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3월 1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여대공 엘리자베트 마리 (Erzherzogin Elisabeth Maria Henriette Stephanie Gisela “Erzsi” von Österreich, 1883 ~ 1963) 별세
엘리자베트 마리아 헨리에테 슈테파니에 기젤라 “에르츠시” 폰 외스터라이히 여대공 (독: Erzherzogin Elisabeth Maria Henriette Stephanie Gisela “Erzsi” von Österreich: 1883년 9월 2일 ~ 1963년 3월 16일)은 오스트리아의 황족이다. 루돌프 폰 외스터라이히웅가른 황태자와 스테파니 드 벨지크 왕녀의 외동딸이며,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친손녀,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의 외손녀에 해당한다.

– 엘리자베트 마리아 페츠네크 (Elisabeth Maria Petznek)
.휘: 엘리자베트 마리아 헨리에테 슈테파니에 기젤라 폰 외스터라이히
.별호: 붉은 여대공
.출생: 1883년 9월 2일, 오스트리아 제국 락센부르크
.사망: 1963년 3월 16일, 오스트리아 공화국 빈
.묘소: Hütteldorfer Friedhof
.가문: 합스부르크로트링겐가
.부모: 루돌프 폰 외스터라이히웅가른 황태자, 스테파니 드 벨지크 왕녀
.배우자: 오토 페르디난트 폰 빈디슈그레츠 후작영식 (1902년 결혼, 1948년 이혼), 레오폴트 페츠네크 (1948년 결혼, 1958년 사별)
.자녀: 후작영식 프란츠 요제프, 후작영식 에르네스트, 후작영식 루돌프, 후작영애 슈테파니에
.종교: 천주교
*제16세대 오스트리아 여대공
.재위: 1883년 9월 2일 ~ 1902년 1월 23일
왕족 신분을 스스로 버리고 사회주의자가 되어 “붉은 여대공”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왕족 신분을 버린 뒤로는 남편의 성을 따라 엘리자베트 페츠넥 (Elisabeth Petznek)을 칭했다.
빈디슈그레츠의 오토 공비 엘리자베트 마리 (Erzherzogin Elisabeth Marie von Österreich)의 독어명은 엘리자베트 마리 헨리에테 스테파니 기젤라
(Elisabeth Marie Henriette Stephanie Gisela), 헝가리어로 에르제베트 마리어 헨리에터 슈테파니어 기젤러 (Erzsébet Mária Henrietta Stefánia Gizella)이다.
오스트리아 제국 루돌프 황태자와 벨기에의 스테파니의 외동딸이다. 애칭은 에르치 (Erzsi). 후에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의 당원이 되어 ‘붉은 황녀 (The Red Archduchess)’로 불렸다.

○ 생애 및 활동
엘리자베트 마리 헨리에테 스테파니 기젤라 (Elisabeth Marie Henriette Stephanie Gisela)는 루돌프 황태자와 스테파니 황태자비의 무남독녀 외동딸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황후의 유일한 친손녀이다. 당대 왕족들 중 최고의 미녀로 유명했던 엘리자베트 황후의 손녀답게 할머니에겐 미치지 못해도 굉장한 미인이었다.
아버지 루돌프 황태자가 자살했을 당시 엘리자베트 마리는 고작 6살이었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아버지 루돌프가 자살했던 날을 충격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루돌프는 메이얼링에 가기 전 갑자기 딸 에르치를 보고 싶다며 찾았지만 황궁 일정 때문에 보지 못하고 떠났고, 그 다음날 미친 사람처럼 들이닥친 어머니 스테파니에게 끌려간 곳에는 아버지의 시신이 있었다고 한다.
부모와 애정이나 애착 없이 유모에게서 자란 스테파니는 본인도 딸을 직접 키우지 않고 유모에게 일임했다. 일정에 따라 얼굴이나 보는 합스부르크 식 양육으로 별로 친하지 않던 어머니가 재혼한 뒤에는 조부인 황제 곁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살리카법에 따라 여성인 그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조부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곁에서 자라는 유일한 손녀인 엘리자베트를 진심으로 귀여워하며 자주 무릎에 앉히고 놀아주었고, 뭐든 들어주었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아버지 얘기가 나오면 곧장 굳어져 피하는 사람들을 보며 의문을 갖기 시작했고 점차 다루기 힘든 아이로 자랐다. 우연히 아버지 루돌프의 개혁 의지나 어떻게 제국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려 했는지 알게 된 엘리자베트는 자기 말이라면 무조건 응해주던 조부 프란츠 요제프에게도 “빈민들을 돕자”는 취지의 말을 꺼냈다고 한다. 그 순간 자애롭던 할아버지는 돌변해 날벼락을 내렸고, 엘리자베트는 죽은 아버지를 이상적으로 존경하고 그 정치사상에 동조하게 되었다.
전 황태자의 딸이지만 잊혀졌다가 할머니 엘리자베트 황후의 장례식에서 슬퍼하는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첫 등장한 이 ‘에르치’는 곧 미모와 물려받은 유산,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유일한 친손녀라는 지위 덕분에 유럽 왕실에서 가장 촉망받는 신붓감으로 떠올랐다. 여러 나라의 왕자들과도 혼담이 오가고 할아버지 프란츠 요제프는 손녀가 빌헬름 2세의 장남인 빌헬름 황태자와 결혼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엘리자베트가 선택한 남편은 일국의 황태자나 왕자도 아닌 슈탄데스헤어 출신의 오토 추 빈디슈그레츠 (Otto zu Windisch-Grätz)였다.
무도회에서 처음 만난 이 남자는 황실 무도회에 참석할 자격이 부족했지만 엘리자베트가 첫 눈에 반해버려 오토가 등장하는 행사에 좇아다니며 눈도장을 찍었다. 명목상으로는 슈탄데스헤어들도 신성 로마 제국 연방 제후 가문이라 동등결혼 자격이 있지만, 그가 일개 군인에다 실제 인식은 그렇지 못해서 당연히 황실 가족들은 이 결혼을 반대했지만 엘리자베트 마리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루돌프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죄책감을 갖고 있던 황제의 압력에 강제결혼한 남편은 아내의 어마어마한 재산과 호화로운 생활에 익숙한 남편이 되었다. 4남매를 낳은 엘리자베트는 남편과 여배우의 불륜현장을 덮치는 등 몇몇 스캔들을 겪었고, 황제 사후에 이혼했다. 남편은 그녀의 재산과 자녀 양육권을 요구해 어마어마한 양육권 싸움 등으로 화제가 되었다. 루돌프를 닮았는지 사회주의자 성향을 가졌던 엘리자베트는 노동자들과 사이가 좋았는데 그들의 도움으로 양육권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그녀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의 당원 레오폴트 페츠네크와 사랑에 빠졌다. 그에게는 정신 이상으로 별거 중인 부인과 자녀가 있었는데 이번에도 임자 있는 남자 엘리자베트는 직접 찾아가 담판을 짓고 부인이 받아들여 결국 황실 망명 후에는 그와 재혼하면서 완전히 평민이 되었다. 이후로도 붉은 황녀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마지막으로 살았던 폴란드에서는 평전도 나와 있다고 한다.
사실 가정 면에서는 매우 불행한 인물이었다. 애인과 동반자살한 아버지야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가 일개 백작과 재혼하자 이에 반대한 엘리자베트 마리는 어머니와 연을 끊어버렸다. 애초에 어머니 스테파니와의 사이도 그리 좋지 않아서 좀처럼 보는 일도 없었다. 스테파니는 친정 어머니와 똑같이 아이를 직접 키우거나 애정을 주지 않고 유모에게 다 맡겨서 방치했었고 아버지를 존경하던 엘리자베트는 스테파니가 아버지의 개혁적인 정치 사상이나 보수적인 황실, 궁정에서 죽음까지 내몰리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궁정에 맞추라는 잔소리와 바가지 등으로 아버지를 괴롭혔다는 점, 자신을 두고 재혼한 것 등에 반발했고 매년 루돌프의 기일마다 아버지와 ‘연인’ 베체라 양을 커플로 기리면서, 평생 루돌프 때문에 마음고생한 어머니에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곤 했다.
그래도 딸의 이름을 스테파니로 짓고 아이들과 함께 만나기도 했으나 결국 1934년 스테파니는 자신에게 의지가 되기는커녕 계속 망신을 주었던 딸의 상속권을 박탈해버렸다. 사실 스테파니가 직접 기르지 않았고 재혼 문제로 다투다 딸을 두고 갔기에 모녀간이라도 정을 쌓을 틈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또한 할머니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는 자신이 ‘할머니’로 생각되는 게 싫어서 손자녀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할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하나뿐인 친손녀를 매우 예뻐했고, 할머니 엘리자베트도 가깝지는 않았으나 개인 재산 중 딸들의 상속분과 황실 보물 등 개인이 처분 불가능한 것들을 뺀 나머지 (루돌프에게 주었을 상속)를 이 손녀에게 물려줬다.
조부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살아있을 때는 기세등등해 차기 황제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부인 조피를 무시하더니 정작 그녀 자신도 임자가 둘이나 있는 신분 낮은 남자와 결혼해 황녀 지위를 잃고, 사치했다. 그는 세르비아에서 살해당하는 통에 즉위는 실현되지 않았다.
엘리자베트는 생전에 유언장을 작성해 두었는데 자녀들에게는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 페츠네크와 의붓아들은 그래도 자녀들에게 얼마쯤은 주라고 설득했지만 그렇게하지 않았다. 그녀는 죽기 전 자신이 아이들보다 애지중지하던 애견 저먼 셰퍼드들을 전부 안락사시키도록 지시했는데, 이유는 자신보다 이 개들을 사랑하고 돌봐줄 수 있는 이가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결국 엘리자베트의 유언대로 개들은 수의사의 손에 안락사되었다.
어찌 보면 출생부터 사망까지 인생을 기구하게 살다간 사람이다. 본인 의사와는 상관없이 매우 불운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그럼에도 그것만으로는 참작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인성이 심하게 결여된 데다 자녀들에게도 부모자격이 없는 인물이다.
○ 가족관계
- 부모
.부친: 루돌프 폰 외스터라이히웅가른 황태자
.모친: 스테파니 드 벨지크 왕녀 - 배우자
.오토 페르디난트 폰 빈디슈그레츠 후작영식 (1902년 결혼, 1948년 이혼)
.레오폴트 페츠네크 (1948년 결혼, 1958년 사별) - 자녀
후작영식 프란츠 요제프
후작영식 에르네스트
후작영식 루돌프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