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1일, 이스라엘 제11대 총리 선거에 아리엘 샤론 (Ariel Sharon, 1928 ~ 2014) 별세
아리엘 샤론 (Ariel Sharon, 1928년 2월 27일 ~ 2014년 1월 11일)은 이스라엘의 정치인이자 군인이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총리를 지냈다.
– 아리엘 샤론 (Ariel Sharon)
.출생: 1928년 2월 26일, 이스라엘 Kfar Malal
.사망: 2014년 1월 11일, 이스라엘 라마트간 Sheba Medical Center
.매장: 2014년 1월 13일, 이스라엘 Havat Shikmim
.설립 조직: 카디마, Shlomtzion, Unit 101
.배우자: 릴리 샤론 (1963 ~ 2000년), 마가릿 샤론 (1953 ~ 1962년)
*이스라엘의 제11대 총리
.임기: 2001 ~ 2006년
.정당: Herut
1948년 독립 전쟁 당시에는 육군 장교로 참전했다.
“아리크(אַריק)”라는 별명이 붙은 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오슬로 협정의 비판으로서 많은 세월 동안 알려졌다.
그는 이스라엘이 1967년 차지한 영토들인 요르단 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 유대인 정착의 강한 후원자였다.
○ 약사
1928년 2월 27일: 텔아비브 근방에서 러시아 이민자 부모에게서 출생함.
1942: 14살 때 샤론은 영국 통치에 저항하여 싸우기 위해 유대인 지하 민병대 조직에 참여함.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전쟁 당시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그 용기를 인정받음
1953년: 국경의 테러 공격을 막기 위해서 이스라엘 101부대를 창설하여 이끌었고, 테러범들이 조직된 요르단과 이집트 도시들에 파괴와 폭동을 조성함.
1956년: 시나이 캠페인 동안 샤론은 상관들의 명령을 무시하고 전략적인 미틀라 패스를 점령하였고, 수에즈 운하에서 이집트 군대를 격파함.
1967년 6일 전쟁: 샤론은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장갑 부대에게 명령을 내려, 시내 반도에 있는 이집트 방위군을 섬멸하였다. 군대 전문가들은 그의 병법과 전략을 칭송했고, 오늘날까지도 다른 나라의 전쟁 대학에서 연구되고 있음.
1971년: 가자에서 혹독한 반테러 캠페인을 실시하여 이스라엘 시민들에 대한 공격을 급감시킴.
1973년 7월: 우익 정당인 리쿠드당 창당에 도움을 줌.
1973년 10월 욤키푸르 전쟁: 샤론이 은퇴한지 몇 달 후에 이집트와 시리아의 갑작스러운 공격이 있었고, 이스라엘이 파멸할 수도 있다는 공포가 고조되자 샤론이 다시 복귀한다. 샤론은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 반격의 선두에 섰고, 이집트의 강력한 제3의 군대를 포위한다. 카이로를 향한 그의 진격은 세계 열강이 개입하여 휴전을 이끌게 함.
1977-1981년: 새로운 리쿠드 정부의 내각 각료로서 샤론은 유대와 사마리아, 가자에 유대인 정착촌을 확장시킴.
1982년 4월: 국방부장관으로서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군 철수와 그곳에 있던 유대 정착촌의 강제 철거를 감독함.
1982년 6월: PLO의 국경 공격을 종결시키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을 총지휘함. PLO는 레바논에서 축출되었지만, 동맹을 맺었던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가 베이루트 근처에서 팔레스타인 일반 시민들을 학살한 것으로 인해 국방부장관직에서 물러남.
1990-1992년: 건설부 장관으로서 샤론은 전 소련 연방 출신의 새로운 백만 이민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을 확보함.
2000년: 야당 당수로서 샤론은 이스라엘의 주권을 나타내기 위해서 예루살렘의 성전산을 방문했고, 이로 인해 제2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봉기)가 발생함.
2001년 3월: 총리 선거에서 대승을 거둠.
2003년: 선거에서 재선되고 이스라엘 보안 장벽 설치를 시작함.
2005년 8월: 가자로부터 이스라엘을 철수시키고, 21개의 유대인 정착촌을 철거시켰고, 8,500명의 유대인들을 고향에서 쫓아냄.
2005년 11월: 리쿠드당을 떠나 중도파 카디마당을 창당함.
2006년 1월 4일: 심각한 뇌졸중으로 혼수 상태에 빠짐.
2014년 1월 11일: 85세의 나이로 사망함.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