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17일,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제임스 패커 (James Innel Packer, 1926 ~ 2020) 별세
제임스 이넬 패커 (James Innel Packer, 1926년 7월 22일 ~ 2020년 7월 17일)는 성공회 사제이자 복음주의 신학자이다. 패커는 2020년 7월 17일, 9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 제임스 패커 (James Innel Packer)
.출생: 1926년 7월 22일, 영국 트와이닝
.사망: 2020년 7월 17일 (93세), 캐나다 밴쿠버
.배우자: Kit Mullet (1954 ~ 2020년)
.영향을 준 인물: 장 칼뱅, 존 오웬, C. S. 루이스, 리차드 백스터, 존 번연, 찰스 윌리엄스
.학력: 옥스포드 대학, Wycliffe Hall, The Crypt School, 코퍼스 크리스티 대학, 트리니티 대학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 (Corpus Christi College), 오크힐 신학교 (Oak Hill Theological College), 성공회 신학교인 위클리프 홀 (Wycliffe Hall)에서 공부했다. 1952년에는 부제 서품을, 1953년에는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캐나다 리전트 신학교 (Regent College)에서 역사신학 및 조직신학 교수로 있었다.
성공회 사제들인 존 스토트 신부, 앨리스터 맥그래스 신부와 더불어 저교회파의 성공회신학과 개혁주의신학 (the low church Anglican and Reformed traditions)의 대표적인 신학자 중 한 사람이다. C.S. 루이스로부터 첫 신학 강의를 듣고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청교도 신학에 대한 깊이 있는 관심으로 청교도 관련 서적을 많이 집필하였다. 특히, 존 오웬, 리차드 백스터, 조너선 에드워즈에 대한 자료는 청교도 연구에 기초를 제공한다.
○ 생애 및 활동
패커는 1926년 7월 22일 영국 글로스터셔 북쪽에 있는 트와이닝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제임스와 도로시 패커 부부의 맏이였다. 유일한 동생은 마거릿인데 1929년에 태어났다.
패커의 가족은 중산층에 속했으며 성공회 교단에서 명목상의 신앙을 유지했다. 집 근처에 있는 세인트캐더린교회 (St. Catharine’s Church)에 열심히 다니긴 했으나,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는 일절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고 식사 시간에도 기도하는 법이 없었다.
1933년 9월, 일곱 살 때였다. 패커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한테 괴롭힘을 당하며 차도로 쫓겨 나오다가 그만 지나가던 식료품 트럭과 부딪히고 말았다. 그 결과 뇌수술을 받고 3주 동안 입원했으며, 회복을 위해 6개월 간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쉬었다. 또한 사고로 인해 이마의 오른쪽 측면 전두부가 깨져 움푹 들어가게 되었는데, 훗날 그는 한쪽 끝을 살짝 깨뜨린 달걀 모양에 자신의 머리를 비교하기도 했다. 그렇게 깨진 뼈 조각은 그가 살던 지역에서 근무하던 한 노련한 의사가 제거해 주었다. 그 의사는 패커에게 상처를 보호하기 위해 검은색 알루미늄 판을 고무줄로 둘러 착용하라고 권했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운동도 하지 말라고 금했다. 그러자 패커는 혼자 지내며 책읽기나 글쓰기 따위에만 점점 더 몰입하게 되었다. 이마에 두르고 있던 알루미늄 판은 이후로 8년 동안이나 착용했고, 열다섯 살이 되어서야 더 이상 착용하지 않기로 했다.
1937년 열한 번째 생일을 맞이하던 날 아침, 패커는 자전거 선물을 받길 기대하며 잠에서 깼다. 자전거는 그 나이쯤 되면 으레 받는 선물이었는데, 그걸 받고 싶다고 넌지시 말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패커의 부모는 오래되고 무거운 타자기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상태는 매우 좋았다. 패커 전기를 쓴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그 선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건 패커가 요구한 선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선물임을 곧 알게 되었다. (중략) 그렇게 최고의 선물이 된 타자기는 유년 시절에 누린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1937년 가을, 패커는 초등학교에서 문법학교 (The Crypt School)로 진학했다. 거기서 그는 자기 학급에서 유일하게 고전을 전공하는 학생이 되었다. 리랜드 라이큰은 이렇게 기록했다. “그 학교는 헨리 8세가 로마교회와 절교하고 국교회를 세운 시대에 속한 1539년에 설립된 명문이었다. 원래는 지역 교회의 지하실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크립트’ (Crypt)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당시 패커가 가진 명목적인 기독교 신앙의 관점으로 보면 별 의미가 없을 수 있지만, 이후 그가 걷게 될 길에 비추어보면, 그 학교 선배 중에 영국이 낳은 위대한 설교자요 전도자인 조지 휫필드가 있었다는 사실은 큰 의미가 있었다.”
어느 날 패커는 반 친구와 함께 체스를 하게 되었다. 친구의 아버지는 유니테리언파에 속한 목회자였다. 그래서인지 친구는 패커를 설득하며 유니테리언주의를 받아들이게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패커는 왜 신약성경의 일부만 수용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부인하려고 하는지 궁금했다. 이후 패커는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The Screwtape Letters)에 이어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를 읽었다. 그렇게 십대를 보내며 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킹제임스 성경도 시간을 내어 읽었고, 그 모든 독서가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비록 그때까지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진 못했지만, 나중에 패커는 그 당시 자신이 구원의 문턱에 절반쯤은 이르렀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열네 살이 되도록 그는 회심이라든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세인트캐더린교회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 회심
열여덟 살에 패커는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대학교에 들어가 코퍼스크리스티칼리지 (Corpus Christi College)에서 고전을 공부하게 되었다.
자신의 묘사에 의하면, 뭔가 어색한 모습에 수줍음을 많이 타던 지적 괴짜로서 여행용 트렁크 하나를 손에 들고 옥스퍼드에 도착했다.
당시 아버지가 철도 회사 (The Great Western Railway)에 근무하고 있었기에 기차로 한 시간가량 되는 거리를 공짜 티켓으로 올 수 있었다.
그리고 3주가 지난 1944년 10월 22일, 패커는 세인트알데이트교회 (St. Aldate’s Church) 주일 저녁 예배에 참석하여 복음 설교를 듣게 되었다.
어느 연로한 성공회 목사가 설교했다. 성경 본문을 해설할 때는 따분하게 들렸다.
그런데 후반부에 이르자 설교자가 자신이 어릴 때 수련회에서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때 자신이 정말로 그리스도인인지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패커는 그 이야기를 열중해 듣다가 자신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교가 끝나고 ‘내 모습 이대로’ (Just As I Am)를 찬양하며 믿음을 갖도록 초청하는 시간이 되자, 패커는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드리기로 했다.
이는 1735년에 조지 휫필드가 회심한 장소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 회심후 사역
제임스 패커는 학업에 열중하는 진중한 학생이었지만, 옥스퍼드에서의 그의 삶의 핵심은 영성이었다. 패커가 C.S.루이스의 강의를 처음 듣게 된 것은 옥스퍼드에서였다. C.S.루이스와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없었지만 C.S.루이스는 패커의 삶과 사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패커는 1952년 리처드 백스터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옥스퍼드를 떠난 후 학자로서의 경력을 즉시 시작하지 않고, 버밍엄 교외의 교구 목사로 3년의 임기를 지냈다.
제임스 패커는 다양한 곳에서 사회생활을 했다. 직장생활의 처음 절반은 영국에서 했고, 후에는 캐나다로 갔다. 영국에서 패커는 브리스틀의 신학교에서 다양한 교수직에서 재직했으며, 그 기간에 그는 옥스퍼드에서 영국 교회의 복음적 연구를 위해 설립한 정보센터 라티머하우스의 소장이자 감독으로서 10년간 일했다. 이를 통해 패커는 존 스토트와 마틴 로이드 존스와 함께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지도자로 손꼽히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패커가 1979년 밴쿠버에 있는 리젠트 대학으로 이주하면서 복음주의 교계에 충격을 주었지만, 그는 남은 생애 동안 영향력을 확대했다.
제임스 패커는 성공 윤리를 거부한 겸손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인생 자체가 성공담이다. 그의 첫 번째 책인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1958년 초판)은 첫해에 2만 부가 팔렸으며 그 이후로 계속 인쇄되었다. 2005년 타임스 잡지는 패커를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자 25명 중 한 명으로 지명했다.
CT가 복음주의에 영향을 끼친 상위 50권의 책을 설문 조사했을 때, 제임스 패커의 책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5위에 올랐다. 그의 명성과 영향력은 그가 이루고자 목표한 것이 아니다. 그는 성공을 좇는 일을 지속해서 거부했다. 대신, 그는 타자기로 자신의 자취를 남겼다 (그는 평생 글과 책을 집필할 때 타자기를 사용했다).
제임스 패커는 여러 개의 직업을 갖고 수많은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교직을 생업으로 삼았고 학생들은 그를 교수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 세계의 많은 사람은 제임스 패커를 작가이자 연사로 알고 있다.
연사로서의 패커의 명성은 작가로서 그의 위상과 맞먹었다. 두 분야 모두에서 그의 관용은 탁월했다. 패커에게 너무 작은 청중이나 장소는 없었고 그는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그의 출판 경력은 사실상 그가 모든 글 청탁을 받아준 결과였다. 그의 저서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100만 부 판매)은 한 작은 복음 잡지의 편집자가 요청한 일련의 격월 기사로 시작되었다. 그의 첫 번째 책인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은 한 그룹 학생들과의 대화로 시작되었다 (발행자가 소책자 제작을 요청했지만, 패커는 책을 썼다). 아마도 역사상 누구도 패커보다 다른 책에 많은 추천서와 서문을 더 많이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출판물과 연설을 통해 알려진 대로 패커는 청교도 학자로 유명했지만, 그는 헌신적인 성도였으며, 기본적으로 미래의 목회자 교육 양성을 가르침에 힘썼고, 교회위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지난 25년간, 패커는 CT를 통해 종종 문화 비평 주제를 다루는 수필가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패커가 직접 말하듯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필연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경력을 가졌지만, 일관되게 신학자로 자신을 정의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기본 소명이 신학자라고 여긴다.
고인이 된 분이 남긴 유산에 관해 이야기할 때, 예측 불가능한 추론적 사후의 유산으로 설명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제임스 패커의 주요 유산은 그가 평생 전 세계 기독교도들과 사람들의 삶에 미친 영향일 것이다. 이는 논쟁의 여지가 없으며, 패커가 그의 생애 동안 기독교의 방향성에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사안이라고 생각하는 몇 가지를 강조하려고 한다.
패커의 첫 번째 책은 성서의 권위에 대한 변호였으며, 이것은 평생의 열정이자 복음주의 교회에 대한 패커의 가장 중요한 공헌으로 남았다. 패커는 성서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견해를 강력하게 믿었다. 그는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오래된 교리를 옹호했고, 성서의 확실성을 증명하는 책을 출판했다. 그는 영어 표준판 성경 작업의 편집장으로 봉사하면서 그 프로젝트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성과로 여겼다.
제임스 패커는 복음주의자들에게 성서의 권위를 논의할 기회를 주었다. 개인적으로 필자에게 영향을 미친 가장 큰 패커의 유산은 고향에 있는 기독교 서점에서 대학생으로서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의 서적을 집은 그 순간부터 시작됐다.
자유주의 추세와 공격에 직면하며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의 대변인으로서 패커의 행보는 일생 했던 그가 했던 또 다른 중요한 일이다. 패커는 국제성경무오협회 (International Council of Biblical Inerrancy)에서의 10년간의 리더십을 만족스럽게 되돌아보며, “무오에 대한 선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은유는 패커가 최선을 다했던 여러 이유를 설명해준다. 패커는 성경의 본질과 해석,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입장과 같은 수많은 신학적 문제에 대해 보수적인 복음주의 선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그는 진실을 찾기 위해 과거를 바라본 전통주의자였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그는 예레미야 6:16을 인용했다. “옛적 길 곧 선한 길”에 대한 그의 생각을 책을 통해 그 오래된 길을 따르라는 요청이라고 주장했다.
제임스 패커의 삶에서 일관된 또 다른 주제는 평범한 사람을 높이는 것이었고, 이 또한 그의 유산 일부이다. 패커는 자신이 어린 시절 평범함 사람들에게 받았던 도움의 손길을 잊지 않았으며, 후일 이 정신으로 청교도로서의 정체성을 키웠다. 그는 최고 수준의 전문 학자들을 위한 학문을 집필할 수도 있었지만, 그의 소명은 평신도를 위한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에게 출세 제일주의는 전혀 없었다. 제임스 패커에게 헌정하기 위해 출판된 논문집의 제목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신학>이다.
앨리스터 맥그래스가 패커를 신학자가 아닌 신학 연구가라고 불렀을 때 패커는 그것을 대단한 발견이라고 인정하며 스스로 일반 기독교인을 위한 체계적인 교리를 연구하는 “전도사”라고 결론을 내렸다. 패커는 평신도를 위한 비공식 신학적 저술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겼으며, 자신만의 체계적인 신학을 완성하거나 출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다른 학자들처럼 괴롭지 않았다고 말했다.
– 사망
많은 사람에게 제임스 패커로 더 잘 알려진 제임스 인넬 패커는 우리 시대의 가장 저명하고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2020년 7월 17일 금요일 9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 평가
평생 제임스 패커의 유산 중 하나는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고 영감을 주는 패커의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품이었다. 매 순간 그의 경건함이 드러났으며, 그의 존재만으로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었다. 그의 말은 지혜의 말씀이었다. 그는 열심히 일했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쓰는 시간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그가 사모한 청교도들처럼, 패커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분명한 사고에 근거하고 동시에 마음을 얻는 것이라고 믿었다. 제임스 패커는 최고의 영국 신사적 매너로 정확하게 이야기했지만, 영적인 따뜻함이 있는 사람이었다. 운 좋게도 그를 만나 본 사람들은 하나 같이 믿음 안에서 마음이 맞는 신앙의 협력자로서의 면모를 가진 패커를 경험할 수 있었다. 진정한 영적 기록을 그의 삶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었다.
제임스 패커의 글은 그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점과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을 나타낸다. 그의 유산 중 일부는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른 주제를 정하고, 올바른 것에 관심을 두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의 우선순위 목록에는 성경, 교회, 올바른 신학, 삶의 거룩함, 소명이 있었다. 패커가 다양한 주제에 대해 글을 썼던 이유는 그가 적극적이고 넓은 마음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삶과 관련된 모든 주제에 대해 정확하게 생각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는 진실에 관한 열정을 모든 분야에 갖고 있었다.
또한, 제임스 패커는 역설적인 사람이었다. 평생 헌신적인 성공회의 일원이었지만, 복음주의 개혁주의자 사이에서도 똑같이 수월하게 일했기 때문에 아마도 개혁주의 영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는 영국인이었지만 캐나다에서 인생의 절반을 살았으며, 게다가 그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곳은 미국이었다. 패커는 당시 가장 유명한 복음주의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주요 대학에서 권위 있는 직책을 맡지 않았으며, 교단에서도 단 한 번도 주목받는 높은 자리를 오래 맡지 않았다. 그는 평화로운 성향이 있는 온화한 사람이었지만 논쟁의 중심에서 일관되게 자신을 주장했으며 비방도 서슴지 않았다.
자신에게만 집중하던 조용한 사람이 어떻게 유명하고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는지 묻는다면, 책이 수단이 되어 그의 생각이 널리 퍼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생애는 기록되고 출판된 그의 힘 있는 글을 통해 기억될 것이다. 제임스 패커는 책의 영향으로 인해 유명한 연사가 되었다. 글을 쓰고 말하면서, 그 내용은 항상 사려 깊고 논리적으로 설명되고, 명확하며 실용적이었다.
제임스 패커는 자신에게 주어진 명성과 성공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으며, 이것이 사실임이 분명하다. 그는 유명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자신 앞에 놓인 임무를 수행하고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겼다. 패커는 거실에서 십 대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화려한 강단에 서는 것만큼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왕 되신 하나님을 위해 사역했다.
2016년 그가 황반변성으로 시력을 잃어 더는 글을 읽거나 자유롭게 거동하거나 공식 석상에서 말할 수 없게 되면서 사역을 마무리하였다.
제임스 패커에게 교회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그는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모든 방법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이는 그가 일생을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그리고 지금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묘비명에 새길만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 저서
하나님의 인도, 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은혜를 아는 지식 (Great Grace), 쉴만한 물가
견고한 크리스천 (GROWING IN CHRIST), 규장
성령을 아는 지식 (Keep in Step With the Spirit), 홍성사
하나님을 아는 지식 (Knowing God)/IVP
하나님! 나를 도와주세요 (ANSWERS QUESTIONS FOR TODAY), 아가페
A Quest for Godliness : The Puritan Vision of the Christian Life, Crossway Books, 1990.
기독교 참된 휴머니즘 (Christianity The True Humanism)/ 여수룬
청교도 사상 (Among God’s Giants ), CLC (기독교 문서선교회): 청교도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과 존 오웬과 그의 작품에 관한 설명을 주로 소개한다. 마지막 장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소개한다.
– 저명한 글
양심에 대하여 : 청교도들의 양심에 대한 관점을 설명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