혐오감은 남북전쟁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저널리즘과 정치에 관여하면서 생활을 영위한 실제적이며 거친 양키였으며, 어머니는 스웨덴보르그 (Swedenborg)의 종교적 신비주의 철학에 깊이 심취했던 섬세한 감정의 소유자였다. 이런 그의 가정환경이 그에게 마음의 갈등이야말로 인간 삶과 모든 만물의 본질이란 생각을 심어 주었던 것이었다.
프로스트는 11세 때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도시 소년으로 자라다가 1885년 아버지가 그 곳에서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유골을 안고 뉴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는 12살 때 매일 오후와 토요일 마다 구둣방에서 일을 하였고, 여름방학 동안에는 농장에서 어른들과 함께 건초를 만드는 등의 농사일을 하였다. 그리하여 정규학교 교육을 받는 동안에 그는 마음을 개발함과 동시에 농촌생활을 사랑하게 되고 농촌생활에 젖어 신체를 단련하게 되었다.
프로스트는 로런스 (Lawrence)고등학교에 다녔으며, 그곳에서 평생의 반려인 화이트 (Elinor Miriam White) 양을 만났다. 프로스트와 화이트는 모두 그 학교의 최고 우수학생이었으며, 졸업식 때에는 둘 다 고별사를 읽었다. 이 때부터 그는 자신이 시인이 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듯 많은 습작을 하였으며, 독립이라는 잡지에 「나의 나비」(“My Butterfly”)라는 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 진학에 큰 뜻은 없었으나 그를 사랑해주는 할아버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다트머쓰(Dartnmouth) 대학에 장학금을 받아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두 달도 채 못 되어 돌아와서는 매사추세츠 주의 메투엔 (Methuen)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모친 대신 교편을 잡았다.
그는 화이트 양과 결혼한 지 2년 후인 22세 때 하버드에 입학하였으나 결국 중퇴하고 말았다. 그의 할아버지는 이에 실망하였으나 뉴햄프셔의 데리 (Derry) 지방에 농장을 사 주며 부대조건으로 10년간 농사를 짓도록 규정했다. 그는 농부로서 그다지 유능하지 못하여 부업으로 교편을 잡기도 하며 시작 (詩作)을 계속하였다. 그는 만 10년 동안 농장 일을 한 후 이를 처분하고 1912년에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 당시 영국의 문단은 진통기에 있었고 소위 조지왕조시대의 시가 문학운동의 중심이었지만 프로스트는 이 움직임에 초연하였다. 그는 거의 일년 동안 별다른 교제 없이 시작에 몰두하다가 글루스터셔(Gloucestershire)에서 토지를 구하여 또다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는 그동안 써 두었던 시를 간추려 1913년에 [소년의 의지] (A Boy’s Will)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 38세였다. 이 작품이 호평받자 그는 1년 후에 [보스톤의 북쪽] (North of Boston)을 출판했는데 이것도 역시 절찬 받았다.
영국의 비평가들은 프로스트의 소박한 서정, 단순한 어휘와 예리한 관찰에 완전히 매혹되고, 보통사람들이 의식하지 않고 그냥 간과하는 지극히 당연한 일을 잊을 수 없는 시로 표현한 것에 탄복하였다. 깁슨 (Gibson)은 “프로스트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흔히 쓰는 어휘를 시어로 승화시켰다. 다른 시인이라면 평범한 이야기로 취급하였을 단순한 사건을 의미심장한 시로 변화시켰다.” 라고 평하였으며, 다른 비평가는 그의 시가 “정확한 지식, 명석한 관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실생활의 모든 면에서 발견해내는 무한한 즐거움”의 소산이라고 말했고, 또한 운율이 자연스럽다는 점을 높이 칭찬하였다.
성공은 그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워낙 수줍어하고, 극도로 감수성이 예민하며, 군중 앞에 서면 마음에 고통을 느끼는 프로스트는, 사람들의 예찬과 추종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나머지 뉴햄프셔의 프랜코니아에 작은 농장을 샀다. 그러나 경제적 이유와 자존심 때문에 그는 강연회나 시 낭독회에 나와 달라는 요구를 오랫동안 거절할 수 없었다. 영국서 돌아온 지 2년도 채 안되어 그는 메인 주에서 텍사스 주에 이르기까지 미국 도처에서 공중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아카데믹한 것에는 취미가 없다고 역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개월 혹은 수년간 학교 안에서 사는 상주 시인이 되어 줄 것을 여러 대학과 합의한 최초의 미국 시인이 되었다. 그는 주로 매사추세츠주의 애머스트 대학과 그런 계약을 맺었지만, 그 사이 사이에 미시건 대학, 하버드 대학 및 다트머스 대학에서도 몇 해씩 보냈다.
그렇게 여러 곳에 머무르면서 그는 그가 늘 좋아하고 바라던 농부 생활을 휴가 기간 (봄, 여름, 가을) 동안 맛 볼 수 있었다. 1919년 그는 뉴 햄프셔를 떠나 버몬트로 가서 농장을 샀다. 아이들은 모두 자라고, 그리고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그는 버몬트 주 립튼의 고지대 농장으로 그의 법률상의 거주지를 옮겼고, 1936년부터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겨울의 몇 개월 동안 플로리다에서 보내기 시작했다. 1940년에는 플로리다 주의 코럴 게이블 시외에 2천 평의 농토를 사서 농장에 전형적인 방갈로를 세웠다. 땅과 자라나는 것들에 대한 그의 정감은 그러한 삶이 필요치 않게 된 훨씬 후에도 그에게 뜨겁게 남게 되었다.
40세 이후부터 프로스트는 미국 현대 문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추앙되었다. 터프츠 (Tufts) 대학의 피 베타 카파 (Phi Beta Kappa) 시인, 월간지 [일곱 예술] (The Seven Arts)의 고문, 미국문예원인 국립문예재단 (National Institute of Arts and Letters)의 회원, 하버드 대학의 피 베타 카파 (Phi Beta Kappa) 시인 등이 되었다. 그는 1938년에 매사추세츠 주의 보스톤으로 이사하였다가, 3년 후에 그 부근의 케임브리지 근처에 자리잡았다.
그는 시로 퓰리처 상을 네 번 수상하였으며, 예일 대학, 콜럼비아 대학, 다트머쓰 대학, 하버드 대학 등에서 명예학위를 받았고, 미국문예원 최고의 상인 황금패를 받았으며, 1961년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시를 낭독하기도 했다. 그는 1963년 2월에 88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 대표작
〈A Boy’s Will〉- 〈소년의 의지〉. 1913년 출판.
《North of Boston》 – 《보스턴의 북쪽》. 시집. 1914년 출판.
〈The Road Not Taken〉- 〈가지 않은 길〉. 1915년 출판.
〈Build soil〉 – 〈토양을 만들자〉. 1932년 출판.
○ “가지 않은 길” _ 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 The Road Not Taken _ Robert Frost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Because it was grassy and wanted wear;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And both that morning equally lay
In leaves no step had trodden black.
Oh, I kept the first for another day!
Yet knowing how way leads on to way,
I doubted if I should ever come back.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참고 = 위키백과,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