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9일, 미국의 제39대 대통령 제임스 얼 “지미” 카터 주니어 / 지미 카터 (James Earl Carter, Jr., 1924 ~ 2024) 타계
제임스 얼 카터 주니어 / 지미 카터 (James Earl Carter, Jr., 1924년 10월 1일 ~ 2024년 12월 29일)는 민주당 출신 미국의 제39대 대통령(1977년 ~ 1981년)을 역임했다. 민주당 소속으로 1963년부터 1967년까지 조지아주 상원 의원,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조지아주의 76대 주지사을 지냈다. 카터는 100세까지 산 최초의 대통령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장수한 대통령이다.
지미 카터는 미국 현지시각 12월 29일 15시 40분, 호스피스 간호를 받던 자택에서 별세하며 향년 100세 89일로 생을 마감했다.
– 지미 카터 (Jimmy Carter)
.본명: 제임스 얼 카터 주니어 (James Earl Carter Jr.)
.출생: 1924년 10월 1일, 조지아주 플레인스 와이즈 요양원 (현 조지아주 플레인스 릴리안 G. 카터 간호 센터)
.사망: 2024년 12월 29일 (100세), 조지아주 플레인스 우드랜드 드라이브 209 사저
*제39대 대통령
.재임기간: 1977년 1월 20일 ~ 1981년 1월 20일
카터는 조지아주 플레인스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946년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해군 잠수함에 승선했다. 카터는 군 복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의 땅콩 재배 사업을 되살렸다. 카터는 인종 분리 정책에 반대하며 성장하던 민권 운동을 지지했고, 민주당 내에서 활동가가 되었다. 1963년부터 1967년까지 조지아주 상원 의원으로 재직하였고,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조지아 주지사로 재직했다. 조지아 주 밖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다크호스 후보였던 카터는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어 1976년 대선에서 공화당 의 현직 대통령인 제럴드 포드를 상대로 신승했다.
카터는 취임 둘째 날 베트남 전쟁에서 병역을 기피한 모든 사람들을 사면했다. . 에너지부와 교육부를 설립했으며, 에너지 절약, 가격 통제, 신기술을 포함한 국가 에너지 정책을 만들었다. 스태그플레이션에 대응하는 동시에 카터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 파나마 운하 조약, 제2차 전략 무기 제한 협상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임기 말에는 이란 인질 사태, 에너지 위기, 스리마일 섬 사고, 니카라과 혁명, 그리고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이어졌다.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응하여 카터는 데탕트 정책을 종식시키고 카터 독트린을 선포했으며, 소련에 곡물 금수조치를 부과하고, 1980년 모스크바 하계 올림픽에 대한 다국적 보이콧을 주도하여 냉전을 확대했다. 카터는 1980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도전자 에드워드 M. 케네디를 물리쳤지만,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공화당 후보인 로널드 레이건에게 큰 차로 패배했다. 연방대법원 대법관을 임명하지 못하고 임기를 마친 유일한 대통령이다.
카터 대통령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인권을 증진하고 확대하기 위해 카터 센터를 설립하고 비영리 주택 기구인 해비타트 운동의 주요 직책을 맡았으며, 2002년에 관련된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평화 협상을 중재하고, 선거를 감시하고, 전염병을 근절하기 위해 널리 여행했다. 정치적 회고록에서 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을 썼으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에 관한 두 권의 책을 포함하여 세계 문제에 대한 논평도 계속했다. 역사학자와 정치학자들의 여론 조사에서는 대체로 카터 대통령을 평균 이하의 대통령으로 평가하지만, 학자와 대중은 미국 역사상 가장 길었던 대통령 퇴임 후 기간에 대해서는 더 호의적으로 본다.
○ 생애 및 활동
- 어린 시절
지미 카터는 조지아주 섬터 카운티 플레인스 마을에서 태어났다.
조지아 공과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해군에 들어가 전함·원자력·잠수함의 승무원으로 일하였다.
1953년 미국 해군 대위로 예편하였고 이후 땅콩·면화 등을 가꿔 많은 돈을 벌었다. 그의 별명이 “땅콩 농부” (Peanut Farmer)로 알려졌다.
- 정계 입문
1962년 조지아주 상원 의원 선거에서 낙선하였으나, 그 선거가 부정선거 였음을 입증하게 되어 당선되고, 1966년 조지아 주지사 선거에 낙선하지만, 1970년 조지아 주지사를 역임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 조지아주 상원의원을 두번 연임했으며,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조지아 지사로 근무했다. 조지아 주지사로 지내면서, 미국에 사는 흑인 등용법을 내세웠다.
- 대통령 재임
1976년 미합중국 제39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도덕주의 정책으로 내세워서, 많은 지지를 받고 제럴드 포드 대통령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카터 대통령은 에너지 개발을 촉구했으나 공화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 외교 정책
카터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조정하여 캠프 데이비드에서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수상과 함께 중동 평화를 위한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체결했다. 이것은 공화당과 미국의 유대인 단체의 반발을 일으켰다. 그러나 1979년, 양국 간의 평화조약이 백악관에서 이루어졌다.
소련과 제2차 전략 무기 제한 협상 (SALT II)에 조인했다.
카터는 1970년대 후반 당시 대한민국 등 인권 후진국의 국민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취임 이후 계속해서 도덕정치를 내세웠다.
임기 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사건으로 인해 1980년 하계 올림픽에 반공국가들의 보이콧을 하였다.
그는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의 인질 구출 실패로 인한 원인으로, 1980년 제40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하며 재선에 실패하였다.
- 대한민국과의 관계
지미 카터는 대한민국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대통령 중 하나다. 인권 문제와 주한미군 철수 문제로 한때 한미 관계가 불편하기도 했다.
1978년 대한민국에 대한 북한의 위협에 대비해 한미연합사를 창설하면서, 1982년까지 3단계에 걸쳐 주한미군을 철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주한미군사령부와 정보기관·의회의 반대에 부딪혀 주한미군은 완전철수 대신 6,000명을 감축하는 데 그쳤다. 또한 박정희 정권의 인권 문제 등과의 논란으로 불협화음을 냈으나, 1979년 6월 하순,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관계가 다소 회복되었다.
1979년 ~ 1980년 대한민국의 정치적 격변기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그는 이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였고, 이는 후에 대한민국 내에서 고조되는 반미 운동의 한 원인이 됐다.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된 것에 대해 그는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으며,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을 조문사절로 파견했다.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에 대해 초기에는 강하게 비난했으나, 미국 정부가 신군부를 설득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결국 묵인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게 됐다.
- 퇴임 이후
2011년 남수단 독립 국민투표에 업저버 사절단을 지도한 카터 퇴임 이후 민간 자원을 적극 활용한 비영리 기구인 카터 재단을 설립한 뒤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제 3세계의 선거 감시 활동 및 기니 벌레에 의한 드라쿤쿠르스 질병 방재를 위해 힘썼다. 미국의 빈곤층 지원 활동, 사랑의 집짓기 운동, 국제 분쟁 중재 등의 활동도 했다.
카터는 카터 행정부 이후 미국이 북핵 위기, 코소보 전쟁, 이라크 전쟁과 같이 미국이 군사적 행동을 최후로 선택하는 전통적 사고를 버리고 군사적 행동을 선행하는 행위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 하며 미국의 군사적 활동에 강한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다.
특히 국제 분쟁 조정을 위해 북한의 김일성, 아이티의 세드라스 장군, 팔레인스타인의 하마스,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정권 같이 미국 정부에 대해 협상을 거부하면서 사태의 위기를 초래한 인물 및 단체를 직접 만나 분쟁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힘썼다. 이 과정에서 미국 행정부와 갈등을 보이기도 했지만, 전직 대통령의 권한과 재야 유명 인사들의 활약으로 해결해 나갔다.
1978년에 채결된 캠프데이비드 협정의 이행이 지지부진 하자 중동 분쟁 분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3년 퇴임 후 직접 이스라엘과 팔레인스타인의 오슬로 협정을 이끌어 내는 데도 성공했다.
1993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북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행동이 임박했으나, 미국 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고 미국과 북 양국의 중재에 큰 기여를 해 위기를 해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이 때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만남을 주선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수주일 후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하여 김일성과 김영삼의 정상회담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 문제, 세계의 인권문제에서도 관심이 깊어 유엔에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의 제도를 시행하도록 노력하여 독재자들의 인권 유린에 대해 제약을 하고, 국제형사재판소를 만드는 데 기여하여 독재자들 같은 인권유린범죄자를 재판소로 회부하여 국제적인 처벌을 받게 하는 등 인권 신장에 크나 큰 기여를 했다. 2011년 4월 26일부터 29일까지 북한을 3일간 방문했다.
- 별세
2023년 2월, 이전에 걸렸던 흑색종이 재발하여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 치료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는 그의 삶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물론 당시 100세를 바라보는 초고령이었기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다른 호스피스 환자들과 달리 호스피스 치료로부터 1년 9개월이 넘은 2024년 12월까지 살아있었다.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 사전투표에서 카멀라 해리스를 찍을 수 있을 때까지 살아있는 것이 목표라고 아들에게 전했다고 한다. 경합주인 카터의 거주지 조지아주의 사전투표는 10월 15일에 시작하므로, 100세가 되어서 표를 던지게 될 것이다.
2024년 10월 1일 100세 생일을 맞이했다. 언론사에서 여러 기사를 냈고 조 바이든 대통령은 2일 전에 축하 메세지를 보냈다.
현지시각 10월 16일, 사전투표로 카멀라 해리스에게 투표하면서 소원을 성취했다. 현지시각 11월 5일, 대선 본투표 당일을 맞이하면서 선거 결과까지 확인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해리스는 트럼프에게 참패하게 된다.
미국 현지시각 12월 29일 15시 40분, 호스피스 간호를 받던 자택에서 별세하며 향년 100세 89일로 생을 마감했다.
○ 평가
경제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에 발목이 잡혀 실패한 대통령으로 평가를 받지만 이란 사태는 미국 내 이란 재산을 풀어주겠다는 조건을 내세워서 사실상 카터가 해결한 것이었고, 사랑의 집짓기 운동 등으로 퇴임 후에 훨씬 더 존경받는 미국 대통령 중에 특이한 인물로 남았다.
그는 2002년 말 인권과 중재 역할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었다.
이외에도, 그는 대통령 재임 시절은 물론 퇴임 후에도 지속적으로 여러 장기 집권중인 독재자들을 만나왔는데, 그와 만난 독재자들 중 절대 다수가 얼마 되지 않아 최후를 맞이하게 되며 ‘독재자의 사신’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