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18일, 러시아가 크림반도 (Crimea)와 합병
크림반도 (Crimea, 러: Крым, 우: Крим)는 흑해 북부 연안에 위치한 반도이다. 북쪽은 우크라이나, 동쪽은 러시아와 맞닿아있다.
동유럽에 있으며 흑해, 아조프 해에 면한 반도로, 2014년 크림 위기로 러시아에 편입되어 러시아가 실효 지배 중이지만 일부 친러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여전히 명목상 우크라이나의 영토로 보고 있다. 중심도시는 가운데쯤에 있는 심페로폴 (Симферополь)이며 크림타타르어로는 아크메스지트 (Aqmescit, 하얀 모스크)라고 한다. 동양에서는 음차하여 가리미아 (哥利米亞) 반도라고 했었다.
이곳의 이름은 영어식인 ‘크리미아 (Crimea)’와 러시아 / 우크라이나식인 ‘크림 (Крым / Крим)’이 혼용되어 쓰이고 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크리미아’, ‘크림’ 두 표기를 모두 옳은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스페인’과 ‘에스파냐’, ‘제노아’와 ‘제노바’, ‘베니스’와 ‘베네치아’, ‘플로렌스’와 ‘피렌체’가 모두 혼용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반도 전역의 면적은 2만7064km2로, 한국의 경상도보다 약간 작은 면적이다. 고대에는 그리스인과 고트족 같은 민족이 거주했고, 중세부터 근대에는 크림 칸국의 영역이었으며 18세기 러시아 제국에 정복된 후 러시아인들이 집중적으로 이주해오고 극소수 남아있던 그리스인들과 고트계 주민들은 우룸인으로 동화된 뒤에 러시아인으로 동화되었다. 크림 칸국 시절부터 러시아와 악연이 많던 크림 타타르인들은 대거 추방당했다. 1954년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가 소련 내부 행정구역 조정으로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로 편입시켰고, 소련 붕괴 이후 소련 내부의 경계선이 독립국 국경이 되면서 신생 독립국 우크라이나의 일부가 됐다가 2014년에 투표를 거쳐 다시 러시아로 옮겨갔다. 세바스토폴 (Севастополь) 특별시와 크림 공화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바스토폴을 제외한 면적은 2만 6100㎢이다. 크림 반도의 인구는 235만(2007년 기준)으로, 크림 (자치) 공화국에 197만명이 살고 세바스토폴 특별시에 38만 명이 산다. 수도 심페로폴의 인구는 2013년 기준 36만으로, 세바스토폴과 비등하다.
1945년 얄타 회담이 열렸던 곳이다. 2014년부터 러시아가 실효 지배하고 있지만 국제 사회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우크라이나의 영토로 본다.
– 크림반도 (Crimea)
.위치: 동유럽, 흑해 및 아조프해 연안
.면적: 27,000 km2
.실효 지배: 러시아 / 연방관구 – 남부 연방관구 (사실상), 공화국 – 크림 공화국 (사실상), 연방시 – 세바스토폴 (사실상)
.영유권 주장: 우크라이나 – 크림 자치 공화국 (법률상, 국제적인 승인), 세바스토폴 (법률상, 국제적인 승인)
.인구: 1,973,185명
.구성 집단: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크림 타타르족
○ 역사
– 약사
기원전 8세기 ~ 기원전 7세기 : 고대 그리스의 식민지가 되다.
기원전 5세기 : 보스포루스 왕국의 지배를 받음.
기원전 5세기말 : 케르소네소스가 건설됨.
기원전 3세기 ~ 기원전 2세기 : 프리드네프로비예(드니프로강 연안 지역)에서 크림반도로 스키타이 왕국의 중심이 옮겨진다.
기원전 2세기 : 스키타이인들이 그리스인들과 해안 항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기원전 107년 : 스키타이인의 난이 그리스 황제 미트리다테스 4세에 의해 진압된다.
기원전 1세기 ~ 서기 3세기 : 고대 로마의 지배를 받음.
193년까지 : 보스포루스 왕국과 스키타이인들 사이에 수십 년 간의 전투. 사브로마트(Савромат) 2세의 승리.
40년대 : 무역이 번창한다.
3세기부터 : 고트족의 침입. 보스포루스 왕국을 점령.
258년 : 해적들이 해안의 도시들을 침략.
269년 ~ 270년 : 로마 제국 군대가 야만인들을 도나우강으로 몰아낸다. 해적선은 그리스 해안에서 침몰함.
330년 : 비잔티움 제국. 무역이 번창.
375년 : 훈족의 침입.
4세기 ~ 5세기 : 비잔티움 제국의 확장. 봉건제 공국 망구프(Mangup), 에스키 케르멘 등이 세워짐.
988년 : 키예프 루스의 블라디미르 1세가 케르소네소스에서 세례를 받음.
1428년 ~ 1783년 : 크림 칸국의 지배를 받음.
1783년 ~ 1917년 :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음.
1853년 ~ 1856년 : 크림 전쟁.
1921년 : 소련 크림 타타르족의 자치 공화국인 크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이 수립됨.
1944년 : 크림 반도에 거주하던 크림 타타르족이 강제 이주되면서 크림주로 격하됨.
1954년 : 니키타 흐루쇼프의 제안에 따라 페레야슬라프 조약 체결 300주년을 기념하고 소련이 크림주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양도함.
1991년 :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자치 공화국인 크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이 수립됨.
1992년 :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우크라이나의 자치 공화국인 크림 자치 공화국이 수립됨.
2014년 :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다시 점령.
– 고대
크림 반도의 역사는 고대부터 상당히 역동적이다. 기원전 6세기부터 그리스인들의 식민 도시 케르소네소스가 무역 거점으로 번영을 누렸다. 이 지역에 식민 활동을 한 그리스인들은 도자기에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담아서 이를 현지인들의 밀과 교환하는 무역을 하며 평화롭게 교역하였다. 기원전 5세기경 크림 반도 및 케르치 해협 우안 지역에 스키타이계와 그리스계를 중심으로 보스포루스 왕국이 성립되어 번영하였으며 한 때는 폰투스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가 다시 회복되었고 결국에는 로마 제국의 종주권하에 놓이게 되면서 지중해 문화권에 편입되었다.
– 중세
서기 340년 고트족의 침입으로 로마의 지배권이 상실되었고 370년 훈족의 침입을 받은 이후 명맥이 거의 끊기는 듯했으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치세 당시 동로마 제국이 반도 남부의 지배권을 다시 확립하였다. 반도 중북부는 고트족에 이어 볼가 불가르, 그리고 하자르 칸국이 지배하다가 10세기 키예프 공국이 이곳에 진출하면서 동로마의 영향을 받고 동방 정교로 개종하게 된다. 블라디미르 1세 대공이 동방 정교를 받아들이고 동로마 황제 바실리우스 2세의 동생인 황녀 안나와 결혼하면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지는 지역이 현재의 세바스토폴 근처인 케르소네소스이며, 이런 까닭에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화되기 이전의 크림 반도는 정교회와 러시아 국민의 성지 역할을 했다. 13세기 무렵에는 멀리 이탈리아의 제노바 공화국에서 카파 항을 식민화했다.
키예프 공국의 붕괴 이후 이 지역 대부분은 킵차크 칸국에 속했으며, 킵차크 칸국이 와해되면서 1430년 크림 칸국이 독립했다. 제노바 공화국과 크림 칸국, 그리고 동로마계 국가인 테오도로 공국은 함께 오스만 제국에 맞섰는데, 1475년, 오스만 제국이 쳐들어와 제노바의 식민지를 전부 점령하고 테오도로 공국도 멸하고 크림 칸국도 복속시켜 전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18세기, 크림 칸국을 예카테리나 2세 치하의 러시아 제국이 정복하면서 이후 쭉 러시아령이 되었다.
지배층인 칸과 그 일족은 몽골 출신이었지만 피지배인은 튀르크계 부족들로 구성되었고 그것도 얼마 뒤에는 둘이 서로 섞여버려서 크림 칸국은(사실은 시조인 킵차크 칸국부터 이미) 이미 사실상 튀르크계 국가였으며, 오스만 제국 시기 번국으로 지내다보니 오스만 투르크와의 동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오늘날의 크림타타르인의 언어는 터키어와 별반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크림 칸국은 그냥 속국이 아니라 만약에 오스만 제국의 제위가 끊어져 버린다면 크림 칸국의 칸이 오스만 제국의 제위를 잇는 조건이었다.
거의 청나라와 내몽골 수준. 혈통은 러시아, 우크라이나와 많이 동화되었다. 사실 단순히 거리만 따지면 크림 반도와 오스만 제국 본토가 제법 멀어 보이지만, 흑해 덕분에 서로 접근이 편리했던 영향도 있다. 동로마 제국 시절에도 제국 도시 케르손이 있었고 폴리스 시대에도 흑해를 통해 그리스 문화권과 긴밀히 교류해 왔음을 생각해 보면 전통적으로 크림 반도와 그리스, 발칸, 소아시아 문화권과 아주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냥 타타르어도 같은 튀르크 어군이나 크림 타타르어는 오우즈 어군, 카잔 타타르어 등 나머지 타타르어는 킵차크어군으로 전혀 다르다.
– 근대
그러자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흑해 영해상을 통해 접경하게 되고 이 때문에 2번에 걸쳐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했으나 여전히 분쟁 지역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기 위해 남진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부동항 확보를 위한 1차 목표가 바로 크림 반도였다. 당시 제정 러시아가 제국주의 취해 있어서 크림 진출은 부동항이 주 목적이었지만, 크림 반도가 바로 고대 그리스인들과 동로마가 제대로 개척해 놓은 땅이고, 바로 동로마 제국을 통해서 키예프 공국이 정교회로 개종함으로써 러시아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점 때문에 더욱 의미심장한 진출이었다. 전략적 거점이거니와 역사적 의미까지 있고 제국주의까지 동반되니 눈에 불을 켜고 점령하려 들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 등 서유럽 열강들은 이런 러시아의 남진을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를 막기 위해 오스만 제국을 지원했다. 또한 직접적 이득이 없던 사르데냐 왕국은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지원받기 위해 이 전쟁에 끼어들었다. 이것이 크림 전쟁이다.
전쟁은 1853년부터 1856년까지 3년간 지속되었고 러시아는 열강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 제국에 패해 1856년 파리 조약을 통해 흑해 일대의 통제권을 잃고 남진이 저지되었다.
이 전쟁에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영국의 여성 간호사 부대를 창설해 전장에서 간호병으로 활약해 현대전 간호병의 전략을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의미에서 크림 전쟁은 근대 전쟁과 현대 전쟁의 경계선을 그은 전쟁이라고 평가한다.
– 소련 시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러시아 혁명 이후 크림 반도 지역과 그 북부의 오늘날 헤르손 (Kherson) 주 지역은 크림타타르인에 의해 일시적으로 독립했으나, 1921년 소련에 편입되었다. 이 때 헤르손 지역은 우크라이나에 편입되고, 크림반도만이 소련 내의 크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 (Крымская Автономная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Советская Республика)이 되었다.
독일군이 소련에서 얼추 물러난 1944년 5월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나치 점령기 당시에 자행된 민족 차원의 대 소련 반동행위에 대한 보복조치”를 운운하면서 크림 타타르인들을 전원 저 멀리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켜 버린다. 사족이지만 이 때 크림반도 전체에 흩어져 있는 20만 명에 달하는 타타르인들을 전부 화물열차편에 잔뜩 쑤셔 넣어서 출발시키기까지 딱 3일 걸렸다고 한다. 기차 안에서만 최소 7천여 명이 사망하였다. 또한 2천 4백여 가구에서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는데, 그 과정에 굉장히 의심쩍은 구석이 있어서 가족끼리 생이별하라고 고의적으로 찢어놓았다는 음모론이 종종 제기되고 있다. 중앙아시아에 끌려간 사람들은 1980년대가 다 돼서야 고향 땅으로 돌아올 권리를 되찾게 된다. 크림 타타르인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는 노래의 뮤직비디오. 우크라이나는 2016년 5월 스톡홀름에서 열린 제61회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위 곡을 출전시켰다.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과 소아시아 모든 나라의 지상파 방송에서 프라임타임에 생중계되는 행사임을 감안해도 현재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반러감정이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는 부분. 우크라이나인들이 크림 타타르족에 대한 인식도 좋은 건 아니지만 현재 크림 타타르인들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크게 줄어 존재감 자체가 줄어들었다. 미국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입지와 비슷한 셈이다. 게다가 남아있는 사람들도 우크라이나인들과 혼혈이 많이 이루어진 관계로 종종 동족 의식을 보일 때도 있다. 전전해와 전해 유로비전 콘테스트에서 러시아 가수들에 대한 야유를 생각해보면 지금 유럽에서 전반적으로 러시아의 이미지가 매우 안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림 타타르인에 대한 인종청소가 끝난 후 이 지역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내에서 누리던 소수민족 자치공화국 지위를 잃고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개 주로 격하당했다가, 1954년 페레야슬라프 조약 300주년을 기념하여 당시 소련 서기장이었던 우크라이나 출신의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편입되었다. 주민은 러시아계 위주인데도 소속은 우크라이나인 모순적인 상태가 되었는데, 이 당시에는 같은 소련 안에서 행정구역을 개편한 것에 불과해 큰 의미가 없는 조정이었지만 소련 해체 이후 소련 내부 경계선이 국경선으로 변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 우크라이나령 시대
소련이 해체될 무렵이던 1991년 1월, 러시아계 주민들의 요구로 다시 크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이 되었고 1992년 헌법 개정을 통해 크림 자치 공화국 (우: Автономна Республіка Крим, 러: Автономная Республика Крым)이 되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크림 반도에 워낙 미련이 남아 있었다. 특히 크림 반도에 거주하던 러시아계 주민들은 1992년 독자적인 헌법 제정을 통해 우크라이나와 따로 놀려고 할 정도로 친러 성향이 매우 강한 편이었고, 트란스니스트리아같이 러시아군이 개입할 경우 사실상 러시아 통제 아래 독립국으로 분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옛 소련 해군에 속했던 흑해함대 관할 등의 문제를 두고 우크라이나 정부와 조율 중이던 러시아 정부 측에서는 우크라이나를 크림 반도의 관할 문제로 자극하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흑해함대는 1997년 우크라이나 해군과 러시아 해군 흑해함대로 분할되기 전까지 러시아, 우크라이나 공동관할이었다. 무엇보다도 1994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참여한 부다페스트 협약(Budapest memorandum)을 통해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우크라이나의 영토 주권을 보장하기로 했으므로 협약을 부득이 어겨가면서까지 크림 반도를 차지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1997년 우호친선조약을 통해 흑해함대를 양국 해군 관할로 분할하고, 세바스토폴에 러시아 흑해함대가 주둔하는 것이 허락되는 대신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의 영토로 인정했다.
– 러시아의 크림 합병
2013년부터 2014년 사이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로 친러 성향의 야누코비치 정권이 붕괴되고 반러, 친서방 성향의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경제지원을 당시 러시아에서 추진하고 있던 유라시아경제연합의 관세동맹으로 유도시켜 유라시아 연합을 보강시키려 하고 있었던 터라, 우크라이나 정부의 정권교체는 곧 세력권 이탈로 해석했다. 나름대로 우크라이나를 끼어넣으려 하면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려고 공들이던 프로젝트가 친러정부의 전복으로 전부 물거품이 된 것이다. 물론 우크라이나에 새로 수립된 민주정부를 인정하고 이후 몇 차례 영향력 행사를 통해 친러 정부의 성립을 지원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유로마이단의 경우 워낙 야누코비치 정권의 부패와 실정으로 친러 성향 정치세력이 인심을 잃었던지라, 적어도 러시아가 바라던 근시일 내에 민주적인 방식(선거)을 통해 친러 정권이 집권하기는 힘들었다.
이에 러시아는 공산당-지역당을 지지하는 성향이 강한 크림반도 주민들을 자극했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당시 공산당이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제1당이 된 적이 있었고 공산당의 세가 약해진 다음에는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지역당이라는 정당이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야누코비치도 지역당 소속으로 대통령직을 역임했다. 크림 자치정부 및 러시아계 주민들은 2014년 2월 영토 내의 공항을 장악하고 독립 움직임을 보이며 우크라이나 중앙정부와 마찰을 빚었다. 러시아군은 세바스토폴에 주둔 중이던 해군 병력을 이용해 의용대를 빙자한 군사력으로 크림 반도를 점차 장악해 나갔다.
이후 러시아에 의해 장악된 크림 자치공화국은 3월 16일 주민들을 상대로 독립의사를 묻는 국민투표를 진행해 독립 여론을 확인했다.투표 결과는 독립 및 러시아 귀속 찬성 96.77%라는 압도적인 여론이 나타났다. 3월 17일 크림 공화국으로 독립해 다음날인 3월 18일 러시아 연방에 가입하면서 사실상 러시아로 편입되었다.
한편 미국과 유럽연합을 비롯한 서방에서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제를 시작했으며, UN에서는 총회 결의안 68/262호를 통해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을 불법이라고 규정했다.
일각에서는 서방과 우크라이나가 크림반도를 러시아 영토로 정식 인정하거나 혹은 크림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하여 북부 일부 지역은 우크라이나에게 반환하고, 세바스토폴, 심페로폴, 케르치, 얄타 등 주요 부동항 도시들이 몰려 있는 남동부 지역은 러시아령으로 인정하는 선에서 영토 분할을 해서라도 이 지역의 분쟁을 해결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러면 크림 반도 내에서 주민들끼리 더 큰 혼란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의 당사국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서방의 정치권 인사들이 이를 받아들이지는 미지수다 (실제로 우크라이나와 서방 국가들은 러시아가 병합한 크림반도 전 지역들을 모두 우크라이나에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에 반환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거듭 확인했다.
‘역사적으로 크림반도와 세바스토폴은 러시아 연방의 고유 영토’라는게 러시아측의 입장이나, 이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의 여파로 인한 신(新)냉전의 기류가 크림반도까지 일면서, 자칫 제2의 남오세티야가 될 우려가 높아지고 있었으며, 특히 친(親)러시아 성향이 가장 강한 크림 자치 공화국은 친(親)서방 정책을 취하는 키이우의 우크라이나 과도 정부에 반발하였다. 또한, 2014년 3월 11일에 크림 지방 정부는 크림 공화국으로 독립을 결의했다.
2014년 3월 16일에 크림 공화국 내에서 크림반도의 러시아 귀속을 위한 주민투표가 진행된 결과, 압도적인 비율로 러시아와의 합병에 찬성하였다. 2014년 3월 18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세르게이 악쇼노프 크림 공화국 총리, 블라디미르 콘스탄티노프 크림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알렉세이 찰리 세바스토폴 시장이 러시아-크림 공화국 합병 조약에 서명하였으며, 3월 21일에는 러시아 상원이 크림반도 합병 조약 비준과 관련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데 이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최종 서명함으로써 크림반도가 러시아의 행정 구역으로 편입되는 법적인 절차는 마무리되었다. 완전한 합병은 2015년 1월 1일에 완료되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절대다수 국가들은 이 합병을 불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유엔 총회는 2014년 3월 27일 캐나다, 코스타리카, 독일, 리투아니아, 폴란드, 우크라이나의 주도로 제출된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은 결의안 (유엔 총회 결의 68/262)을 통과시켰다.
○ 지리
지형적으로 반도이지만 사실상 섬이나 월경지와 다름 없는 위상이다.
크림 자치 공화국을 기준으로 한 우크라이나 본토와의 경계는 10km가 안 되고, 그나마도 중간에 5km크기의 호수 프리오브라젠카 (preobrazhenka)가 있다. 좁은 지협으로 본토와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연결되었고 오히려 끝부분이 넓게 퍼져있다. 사실 우크라이나와 크림반도 경계보다 남쪽에 건천에 가까운 운하가 있으므로 기능적으로는 섬이라고 할 수도 있다.
휴양지로 알려져 있다.
남부 해변 : 얄타를 포함한 Алуштинский(알루슈친스키) 지역
서쪽 연안 : Евпаторийско (엡파토리스코, 크림반도 서해안의 항구) – 게르만 지역
동남부 연안 : 페오도시아 및 수단 지역
○ 기후와 산업
겨울은 기후가 따뜻하다. 아열대 식생을 볼 수 있다. 북부 지방은 1월 평균기온이 1℃인데 비해 남부에서는 4℃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
얄타 · 알룹카 (Алупка)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휴양지가 여러 곳에 있다.
포도를 비롯한 과일이나 잎담배, 향료의 원료식물, 채소 등의 재배가 활발하고, 관개 시설을 이용하여 곡물 · 사료작물도 재배한다. 케르치에서는 철광 생산과 아울러 제염업 (製鹽業)도 이루어진다. 심페로폴은 각지로 통하는 철도·항공로가 열려 있고, 모스크바와의 사이에는 장거리 버스가 운행된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