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23일, 싱가포르의 정치인이자 초대 총리•인민 행동당의 총재 리콴유 (Lee Kuan Yew 또는 Lee Kwan-Yew, 李光耀, 1923 ~ 2015) 별세
리콴유 (Lee Kuan Yew 또는 Lee Kwan-Yew, 중: 李光耀, 1923년 9월 16일 ~ 2015년 3월 23일)는 싱가포르의 정치인이자 초대 총리와 인민 행동당의 총재 (1959년부터 1990년까지)로 재직했다.

– 리콴유 (李光耀)
.출생: 1923년 9월 16일, 싱가포르
.사망: 2015년 3월 23일, 싱가포르 싱가포르 SGH Blocks 6 / 7
.학력: 피츠윌리엄 하우스 (1947 ~ 1949년), 래플스 인스티투션 (1936 ~ 1940년)
.배우자: 과걱추 (1950 ~ 2010년)
.정당: 인민행동당
*싱가포르의 제1대 총리
임기: 1959년 6월 5일 ~ 1990년 11월 28일
퇴임 후에도 싱가포르의 두 번째 총리인 고촉통 내각에서도 수석 총리로서 정치에 관여했다. 싱가포르의 세 번째 총리가 된 그의 아들 리셴룽 총리를 조언하는 특별직을 맡기도 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과 가족은 리콴유를 “해리” (Harry)라고 불렀으며, 공식적으로는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지만 “해리 리콴유”라고 지칭되기도 했다. 최근 그는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자신의 집이 ‘국가 성지’로 지정되는 일이 없도록 자신의 사후에 집을 허물라고 지시했다.

○ 생애 및 활동
리콴유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자신이 4세대 중국계 싱가포르인이라고 하였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리복분 (1846년 출생)은 하카계 사람으로 중국 광둥성으로부터 영국의 동남아 해협 식민지 (Straits Settlements)로 1862년 이민을 갔다.
리콴유는 1923년 9월 16일, 싱가포르에서 출생했다.
리친쿤과 추아짐니의 큰아들인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캄퐁 자바 가의 92번지에 있는 큰 방갈로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그는 그의 할아버지 리훈렁이 가르쳐준 영어로 인해 영국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할아버지는 그에게 콴유라는 중국 이름에 덧붙여 “해리”라는 영어 이름을 더해주었다.
텔록 쿠라우 초등학교와 래플즈 학교 및 래플즈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2년부터 1945년간의 일본의 지배로 인해 대학을 다니는 것은 미룬 채 타피오카를 이용해 만든 “스틱파스”라는 접착제를 암거래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942년부터는 일본어와 중국어 수업을 듣고 동맹군의 전보를 번역하는 일과 일본의 호도부(정보 및 선전 부서)에서 영어 편집인으로 일했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 피츠윌리엄 칼리지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는 1949년에 싱가포르로 돌아와 법률 회사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1954년 10월 인민행동당 (People Action Party, 현 집권 여당)을 창당하고 정치활동을 본격화했다. 인민행동당이 처음 시작되었을 땐 리콴유와 같은 영국 유학파 출신의 지식인과 노동운동가 중심의 좌익 세력이 연합한 정당이었다. 리콴유는 영국에서 교육받은 영어 사용자로서 친서방주의자이며 반공주의자였다.
리콴유의 출신 배경 및 신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좌익 세력과 손을 잡은 이유는 1. 당시 좌익 세력은 굉장한 대중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상황이었고, 2. 대중적인 기반 없이 정치적 성공을 얻을 수 없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초기엔 당내 좌파에 밀려날 뻔도 했지만 이후 불어닥친 반공 바람에 힘입어 리콴유와 당내 우파는 인민행동당을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활발한 정치활동으로 리콴유는 점차 주민들의 지지를 확보, 1959년 5월 주민선거에서 인민행동당이 싱가포르 자치의회 의석 43석 중 41석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당수인 리콴유는 자동으로 싱가포르 자치정부 수반에 올랐다.

자치 정부 수반이 되긴 했지만 싱가포르는 너무 작은 나라였기 때문에 리콴유 정부는 이웃 대국인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해서 활로를 모색하고자 했다. 싱가포르는 자원도, 인구도, 내수시장도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말레이시아를 활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말레이시아도 해외 교역의 관문으로의 가치를 보고 싱가포르를 받아들였지만, 중국계가 압도적인 싱가포르와 싱가포르의 공산주의 운동은 말레이시아에게 위협적으로 보였다.
1965년에 말레이시아 연방은 싱가포르를 연방에서 축출하였고, 싱가포르는 독립하게 된다. 리콴유와 그의 정부 각료들은 8월 7일에 툰쿠 압둘 라만 말레이시아 총리에게 불려가 축출 통보를 받았다. 8월 9일에 말레이시아 의회에서는 만장일치로 싱가포르 축출안을 가결했고, 같은 날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독립을 선포했다.
말레이시아는 화교 인구가 다수인 싱가포르의 존재가 국가 통합성, 내부 안정에 장애를 초래하는 ‘혹’이라고 인식했다. 싱가포르가 떨어져나간 이후로도 1969년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하고 중국계 야당이 약진하는 일이 벌어지자 폭동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계엄령이 몇년간 실시 된 뒤에 말레이계 주민에 대한 우대정책이 시행되어 화교와 인도계에 대해서 차별정책을 진행하였다. 몇몇 화교계 가문이 재계를 지배하며 원주민보다 월등한 경제력을 자랑하는 필리핀 같은 나라를 보면 말레이시아가 싱가포르의 주류를 이루는 화교를 부담스럽게 생각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리콴유는 독립 당시 말레이시아 총리에게 몇백만 명의 시민들을 저버릴 셈이냐고 호소하기도 했으며,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독립한 것을 가장 가슴 아프고 많은 사람을 실망시킨 때라고 회고하였다. 리콴유는 직접 쓴 자서전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에서, 강제 독립 당시의 절망적이었던 상황을 절절하게 묘사한다. 대략적으로 설명하면 군대 없고, 자원 없고, 땅 없고, 구성원들은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 타밀인 등인데 서로 싸우기나 하지 등 정말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 도시국가에 불과한 상황에서 축출당했을 때의 서러움은 정말 심각하여 영연방의 기억을 되살려 영국이나 말레이에 다시 붙어볼까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지배했다고 한다.
그러나 2015년 기밀해제되어 공개된 고켕스위에게 보낸 편지와 고켕스위가 작성한 메모를 보면 말레이시아 연방 시절 리콴유는 본인이 내키든 내키지 않았던 결국 싱가포르가 독립하는 방법밖에는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기밀해제된 자료에 따르면 리콴유는 독립한다는 전제 하에 최대한 싱가포르가 이익을 얻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고 독립 이후에 발생할 충격을 최대한 완화하기 위해서 말레이시아 측과 상호 동의하에 축출당하는 것처럼 연출하기로 미리 합의했다고 한다. 리콴유 정부는 1965년 7월 고켕스위를 말레이시아 중앙정부에 보내 최종적으로 분리 독립에 합의했으며, 기밀 해제된 문서를 볼때 이미 독립 이후에 어떻게 해야할지 대강의 계획은 세워뒀던 것으로 보인다. 리콴유는 말레이시아와 합의해 분리독립한다는 계획을 극히 일부 각료들끼리만 진행하고 다른 각료들에게는 비밀로 한 탓에, 말레이시아 정부가 싱가포르 축출을 통보한 날인 8월 7일 아침에서야 리콴유에게서 독립 계획을 전해듣고 크게 반발한 각료들도 있었으나 이미 대세를 뒤집을 순 없었다.

리콴유는 독립 당시 주변 대국, 특히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무력 침공을 두려워했다. 싱가포르가 독립할 때도 모든 말레이시아 정치인들이 싱가포르의 축출을 원했던 것은 아니고 중국계를 몰아내고 싱가포르 땅을 차지하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싱가포르는 식수조차도 말레이시아로부터 구입하고 있었으므로 말레이시아가 행여나 마음만 먹는다면 싱가포르로의 식수 공급을 중단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그 이후 초고속의 경제성장을 겪으면서도 리콴유는 이러한 식수공급의 중단을 매우 두려워했다. 특히나 말레이시아의 정세가 급변하여 싱가포르의 축출 혹은 강제 병합을 외치는 강경분자들의 힘이 세질 때마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었는데 그 때마다 엘리전을 통한 무력행사를 불사하며 싱가포르의 식수공급 중단 사태는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당시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는 반서방주의자로서 친서방국가였던 말레이시아와 대결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리콴유는 독립 이후 체제를 정비하고 군비를 확장하면서 말레이시아 혹은 인도네시아의 침공을 제일 두려워하였다.
그는 1965년부터 1990년까지 유소프 빈 이샥과 벤저민 헨리 시어즈와 데반 나이르와 위킴위가 싱가포르의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기에 싱가포르의 실권자이자 싱가포르의 총리로 재임하였다.
독립 후 리콴유는 우선 순위를 정하여 국가개발에 힘을 쏟았다. 특히나 제일 중요시 여긴 것은 군대 양성이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원래 리콴유는 말레이시아에 병합되어 안전을 확보한 뒤 자치권이 확보된 하나의 독립된 자치주로 살아가기를 원했었다. 특히 이 과정 가운데 화교가 축출당하면서 싱가포르가 다른 나라에 집어삼켜지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였다.
말레이시아에서 축출될 당시에 말레이시아 정치인 가운데에는 싱가포르가 합병되길 원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는데, 이들의 생각은 중국인들을 내쫓고 말레이인만 있는 싱가포르를 흡수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본인부터 중국계인 리콴유는 이런 식의 합병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싱가포르가 독립한 이후에도 이러한 움직임은 끊임없이 있었고 인도네시아도 호시탐탐 싱가포르를 노렸기 때문에 리콴유는 군대 양성에 열을 올렸다. 사실상 주변국들에 비해 인구가 너무 적은 데다가 이전에 주둔해 있던 군대는 대다수가 말레이시아로 옮겨가고 남아있는 군대도 말레이 민족의 특색이 강했던터라 여러모로 싱가포르의 정체성을 갖춘 군대를 양성하는 것이 중요했다. 실제로 1967년에 국가예산 당 국방비 비율이 7%였던 것이 1972년에는 무려 38%를 차지했을 정도였으며, 이 돈의 대부분은 싱가포르군의 무기 체제 개선에 사용되었다.
다만 군대가 바로 만든다고 되는게 아닌지라 일정 기간동안 영국군의 보호 아래에 있었으며, 이후 이스라엘 장교단을 불러 군대를 육성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데, 영국과 밀접하면서도 영국이 아닌 이스라엘을 택한 것은 비슷한 상황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 빠르게 군대를 조직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영국식 군제를 따르면 최소한 20년이 걸릴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인재양성에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현재도 싱가포르는 대한민국, 홍콩 못지않게 교육열이 높은 나라인데 이는 중국인 특유의 습성과 더불어 리콴유의 피나는 노력이 있던 탓이다. 이를 위해 굉장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특히 이 가운데 중요하게 작용한 것이 있다. 바로 리콴유를 지배한 법칙인 ‘모든 것은 상위 10%가 중요하다’였다.
그는 모두가 잘해서 모두가 복지를 누리고 다같이 잘사는 방법은 자원이 많거나 역사가 깊은 나라에나 가능하지 싱가포르에는 택도 없는 이야기라고 여겼다. 그런 이유로 리콴유는 학력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최대한 분리하는 대신 교육을 상위 10%에 집중투자하는 방법으로 경쟁에 불을 붙였다.

모든 시험과 관문에서 상위 10%만 더 좋은 대학과 더 좋은 직장에 진학하는 체제가 강한데 어느정도냐면 리콴유는 오직 상위 10%가 어느정도의 절대적 성과를 올렸는가만 관심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 기준에 맞추어 교육체제를 정비하여 1957년에 52%였던 싱가포르의 문해율이 1990년에는 90%로 증가했다. 이와 함께 대학도 열심히 손봤으며, 그 덕분에 싱가포르 국립대학은 아시아 1위대학이자 전 세계에서 열 손가락안에 꼽는 명문대가 되었다.
또한 경제발전에 항상 골몰했다. 싱가포르는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잘나가는 항구이자 태평양과 인도양의 거점으로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리콴유는 자서전에서 밝혔다시피 말레이시아에서 축출당한 시점에 이미 싱가포르는 교역항으로의 이점을 잃어버렸다고 판단했다. 왜냐면 주변에 대체 항구들이 즐비했고, 특히나 싱가포르를 내쫓으면서 이미 말레이시아는 다른 항구 (조호르바루)를 물류 교역의 거점으로 키워놓을 계획을 수립 중에 있었고 인도네시아 또한 싱가포르보다 더 좋은 위치를 주장하며 물류 교역의 중심지를 만드는데 힘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단순히 물류의 거점만 내세우며 살기에 싱가포르가 가진 장점이라고는 없었다. 이런 이유로 집중한 것이 산업화였다. 원자재를 수입하여 가공을 거친 후에 물건을 파는 것이 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다른 나라에 비해 근면하고 신뢰도 높은 국민성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 것이라 생각했고 인종 통합에 골치를 썩으며 정부의 부패에 휘둘리던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주춤하는 동안 싱가포르는 리콴유의 독선적이지만 효율적인 정책을 통해 원자재를 수입하여 가공품을 되파는 무역의 거점이 되어 경제성장을 시작했다.
이러한 중개무역에만 집착한 것이 아니라 금융업의 허브로 위치하는 것과 관광산업 또한 밥벌이의 수단으로 생각하여 현재의 싱가포르는 홍콩, 도쿄와 더불어 금융의 중심지이자 조그만한 섬나라 지만 대단히 높은 관광 인지도를 지닌 나라로 성장했다. 그 결과 싱가포르의 GDP는 1960년에 7.1억 달러 미만이었던 것이 1990년에 361.4억 달러가 되어 30년 만에 51배나 증가했고 30년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4%를 기록했다. 물론 1인당 GDP도 비슷한 시기에 428달러에서 11862달러로 28배 가까이 증가하여 리콴유는 집권기간 동안 고국을 제3세계에서 제1세계로 증진시킨 세계의 유일한 지도자로 간주된다. 사회적으로도 1960년으로부터 1990년까지 기대수명은 65세에서 74세로, 전화 보급율은 3%에서 38%로, 관광객 수는 10만 명에서 530만 명으로 크게 늘었다. 이런 업적들로 인해 중국의 덩샤오핑은 22,000명이 넘는 관리들을 싱가포르에 파견해 싱가포르의 경제 성장을 배우고자 했으며, 르완다의 폴 카가메의 정책도 리콴유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외환 보유고를 관리하기 위해 1981년에 싱가포르 정부 투자 공사를 설립했는데, 이렇게 마련한 기금을 통해 1997-98년에 있던 아시아 금융 위기 동안 싱가포르는 통화를 보호하며 안정적인 환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리콴유는 “국민의 사랑을 받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게 더 중요하다.”, “국가 발전에는 민주주의보다 규율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남기며 다른 나라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방법들을 생각했다. 싱가포르의 통제질서와 벌금제도, 태형제도는 오늘날에도 유명하다.
1959년 만 35세라는 젊은 나이로 자치정부 수반으로 선출된 이래 1990년 11월 28일에 명목상 총리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30년이 넘게 싱가포르를 통치하였으며, 후임으로 고촉통 (吳作棟)이 집권한 후에도 선임장관 (Senior Minister)의 지위로서 ‘실질적인 총리는 리콴유’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싱가포르 정부를 사실상 좌지우지했으며, 2004년에는 아들 리셴룽 (李顯龍)을 총리에 앉혀 사실상 부자세습에 성공했다.
이후 리셴룽 총리 시절에는 고촉통이 선임장관 지위를 물려받고 리콴유 자신은 고문장관 (Minister Mentor)이 되어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2011년 5월 21일에 리콴유는 고촉통과 함께 각각 내각고문과 선임장관에서 물러나며 권력에서 완전히 은퇴했는데, 이는 그 해 총선에서 집권당인 인민행동당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지고 야당인 노동당이 사상 최다의석을 확보한 데 따른 데 대한 위기의식의 발로로 보인다. 본인은 성명을 통해 “총선 이후 새로운 정국에 대해 깊이 생각해 이번 결정을 내렸다”면서 “리셴룽 총리와 젊은 지도자들이 새롭고 젊은 내각을 구성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2013년 2월 15일에 리콴유는 장기간의 심장 부정맥으로 뇌로 가는 혈류가 일시적으로 중지된 후 싱가포르 종합병원에 잠깐 입원한 적이 있고, 퇴원 후에도 항응고제 치료를 받아오다가 2015년 2월 5일에 폐렴으로 싱가포르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한 후 3월 18일에 사망했다는 보도까지 나올 정도로 위독해졌고, 닷새 뒤인 2015년 3월 23일에 싱가포르 표준시로 오전 3시 18분에 향년 9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리콴유의 장남인 리셴룽 현 싱가포르 총리가 발표하였다.
3월 23일부터 29일까지 국가애도기간이 선포되어 싱가포르에 있는 모든 국기는 조기를 달았다.
○ 가족
리콴유와 그의 아내 과걱추는 1950년 9월 30일 결혼하였다. 둘 사이에는 두 아들과 하나의 딸을 두었다.
그의 자녀들은 싱가포르 내에서 대부분 정부 고위관료로 재직하고 있다.
전 육군 장성이었던 큰아들 리셴룽은 2004년도부터 싱가포르의 총리이자 재무부 장관이 되었다. 그는 또한 싱가포르 정부 투자 회사의 부의장을 맡고 있다.역시 전 육군 장성인 둘째 아들 리셴양은 싱가포르 최대의 회사인 싱텔의 최고 경영자이다. 싱가포르 항공이나 DBS 은행과 같은 정부 관련 회사들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테마섹 지주회사가 현재 싱텔의 지분 중 56%를 가지고 있다. 테마섹 지주 회사는 리콴유의 첫째 며느리인 호칭이 최고 경영자로 재직하고 있다. 국립 신경 학회를 운영하고 있는 리콴유의 딸 리웨이링은 여전히 미혼이다. 리콴유의 아내 과걱추는 예전에 법률 회사 리&리를 리콴유와 공동 운영했었다. 그의 동생 데니스, 프레디, 수전 유 또한 같은 회사의 파트너였다. 또한 여동생 모니카가 있다. 그러나 리콴유 자신은 지속적으로 친척에 대한 특혜에 대해 부인해왔으며, 그의 가족들의 현재 위치는 그들의 성품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