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13일, 독일의 수학자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Alexander Grothendieck, 1928 ~ 2014) 별세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독: Alexander Grothendieck IPA, 프: Alexandre Grothendieck, 1928년 3월 28일 ~ 2014년 11월 13일)는 독일 태생의 수학자다.
함수해석학과 호몰로지 대수학, 대수기하학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호몰로지 대수학과 대수기하학에서 매우 추상적인 관점을 도입하였다.
–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Alexander Grothendieck)
.출생: 1928년 3월 28일, 독일 베를린
.사망: 2014년 11월 13일, 프랑스 셍쥐홍
.부모: 사스카 샤피로
.형제자매: 도덱 샤피로, 마이디 그로텐디크
.학력: University of Lorraine (1950 ~ 1953년), 고등사범학교 (1948 ~ 1949년) 등
.유명한 제자: 피에르 들리뉴, 호앙 쑤언 신, 뤼크 일뤼지, 미셸 레노, 장루이 베르디에, 막스 카루비 등
1966년 필즈상을 수상하였으며, 1988년에는 또 다른 필즈상 수상자인 수학자 피에르 들리뉴와 함께 크라포르드상의 수상자로 결정되었으나, 본인이 윤리적인 문제를 들어 수상을 거절하였다.
○ 생애 및 활동
- 유년기
그로텐디크는 1928년 3월 28일 독일 베를린에서 우크라이나 출신의 유대인 아버지와 함부르크 출신의 독일계 개신교 신자인 어머니 아래에서 태어났다. 그로텐디크의 아버지는 알렉산드르 샤피로 (러: Александр Шапиро, 독: Alexander Schapiro), 어머니는 항카 그로텐디크 (독: Hanka Grothendieck)이었다. 그로텐디크는 아버지 대신 어머니의 성을 사용하였다. 양친은 모두 아주 혁명적인 사회주의자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격동기 때문에 그로텐디크는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3년까지 그로텐디크는 양친과 함께 베를린에서 살았으나, 그해 연말 아버지는 파리로 이사를 했으며, 어머니는 그 이듬해에 파리로 이주했다. 그로텐디크는 부모를 따라가지 못하고 함부르크에 남아서 다른 친척들의 집에서 머물며 학교를 다녔다. 그로텐디크의 부모는 한편 그 당시 스페인 내전에서 사회주의자 측의 전투요원으로 전쟁터에 자원해서 싸우고 있었다. 그 후, 1939년, 그로텐디크는 독일의 유대인 학대를 피해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 곳곳의 유대인 피난 캠프를 떠돌아 다니면서 생활했다. 그로텐디크의 아버지는 1942년, 독일의 나치 정권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그 해에 사망하였다.
어린 그로텐디크는 1940년 어머니와 함께 환경이 몹시 열악한 리외크로 (프: Rieucros)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 후 그는 유대인 강제수용소를 전전하게 되는데, 프랑스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의 가혹한 환경 속에서 신체적 공격까지 받으며 극도로 어려운 생활을 했다. 그는 수용소에서 대부분의 생활을 혼자 보냈는데, 그 때의 시간을 수용소 생활이 준 선물로 여겼다. ‘고독한 시간은 다른 사람과 전혀 소통하지 않고도 생각을 만들고 개념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 청년기와 교육
그 후 그로텐디크는 르샹봉쉬르리뇽 (프: Le Chambon-sur-Lignon)으로 피신하고, 현지 학교인 콜레주 세베놀 (Collège Cévenol)에 다니면서 바칼로레아에 합격했다. 그가 받은 공교육은 아주 부실했지만 그는 ‘야망이 컸고 수학에 깊은 열정을 느꼈다.’ 알렉산더는 수학 교과서에 나오는 진부하고 반복적인 문제들이 너무도 싫어 스스로 흥미로워 보이는 문제를 만들고 그것을 푸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그리고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기타 공부는 싹 무시하는 버릇을 키웠다. 특히 콜레주 세베놀의 수학 교과서에 나오는 교과서에 길이, 넓이, 부피의 정의를 제대로 내린 게 없다는 점이 그의 가장 큰 불만이었다. 그는 이러한 ‘실제 세계에 바탕을 둔 문제들’을 고민하면서 르베그가 수십 년 전에 ‘르베그 측도와 적분 이론’이란 이름으로 정립한 측도 이론을 순전히 혼자 힘으로 도출해냈다. 그는 후에 이 사실을 몽펠리에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알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막을 내린 후, 젊은 그로텐디크는 프랑스 몽펠리에 대학교에서 수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미적분을 가르친 술라 (Soula) 교수에게 수학계에서 일어난 발견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수학 분야에 남아있던 마지막 공개 문제들은 르베그라는 사람이 모두 풀었다”는 대답을 들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고, 그는 이 말에 전혀 낙담하지 않았다. 대학에서의 수학 공부를 시작한 이후, 그로텐디크의 뛰어난 수학적 능력은 여러 교수들의 눈에 띄었고, 이들의 추천으로 1948년, 그로텐디크는 더 심도있는 수학 공부를 위해 프랑스 파리로 가게 되었다.
- 연구 경력
파리에서 그로텐디크는 프랑스의 유망한 수학자 집단과 어울리면서 수학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나 그는 협력 연구에는 잘 맞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다른 수학자들이 ‘합의를 통해’참이라고 간주하는 개념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싫어했고, 그 개념들을 직접 증명하면서 나아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또 그는 야심이 매우 커서 쉬운 길을 가기보다는 어려운 문제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을 좋아했고 ‘모든 것을 무척 힘들게 노력해서 얻었다.’ 그는 그때의 기분을, 동료 수학자들에게 수학은 아주 손쉬운 것처럼 보인 반면 자신은 ‘느릿느릿 굴을 파며 산으로 올라가는 것처럼’느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 집단에서 매우 뛰어났던 사람들은 유능하고 저명한 수학자가 되었다. 그러나 30~35년이 지난 후 나는 그들이 우리 시대 수학에 정말로 심오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로텐디크가 어울린 수학자 집단에는 앙리 카르탕, 클로드 슈발레, 앙드레 베유, 장피에르 세르, 로랑 슈바르츠가 속해 있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수학자들 중 한 사람은 해석학 분야의 로랑 슈바르츠 (필즈상 수상자)였고, 그로텐디크는 슈바르츠의 지도아래 1950년부터 함수해석학을 공부하였다. 그로텐디크는 곧 위상 벡터 공간에 대한 세계적인 전문가가 되었으나, 몇 년 뒤 그로텐디크는 이에 흥미를 잃고 1957년부터 대수기하학과 호몰로지 대수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 정치적 성향과 IHÉS의 설립
그로텐디크는 몸소 겪은 끔찍한 제2차 세계 대전중의 어린 시절에 큰 영향을 받아, 극좌파적 정치성향과 평화주의적인 정치 성향을 보였다. 그로텐디크는 이러한 정치 성향으로 인해 베트남 전쟁 중, 일종의 반전 시위로 미군의 공중 폭격이 가해지고 있던 베트남의 하노이 근교의 숲속에서 범주론 세미나를 연 적도 있었다.
1958년에 그로텐디크는 프랑스의 부유한 수학자였던 장 디외도네의 지원으로 프랑스 파리에 고등 수학 연구소인 IHÉS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그로텐디크는 자신이 설립한 이 기관에서 1970년에 갑자기 떠났다 (《마리 숲 대수기하학 세미나》 1권의 서문에서 프랑스어로 이유를 작성하였다). 그것은 바로, 순수한 학문 연구기관인 IHÉS에, 프랑스 국방부의 군사용 연구자금이 일부 들어왔기 때문에 이에 항의하는 뜻이었다. 그 이유로 그는 잠시 학계를 떠났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가 처음으로 수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었던 몽펠리에 대학으로 가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몽펠리에에서 1988년까지 몸담았다.
- 은퇴와 은둔
그로텐디크는 1988년에 학계를 완전히 떠나면서 그는 프랑스 아리에주주의 작은 농촌 마을 라세르 (프: Lasserre)에서 농사를 지으며 소일하겠다며 모든 것을 버리고 자취를 감추었다. 같은 해에 크라포르드상을 수상하였으나, 그로텐디크는 윤리적인 이유를 들고 이를 거절하였다. 그의 학계에 대한 비판은 그가 1988년, 크라포르드상 (Crafoord Prize)의 수상을 거절하는 이유로 쓴 편지 (영문)에서 잘 읽어볼 수 있다.
2014년 11월 14일 아리에주주 생지롱 (프: Saint-Girons)의 한 병원에서 8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업적
스킴
환의 스펙트럼
사영 스펙트럼
액스-그로텐디크 정리 (Ax–Grothendieck theorem)
그로텐디크-리만-로흐 정리
에탈 코호몰로지
에탈 기본군
베유 추측의 부분적 증명
결정 코호몰로지
모티브
데생당팡
대수적 K이론
그로텐디크 군
토포스
그로텐디크 위상
그로텐디크 전체
유도 범주
아벨 범주
그로텐디크 아벨 범주
그로텐디크 스펙트럼 열
람다 환
그로텐디크가 대수기하학을 시작했을 무렵, 이미 대수기하학은 점점 더 추상화되는 현상을 보였다. 층 이론이 오카 기요시와 장 르레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후, 장피에르 세르에 의해서 호몰로지 대수학과 층 이론은 대수기하학에도 이미 적용되고 있었다. 그로텐디크가 대수기하학에서 이룬 업적은 그로텐디크 이전의 대수기하학 이론보다 훨씬 더 추상화되었다. 그로텐디크는 호몰로지 대수학에서 유도 함자의 개념을 정의하여 더욱 고차원으로 추상화했다.
- 스킴
그로텐디크는 기존의 대수다양체의 개념을 스킴으로 일반화하였고, 스킴의 언어로 대수기하학을 재서술하였다. 단순히 용어를 바꾸는 것을 넘어, 그로텐디크는 호몰로지 대수학의 기술을 스킴 이론에 철저하게 적용시켜, 스킴 이론의 기법으로 고전적인 대수기하학의 문제들을 새롭게 증명하거나, 혹은 새로운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고전적 대수다양체의 이론과 그로텐디크의 스킴 이론의 차이는 크게 두 가지다.
스킴은 닫히지 않은 점들을 포함할 수 있다. 고전적 대수기하학에서는 엄밀히 정의되지 않은 “일반점”의 개념이 사용되었는데, 그로텐디크는 일반점의 개념을 엄밀히 하기 위하여 고전적인 자리스키 위상에 닫혀 있지 않은 점을 추가하였고, 이로부터 함수환의 모든 소 아이디얼이 점에 대응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스킴은 다항식환의 몫환 말고도 가환환으로 정의될 수 있다. 따라서 스킴 이론의 틀 안에서는 기존의 대수기하학에서는 사용될 수 없었던 멱영원들까지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일종의 무한소의 개념을 순전히 대수적인 방법으로 기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로텐디크는 스킴 이론을 대수기하학에 도입함으로써 정수론과 대수기하학을 하나의 관점으로 통합하였다. 오늘날 스킴 이론은 대수기하학을 비롯하여 정수론, 갈루아 이론, 가환대수학, 대수적 위상수학 등을 일관적으로 다룰 수 있게 하였고, 반대로 대수기하학의 발전이 저런 각각의 수학 분야들에 대해서도 기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통합적인 관점은 D가군과 같은 새로운 분야의 발달에도 기여하였다.
- 상대적 관점
그로텐디크는 개개의 대수다양체를 개별적으로 연구할 것이 아니라, 상대적 관점 (Grothendieck’s relative point of view) 즉, 대수다양체들 사이의 함수 또는 사상을 연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이러한 상대적 관점을 사용하여 기존의 여러 정리들을 일반화하고 확장했다.
상대적 관점으로 얻은 결과 가운데 하나는 1956년 경에 얻어낸 리만-로흐 정리의 일반화이다. 리만-로흐 정리는 프리드리히 히르체브루흐에 의해서 고차원의 대수다양체의 경우로 확장이 되어 있었는데 (히르체브루흐-리만-로흐 정리), 그로텐디크는 이를 더욱 일반화하여 그로텐디크-리만-로흐 정리 (Grothendieck-Riemann-Roch theorem)을 얻었다. 이 결과는 1957년, 독일 본에서 있었던 《아르바이츠타궁》(독: Arbeitstagung)에서 발표되었으며, 차후에 아르망 보렐과 장피에르 세르와 함께 쓴 논문에서 출판되었다. 이는 아티야-싱어 지표 정리의 발견에 중요한 역할을 주었다.
- 모티브
그로텐디크는 모티브의 개념을 정의하였고, 이에 대한 여러 가설을 세웠다. 그로텐디크의 가설들은 수학을 관둔 이후 수십 년간 많은 수학자들이 연구 방향을 잡는 이정표 역할을 해 주었다. 블라디미르 보예보츠키는 2002년 모티브에 대한 일부 가설들을 증명하였고, 이 공로로 필즈상을 수상하였다.
- 에탈 코호몰로지
앙드레 베유는 대수다양체의 위상수학적인 성질과 정수론적인 성질 사이의 베유 추측을 발표하였고, 이를 새로운 코호몰로지 이론을 통해 증명할 수 있음을 보였다. 그러나 베유 자신은 이러한 코호몰로지 이론을 정의하지 못했다.
그로텐디크는 자리스키 위상을 대체하여, 에탈 코호몰로지를 도입하였고, 이를 사용하여 베유 추측의 상당 부분을 증명하였다. 1970년대 초반에 그로텐디크의 제자인 피에르 들리뉴는 에탈 코호몰로지를 사용하여 베유 가설을 완전히 증명하였고, 이 업적으로 필즈상을 수상하였다.
○ 수학계의 평가
현대 수학에 있어 그로텐디크의 영향력에 견줄 만한 것은 없다. 20세기의 후반부 50년 동안 가장 중요한 수학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많은 수학자가 주저 없이 그로텐디크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혼자서 현대 대수기하학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수학 전체에 대한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어놓았다. 랭글랜즈 프로그램의 기하학적 재공식화에서 사용한 함수와 시프에 대한 사전은 그로텐디크의 연구를 특징짓는 심오한 통찰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다. – 에드워드 프렌켈, 내가 사랑한 수학: 천재 수학자가 찾아낸 사랑의 공식
사람들은 흔히 수학에 대해서 점점 더 강력한 폭발물로 바위를 깨고 들어가는 터널 공사처럼 점점 더 강력한 도구를 적용하여 점점 더 깊이 미지의 세계에 파고드는 작업이라는 인상을 품는다. 물론 그것도 한 방법이다. 하지만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순수 수학의 많은 부분을 자신의 그림에 따라 다시 빚어냈던 그로텐디크는 견해가 달랐다. <우리가 알아야 할 미지의 대상은 흡사 물의 침투에 저항하는 바위나 진흙땅처럼 보였다. … 바다는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조용히 다가간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 같고,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으며, 물이 너무 멀어서 우리에게는 소리도 잘 안 들리지만…. 마침내 저항하던 물체를 둘러싸고 마는 것이다. – 조던 엘렌버그, 틀리지 않는 법: 수학적 사고의 힘
우리 (수학자)들은 새로운 결과를 최대한 일반화시켜 설명해야 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있다. 이렇게 하려면 각각의 주제에 관련된 개념과 추상화의 전 세계를 새롭게 건설해야만 한다. 이 과정 후 독창적인 사례는 사라지고, 각 정리에 들어있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명료해질 때까지 이 새로운 우주에서의 진지한 도제 수업은 본질적인 것이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과정이 얼마나 극적으로 잘 작동하는지 알 수 있었는데, 그로텐디크와 함께 활동했던 대수 기하학자 세대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그로텐디크는 놀라운 천재로 아름다우면서 심오한 아이디어와 전적으로 새로운 담론의 우주, 즉 ‘스킴’ 개념을 이 분야로 끌어들었다.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이 분야의 지도적인 수학자들 중 일부마저도 이것을 채택하거나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그로텐디크의 성공은 그러한 거부가 어리석은 것임을 보여주었다.
그는 대수 기하학의 정원에서 자라난 모듈리 공간 (moduli space)이라는 꽃에 사로잡혀 있다고 회고한 적 있는데, 이 정원에는 놀라운 사람들이 있다며 대표적으로 날카롭고 뛰어난 베유와 정말로 인간이 아닌 다른 종으로 보이는 그로텐디크를 언급했다. – 데이비드 멈포드 (필즈상)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대단히 사소하지 않은 정리가 짠 하고 나타났다. – 피에르 들리뉴 (필즈상, 그로텐디크의 제자)
그로덴티크와의 관계는 그리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그의 우월함은 압도적이었다. 그의 세미나는 파리의 모든 수학자들을 매료시켰지만 내게는 그들에게 내세울 새로운 것이 없었다. 나는 그로 인해 엄격한 수학의 세계를 벗어나 좀 더 일반적인 개념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누군가가 계산을 하고 있다면, 다른 누군가는 꿈을 꾸어도 좋지 않겠는가? – 르네 톰 (필즈상)
창조에는 필요도 있어야 되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욕망이 생기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창조 활동을 뒷받침하는 배경에는 “이러한 것을 만들 수 있었으면…” 하는 욕망이나 부족한 것을 한결같이 구하는 갈망이 없으면 안된다. 그로텐디크나 자리스키 선생님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역경 속에서 살아온 배고픈 수학자가 뛰어난 업적을 올린 것은, 욕망이라는 정념이 항상 그들을 움직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을 때는 설사 고생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경우를 그로텐디크가 지나온 가시밭길과 비교하는 것도 부끄럽지만 나의 체험으로 미루어보면, 그도 역시 고생을 실감한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잇따른 역경이 그의 수학에 대한 끊임없는 정념을 만들고 그것이 정열적인 창조 활동을 뒷받침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히로나카 헤이스케 (필즈상)
나처럼 평범한 수학자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 고등과학연구소에 들어설 때의 기분은 아마도 무슬림 순례자들이 메카에 발을 디딘 순간에 느끼는 가슴 벅참과 비슷할 것이다. 이곳은 그로텐디크가 10여년 동안 쉬지 않고 사도들에게 신성한 말씀을 가르친 곳이 아니던가. – 응오바오쩌우 (필즈상)
수학은 20세기 전반에 걸쳐 점점 더 추상적이고 일반화되었지만, 이 추세의 가장 큰 핵심은 알렉산더 그로텐디크였습니다. 그의 신비로운 기술은 모든 불필요한 가설을 제거하고 너무 깊게 파묻혀 있는 내부 패턴을 가장 추상적인 수준에서 그들 스스로 드러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마술사처럼ㅡ그 진정한 본성이 드러난ㅡ오래된문제의 해결 방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보여줍니다. – 그로텐디크 부고 당시 데이비드 멈포드, 존 테이트 (울프,아벨상 수상자)의 기고글
○ 저서
총 55편의 논문과 13권의 학술서적, 15권의 일반교재를 서술하였다. 특이하게도 그가 제출한 논문은 모두 프랑스에서 출간하는 저널에서만 출간되었으며, 모두 프랑스어로 기술되었다. 그로텐디크는 적지 않은 수의 책을 저술했다. 대표적인 저술서는 Eléments de géométrie algébrique (EGA), Séminaire de géométrie algébrique (SGA) 등이 있다.
- Publications
Grothendieck, Alexander (1955). “Produits Tensoriels Topologiques et Espaces Nucléaires” [Topological Tensor Products and Nuclear Spaces]. Memoirs of the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 Series (in French). Providence: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 16.
Grothendieck, Alexander (1973). Topological Vector Spaces. Translated by Chaljub, Orlando. New York: Gordon and Breach Science Publishers.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