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년 12월 11일, 조조의 아들이자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초대 황제 조비 (魏 高祖 文皇帝 曹丕, 187 ~ 226)가 무력으로 후한 헌제를 폐위시키고 위나라 세워 삼국 시대 시작
조조의 아들이자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초대 황제 조비 (魏 高祖 文皇帝 曹丕, 187 ~ 226)
위 고조 문황제 조비 (魏 高祖 文皇帝 曹丕, 187년 ~ 226년 6월 29일 / 음력 5월 17일)는 조위의 초대 황제로, 자는 자환 (子桓)이다. 무제와 무선황후의 아들로, 무제가 다진 기반을 이어받고 후한 헌제의 선양을 받아 조위를 건국하였다.
○ 생애 및 활동
조비는 조조와 원래 측실이었던 황후 변씨 사이에 출생한 서자였다. 태어날 때 하늘에 푸른 뭉게구름이 피어올라 후광처럼 머리 위를 감쌌다고 한다. 또한, 본인의 저서인 《전론》(典論)에 따르면, 어릴 때부터 조조의 영재교육을 받고, 6살 때 궁술을 마쳐 좌우 어느 쪽으로도 자유자재로 쏠 줄 알았으며, 8살 때는 말에 올라탄 채 활을 쏠 수 있었다. 검술도 좋아해 여러 스승을 사사하고 모든 검법에 숙달했고, 문학적 소양도 뛰어나 이미 8살에 붓을 들면 그대로 훌륭한 문장이 되고, 고금의 경서와 그 주석, 제자백가 등에 완전히 통달하여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이것은 객관적인 내용이 아니라 자신의 저서에 나오는 내용일 뿐임을 고려해야 한다.
조조에게는 25명의 아들이 있었다. 측실 유씨 부인이 낳았으나 본래 정실인 정씨 부인의 양자로 들어가 적자 (嫡子)로 입적된 장남 조앙은 197년 (건안 2년)에 장수(張繡)와의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역시 적자로 입적된 차남 조삭은 조앙이 죽기 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 후 변씨 부인이 정실이 되었으므로 조비의 후계 지위는 굳건해 보였다. 그러나 환씨 부인 사이에 태어난 조충 (曹沖)이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조조는 그를 매우 예뻐하였다. 그러나 조충은 208년에 13살의 어린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조충이 죽자 조조는 다른 아들들에게 “조충이 죽은 것은 나에게는 불행이지만 너희들에게는 행운이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조조가 조충을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동진의 역사가 손성은 이에 대해 조충은 어차피 서자라 살아있었더라도 후계자가 되기 힘들었기에 조조가 말을 가볍게 한 것이라고 평했다.
204년 아버지의 큰 경쟁 상대였던 원소(袁紹)의 세력을 공격하는 데 종군한다. 거기서 원소의 둘째 아들 원희(袁熙)의 아내인 견씨를 약탈하여 처로 삼았고, 견씨는 이듬해 조예(曹叡)를 낳는다. 211년 조비는 오관중랑장 겸 부승상으로 오르지만, 조조는 다섯째 아들 조식(曹植)의 재능을 아꼈으므로 아직도 후계자가 결정되지 못한다. 하지만 조식이 술로 말미암아 조조의 노여움을 사고 총애를 잃자, 마침내 217년 그의 나이 31살 때 조조가 위왕에 오르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조비는 행동이 가볍고 감정 표현을 자제하지 못하는 면도 있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세자로 낙점되자 너무나 기쁜 나머지 옆에 있던 신비의 목을 끌어안고 기뻐했다고 한다. 신비가 집에 돌아가 총명하기로 유명한 딸 신헌영에게 이 일을 말해주니, 그녀는 왕이 되어 국사를 짊어진다는 게 고된 일인데도 그렇게 기뻐하는 것을 보니 위의 앞날이 오래갈지 걱정된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실제로 위나라는 오래가지 못하고 멸망하였다.
조비는 220년 정월 조조의 죽음으로 위왕의 자리를 이어받았고, 조조의 지위를 승계한 그 해에, 결국 후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황제에 올랐다. 그리고 수도를 허창에서 낙양으로 옮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비가 헌제를 협박하여 제위를 넘겨받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정사 《삼국지》에서는 그런 묘사는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헌제(민제)가 스스로 양위를 주도한 게 아니라 조비가 선양이라는 평화로운 형식적 절차를 통해 한나라 4백년 사직을 찬탈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리하여 조비는 황제로 즉위하고, 헌제는 산양공에 봉해져 하내군 산양현 1만 호를 받았으나, 한때는 주살되었다는 소문도 널리 퍼졌는데, 촉한에서는 이 소문을 유비 (劉備)가 황제로 즉위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실제로 헌제는 주살되지 않았고 이후 조예 대에 죽고 시호도 추증받는다.
황제에 즉위한 이후 조비는 내치에 힘쓴다. 제도의 확립과 민심의 안정 그리고 유학의 부흥에 힘쓰는 등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제도적인 면에선 행정 구역을 재확립하고 구품관인법을 실행한다. 구휼책이나 사면령을 종종 내려 민심의 이반을 제지하고자 하고 일부 지역 한정으로 세금 면제책도 시행하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구휼책들은 시대와 왕조를 막론하고 어느 때나 존재했던 제도로 조비만이 시행한 제도도 아닐뿐더러 현대적인 복지제도와는 거리가 멀다.
유가 부흥책의 경우 사회의 안정과 전통적인 향촌 질서를 부활시키고자 한 정책이었다. 유학의 부흥을 위하여 공자의 묘당을 다시 세우고 주변에 그를 관리하게 하는 한편 제사 규칙을 정하고, 더 나아가 장례 제도를 개선한다. 그뿐만 아니라 유교 경전 저술에도 힘썼기 때문에 조비의 유가진흥에 기울인 이런 노력은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유가 부흥책으로 도덕성의 향상을 기치로 삼았음에도 스스로는 이와 반하는 패륜적 행위를 거듭 자행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지도 계급의 도덕성 향상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또한, 구품관인법의 제정은 사대부 계층의 문벌 귀족화를 초래해 수많은 폐단을 낳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때 문벌귀족화된 사대부 계층들이 이후 고평릉의 변으로 위나라의 정권을 찬탈하게 된다.
한편 조비 시대에는 법률의 가혹함으로 백성들의 원성이 컸다고 한다. 백성들을 계속 이주시켜 그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있었다. 농민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것은 예사였으며 척박한 자신의 고향을 백성들을 이주시켜 강제로 개간하려 하자 노육은 이를 반대했다. 그러자 조비는 그 의견에는 따랐지만 노육을 원망하여 좌천시킨다. 또 백성의 딸이나 심지어는 유부녀까지 빼앗아서 병사들의 아내로 주기도 했다. 이것은 원래 조조 때부터 있었던 제도이지만 조비 대에는 일반 여성을 강제로 다른 남자에게 결혼시키는 지방 관리들이 많아 백성들의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위가 망한 이후 육조 시대 때 이미 각종 야사나 민담에는 조비를 비판하는 내용이 범람하게 된다.
군사적으로는 이릉대전을 앞두고 위와 촉의 협공을 우려한 손권 (孫權)이 거짓으로 순종의 뜻을 밝히며 항복해오자 그 항복을 받아들인다. 유엽은 손권의 속마음을 알고 항복을 받아주는 대신 촉과 함께 오를 먼저 정벌할 것을 건의했지만 조비는 받아들이지 않고 손권을 오히려 오왕으로 책봉한다. 손권을 오왕으로 책봉하면 오의 단결력이 커질 것을 우려한 유엽이 이도 반대했지만 조비는 듣지 않았다. 이릉대전에 승리하자 유엽의 예상대로 손권은 즉시 태도를 바꾸어 태자를 인질로 바치기를 거절하였다. 분노한 조비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군을 동원해 매년 손권을 공격하지만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국력만 낭비하였고 이는 난세를 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 이로 인해 오나라를 적으로 돌렸으며 이릉대전에서 대패한 촉나라는 편하게 국력을 회복하여 조비의 뒤를 이는 조예 대에는 촉의 제갈량이 북벌을 하게 된다. 조예는 재위기간 내내 양 국가의 협공을 막아내야 했다. 조비의 군재는 아버지인 조조나 동생인 조창과는 달리 그리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는데 이릉대전 당시에 조비는 스스로 유비가 병법을 모른다고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자신이 오나라를 침공했을 때 서성이 급하게 만든 가짜성에 속아 후퇴했을 정도였다.
226년 (황초 7년), 평소 주색에 빠져있던 것이 원인이 되어 병을 얻은 조비는 병세가 위독해지자 아들 조예를 황태자로 책봉한 후 조진 (曹眞)과 조휴 (曹休), 사마의 (司馬懿), 진군 (陳羣)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사망하였다. 그가 제위에 오른 지 7년, 나이 40살 때의 일이었다. 조예는 조비가 사사로운 이유로 피해를 준 모든 사람을 찾아내어 사면, 복권했다.
○ 평가
진수는 조비에 대해 “문제는 천부적으로 문학적 소질이 있어서, 붓을 대면 문장이 되었고, 넓은 지식도 갖추고 있었고, 기억력이 탁월해 다방면으로 재능을 갖추었다. 만일 여기에 그의 도량이 약간만 더 크고 공평한 마음 씀씀이에 힘쓰며 도의의 존립에 노력을 기울이고 덕망이 있는 마음을 더욱 넓힐 수 있었다면 어찌 고대의 현군이 멀리 있었겠는가.”라고 평했다. 서진이 위나라의 선양을 받아 건국했기 때문에 위나라를 건국한 조비를 직접적으로 비판할 수 없어서 돌려 말했지만, 바로 말하면 “조비가 천부적인 문학적 소질은 갖추었을지 모르지만, 도량도 작고, 마음 씀씀이도 공평하지 않았으며, 도의를 지키는 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덕망도 없었으니, 고대의 현군과는 거리가 멀었다.”라는 뜻이 된다. 제왕의 덕목과 별로 상관없는 예술가적 기질은 갖추었지만 정작 제왕이 갖추어야 할 덕목은 전혀 갖추지 못했다는 점에서 송의 휘종과 유사한 면이 있다.
○ 가족 관계
황후 : 문소황후 견씨
장남 : 명제 조예
장녀 : 동향공주(東鄕公主)
황후 : 문덕황후 곽씨
후궁 : 귀인 이씨(貴人 李氏)
차남 : 찬애왕 조협
후궁 : 귀인 시씨(貴人 柴氏) – 곽황후와 함께 입궁
후궁 : 귀인 음씨(貴人 陰氏)
후궁 : 귀인 유씨(貴人 劉氏) – 한 헌제의 장녀, 유귀인의 언니
후궁 : 귀인 유씨(貴人 劉氏) – 한 헌제의 차녀, 유귀인의 동생
후궁 : 부인 이씨(夫人 李氏)
후궁 : 숙원 반씨(淑媛 潘氏)
3남 : 북해도왕 조유
후궁 : 숙원 주씨(淑媛 朱氏)
4남 : 동무양회왕 조감
후궁 : 소의 구씨(昭儀 仇氏)
5남 : 동해정왕 조림
후궁 : 서희(徐姬)
6남 : 원성애왕 조례
후궁 : 소희(蘇姬)
7남 : 한단회왕 조옹
후궁 : 장희(張姬)
8남 : 청하도왕 조공
후궁 : 송희(宋姬)
9남 : 광평애왕 조엄
후궁 : 손희(孫姬)
후궁 : 임씨(任氏) – 조비가 처음으로 맞이한 처첩, 성격이 온순하지 못해 조비와 잦은 불화가 있었음. 견황후가 조비에게 시집온 뒤 출궁됨.
후궁 : 설영운(薛靈芸)
후궁 : 막경수(莫瓊樹)
후궁 : 단교소(段巧笑)
후궁 : 진상의(陳尙衣)
침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