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 11일, 올해로 20주기를 맞은 알카에다의 ‘9·11 테러’ (9/11 attacks)로 2,977명 사망

9·11 테러 (September 11 attacks, 9/11 attacks) 또는 약칭인 9/11은 2001년 9월 11일 화요일 아침 미국에 대항하는 이슬람 과격 테러단체인 알카에다가 일으킨 네 차례의 연쇄 테러 공격을 의미한다.
9월 11일 아침 미국 북동부에서 캘리포니아주로 향하는 민항 여객기 4기가 알카에다 테러범들에게 비행 중 연쇄적으로 납치당했다. 납치범 무리는 5명으로 이루어진 3개 무리와 4명으로 이루어진 4개 무리 총 19명이었다. 납치범의 각 무리 내에 비행 훈련을 받고 항공기를 장악해 조종한 납치범이 1명씩 있었다. 납치범들은 미국의 유명한 건물에 비행기를 부딪쳐 대규모 인명 피해를 일으키고 테러 대상 건물을 부분적으로 파괴하거나 완전히 붕괴하게 만들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으로 납치당한 항공기는 아메리칸 항공 11편이었다. 이 비행기는 현지 시각 오전 8시 46분 미국 뉴욕 로어맨해튼에 있는 세계 무역 센터 북쪽 타워 (1WTC)에 충돌하였다. 17분 뒤인 9시 3분에는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이 세계 무역 센터 남쪽 타워 (2WTC)에 충돌하였다. 110층짜리 쌍둥이 빌딩은 모두 화재 발생 1시간 42분만에 붕괴되어 이 여파로 7 세계 무역 센터(7WTC) 등 다른 세계 무역 센터 건물도 붕괴되고 주변 건물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세 번째로 납치된 항공기는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에서 이륙한 아메리칸 항공 77편으로 오하이오주 상공에서 납치되었다. 오전 9시 37분 미국 버지니아주 알링턴군에 있는 미 국방부 본부인 펜타곤의 서쪽 면에 충돌하여 건물 일부가 붕괴되었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납치당한 항공기인 유나이티드 항공 93편은 워싱턴 D.C.를 향해 비행했다. 유나이티드 항공 93편 항공기는 목표물에 타격하지 않은 유일한 항공기로 오전 10시 3분 경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섕크스빌 인근 들판에 추락하였다. 비행기에 탑승했던 승객들은 납치범들이 장악한 항공기 조종석 통제권을 되찾으러 시도했고, 결국에는 테러범들이 의도한 목표물을 타격하는 데 실패하게 만들었다. 수사관들은 유나이티드 항공 93편의 원래 목표물은 백악관이나 미국 국회의사당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테러 발생 직후 곧바로 알카에다가 테러를 일으켰다는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뒤이어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아프가니스탄 내 알카에다 세력을 축출하고 알카에다의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을 인도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거부한 탈레반을 몰아내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다. 처음에는 빈 라덴이 자신이 테러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고 부인했으나 2004년 빈 라덴은 비디오 테이프를 통해 공식적으로 자신이 테러를 기획한 것이라고 밝혔다. 알카에다와 빈 라덴은 테러를 일으킨 동기로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 미군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둔, 이라크에 대한 제재조치 등을 꼽았다. 빈 라덴은 테러 후 10년 간 은신하였으나 2011년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에 있는 자신의 은거지에서 미군의 넵튠 스피어 작전으로 사살되었다.

테러로 세계 무역 센터와 인근 인프라가 크게 파괴되었고 이는 뉴욕의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으며 세계적인 경제 불황도 초래하였다. 전 세계의 많은 국가가 9·11 테러 이후 테러방지법을 강화하였으며 테러 공격을 막기 위해 법집행기관과 정보기관의 권한을 확대하였다. 미국과 캐나다의 민항 항공편은 9월 13일까지 폐쇄되었으며 월가의 금융 거래는 9월 17일에야 재개되었다. 그 외에도 추가적인 테러 우려로 수많은 폐쇄 조치, 대피, 행사 취소가 잇다랐다. 붕괴된 세계 무역 센터 부지는 2002년 5월 정리가 끝났으며 펜타곤은 테러 1년만에 재정비를 완료하였다. 구 세계 무역 센터를 대체할 새 건물의 건설 공사는 2006년 11월 시작하여 2014년 11월 완공해 개방하였다.
9·11 테러로 2,977명이 사망하고 25,0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으며 그 외에도 상당한 보건 문제를 일으켰고 인프라 파괴로 최소 100억 달러의 재산 피해가 발생하였다. 또한 이 테러는 역사상 가장 사망자가 많은 테러이자 미국의 역사상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소방관과 법 집행관이 사망한 사건으로 소방관 340명과 법 집행관 72명이 순직하였다. 테러 이후에는 사망자를 추모하는 뉴욕의 내셔널 셉템버 11 메모리얼 & 뮤지엄, 버지니아 앨링턴군의 펜타곤 메모리얼, 펜실베이니아주 추락 현장의 93편 국립 추모관 등 수많은 추모 및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미국인들 눈물의 상징’ 9.11 메모리얼 파크 (National September 11 Memorial & Museum)
미국 뉴욕시 맨해튼 구 세계무역센터 1, 2번 건물 자리에 있는 9.11 테러 추모 공원 (National September 11 Memorial & Museum, 180 Greenwich St, New York, NY 10007)에 자리잡은 정사각형의 인공폭포는 세계무역센터 1, 2동의 자리다.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9.11 테러로 사망한 2,977명의 희생자와, 1993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사건으로 사망한 6명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진 현장 (그라운드 제로)에 지어졌다. 9.11 테러 10주기가 되는 2011년 9월 11일에 개장했다.

2003년, 맨해튼 개발 공사 (Lower Manhattan Development Corporation)에서 세계무역센터 기념공원의 건설에 관한 국제 현상 공모를 실시하였다. 2003년 11월 9일에 13명의 심사단원이 8팀의 최종 후보를 선정하였다. 이후 2004년 1월 6일, 마이클 아라드 (Michael Arad)와 피터 워커 (Peter Walker)에 의해 설계된 ‘부재의 반추’ (Reflecting Absence)가 최종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기념공원을 설계한 이스라엘 출신의 마이클 아라드 (Michael Arad)는 국제 현상 공모전에서 5,200:1의 경쟁률을 뚫고 당선되었다.
또한 세계무역센터 기념 재단은 기념 공원과 박물관의 건설 자금을 모으고, 건설 계획을 추진하기 위하여 비영리 재단으로 설립되었다. 2005년 1월부터 기념 공원의 건설 자금을 모금하기 시작하였고, 건설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후 비용에 관한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 기념 공원과 박물관을 짓는데 6억 7,200만 달러가 필요하고, 나무를 심고 길을 정비하는 비용까지 합하면 9억 7,300만 달러가 사용된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는 4억 9,400만 달러가 필요하다는 초기 계획에 비하면 2배 가까이 비용이 올라가게 된 것이다. 결국 전체적인 규모가 축소되었고 전체 비용도 5억 3,000만 달러로 줄어들었다.
지속된 연기 이후 2006년 8월에 건설이 시작되었고, 2011년 9월 11일 마침내 개장하였다.

테러로 붕괴된 두 개의 쌍둥이 건물이 서 있던 자리에 두 개의 풀이 있고 각 풀에는 거대한 구멍과 폭포가 설치되어 있어서 풀 외곽에서 안쪽으로 물이 쏟아져내리고 이는 테러로 인해 흘린 유가족들과 미국인의 눈물을 상징한다. 면적은 각각 4046m2 (약 1220평)이며 1분에 쏟아져 내리는 물의 양은 1만 1400리터에 달한다. 테두리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이 폭포를 둘러싸고 있다. 희생자들의 이름은 서로 연이 있던 희생자들끼리 가까운 곳에 모아져있다. 가족이었던 사람들이 서로 주위에 있고, 같은 직장에 출근해 얼굴을 보던 사람들끼리 주위에 배치되어 있어 이름을 보는 유가족들이 기억을 되살리도록 했다는 취지이다.
부지 내에 현장 유품 등이 전시된 메모리얼 뮤지엄이 있고, 바로 옆에는 새로 지어 올린 1WTC, 통칭 프리덤 타워가 있다. 당시 구조 활동을 지원했고 순직한 소방관들의 유품 등이 전시된 트리니티 교회도 바로 근처에 있다.
작은 건물에 출입구가 있고 지하로 크게 연결되어 있어 메모리얼 공원 지하 전체를 차지한다. 디자인적으로 벽과 계단 등에 예각과 둔각을 혼합하여 참사의 분위기를 잘 표현하였고 화강암과 철근 등을 이용하여 건물들의 중압감과 무게감을 느낄 수 있다. 박물관 전체의 크기도 매우 크며 음성, 영상, 실물자료 등이 적재적소에 잘 배치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전시 주제는 그날의 비극과 관련한 “회상”에 맞춰져 있다. 한인 희생자들도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