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3월 3일, 인도는 무크티 바니히 (Mukti Bahini)의 방글라데시 해방 전쟁을 지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인도–파키스탄 (3차) 전쟁 시작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Indo-Pakistani War of 1971)은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서 1971년 12월에 발발한 전쟁이다.

–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인도-파키스탄 전쟁,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의 일부
.날짜: 1971년 3월 3일 발발
.장소: 인도, 파키스탄, 동파키스탄
.결과: 인도와 동파키스탄 독립파의 승리, 방글라데시의 독립
.교전국: 인도, 방글라데시아와미 연맹 (동파키스탄) / 파키스탄 (서파키스탄)
.지휘관: 인도의 인디라 간디, 방글라데시의 무지부르 라만 / 파키스탄의 누룰 아민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동파키스탄 독립 운동)에 개입한 인도와 파키스탄 양군이 충돌했지만, 전황은 인도에 유리하게 진행되어, 동파키스탄은 1971년 12월 16일에 방글라데시로 독립했다.
1972년 7월 2일, 심라 협정 (Simla Agreement)으로 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 독립을 승인하였다.

인도와 파키스탄 • 방글라데시, 그리고 인도불교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는 하나의 인도였다. 종교의 나라 인도, 그 종교가 서로를 갈라서게 했다.
인도는 종교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자비와 평등을 강조한 불교가 생긴 곳이 인도다. 인도에서는 4세기부터 민간신앙과 불교 등이 섞인 힌두교가 발전했다. 11세기 무렵부터 약 800년 동안은 이슬람교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인도는 시대별로 왕조의 변천을 겪으면서 그만큼 많은 종교의 변화를 겪은 나라다. 그래서인지 종교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다툼이 자주 일어났다. 알라신만을 유일한 신으로 인정하는 이슬람교와 세상 만물을 신으로 섬기는 힌두교 간에는 충돌이 잦았다. 영국은 힌두교와 이슬람교 신자들의 다툼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인도인들을 분열시키는 식민지 정책을 썼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1905년, 영국은 벵골 분할령을 발표한다. 인도 북동쪽에 있는 벵골은 영국의 통치에 가장 거세게 저항한 곳이다. 이 법은 이슬람 신자가 많이 살던 곳을 동벵골, 힌두교 신자들의 지역을 서벵골로 나누었다. 인도의 민족운동이 힘을 얻지 못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분노한 인도인들은 한마음이 되어서 저항했다. 영국산 면직물을 불태우고, 상점과 공장 문을 닫았다. 인도국민회의에서는 ‘영국 물건을 사지 말자’, ‘국산품을 애용하자’, ‘인도인의 손으로 인도를 통치하자’, ‘교육만이 힘이다’ 등의 구호를 내걸었다. 결국 1911년 벵골 분할령은 폐지되었지만, 종교 간 갈등을 일으키려 했던 영국의 속셈은 오랫동안 인도 사람들 가슴속에 남았다.
드디어 1947년에 인도는 손꼽아 기다리던 독립을 했다. 그러나 독립의 기쁨은 잠시, 인도국민회의와 이슬람동맹이 각각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려 했다. 이 문제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종교를 찾아 떠나는 혼란을 겪었다. 인도의 독립을 이끌었던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는 “힌두교든 이슬람교든 기독교든 종교를 가리지 말고 한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외쳤지만, 암살당하고 말았다.
결국 힌두교를 믿는 인도와 이슬람교를 믿는 파키스탄으로 나뉘어 각각 독립국가를 세우게 되었다. 이슬람교와 힌두교 간의 종교 갈등이 영국의 식민 지배를 겪으면서 더욱 커져서 인도가 분리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런데 옛 지도를 잘 보면 특이한 점이 있다. 거대한 인도를 사이에 두고 파키스탄 영토가 두 지역에 흩어진 것이다. 동벵골이 있던 곳의 동파키스탄과 인도 서북쪽에 있는 서파키스탄. 인도를 사이에 두고 1000㎞가 훨씬 넘는 거리에 있는 이들은 이슬람교를 믿는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언어도 문자도 민족도 풍습도 모두 달랐다. 게다가 인구는 동파키스탄이 훨씬 더 많았지만, 정치는 서파키스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정부의 예산도 서파키스탄 중심으로 쓰였고,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공무원이 돼도 높은 자리에 오르기 힘들 정도로 차별을 받아야 했다. 이 밖에도 불편한 점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다.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 간에는 또다시 갈등이 시작되었다. 물론 파키스탄과 인도 간에도 분쟁은 계속되었다.
1952년 서파키스탄은 오직 우르두어만을 공식 표준어로 지정했다. 벵골어를 쓰던 동파키스탄에선 대학생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반대 운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면서 벵골어도 표준어로 인정한다는 선언이 나왔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벵골 지역의 동파키스탄인들은 서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마침내 1971년 동파키스탄이 독립해 방글라데시가 된다. 인도가 힌두교를 믿는 인도, 이슬람교를 믿는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분리된 것이다.

○ 파키스탄
파키스탄 (Pakistan)은 남아시아에 있는 국가다. 정식 명칭은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Islamic Republic of Pakistan)이다. 파키스탄 인구는 2억 명으로, 세계에서 6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자 인도네시아에 이어 2번째로 무슬림이 많은 나라다. 수도는 이슬라마바드이며, 주요 도시로는 카라치, 라호르, 라왈핀디, 페샤와르, 퀘타가 있다.
파키스탄이라는 이름은 초우드리 라흐마트 알리가 파키스탄을 구성하는 5개 지역명에서 따온 조어 (造語/組語)이며, 우르두어와 페르시아어로 “신성한 땅”이라는 뜻이 되도록 지은 말이다.
1906년에 벵골 분할령에 찬성하면서 전인도 무슬림 연맹이 결성되었다.
1929년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 정권이 약해졌다. 인도의 자치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무슬림의 국민국가를 만들자는 운동이 있었다. 1933년에는 파키스탄 선언이 발표되어 영국령 인도의 서북부인 현재의 파키스탄 지역을 파키스탄으로 명명했다.
1947년 8월 1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그 당시 영국령 인도제국이었으나 종교적 이유로 인도와 분리 독립했다. 인도 제국 (Indian Empire)은 1877년에 성립된 영국의 식민 제국이었다. 영국 왕이 인도 황제를 겸임하였다. 인도에서는 영국의 지배 (British Raj)라고 부른다. ‘영국의 지배’라는 용어는 통치 시기를 이르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 때는 영국의 영향력이 실질적으로 행사되었던 기간인 1858년부터 1947년을 포괄적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파키스탄 인구의 96%가 이슬람교를 믿고 있으며, 그 중에서 수니파가 80%, 시아파가 20%를 차지하고 있다. 무슬림 외에는 힌두교인이 2%로 가장 많으며, 기독교인이 1.59%이다. 그 밖에도 소수의 바하이교, 시크교도, 조로아스터교도 등이 있다. 그러나 이같은 소수종교들은 이슬람 원리주의에 의해 탄압받는 종교들이다. 미국 국무부 산하의 종교자유위원회는 파키스탄을 최악의 종교 탄압 국가로 규정했다.
파키스탄의 종교인구의 구성은 영국령 인도의 분할에 의해 크게 바뀌었는데, 영국령 인도가 인도와 동서 파키스탄 등으로 분할 독립할 당시 7백만 명의 무슬림이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이동했고, 반대로 6백만 명의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는 파키스탄에서 인도로 이동하여 파키스탄에서 무슬림은 더욱 더 큰 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 방글라데시
방글라데시의 독립은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1971년 방글라데시 (동파키스탄)의 독립 문제를 놓고, 서파키스탄 중심의 파키스탄군과, 방글라데시의 분리 독립을 주창하는 묵티바히니 독립군, 이들을 지원하는 인도군 사이의 전쟁. 이 전쟁으로 방글라데시가 독립했다.
독립전쟁의 발단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1952년 서파키스탄은 오직 우르두어만을 공식 표준어로 지정했다. 벵골어를 쓰던 동파키스탄에선 대학생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반대 운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면서 벵골어도 표준어로 인정한다는 선언이 나왔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벵골 지역의 동파키스탄인들은 서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마침내 1971년 동파키스탄이 독립해 방글라데시가 된다.
독립전쟁 초기 전세는 주요 도시 상당수를 장악한 묵티바히니가 우세했다. 그러나 화력과 장비에서 열세인데다 파키스탄군이 강력한 진압 작전을 밀고 나가면서 결국 묵티바히니는 동파키스탄의 모든 거점을 잃고 인도로 후퇴하여 국경 지역에서 게릴라전으로 파키스탄군에게 저항했다. 파키스탄군은 전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거리에 얼씬거리는 동파키스탄인에게 총탄을 퍼부었으며 각종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이때 동파키스탄 전역의 대학교에서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사살되고 파키스탄 군인들이 농촌으로 진입하여 촌락을 쑥밭으로 만들고 수많은 농민들을 죽였다. 서파키스탄군은 학살, 강간 등을 수시로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약 동파키스탄인 100만 명이 학살당하고 600만명의 벵골인들이 헬게이트가 열린 동파키스탄에서 인도로 도망쳤다. 서파키스탄군이 동파키스탄에 헬게이트를 열어 약 600만명의 벵골인이 인도로 피난오자 인도 입장에서도 이 파키스탄 내전을 좌시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한편 이러한 묵티바히니의 게릴라전 저항에 당황한 파키스탄군은 묵티바히니를 토벌하고자 인도 국경에 있는 묵티바히니 기지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 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파키스탄군의 인도 국경 폭격은 오히려 분노한 인도의 직접적인 무력 개입을 초래했다. 묵티바히니 역시 폭격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해도 기죽지 않고 치열하게 저항했다. 이전까지는 앙숙 파키스탄을 골탕먹이기 위해 간접적으로 묵티바히니에게 비밀리에 무기 및 보급 지원, 인도 영토 내 게릴라 기지 설치를 묵인하는 정도였지만 인도 국경이 폭격당하자 ‘공식적으로’ 중립을 지키고 있던 인도는 입장을 적극 개입으로 급선회했다.
인도의 인디라 간디 총리는 묵티바히니와 방글라데시의 독립 운동 지원을 천명하면서 파키스탄과의 전쟁을 선포했고 전쟁은 인도군-묵티바히니 연합, 파키스탄군 간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1971년 12월 3일 인도는 마침내 군대를 투입하여 벵골인들의 저항을 지원하였고 동부와 서부에서 인도와 약 2주일간 전쟁을 벌인 끝에 대패한 서파키스탄은 항복했다. 1971년 12월 16일 파키스탄군 지도부가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결국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은 방글라데시의 독립으로 막을 내렸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