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해방신학 : 역사와 정치와 구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 분도출판사 / 2000.5.31
- “해방신학”의 이론적 초석이 된 대표적 저서의 하나
신학의 과제는 “시대의 표징”을 식별하여 교회와 사회 안에서 예언자적 기능을 다하는 일이며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신 “인간 해방”을 현실화하는 것이라 역설하면서 신학의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이 책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남미 여러나라에서 일어난 자유화 운동에 투신하고 있는 남녀들의 체험을 복음에 비추어서 고찰해보았다. 오늘의 불의한 상황을 철폐하여 보다 자유롭고 인간다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공동 노력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신학적 반성이다.
해방운동이 야기시킨 문제점들의 워낙 새롭고 변화가 심하여 명백한 개념을 구사하기 힘들었던 용어 문제를 방법론적으로 정의하고 해방의 신학이 전통적인 문제인 동시에 새로운 문제라는 것을 재확인하며 현대 세계안에서 교회의 실제활동을 제시하고 있다.
최근 교회안에 유행어처럼 되어버린 해방신학에 미묘한 오해를 정리해주며 사회적 정치활동에 보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현실과 우리 자신을 진단하고 참된 의미의 인간 해방을 현실화 하는데 도움을 준다.

○ 목차
서론
제1부 신학과 해방
제1장: 신학: 비판적 사색
제2장: 해방과 개발
제2부 문제제기
제3장: 문제제기의 과정
제4장: 제시된 해답
제5장: 교회와 세계를 양분한 데서 초래된 위기
제3부 라틴아메리카 교회의 당면과제
제6장: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운동
제7장: 해방운동과 교회
제8장: 교회의 당면 과제
제4부 해방의 신학
전편:신앙과 신인간
제9장: 구원과 해방
제10장: 역사의 하느님
제11장: 종말론과 정치
후편: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새로운 사회
제12장: 교회: 역사의 성사
제13장: 가난과 인간의 연대성
결론

○ 저자소개 : G. 구티에레즈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Gustavo Gutiérrez, 1928년 6월 8일 ~ 2024년 10월 22일)는 페루 출신의 철학자이며 신학자이며 도미니칸 수도회의 사제이다.
노트드담 대학교에서 교수로 있으며 여러 북미와 유럽의 대학교에서 방문 교수를 역임했다.
해방신학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28년 6월 8일, 페루의 리마에서 출생.
.1959년 사제로 서품.
.리마 가톨릭 대학교의 신학 교수이자 페루 가톨릭 학생 전국 연합회의 지도 신부.
.2024년 10월 22일 선종.
.저서로 <해방신학>, <해방신학의 영성> 등이 있다.
– 역자 : 성염
교황청립 살레시오대학교에서 라틴문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와 서강대학교에서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주교황청 한국대사를 지냈다.
「고전 라틴어」 등을 저술하고 아우구스티노의 작품들을 우리말로 번역했으며, 2020년에 한국가톨릭학술상을 받았다.

○ 독자의 평 1
“그래, 그래도 사랑이다.”
이 책을 집어든 출발점은 석탄발전소 노동자가 죽었을때 내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의 설교말씀 중에 그 어떤 얘기도 없으며, 오히려 동성애 차별이 교리적으로 타당하기에 삭발까지 해가며 ‘드러운 것’이라 목청을 높이는 모습에서 ‘이것이 바른 기독교적 행위 인가’의 의문에서 출발했다.
해방신학은 60년대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어난 신학이며 70년대에 우리나라에 와서는 민중신학으로 발전된 신학적 이론이다. 서론에 저자인 쿠티에레즈는 압제받고 착취당하는 남미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자유화 운동에 투신하고 있는 체험을 그리스도교 복음에 비추어서 고찰해 보려는 하나의 시도라고 해방신학을 정의했다.
p28 주님과 교제한다는 사실은 곧 우리 이웃 사람들을 위해 구체적이며 창조적으로 봉사, 헌신하는 그리스도교 생활을 의미. (중략) 신학은 인간 자신과 인간의 근본적 원리원칙에 비판적 사고가 되어야 마땅하다. p34 유린당하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 항의하고 국민 대다수가 당하는 착취에 대해서 투쟁하며, 사랑을 자유로이 해방시키고, 정의와 우애가 군리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신학이 해방신학인 것이다.
p 79~침묵하는 것이 과연 교회가 중립적으로 순수하게 종교적 역활을 수행하는 것일까? 교회는 세계의 일부이며91 교회가 현세 영역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교회가 독재정권이나 전제정권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그들의 처사에 , 교회는 비 세계가 아니다. 정의의 사회를 건설하는 일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로 환산될 수가 있으며 해방운동에 참여하는 일 그 자체가 이미 구원사업이라는 것이다.
p129 하나님은 때가 되자 당신 아들을 인간으로 세상에 보내시어, 아들로 하여금 인간을 결박해 온 모든 종속, 즉 기아와 비참, 압제와 무지, 인간 이기심에서 근원한 불의와 증오로 부터 모든 인간을 해방시키게 하신것이다. p140 교회가 그 사명을 다하는 데 ‘권력’의 힘보다느 ‘주님’의 힘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 줘야 하며 그 지상적 유대는 그 나라의 소외된 인간들과의 유대, 그들의 관심과 투쟁을 함께하는 유대뿐인 것이다.
p160 오늘의 교회가 부심해야 할 일은 교회 밖에 사는 사람들에게 신앙을 증거하는 일이 아니라, 교회 안에 살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신앙을 증거하는 일이다. “크르스천이여, 그대의 품위를 생각하라!”는 레오 교황의 충고가 오늘의 크르스천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로 여겨진다.
p181 현세사회를 건설하는 일도-전체 인간사를 포괄하는-구원 과정의 일부로 인정해야 하며,인간의 활동과 사회적 행동원리를 고찰하는 신학사상은 모두 이같은 원리에서 출발. 이 세계를 변혁시킨다는 것은 곧 인간이 된다는 것. 인간다운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며, 다시 말해서 구원받는다는 것. 비참과 착취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정의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구원활동의 일부가 된다.
p219-229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어주고 멍에를 풀어주는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버리는 것이다.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것.(이사야 58 6-7)
이웃을 하나님께 다가갈 기회 또는 도구가 아닌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 이웃은 개인이 아닌 사회적 관계속에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인종적 요소를 포괄하는 인간을 가리킨다.
p260 예수는 보이지 않는 ‘성화상’이 아니며 초월적 불가견적 세계를 나타내는 표징으로 변형되었다.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태도 성전을 정화하던 행동은 왕으로 추대할 만큼 위력적이며 혁명가였으며 그 제자들은 혁명당원이였다. 율법에 맹종하던 유대인보다 더 철저한 혁명가였다. 인간의 능동적 참여로써 하늘나라를 바랬고 이러한 인간의 정치활동과 자율성을 저해하는 메시아 사상을 오히려 반대하였다.
p287 최근까지 교회는 기존 세력의 위치에 서서 자기 본위로 생각하고 공권력과 결타하며 자기만의 구원의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우월감을 가지게 되었다.
p315 만약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역사적 사회적 여건을 고력하지 않는다면, 여하한 신학도 비판적이고 온건한 신학이 도지 못하며, 오로지 기존 상황을 유지하고 현실을 도피하려는 태도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기 따름이다.
p339 신학이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하여금 사랑의 과업에 더욱 철저하고 더욱 완전히 투신하게 함으로써, 서계 안의 교회 공동체의 활동에 활력을 부여하지 못한다면 별 가치없는 신학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사랑할 힘을 주신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인 차원에서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한 그 온전한 사랑으로 참다운 인간적 박애를 건설하는 것이요, 역사적 차원에서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한 그 온전한 사랑으로 불의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것이다.
역사적, 성경적으로 민중신학의 타당성은 그 근거가 명확하며, 이로써 현재 한국의 개신교의 뿌리와 반민중성을 고려할때 개별 노회라는 분파성과 동성애 주장은 반예수적 주장이며, 목회 지도자들의 교회의 부흥 얘기는 공허한 메아리로 들리는것이 이해 될만 한 것이다. 철저히 낮아지고 또 서민적이지 않고서는 개신교가 설 자리는 돈밝히는 종교로만 남을 뿐이다. 급기야 예수님에게도 외면 받을것이다.

○ 독자의 평 2
쌍용차 사태의 해결을 염원하는 미사, 4대강반대, 해군기지 반대 미사 등 국가권력의 회개를 촉구하는 비상 시국회의 및 미사를 개최하는 일부 종교인의 집단적인 정치적 관여가 과연 신앙의 기본원리에 합당한 것인가 (또는 진정 저들의 말대로 빨갱이인가)를 살펴보기 위해 이와 유사한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해방신학”을 읽어본다 (난 크리스천이 아니므로 사견없이 요약만 함).
해방신학은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이 미국의 식민지배하의 착취와 억압을 받는 문제에 대해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교회의 일부에서 신학적 반성과 더불어 현실 속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아내고자 하는 것으로
- 개념
신학은 영성의 증진을 목표로 하여 플라톤사상의 범주안에서 영성의 세계를 강조하고 현세의 생활은 의미를 두지 않다가 12c부터 지식도 신학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기능으로 보고 토마스 아퀴나스, 아리스토 텔레스 등에 바탕을 둔 학문으로 성립되기 시작하여 체계화가 이루어졌다.
신앙을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를 버리고 하느님과 이웃을 향하는 사랑으로 볼때 타자와의 관계, 즉 “타자들에 해당하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점과 주장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시되어 현실참여 및 비판과 실천의 움직임이 강조되었으며 이것은 역사속에서 하층민과 민중의 구원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이에 압제받는 대중과 사회계급의 염원을 담아 역사속에서 행해지는 성서적 근거로 “해방”이라는 용어를 정의한다.
- 연관성
이제 신앙적 구원과 역사적 해방 사이의 연관성을 신앙과 인간실존, 신앙과 사회현실, 신앙과 정치활동에 견주어 좀더 살펴 본다.
교회는 구원을 독점 분배하는 기관이다보니 쉽게 정치적으로 엮이게 되므로 (현대에도 여러 국가에서 교회는 자본주의 사회의 혜택을 독점하는 계급으로부터 특혜를 받아 누리고 있으며 체제의 일부로 귀속되어 그리스도교 메세지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했다.) 하느님 나라에는 속적인것이 있으면 안된다고 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치사상에 의해 교회와 세계 (사회현실)를 분리 하여 정치참여를 제한했으나 16c 프랑스 혁명 등 역사적 변화의 움직임에 따라 교회의 사명또한 복음선포와 현세영역에 그리스도교 정신을 함양시키는 것으로 되어 평신도는 교회와 정치참여 모두에 관여하도록 한다.
다만 교회와 세계는 여전히 분리된것이므로 표면적으로는 사제의 정치참여를 제한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독재정권이나 전제정권에 협력하게 되고 “교회의 정치 불간섭”은 이를 은폐하기 위한 용도로만 적용하게 된다 (즉 평신도 운동이나 사제들의 어떤 단체가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태도를 취할때에만).
지배계급은 언제나 교회를 압잡이로 세워 자기 이익을 비호하고 특권적 위치를 유지하는 데 이용해 왔다.
그러던 그들이 오늘에는 교회의 순전히 종교적이고 영적인 직능을 강조하는 것이다.
교활한 그들의 눈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심장부에서 부터 자기네를 “타도하려는”움직임이 일고 있음을 발견한 까닭이다.
이에 신학의 의미를 재고찰 하게 되는데 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신학도 우주적 관점에서 인간학적 관점으로 돌려진다.
즉 세속성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관게를 맺는 필수요소이므로 종교를 속계(俗界)와 상관시켜서 재정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토마스아퀴나스 및 바울의 사상을 따라 인간이 받은 소명은 적극 활동하여 하느님을 뵈는 것으로 정의사회를 전설하는 일이 하느님 나라의 건설로 환산되는것, 즉 해방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구원사업으로 정의한다.

- 진행
이러한 움직임은 선진국형 자본주의적 개발에 의해 극심한 빈부격차가 발생한 라틴아메리카에서 대두되는데 국가간 의존관계가 이루어져 선진국과 저개발 국가의 격차가 심해지자 진정한 개발은 이 종속 관계를 탈피해야 함을 의식한데에 있다
경제적 종속관계는 기술, 정치, 문화까지도 종속시키며 그 나라의 집권층은 자주적 발전을 포기하고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 가담하여
이득을 분배하는 ‘국적없는’ 무리들로 변절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검은머리 외국인 되겠다.
“의존관계는 특히 불평등한 수개의 구조들의 경합에서 온다.
세게 시장의 확대가 국가들간에 의존(과 지배의 현상)을 조성해 놓았다.
그리하여 국제 자본주의 체제에 장악된 이 통합체 내에 불평등과 차별이 등장한 것이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외적으로 지배하에 두는 체제는 멀지 않아 그 피지배국가의 종속 구조를 발견하고 그 속으로 깊이 침투한다.
어느 정도까지 침투 하느냐 하면 그 국가의 내외 구조 전부를 장악할 만큼 되는 것이다.”
이에 해방운동은 역사적 현실에 맞게 새로운 고유의 사회주의 노선을 만드는것을 목표로 국민들의 의식이 바뀌어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적극적인 사회참여 형태로 바뀌어 간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불의한 기존 질서와의 결탁을 끊고 비참과 빈곤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운명을 같이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자기를 부르신 주님께 성실해지는 길이요, 자기가 설교하는 복음에 충실하는 길이라고 하면서 라틴아메리카 교회의 처신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1.교회는 압제받는 대중과는 연대성을 가지고, 국가와는 분리되어야 함
2.의식화 하는 복음화(성서의 해방시키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압제받는 이들을 복음화 시켜야 함)
3.그리스도의 “가난과 박해를 당하면서” 에 따르기 이해 권력과 특혜를 버려야 함
4.교회구조의 부적당성 개편이 필요
5.성직자의 생활양식의 변화가 필요 (생활비를 직접 벌며, 평신도의 사목적 결정에 참여 유도)
그러나 여전히 교회 내부에는 분열이 있었으므로 이에 대한 대안은 과제로 남아있다.
해방운동을 놓고 라틴아메리카 교회는 날카롭게 “분열”되어 있다
…중략..
심지어는 크리스천 마저 압제받고 박해받는 부류와 압제하고 박해하는 부류, 고문당하는 자들과 타인을 고문하고 여기에 동조하는 자들로 양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착취와 불의에 시달리는 크리스천들과, 그것을 자행하는 기존질서의 혜택을 누리는 크리스천들로 나뉘어 서로 대치하고 있다
- 성서
실제 크리스천들이 해방운동에 참여하는 궁극적 동기는 불의하고 불평등한 사회가 복음의 요구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다는 생각때문인데 구원이라는것은 이승에서 죄를 치유받고 이 치유로 후세에서 구원을 얻는 바탕이 되는것이기도 하지만 역사 내에 실재하며 인간과 하느님의 친교이자 인간과 인간의 상통인 것이므로 인간이 현세계를 건설하는 일을 포기하거나 타인을 향하여 자기를 개방하지 않고 제탓으로 자기 자신안에 틀어 박힌다면 이는 곧 하느님과의 합일을 거절하는 소행이라고 한다.
마태복음 25장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성서에 근거하여 창조와 구원의 관계를 보면
창조는 구원 이전의 단계가 아니라 구원과정의 일부분으로서 제시하며 출애굽을 통한 이스라엘의 해방은 정치적 해방이면서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것이므로 재창조이자 창조의 완성으로 본다.
또한 죄는 개인 내면에만 해당하는 사사로운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이며, 인간들 간의 사랑과 형제애의 부재요, 하느님 및 타인들과의 친교를 단절하는 것이므로
압제적 구조,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민족들과 인종들 사이에 또 사회계급 사이의 지배와 노예제도 속에 죄는 엄연히 현존한다.
그리고 성서의 하느님은 희생 제물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구현을 바라시며
이사야 58장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2)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중요한 것은 지(知) 가 아니고 행(行) 이다.
야고보서 2장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예수는 부유층과 세도층과 정면으로 충돌했고 서민들을 편들었으며 로마관례에 따르면 십자가에 붙이는 명패는 사형의 죄목을 나타내는데 예수의 경우에는 이 명패가 정치범임을 표시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함께 모여서 창조의 선물인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는것,
즉 이스라엘 성찬 예식의 근본 요소는 공동체적인 것이며 인간적 우애를 조장하는 목적을 담고있다
- 결론
그래서 신학은 착취당하는 사회계급이 압제자들에 항거하는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투신하는 실천을 통해서 입증되어야 하며,
해방은 정치적해방, 역사를 통해 달성되는 인간의 해방, 죄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 져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인 차원에서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한 그 온전한 사랑으로 참다운 인간적 박애를 건설하는 것이요, 역사적 차원에서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한 그 온전한 사랑으로 불의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것이다.

○ 독자의 평 3
“불의한 현실 속에서 교회가 취할 수 있는 선택”
해방신학이란 남미를 중심으로 정립된 일종의 과감한 사회참여의 신학이다. 20세기 중반 남미는 극심한 부패에 시달리고 있었고(오늘날에도 크게 개선되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 결과 엄청난 빈부의 격차가 발생하고 사회 정의가 무너지면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 과연 교회의 신앙에 적합한가를 두고 많은 도전들이 있었고,(사실 정확히 말하면 교회는 기득권층과 결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문제를 그냥 지나치지 않기로 결심한 이들이 나섰고, 당연히 이들의 활동에는 강한 정치적 행동이 포함되어 있었다.
해방신학은 그렇게 처음부터 실천적인 차원이 먼저였다. 하지만 어떤 운동이 계속 유지되려면 이론적 근거가 마련되어야 하는 법, 1973년에 처음 나온 이 책(우리나라엔 1977년에 첫 번역본이 나왔다)은 당시 남미 가톨릭교회 주도의 해방신학의 창시자인 구스타보 구티에레즈가 이 새로운 운동의 신학적 근거를 정립하기 위해 쓴 책이다.
책의 1부에서는 신학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해방과 개발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정립한다. 흥미로운 건 흔히 신학에서 주요 주제로 다뤄지지 않는 ‘개발’이라는 것이 일찌감치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그 시절 개발 중심의 사회정책이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지적하면서, 그에 대한 좀 더 확장된 개념인 ‘해방’을 신학의 주요한 주제로 제기한다.
2부에서는 성과 속에 대한 전통적인 구분과 분리가 어떻게 교회의 바른 신학적 행동에 문제를 가져왔는지를 지적하면서 이원론을 극복해야 함을 호소하고, 3부에서는 라틴아메리카의 상황에 대한 분석이 이어진다.
4부는 전통적인 신학적 용어로 해방신학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구원론, 종말론, 역사신학 등의 분과에서 해방신학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내용상으로는 이 부분이 가장 길다.
교회의 사회 참여는 어느 정도, 어느 강도로 가능할까. 오늘날 대부분의 세속국가에서는 정교분리를 기본적인 원칙으로 삼고 있지만, 이 말이 교회가 사회의 다양한 논의와 문제 해결과정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규정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교회가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는 듯하다.
물론 그 이유를 전혀 추측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복잡한 사회문제는 필연적으로 어느 한 쪽이 무조건 옳고 다른 쪽은 틀리는 식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이 과정에서 어느 편에 서느냐는 (좁은 의미의) 정치적인 문제로 비워질 가능성이 높다. 이는 교회를 정쟁의 한 가운데로 끌고 들어가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 결과 교회는 매우 누그러진, 그래서 누구에게도 별 도전이 되지 않는 좋은 이야기만 하는, 그래서 아무도 귀 기울일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과연 교회는 충돌이나 비난이 두려워서, 정쟁에 끌려들어가기 싫어서 이 문제를 지금처럼 둬도 괜찮을까?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가톨릭에서 시작된, 그리고 지나치게 “좌파적인” 이 신학에 대해 심한 경계를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수십, 수백 억짜리 건물을 화려하게 꾸며놓은 강당을 채우는 게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인지는 곱씹어 볼 일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의 가장 기초적인 필요를 모른 체 하지 않으셨다. 당시 성전을 누구보다 화려하게 꾸미려고 했던 인물은 헤롯이었고, 대제사장들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흥미로운 부분이다. 자신의 성전을 세우려는 이들은 하나님의 성전이신 그분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전반적인 신학적 전개에는 크게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다만 만인구원론을 주장하는 부분은 견해를 달리 하는데, 이 주장이 저자가 세워가고 있는 해방신학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벽돌인지는 조금 의심스럽다.
물론 저자가 이 책을 쓴 197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상황과 오늘 우리의 상황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가 기득권과 한 패가 되어 있다는 비판이 존재하는 우리의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게 할 수 있을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