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2월 7일, 미국의 건축가•뉴욕 세계 무역 센터의 설계자 미노루 야마사키 (Minoru Yamasaki, 1912 ~ 1986) 별세
미노루 야마사키 (Minoru Yamasaki, 일: ミノル・ヤマサキ, 1912년 12월 1일 ~ 1986년 2월 7일)는 일본계 2세 미국인 건축가로, 뉴욕 세계 무역 센터의 설계자로 잘 알려져 있다.
– 미노루 야마사키 (Minoru Yamasaki)
.출생: 1912년 12월 1일, 미국 워싱턴 시애틀
.사망: 1986년 2월 6일, 미국 미시간 디트로이트
.부모: John Tsunejiro Yamasaki, 하나 야마사키
.배우자: Teruko Hirashiki (1969년–1986년), Teruko Hirashiki (1941년–1961년)
.자녀: 타로 M. 야마사키
.저서: A life in architecture
오랜 경력을 통해 야마사키는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 공항, 영사관, 컨벤션 센터 및 대학 건물 등을 성공적으로 건설했다.
그러나 프루이트-아이고는 그의 명성을 훼손했고, 그의 후기 작품들에도 타격을 입혔다.
○ 생애 및 활동
미노루 야마사키는 1912년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일본인 부모밑에서 태어났다. 그 곳 워싱턴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뉴욕으로 이주하여 뉴욕대 NYU에서 건축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의 설계자 shreve lamb & harmon 사무실에서 일을 한다.
1945년 33세에 미시건주 디트로이트로 직장을 옮긴다. 그 곳의 유명사무실 스미스힌치만앤그릴 SH&G 의 디자이너로 일한다. 1951년 세인트루이스의 프루이트아이고 Pruitt-Igoe 공공주거단지 설계를 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다 (39세). 이때는 라인웨버야마사키앤헬무스 LY&H 사무실의 디자인파트너로 활동한다. 이당시 세인트루이스 램버트국제공항 여객터미널 설계도 진행한다 (1956년, 44세). 곧이어 사우디아라비아의 다란 dhahran 국제공항 여객터미널도 디자인한다 (1961년, 49세).
헬무스 george hellmuth는 이후 1955년 교오바다 gyo obata, 카사바움 kassabaum과 함께 세인트루이스에서 HOK를 설립하여 세계 굴지의 건축설계사무실로 키웠다. 세인트루이스의 워싱턴대에서 건축공부를 시작한 일본계 미국인 2세 “니세이” 교오바다는 미시건 크랜브룩 cranbrook academy of arts 에서 건축공부 (석사)를 마치고 SOM시카고를 거쳐, 당시 11세 선배인 “니세이” 야마사키의 세인트루이스 사무실에 1951년 가담한다. 프루이트아이고와 램버트공항 터미널 설계 등에 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1950년대 중반 프루이트아이고 설계가 끝나자 라인웨버와 결별하고, 야마사키는 다시 디트로이트로 돌아간다. 그 곳 서버브 트로이 troy 에서 야마사키앤어소시에이츠 yamasaki & associates 의 본인 사무실을 내고 많은 역작들을 만들어낸다. 물론 WTC도 그 중의 하나다. 1986년 작고 이후에도 사무실은 200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디트로이트 근방에 설계작품들이 많다.
일본의 진주만공격이 시작되자 시애틀의 일본인에 대한 민심이 크게 악화된다. 이를 피해 일본인2세 “니세이” 야마사키는 뉴욕으로 이주, 뉴욕대에서 건축석사학위를 받는다. 이 당시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 noguchi 를 알게된다. 1945년 SH&G의 디자이너로 일하게되면서, 디트로이트 교외 트로이 troy 로 이주한다. 가까이 위치한 블룸필드힐스 bloomfield hills 에 있는 크랜브룩 아카데미오브아트 CAA에는 당시 미국의 유명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몰리고 있어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에로 사리넨의 아버지인 건축가 일리엘 사리넨이 교장이었다. 바우하우스처럼 미국의 토탈아트 스쿨이었다.
WTC설계자는 실제로 마이너리티인 일본계 미국인 야마사키와 에머리로스앤선스 emery roth & sons의 합작 JV 이다. 물론 야마사키가 주설계자 lead architect 였지만 말이다. 당시 ER&S는 맨해턴의 스카이라인을 만든다고 할 정도로 하이라이즈 오피스와 럭셔리 아파트 건물을 매우 많이 설계하고 있던 맨해턴의 파워건축가였다. 그랜드센트럴과 인접한 파크애비뉴의 59층 팬앰빌딩 (현 met life 빌딩)도 그중의 하나다. WTC의 설계가 시작하기 바로전, 1963년 준공되어 장안의 화제가 된 건물이다. 이때도 월터 그로피우스와의 콜라보로 이태리 밀란의 피렐리사옥을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WTC 발주처인 뉴욕뉴저지항만공사는 맨해턴의 터줏대감 ER&S의 영향력과 실적을 토대로, 마이너리티인 야마사키와의 JV를 인정했을 거라고 추정된다. 공식적으로는 1962년 건축설계팀으로 선정시 야마사키가 주건축가이고(50세), ER&S가 부건축가였다. 당시 야마사키는 하버드, 프린스톤 등 동부에서도 많은 학교건물을 설계하는 등 커리어의 절정에 있었다.
110층으로 층수가 너무 많아지면서 고층부에 도달하는 시간이 이슈가 된다. 초고속 엘리베이터의 사용은 물론이고, 환승센터 역할을 하는 스카이로비를 두어 익스프레스와 로컬의 두 종류 엘리베이터를 운영한다. 혁신적인 수직동선 처리방법이었다. 이방법으로 부분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엘리베이터 쉐프트를 오피스 공간으로 사용할 수도있어 일거양득이었다.
당시 코르뷔지에가 주도하는 CIAM의 유럽식 모델을 도입한 대단위 공공주거 단지계획에 참여한다. 초기에는 저소득층의 파라다이스라고 호응이 매우 좋았으나 사회 인구적 변화와 관리 유지상의 문제로 시재정이 악화되면서 범죄와 마약의 소굴로 게토화되자, 20년만에 철거해야하는 비운의 프로젝트가 되었다. 찰스 젱크스는 첫번째 아파트 주동이 폭파철거되던 1972년 3월 16일을 모더니즘의 제삿날이라고 혹평하였다. 포스트모던의 등장을 암시하는 사건으로 자주 이용된다.
맥그리거 기념회의장 외부공간계획에는 일본식 정원 조경개념을 도입했다. 전쟁이 끝나자 일본인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배려가 다시 좋아지고 미국내 활동이 많아진다. 일본도 자주 오고간다. 일본의 전통 건축개념도 많이 의식하고 도입하려고 한다.
야마사키가 웨인주립대학에 처음 설계한 건물이다. 이후 캠퍼스내에 여러 동을 설계한다 (주: 예일의 건축역사학자 빈센트 스컬리는 야마사키보다는 루이스칸이 동시대의 건축가라고 야마사키를 저평가한다. 맥그리거 회의장의 아트리움을 “새들이 지저귀는 새장”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1955년 작품인 세인트루이스 램버트국제공항 터미널의 지붕은 고딕성당의 그로인볼트 groin vault 를 연상케한다. 틴쉘 thinshell 콘크리트 구조를 이용하여 기둥이 없는 롱스팬의 크로스 배럴볼트 cross barrel vault 이다. 1962년 시애틀 월드엑스포를 위해 설계한 퍼시픽과학관의 광장 구조물은 고딕성당 네이브 nave 의 기둥과 천정 뼈대만 남겨놓은 구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어지는 대학교육시설등의 설계에서도 프리캐스트 콘크리트 PC 를 이용한 구조로 형태 또는 디자인요소가 단순 간결하게 반복된다. 외관디자인에서는 고딕성당의 포인티드 아치도 많이 도입된다. 한편 기하학적 패턴의 디자인이 반복되면서 의도치않게 가끔 이슬람건축과 혼동될 수도 있다. 좁고 길쭉한, 단순 반복되는 창때문에 건물이 가늘게 보인다. 엔지니어링에 기초한 테크니컬 모더니즘이라 할 수 있다.
1972년 디트로이트 교외 버밍햄에 직접 설계한 야마사키 하우스, 1986년 이곳에서 별세했다.
○ Honors
Fellow of the American Institute of Architects, 1963
DFA from Bates College, 1964
American Institute of Architects’ First Honor Award, three times
Cover story of TIME on January 18, 1963
○ 프루이트-아이고(Pruitt–Igoe) 도시 주택 프로젝트
프루이트-아이고(Pruitt–Igoe) 도시 주택 프로젝트는 1950년대 세인트루이스의 ‘도시 황폐화’를 활성화하려는 것이었으나 야마사키 미노루(Minoru Yamasaki)의 건축 경력 중 “하나의 큰 실패”로 남았다.
계획 당시 지역 지도자들은 수십 년 동안 세인트루이스가 계속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인트루이스 시장인 민주당 소속 조셉 다스트, 그리고 공화당 소속 관리들조차 도시에 급진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했다. 다스트는 이 사건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우리 도시의 마음을 재건하고, 개방하고, 깨끗이 정리해야 한다. 빈민가가 모든 본질적인 악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의 잘못이었다. 이제 피해를 복구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책임이다. “
비록 1948년 실시된 투표에서 지역 거주자들은 고밀도 공공 주택 프로젝트 제안을 거부하긴 했지만 연방 정부의 자금이 대규모로 지원되면서 대규모 주택 프로젝트에 저항하기는 어려워졌다. 그렇게 ‘프루이트-아이고’라는 고밀도 공공 주택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도시 지도자들은 프로젝트에서 성장하는 대도시를 수용하고 빈곤을 종식시킬 수 있는 높고 현대적인 건물을 만들기 위해서 야마사키 미노루라는 유망한 젊은 건축가를 선택했다.
야마사키는 가능한 한 많은 가정이 건물에 거주하게 하는 규모의 경제 아이디어를 구현하고자 했다. 야마사키의 제안에는 새로운 유형의 “건너 뛰기” 엘리베이터가 포함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세 번째 층마다 멈췄으며, 더 많은 유닛을 위한 공간을 절약하고 주민들이 더 많이 상호 작용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지역 사회 참여를 장려했다. 복도는 넓고 거리와 같았고 고층 건물 내부의 일종의 마을 광장을 모방했다.
도시 지도자들은 이제 빈민가 주민들이 가장 부유한 주민들보다 도시의 더 웅장한 전망을 가질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결과는 아니었다. 계획가들은 일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단지에 살 것으로 기대했지만 아니었다. 많은 실업자 가정이 아파트를 가져 갔고, 이는 임대료 수입이 건물을 유지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복지법에 따라 편부모만 복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많은 어머니와 아버지들은 혜택 없이 함께 머물든지, 아니면 혜택을 받기 위해 헤어져야 했고 돌아오지 않았다. 곧 프루이트-아이고는 대부분 대규모의 한부모 가정으로 채워졌다. 건물에 아버지가 부족하여 프루이트-아이고에서 범죄는 빠르게 보편화되었고, 아이들은 갱단에 합류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손상시켰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는 갱단들의 놀이터로 사용되었고 갱단의 희생자들이 생겨났다. 놀이터가 없었기 때문에 창문과 가로등에 벽돌과 바위를 던지며 놀았다. 지상층에는 화장실이 없었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는 점점 공중 화장실이 되었다.
세인트루이스는 프루이트-아이고가 문제 투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연방 정부, 세인트루이스 주택 당국, 주 및 세인트루이스 시는 모두 단지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며 문제를 회피했다.
야마사키는 5년 만에 프로젝트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그는 프루이트-아이고와 관련 “개탄스러운 실수”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1950년대 후반까지 그는 “수천 명을 정확히 닮은 공간 단위에 수용하는 비극”에 대해 웅변적인 연설을 했는데, 이는 “확실히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주의에 대한 우리의 이상을 육성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단지의 최종 설계는 원래 구상과 달랐지만, 그는 사람들의 삶이 도시 디자인을 통해 효과적으로 설계될 수 있다는 프로젝트의 핵심 가정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1972년 단지내 건물 3동이 철거되었고 1976년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건물도 마침내 철거되면서 프루이트-아이고는 완전히 사라졌다.
오랜 경력을 통해 야마사키는 세계무역센터(쌍둥이 빌딩), 공항, 영사관, 컨벤션 센터 및 대학 건물 등을 성공적으로 건설했다. 그러나 프루이트-아이고는 그의 명성을 훼손했고, 그의 후기 작품들에도 타격을 입혔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