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그리스·터키, 한국 방문기 (4)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지난 2019년 10월 22일~11월 1일 (그리스·터키, 10박 12일), 11월 2일~4일 (한국 강진 다산 유배지와 안동 퇴계 유적지, 2박 3일)에 ‘2019 인문학여행’을 26인이 동행해 실시했다. 이에 방문지인 그리스와 터키, 그리고 한국 일정중의 단상을 나누고자 한다. _ 편집자 주.

델피와 메테오라
10월 27일에는 델피로 이동해 아라호바 마을, 델피박물관, 옴파로스, 델피 유적지를 살핀 후 메테오라로 이동한다. 메테오라에 도착해 수녀원공동체를 한곳 방문 후 인근 호텔에서 1박한다.
호텔 조식을 마치고 파트라스를 떠나 10여분쯤 달렸을 때 리오 안티리오 다리 (Rion-Antirion Bridge)가 나타났다. 이 다리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그리스 본토로 넘어가는 긴 다리다. 리오-안티리오 다리 (Rio-Antirio bridge)는 그리스 파트라 근처 코린토스 만에 있는 사장교로, 그리스 본토의 안티리오와 펠로폰네소스반도의 리오를 연결한다. 2004년에 완공되었다. 공식 명칭은 하릴라오스 트리쿠피스 다리 (Γέφυρα Χαρίλαος Τρικούπης)로, 리오와 안티리오를 연결하는 다리 건설 구상을 제시했던 19세기의 그리스 총리 하릴라오스 트리쿠피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 다리가 완성되면서, 지금까지 코린토스 지협을 통과하는 교통로밖에 없었던 교통 상황을 개선하게 되었다. 가장자리에는 4개의 지주가 위치하고 있고, 중앙 경간은 560m, 총 거리는 2,252m (연결 다리를 포함한다면 2,882m)이다. 총 거리 면에서 세계 최장의 사장교이다. 폭은 28m로, 2차선 및 비상 차선과 보행자용 도로가 정비되어 있다. 완성 이후 자동차의 통행료는 10.50 유로, 자전거는 1.50 유로를 징수한다고 한다.

그리스의 알프스 아라호바 (Arachova) 마을
우리 일행은 파트라스에서 델피로 이동중 그리스의 알프스 아라호바 (Arachova) 마을을 방문했다.
아라호바는 델피의 관문으로 오가는 여행객들에게 쉼을 제공하고, 겨울에는 스키 리조트와 그 부대시설에서 나오는 관광수입으로 운영하는 마을이다.
한국 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아라호반 마을과 파르나소스 산
그리스 신화에 신성한 산으로 나오는 파르나소스 산 해발 2,445m 경사면에 위치한 아라호바마을은 그렇게 신화를 품고 있다.
파르나소스 산 (Παρνασσός)은 그리스 중부 코린트 만 북부의 델포이 중앙에 위치한 석회암 산으로 최정상의 높이는 2,457m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이 산은 아폴론 신과 코리시아 님프의 신화 전설에 따라 신성하게 여겨져 왔으며, 뮤즈의 고향이기도 하다. 도리아인도 이 산을 중요하게 여겼다. 파르나소스 산은 코린트만 (灣) 북쪽에 위치하며, 아폴론 신전 (神殿)이 있던 성지 델포이가 자리잡고 있고, 아테네에서 200㎞ 떨어져 있다. 포키스주 · 프티오티스주 · 보이오티아주의 경계선에 접하여 북서∼동남 방향으로 뻗어 있으며, 코린트만의 오포스곶까지 이어진다.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불모지로, 남쪽 기슭에 카스탈리아샘 [泉]이 있다. 로마 시인들은 이 샘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뮤즈의 거처인 헬리콘산 (山)보다 파르나소스산을 더 숭배하였다. 이 산은 도리스족 및 아폴론과 코리시아 요정신화에서 신성시된 곳으로, 2개의 봉우리 중 하나는 아폴론과 뮤즈에게, 다른 하나는 디오니소스에게 봉헌되었으며, 정상과 델포이 사이에 있는 고원에는 요정들과 목신 (牧神)에게 바쳐진 코리시아 종유석 동굴이 있었다. 예전에는 라르나소스 (Larnassos)라고 하였는데, 방주 (方舟)를 뜻하는 이 말은 그리스신화에서 유래되었다. 제우스가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대홍수를 일으켰을 때 프로메테우스의 아들 데우칼리온이 아내와 함께 방주를 타고 도착한 곳이 바로 파르나소스 산정이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보크사이트가 산출되어 인근 공장에서 알루미늄으로 가공되고 있으며, 1월∼4월까지 눈이 많이 내려 스키장으로도 유명하다.

.파울 클레의 ‘파르나소소스 산으로’
파울 클레의 ‘파르나소스 산으로’ (Ad Parnassum, 캔버스에 유화, 100 x 126cm, 1932, 스위스 베른 국립미술관)는 제목부터 음악적 감성을 환기한다. 그리스 중부 프티오티다 현에 있는 파르나소스 산은 신화에서 아폴론과 아홉 뮤즈들이 시와 음악을 관장하던 곳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에서도 파르나소스 산이 잠깐 언급되는데, 트로이 전쟁의 영웅인 오디세우스가 젊은 시절 여기서 멧돼지의 습격을 받은 것으로 나온다. 파랑, 오렌지, 초록 색면과 색점들 위에 흰색 점들이 촘촘히 중첩된 ‘파르나소스 산으로’는 영롱한 모자이크를 연상시킨다. 중첩된 색채는 하모니를 이루고 연결된 선들은 멜로디가 된다. 이를 통해 다성음악 (polyphony)과 같은 다층적인 회화가 펼쳐진다. 간결한 검은색 선으로 그려진 세모와 아치는 건축적 구조를 이룬다. 마치 관람자들이 문으로 들어와 뮤즈들의 음악이 흐르는 파르나소스 산으로 올라가라고 안내하는 듯하다. 오렌지색 원은 산꼭대기에서 아래로 서서히 저물어 가는 태양처럼 보인다. ‘파르나소스 산으로’는 음악에 대한 예찬인 동시에 근심과 걱정이 없는 이상향 (Arcadia)을 표현한 그림이다. 자신만의 상상의 작은 정원을 알뜰살뜰 가꾸듯 주로 작은 그림을 그렸던 클레에게 ‘파르나소스 산으로’는 비교적 큰 그림이다. 바우하우스를 떠나 뒤셀도르프 미술대학 교수가 된 후 그는 시간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안정돼 자신의 작업에 좀 더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그림에는 그런 안정감이 묻어난다. 시인의 심성을 지닌 음악을 사랑한 화가 클레는 마침내 파르나소스 산에 도달한 것이다.
클레에게 예술작품은 현실을 넘어선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1920년에 발표된 논문 ‘창조에 관한 신조’에서 클레는 “예술은 가시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가시적으로 되는 것”이라고 밝힌다. 즉, 예술은 보이는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창조적 사고를 가시적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이렇듯 클레의 작품들은 하나의 아이디어가 조형요소와 만나 씨실 날실을 직조하듯이 정교하게 구축되어 있다. 그의 작품에는 몽환과 논리, 시와 수학,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유아적인 치기와 세련미 같은 상반되는 요소들이 공존한다. (참고: 박소영, 전시기획자, PK Art & Media 대표)

델피
아이호반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에서 마을 전체를 바라보고 단체사진을 기념으로 남긴 우리 일행은 드디어 델피로 향했다.
.델피 (델포이) 개관
델피 (Delphi) 혹은 델포이 (Delphoi)는 아테네 북서쪽으로 180킬로미터 떨어진 해발 2457미터의 파르나소스 산의 남쪽 경사면, 코린토스만을 바라보는 양지에 위치하고 있다. 신화 속에서 이곳은 제우스가 동서 세상의 끝자락에서 반대방향으로 풀어놓은 두 마리의 독수리가 만난 장소로서,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세상의 중심이라 여겨졌고, 이러한 까닭에 지구의 배꼽을 상징하는 ‘옴팔로스 (Omphals)’라는 커다란 돌이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 보관되어 있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고대 그리스 세계의 동서축을 남부 이탈리아에서 터키의 앙카라까지로, 북아프리카의 리비아에서 마케도니아까지를 남북의 축으로 본다면 델피가 실제로 지리적인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고대 그리스인들은 델피가 자리 잡은 파르나소스 산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믿었다. 그중에서도 신전들의 배경을 이루는 가파른 절벽을 ‘파이드리아데스’라고 부르는데, 이는 빛나는 바위라는 뜻이다. 이 절벽은 다시 둘로 나뉘어 서쪽 절벽은 장밋빛 바위라는 뜻의 ‘로디니’, 동쪽절벽은 불타는 바위라는 뜻의 ‘플레부코스’라고 한다. 남쪽에서 내리쬐는 햇빛이 두 절벽에 반사되어 마치 조명처럼 신전을 밝히고 있어서 ‘빛의 신’ 아폴론의 성지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또한 이곳은 하늘과 땅 지하세계가 하나로 통하는 우주의 축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분노한 제우스 신이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 대홍수를 보냈을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의인 데우칼리온과 그의 아내 피라가 방주를 타고 표류하다가 처음으로 발을 디딘 곳이 바로 이 산의 정상이었으니, 이는 곧 하늘로 통하는 길을 의미한다. 또한 플레부코스 절벽의 한 구석에 위치한 ‘카스탈리아 샘은’ 하데스가 지배하는 지하세계에서 흘러나온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카스탈리아 샘의 물은 두 절벽 사이에서 흐르는 계곡수와 합쳐져서 산 아래쪽 계곡으로 이어지는데, 이 물이야말로 지난 수천 년간 델피의 드넓은 올리브 숲을 풍요롭게 키워낸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아폴론이 이 땅을 차지하기 전인 초기 미케네 시대에도 델피는 원시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신성한 땅이었다. 그 무렵 델피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숭배하는 성역으로서 신탁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후로 테미스, 데메테르, 포세이돈 신을 모시다가 미케네 시대 말엽에 이르러 아폴론이 신탁의 수호자가 되었다. 기원전 8세기부터 차츰 명성을 얻으면서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그리고 델로스의 아폴로 신전과 함께 그리스의 종교적인 중심지가 되었으며 기원전 6세기에는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신탁소가 되었다.
델피는 신탁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성역주변의 도시국가들이 신전관리와 제례유지를 위해 결탁한 인보동맹의 핵심이 되기도 했으나, 로마시대로 들어서면서부터 쇠락의 조짐을 보이다가 390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이교도 금지령을 내림으로써 델피의 역사도 함께 막을 내렸다. 이후 중세시대에는 성역의 폐허 위에 카스트리 마을이 세워져 아폴론의 성역마저 자취를 감추었으나 19세기 말 프랑스의 고고학자가 발굴에 착수하여 마을의 서쪽을 재건하고 델피라 명명하였다.
.아폴론과 델피
제우스와 레토의 아들이자 아르테미스와 남매인 아폰론은 델로스 섬에서 태어났다. 그가 올림포스를 떠나 델피로 왔을 때 이 땅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아들인 거대한 뱀 피톤의 성지였다. 델피가 신탁을 내리기에 적당한 장소라고 여긴 아폴론은 왕뱀 피톤을 죽인 뒤, 이곳을 차지했는데 그를 모시는 여사제는 피티아라고 불리게 되었다. 피티아는 피톤이라는 왕뱁에서 얻어진 말이다.
가이아의 아들인 키클로페스 3형제를 죽이는 불경죄를 저지른 아폴론은 테살리아 지방의 템페 강에 가서 몸을 씻고 정죄를 한 뒤에 다시 이곳에 돌아와, 카스탈리아 샘가에 템페 강의 월계수를 옮겨 심었는데, 이것이 관례가 되어 델피에 신탁을 받으러 오는 사람은 누구나 이와 같은 정화의식을 거쳐야 성소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렇게 자신의 땅을 확보한 아폴론은 추종자들을 찾다가 크레타에서 오는 배를 보고 돌고래의 모습으로 그 배에 뛰어 올라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고 선원들을 신도로 삼아 이곳으로 데려왔다. 이때부터 그는 ‘델피니오스’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으며 그의 성지 또한 ‘델피’라 명명되었다. 하지만 아폴론의 이런 행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델피의 지명의 유래를 자궁이라는 뜻을 지닌 ‘델피스 delphys’라는 말에서 찾는 것이 더 일반적이고 인정을 받고 있다.

.신성한 길
‘신성한 길’이란 델피 성역의 입구에서 아폴론 신전에 이르는 길로 이 길의 좌우에는 각양각색의 봉헌물과 기념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이는 대부분 야만인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승리, 또는 도시국가간의 전쟁 이후 승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아폴론 성역에 봉헌된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 세계의 종교적 중심지였던 델피는 신탁 의뢰인들이 가져온 봉헌물들을 팔아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시민들은 사치와 풍요를 누렸다. 지금은 황량한 유적 곳곳에는 각 도시국가에서 세운 보물창고와 금은으로 만든 각종 기념비 등이 즐비했고 특히 아폴론 신전의 입구에는 각국의 봉헌물들이 화려하게 늘어서 있었다. 오늘날 베네치아 성 마르코 성당 앞에 있는 사두마차 조각상은 원래 로도스에서 델피에 바친 봉헌물이었으며, 이스탄불의 히포드롬 광장에서 볼 수 있는 청동 기둥도 이곳에 서있던 기념비였다.
신전 벽의 돌과 바위에는 “가장 정확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 “한계를 지켜라”, “오만함을 증오하라”, “지나침이 없게 하라” 등의 금언이 새겨져 있다.

.아테네의 보물창고와 시빌레 바위
아테네인들이 마라톤전투에서 승리한 이후에 아폴론에게 바친 봉헌물을 보관하기 위해 바친 보물창고로서, 수많은 도시국가의 보고 중 유일하게 원형을 볼 수 있는 유적이다. 이 창고는 기원전 500년경 도리아 양식으로 건축되었으며, 2개의 기둥 및 다양한 부조장식물과 더불어 벽에는 갖가지 비문들이 남아있다. 1904-1906년에 아테네 시의 지원으로 복원되었는데,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의 파편들이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델피 성역 중 가장 완벽하게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아테네 보고의 맞은 편 언덕에 자리한 가이아 여신의 성소는 아폴론이 이 땅을 차지하기 전에 왕뱀 피톤이 신탁을 내리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근처에 놓인 회색 바위는 당시 델피의 여사제 시빌레가 그 위에서 신탁을 내렸다고 해서 ‘시빌레 바위’라고 불린다.

.아폴론 신전
델피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아폴론의 신탁이 행해졌던 곳이다. 기원전 6세기 경 이곳에 지어진 신전은 건설비를 봉납한 아테네 귀족 가문의 이름을 따서 ‘알크메오니다이 가문’의 신전이라 명명되었으며, 가로 6개, 세로 15개의 도리아식 기둥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신전이 기원전 373년 지진으로 파괴되자 기원전 330년 다시 재건되었지만, 이마저 다시 지진으로 무너져 버려 현재 기둥 한두 개와 건물을 지지하는 축대만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바위들을 퍼즐처럼 짜 맞추어 쌓은 축대의 표면에는 300여개의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 비문에는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 사이에 쓰인 것으로 고대인들의 지혜를 담은 문구들이 담겨져 있다. 신전의 내부에는 동쪽과 서쪽으로 양분되는데 동쪽에는 포세이돈을 위한 제단, 제우스 동상, 아폴론 동상이 있었고, 마지막으로 화로의 여신 헤스티아의 제단에서 영원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고 한다. 신탁은 신전의 서쪽 안쪽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나 발굴당시 파손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다.
아폴론신전 벽에는 “너 자신을 알라”, “너무 지나치지 않게”, “서약과 손해는 가까이 있다” 등의 금언이 있다.

.델피의 신탁과정
아폴론의 신탁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성소 입구의 카스탈리아 샘에서 몸을 씻어 심신을 정화하고 적당한 희생동물을 골라 봉헌물로 바친 뒤 신전으로 올라가 신관에게 신탁을 받으러 온 이유를 말한다. 신탁의 순서는 추첨으로 결정되는데 델피에 봉헌물을 많이 바쳤거나 도움을 준 도시국가의 시민은 우선적으로 신탁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신탁을 받으러 몰려들었기 때문에, 이는 대단한 특권이었으며 몇 달씩 델피에 머무르며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도 많았다.
신탁 의뢰인의 사연을 들은 신관은 신전에서 가장 깊숙한 지하방에 있는 여사제 피티아에게 질문을 전달하게 되는데, 오직 피티아 만이 지하방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신관은 방밖에서 대기해야 했다. 피티아는 카스탈리아 샘물을 마시고 월계수 잎을 씹은 뒤 신성한 삼갇대에서 앉아 지하의 갈라진 바위 틈에서 나온 증기를 들이마신다. 그리하여 환각 상태가 된 피티아가 신의 계시를 받아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면, 신관이 이를 운문의 형태로 받아 적어서 의뢰인에게 전달하였다. 델피 신탁이 애매모호함으로 악명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진실성을 의심받지 않았던 까닭은 인간이 신의 의지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고대인들의 굳은 신념 때문이었다.
따라서 신탁은 인간이 해석하기에 따라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하곤 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유명한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신탁을 듣고 자신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 고국을 떠나지만, 오히려 그 길이 자신이 태어난 테바이로 향하는 길임을 알지 못했기에 결국 신탁이 예언한 비극을 당하고 말았다. 아폴론 신전의 양쪽 대문 기둥 중 하나에 새겨져 있었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뜻을 지닌 ‘그노티 세아우톤(gnothi seauton)’이라는 문구는 신탁이 아무리 영험하다고 해도 우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고대인의 지혜가 담겨있다. 다른 기둥에는 ‘아무 것도 지나치지 말아라’는 뜻을 지닌 ‘메덴 아간(meden agan)’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플라타이아이 삼각 청동 기둥
페르시아 전쟁 중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승리한 아테네가 페르시아군의 방패를 녹여 기둥으로 만들어 아폴론 신에게 바친 승리의 기념비이다.
‘델피 삼각기둥’라고 불리기도 한다.
본래 아폴론 신전 앞에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이 기둥은 기원전 479년 페르시아 전쟁 중 그리스가 페르시아에 크게 승리한 플라타이아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페르시아군으로부터 노획한 청동 무기들을 녹여서 만들어 델포이에 바쳤지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약탈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가져가 히포드롬 광장에 세운 것이다.
즉, 현재 델포이에 있는 청동 기둥은 복제품이다.
원형은 세 마리의 뱀이 서로 꽈리를 틀어서 중앙의 기둥을 이루고 그 위로 세 개의 머리가 황금으로 된 세발솥을 떠받치고 있었으며, 몸체에는 이 전투에 참가했던 31개 도시국가명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델피가 쇠락하자 로도스에서 봉헌한 사두마차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졌고, 1204년 십자군에 의해 머리 윗부분이 절단되어 무기로 만들어지거나 현금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이스탄불의 히포드롬 광장에 가면 꽈리를 튼 몸체만 남아있는 델피의 청동기둥을 볼 수 있다.
이스탄불에 있는 기둥이나 머리가 없는데, 오스만 제국의 폴란드 대사가 술에 취해 히포드롬을 돌아다니다 이 뱀 기둥을 보고 괴물로 착각해 칼을 뽑아 목을 잘랐다고 한다. 뱀의 머리 일부는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이를 반영했는지 델포이에 있는 기둥도 머리가 없다

.델피 원형극장과 스타디온
기원전 4세기에 지어진 원형극장으로 현재의 모습은 로마시대에 개축된 것이다. 총 35열의 관람석에서 약 5천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지금도 여름이면 연극이나 콘서트가 공연되기도 한다. 극장의 정상에 오르면 델피 유적지뿐 아니라 광활한 올리브 숲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원형극장의 서쪽 출구에서 가파른 오르막을 따라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의 경기장인 스타디온(Stadion)이 나온다. 이는 기원전 5세기에 처음 건설되었으나 지금의 모습은 2세기에 개축된 것으로 기단부만 남아있는 동쪽출입구는 본래 3개의 아치형태로 되어 있었다. 약 7천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고대에는 4년마다 이곳에서 피티아 경기가 개최되었다.
.김나시온 (Gymnasion)
아폴론 성역과 아테나 여신의 성역인 마르마리아 사이에 위치한 김나시온은 기원전 4세기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고 이후 로마시대까지 보수가 계속되었다. 델피의 김나시온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상층부는 스토아 및 달리기 훈련을 위한 곳이었고, 하층에는 체육관, 수영장, 목욕탕 등이 있었다. 이곳은 특히 피티아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훈련장소로 이용되었으며 비문에 따르면 철학가, 시인, 천문학자와 같은 지식인들도 이곳에 와서 젊은이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델피의 김나시온은 경기에서 승리자가 되기 위한 신체의 단련 뿐 아니라 지적 능력을 개발하기 위한 공간이기도 했다.
.피티아 경기
아폴론 신을 기리기 위한 경기로 처음에는 각 도시국가의 대표들이 모여 음악과 시를 놓고 경합을 벌였으나, 나중에는 레슬링, 복싱, 달리기, 경마 등의 운동 경기도 추가 되었다. 우승자는 월계관을 받았으며 성역 내에 자신의 상을 세울 권리를 얻었다. 이 경기의 우승자에게는 월계관이 수여되었다.
.아테나 프로나이아
아테나 여신을 모시던 성역으로 아폴론의 성역보다 아래쪽 산기슭의 올리브 숲에 둘러 싸여 있다. 이 신전은 ‘아테나 프로나이아(Athena Pronaia)’라고 불리는데, 프로나이아는 ‘신전 앞에’라는 뜻으로 델피의 주신 아폴론 신전 앞에 있는 신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입구의 정면에는 아테나 여신의 제단이 있고, 2개의 보물창고, 톨로스라고 불리는 원형 신전, 후대에 지어진 아테나 신전 등이 모여 있다. 그 중 톨로스는 직경 13, 5미터의 둥근 대리석 구조로 된 도리아 양식의 건물로, 기원전 4세기 초에 지어진 것이다. 그리스 유적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알려진 이 톨로스 신전에는 총 20개의 기둥이 있었으나 현재 3개만 재건되어 있으며 정확한 용도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편 신전 뒤편에 놓인 커다란 바위들은 페르시아 군이 이 성역을 침범하려 했을 때 스스로 천둥소리를 내며 떨어져서 병사들을 덮쳤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델피 고고학 박물관 (Delphi Archaeological Museum)
델피 유적지 방문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유적지 옆에 위치한 델피 고고학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델피 유적 입구에 있는 델피 고고학 박물관 (Delphi Archaeological Museum)은 규모는 작지만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박물관 중 하나이다. 1980년에 완공된 이 박물관에는 아폴론의 성역과 마르마리아에서 발굴된 조각품, 봉납물, 비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세계의 배꼽을 의미하는 옴팔로스이다. 옴팔로스는 계란형 구체 표면에 탯줄을 감아놓은 듯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지구상의 신성한 장소를 표시한 것이라 추측할 뿐, 정확한 의미는 밝혀지지 않았다.
박물관의 유물들은 주로 연대순으로 10여개의 방으로 나눠 전시되어 있었다. 주요 유물들은 기원전 1500년 전 미케네 문명시대부터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 문명시대, 기원전 7-8세기 청동 유물 전시실, 기원전 600년경 펠로폰네스의 아르고스에서 만들어진 델포이의 청년 나체상과 시코니안 봉헌창고에 있던 메도페가 있다. 그리고 은제 황소상과 금과 상아로 만든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의 조강, 낙소스 스핑크스상과 시피노스 봉헌창고 또는 보물창고의 프리즈, 아폴론 신전의 파사드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어 성스러운 길에 있는 아테네인의 봉헌창고에서 나온 메토페와 페디멘트의 조각들, 아테나 프로나이아 신전에서 나온 유물들이 있으며, 후기 고대와 전기 헬레니즘 시대의 유물들로는 아테네인들이 기증한 델피의 무희들과 기원전 4세기 테쌀리 지방의 여주였던 아오코스가 기증한 봉헌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헬레니즘가 로마시대의 유물로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미모의 비티니아 사람인 안티노우스의 조각상, 2세기 델피를 정복했던 로마 장군의 두상, 기원전 5세기경 만들어진 금엄한 스타일의 마차를 모는 사람의 마부상 (아마도 마차와 말 등이 포함된 큰 조각의 일부) 등이 있다. 마지막 방에는 주로 성역의 마지막 시대와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리스 철학자 프루타르크와 허큘리스로 생각되는 두상 등의 대리석 두상이 있다.

메테오라로 가던중 만난 만난 테르모필레스 레오니다스 청동상
레오니다스 1세 (Λεωνίδας ο Α’)는 고대 그리스어로 ‘사자의 아들’이란 뜻으로, 아길라드 왕조 출신의 제17대 스파르타 국왕이자 헤라클레스의 후예로 추앙받던 아낙산드리다스 2세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레오니다스의 출생 날짜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기원전 480년 8월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것만이 그의 유일하게 확인된 기록이다.
스파르타 연구자이자 역사가인 Paul Cartledge는 레오니다스의 출생 날짜를 기원전 540년으로 좁혔다.
만약 그의 가정이 맞다고 추론한다면 레오니다스는 기원전 540년 어느 날에 태어났을 것이다.
기원전 489년 또는 기원전 488년경 레오니다스는 자신의 배다른 형제인 클레오메네스 1세의 뒤를 이어 스파르타의 왕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클레오메네스의 딸인 고르고와 결혼하였다.
그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보여준 용맹함으로 그의 이름은 유명해져 후세에까지 영웅으로 추앙받게 된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제국의 크세르크세스 1세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 본토를 침공하자 레오니다스는 뒤를 이을 아들 후손이 있는 300명의 최정예 스파르타 병사를 이끌고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방어전을 폈다.
그는 다른 그리스 연합군 7,000여 명과 함께 페르시아의 대군을 맞아 2일 동안 페르시아 군에게 엄청난 손실을 주면서 방어했으나 한 그리스인 배신자 에피알테스가 페르시아에게 테르모필레를 우회하는 샛길을 알려주었고 이를 우회한 페르시아 정예부대에 맞서 다른 그리스와 노예병들을 모두 남쪽으로 후퇴시키고 자신과 스파르타의 300명의 용사만 남아 장렬히 전사했다(스파르타인 300명, 테베 400명, 모 국가 700명).
이 이야기는 수많은 유럽문화권의 영웅이야기의 모범이 되었고 스파르타의 용맹성을 아직까지도 후세에 알렸다.




메테오라, 정교회 아이세이도리수녀원
메테오라 인근에서 우리 일행은 정교회 아이세이도리수녀원을 방문했다. 은둔의 수도생활을 하기 위한 최적의 자연조건, “위를 생각하고 땅의 것을 멀리하라”는 성경 구절을 실천하기 위해 최대한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자 선택한 이곳은 이런 입지 때문인지 오스만 투르크가 유럽을 휩쓸고 갔을 때에도 종교의 전통이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한다.
14세기쯤 최초의 수도원이 생기기 시작했고, 16세기에 여러 번 증축 과정을 거치는데 최전성기에는 24개 수도원이 밀집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메가로 메테오른 수도원 (가장 먼저 만들어지고 가장 큰 수도원), 루사노 수도원, 발람 수도원, 스테파니 수녀원 등 6개 정도만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방문한 아이세이도리 수녀원 내부는 성경 (신약) 이야기 벽화로 가득한데, 전형적인 비잔틴 양식이라고 한다.



수녀원 방문 후 우리 일행은 호텔 석식을 마치고 휴식시간을 가졌다. 메테오라 인근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오늘 하루를 돌아본다.
간밤에 묵은 파트라스 (안드레 순교지)에서 델피로 향하던중 리오다리 근처(레판토 해전이 있었던 곳)에서 어려 꾸었던 꿈속에서 놀았던 (헤매던?) 척박한 돌산을 보았다.
이런 기시감 (旣視感, 프: Déjà Vu, 데자뷔)을 살며 여러번 느꼈다. 청소년기에, 호주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리오다리 근처에서 그런 느낌이 강했다. 이 여행은 오도록 계획되었던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델피의 기운이 나를 부르는 것인가!
델피의 석산들은 웅장하고도 그 척박함은 가혹해 보였다.
델피박물관에서 여러 조형물들을 보며 현대 예술품으로도 손색없음에 놀랐다.
한편 신탁은 해석의 문제란 생각이 들었다.
지나는 길에 들른 스파르타 레오니다스왕의 청동상에서 스파르타의 기상을 생각했다.


임운규 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
호주성산공동체교회 시무,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