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3월 14일, 대한민국의 소설가 염상섭 (廉想涉, 1897 ~ 1963) 별세
염상섭 (廉想涉, 1897년 8월 30일 ~ 1963년 3월 14일)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며 예비역 대한민국 해군 중령이다.
한성부 출생으로 본관은 파주 (坡州)이며 아호 (雅號)는 제월 (霽月), 횡보 (橫步)이다.

– 염상섭 (廉想涉)
.본명 (本名): 廉尙燮
.호(號): 제월(霽月) · 횡보(橫步)
.출생: 1897년 8월 30일, 조선 한성부 종로방 적선정
.사망: 1963년 3월 14일 (65세), 대한민국 서울 성북구 성북동
.본관: 파주 (坡州)
.종교: 불교 → 천주교 (세례명: 바오로)
.부모: 염규환(부), 경주 김씨 부인(모)
.배우자: 김영옥 (金英玉)
.자녀: 슬하 3녀
.친척: 염창섭 (첫째형)
.군복무: 대한민국 해군
.기간: 1950년 12월 16일 ~ 1953년 12월 16일
.최종 계급: 예비역 대한민국 해군 중령
.근무: 해군본부 정훈국
.지휘: 정훈장교
.주요 참전: 한국 전쟁
.기타 이력: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 중앙대학교 전임교수, 서라벌예술초급대학 학장, 한국독립당 문화예술행정특보위원
1897년 8월 3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중추원 참의 염인식 (廉仁湜)의 손자이며, 가평 군수 염규환 (廉圭桓)의 8남매 중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경주 (慶州) 김씨, 부인은 의성 (義城) 김씨 문중 출신이던 김영옥 (金英玉)이다. 한국 근대 문학의 선구자인 그는 일본 게이오기주쿠 대학 유학 시절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됐다. 귀국한 후 1920년 《폐허》동인에 가담해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1921년 발표한 단편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 는 한국의 첫 자연주의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동인, 현진건과 함께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문학을 이 땅에 뿌리내린 작가로서 큰 공적을 남겼다. 1936년에 매일신보의 정치부장, 만선일보의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1946년에는 경향신문의 창간 편집국장을 지내는 등 신문기자로도 많이 활동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해군 소령으로 임관되어 해군본부 정훈감실에서 편집과장으로 근무했으며, 1954년 서라벌 예술대학 학장으로 취임했다.
대표적인 장편소설로는 〈삼대〉, <만세전>, <두 파산> 등이 있으며, 단편으로는 <표본실의 청개구리>가 있다. 만세전은 천재교육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1963년 3월 14일 성북동 자택에서 직장암으로 향년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 생애 및 활동사항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우다가 1907년 관립사범부속보통학교 (官立師範附屬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반일 학생으로 지목되어 중퇴하였다.
1912년 보성소·중학교를 거쳐 일본에 건너가 우여곡절 끝에 교토 [京都] 부립제2중학을 졸업하고 1918년 게이오대학 [慶應大學] 예과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오사카 [大阪]에서 자신이 쓴 「조선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살포하고 시위를 주동하다 일경에게 체포되어 금고형을 받고 학교는 중퇴한 채 『동아일보』 창간과 더불어 정치부기자가 되어 1920년 귀국하였다.
한때 오산학교 교사로 재직한 일도 있지만, 이후 줄곧 신문·잡지 편집인으로 생활하면서 소설·평론에 전념하였다. 문예전문지 『폐허 (廢墟)』의 동인 활동을 계기로 습작기를 청산하고 출세작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를 발표하면서 한국 근대문학의 기수가 되었다.
이어 중편소설 「만세전」(1922)을 집필, 연재함으로써 그의 뛰어난 현실 인식이 확인되었으며, 식민지 현실을 고발하고 저항적 반일감정을 리얼리즘의 수법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하였다. 이어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이다가 다시 일본에 건너갔으나 별 성과 없이 귀국하여 1929년 결혼을 하고 생활의 안정을 찾아 장편에 전념하였다.
그는 대표작 「삼대 (三代)」를 비롯하여 「무화과 (無花果)」·「백구 (白鳩)」 등과 「사랑과 죄」·「이심 (二心)」·「모란꽃 필 때」 등 우수한 장편을 쓰기도 하였다.
단편 역시 초기에는 암울, 침통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자연주의적 경향이 짙었으나 사회 전반을 다루는 경향으로 나가면서부터는 보다 치밀한 관찰과 객관적 기술을 보임으로써 명실공히 리얼리즘적 경향을 뚜렷이 보이게 되었다.
「제야」·「해바라기」·「금반지」·「고독」· 「조그만 일」·「두 출발」·「남충서 (南忠緖)」 등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일제강점기 말기 10여 년(1936∼1945)은 만주·신경에 살면서 『만선일보』 편집국장·회사 홍보담당관 노릇을 하면서 절필하였고, 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여 다시 『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을 지내기도 하였으나 6·25중에는 해군 소령으로 입대하여 반공 전선에 나가 휴전이 되는 해까지 정훈일을 보았다.

제대 후 한때 서라벌예술대학장으로 있기도 하였지만, 창작에 정진하여 병중에도 많은 작품을 집필하였다. 「삼팔선」·「임종」·「두파산」·「굴레」 등 단편과 「효풍」·「난류」·「취우」·「새울림」· 「미망인」 등의 장편은 우수작으로 평가된다.
1963년 3월 직장암으로 작고할 때까지 완성된 본격 장편 20여 편, 단편 150편, 평론 100여 편 이외에 기타 수필 등 잡문 200여 편의 글을 남기었다. 그 삶과 문학의 특징은 민족적이었고 전통적이었으며 야인적이었다. 식민지사회를 투철히 인식하면서 당대 사회의 진실을 묘사하였다.
또 전통적인 사실적 문체인 내간체를 계승, 발전시켜 자신의 문학의 골격으로 삼았고 서구 근대 물질문명을 점진적으로 수용하면서 보수적인 자세를 보였다.
윤리적인 측면에도 관심을 두어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한 점 등은 높이 평가된다. 더욱이, 리얼리즘 문학을 확립하고 식민지적 현실을 부정하고 전통을 계승하고자 한 점은 돋보인다.
– 학력
1909년 한성사범학교 부속보통학교 수료
1910년 한성 보성소학교 졸업
1911년 한성 보성고등보통학교 수료
1913년 일본 도쿄 아사부 중학교 수료
1914년 일본 도쿄 아오야마 중학교 수료
1918년 일본 교토 제2중학교 졸업
1919년 일본 게이오 대학교 사학과 중퇴
1957년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3기
– 연보
1897년 8월 30일, 한성의 종로구 적선동에서 태어났다.
1907년 9월, 관립 사범부속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09년, 보성소학교로 전학하였다.
1910년,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11년 가을, 일본으로 건너갔다.
1912년 4월, 도쿄의 아자부중학교 (麻布中学校) 2학년에 편입하였다가 중퇴하고 아오야마학원에 입학하였다.
1917년, 교토 부립제이중학교 (府立第二中学校)에 편입하였다.

○ 기타
1932년에 발표된 김동인의 단편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 (1932)를 읽은 염상섭은 그것이 늦장가를 간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생각해 동인과 설전을 벌였다. 당대 문단을 주도했던 두 사람은 이 일로 무려 15년 동안이나 관계를 끊고 살았다. 일각에서는 염상섭의 아이가 다른 사람의 아이라는 루머가 돌고 있었고, 김동인은 그 무렵에 발가락이 닮았다를 발표했던 것이다.
○ 저작
《견우화》
《사랑과 죄》
《이심》
《광분》
《삼대》
《무화과》
《백구》
《모란꽃 필 때》
《불연속선》
《취우》
《표본실의 청개구리》
《두 파산》
《절곡》
《얼룩진 시대 풍경》
《만세전》
《임종》

참고 = 위키백과,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