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11일, 팔레스타인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야세르 아라파트 (Yasser Arafat, 1929 ~ 2004) 별세
야세르 아라파트 (Yasser Arafat, 1929년 8월 24일 ~ 2004년 11월 11일)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초대 수반 (1996년 ~ 2004년)이었다. 또한 쿤야 아부 아마르로도 알려진 그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의장 (1969년 ~ 2004년)이었다. 아라파트는 1993년 오슬로 협정에서 결과를 가져온 성공적인 협상들로 이스라엘의 시몬 페레스와 이츠하크 라빈과 더불어 1994년 노벨 평화상의 공동 수상자였다.
○ 생애 및 활동
1929년 이집트 왕국 카이로에서 팔레스타인인 출신인 부친 압델라우프 아라파트 알쿠드와 알후세이니와 예루살렘 출신인 모친 자흐와 아불사우드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카이로 푸아드 1세 왕립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토목기사로 일했다고 한다. 1956년 이집트군 장교로 수에즈 전쟁에 참가한 경력도 있다.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나서게 된 것은 1948년 1차 중동전쟁에 참가하면서 부터였다.
학창시절 팔레스타인 학생총연맹 (GUPS)을 주도한데 이어, 1959년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 출신이었던 살라흐 할라프 (아부이야드)와 할릴 알와지르 (아부지하드), 팔레스타인 학생총연맹 베이루트 지부의 대표였던 할레드 야슈루티와 함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의 모태가 된 대이스라엘 투쟁단체인 ‘파타(파트흐)’를 창설했다.
아라파트는 자신의 장기적 경력을 통하여 논쟁적이며 양극화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 활동으로 들어가는 팔레스타인의 국민들의 꿈과 열정을 구체화한 운동으로서 1957년 자신이 창설한 파타 (Fatah)를 지도한 것으로 넓게 인정되었다.
1969년에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를 창설하면서 의장이 되었다. 요르단과 레바논, 시리아 등지로 거점을 옮기며 ‘이스라엘의 멸망’을 목표로 잇단 항공기 납치와 주요 시설 파괴 등 수십차례에 걸쳐 대이스라엘 무장투쟁을 하였다.
이러한 무장활동은 아라파트에게 팔레스타인의 대표라는 위상을 주기도 했지만 테러리스트라는 악명도 안겼다. 이 과정에서 그는 체포위기에 몰렸을 때마다 뛰어난 변장술로 위기를 넘겨 ‘중동의 오뚝이’, ‘9개의 목숨을 가진 고양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특히 이스라엘의 암살시도를 40차례나 받았는데도 그때마다 잘 빠져나가 이스라엘 입장에선 골치아픈 인물이었다.
1972년에 PLO 산하 과격단체 ‘검은 9월단’의 이스라엘 선수단 살해 사건으로 국제 여론이 악화되자 아라파트는 국제 테러에 개입을 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뒤 1988년 팔레스타인 독립선언 이후 협상전략으로 돌아섰고 1993년과 1994년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를 인정하는 오슬로 협정과 카이로 협약을 각각 체결해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중동평화 정착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그리고 1995년에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지역을 3단계로 나눈 제2차 오슬로 협약을 마련하여 독립국가의 길이 형성되나 했으나 1995년 11월 14일에 라빈 총리가 암살당하고 강경파들이 들어서면서 오슬로 협정이 사실상 폐기되고, 1996년 예루살렘 성전산 터널 공사 사태를 계기로 1997년에 백악관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정상회담에 마지못해 앉았으나 유대인 정착촌 문제 등을 해결하지 못했고, 대신 테러 용의자들을 풀어 이스라엘 안전 유지활동을 중지시켜 회담이 결렬됐다.
2000년 7월 캠프 데이비드 중동평화협상이 결렬되고 가을에 팔레스타인 자치 보장이 안될 시 최후통첩을 시사했으나, 아리엘 샤론 리쿠드당 총재가 템플마운트를 방문해 허사가 됐다.
이듬해 9.11 테러에 따른 미국 주도의 ‘테러와의 전쟁’을 계기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침공해 자치권을 박탈함으로써 그동안 이루어낸 노력이 허사가 되었다.
같은 시기 이스라엘은 라말라를 공격하여 이스라엘 공군의 공습에 부서진 라말라의 자치정부 청사에 사실상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같은 시기에는 강경파 독립운동조직 ‘하마스’의 대두와 도전에 시달리기도 했다.
2004년, 신병치료를 위해 프랑스 파리로 후송되어 저녁을 먹던 도중 갑자기 구토를 하고 쓰러졌다. 곧바로 프랑스 파리 인근 군사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평생을 바래 온 완전 독립국가 건설을 못 보고 75세로 별세한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40일간의 애도기간을 선포하고 기업과 상점들이 3일, 공공기관이 일주일간 문을 닫았다.
사후 독살 의혹이 있었으나 프랑스 연구진의 결과로는 유언비어였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러나 이후 여러차례에 걸친 유럽 여러나라 연구기관들의 독립적 연구 결과에서 폴로늄 중독에 의한 사망을 강하게 시사하는 결과가 발표되었다. 사실 이 의혹이 도는 이유가 아라파트가 청사에 갇혀살며 이스라엘 정부의 검사를 거친 음식만 먹었기에 팔레스타인인들이 제기하는 것이다. 실제로 근 10년만에 유족과 자치 정부가 유해를 꺼내 스위스 법의학센터로 보낸 결과 상당량의 폴로늄 210이 검출되었다고 한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스라엘의 공작이 아니냐, 엄밀히 말하자면 이스라엘 첩보기구 모사드를 의심하고 있지만 이스라엘 측에서는 부인하고 있다. 본인은 예루살렘에 묻히길 원했으나 이스라엘 정부의 결사반대로 못하고 이집트에서 장례식을 치룬다음 서안지구 라말라에 묻혔다.
가족으로는 아내 수하 알타윌과 딸 자흐와가 있다.
그의 후계자들인 파타당은 아라파트의 상징과도 같던 케피예를 여전히 자신들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팔레스타인 온건파 정당으로, 지금도 이스라엘과의 공존 방안을 모색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강경책과 내부 부정부패 때문에 지지율을 크게 잃어, 결국 하마스에게 밀려난다.
○ 평가
그의 지지자들은 팔레스타인 국민들의 국가 열망을 상징한 영웅적인 자유 투사로서 그를 간주하였다.
많은 그의 이스라엘의 반대자들은 폭력을 흥행하는 장기적 유산과 함께 완고한 테러리스트로 그를 여겼다.
아랍의 국수주의자들은 오슬로 협정이 있던 동안 그가 이스라엘 정부에게 너무 많은 양보를 만들었다는 것을 믿는다.
다른이들은 그를 부패하거나 약하거나 혹은 솔직하지 않았던 것으로 비난하였다.
자신의 약점이 무엇이든 아라파트는 국가의 민족 자결권에 관한 팔레스타인의 꿈을 위하여 싸우고 바친 시작부터 종말까지 애국자였다.
팔레스타인 정치가로서 많은 일을 했지만, 투명하지 않은 재산 관리, 아내의 사치 등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나는 한 손에 올리브 가지를 다른 한 손에는 자유를 위한 전사의 무기를 들고 여기에 왔습니다. 내 손의 올리브 가지를 던져 버리지 않게 하십시오,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에 전쟁이 벌어졌지만 그곳에서 평화가 다시 살아날 날이 올 것입니다.” – 1974년 11월 13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아라파트가 한 연설中
○ 연보
1929년8월4일 이집트 카이로 출생
1949년 팔레스타인 학생연맹 결성
1965년1월 파타 게릴라 운동 창설
1969년2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 취임
1970년9월 PLO 민간여객기 납치사건 후 요르단 정부로부터 추방ㆍ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 국가 출범 선언
1972년9월 뮌헨 올림픽서 이스라엘 선수단 12명 사살
1982년6월 이스라엘 레바논 침공으로 베이루트로 망명
1988년12월 테러 포기 및 이스라엘 생존권 인정 선언
1993년9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협정 체결
1994년7월 팔레스타인으로 귀환
1996년1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대통령으로 선출
2001년12월 이스라엘군에 의해 연금
2002년4월 이스라엘의 망명 요구 거부
2004년11월11일 프랑스 헤르시군병원에서 사망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