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잡기장

사르트르 이야기 (1) 계약결혼
(1) 얼마 전 <수요인문학교실>에선 <실존주의 사상가> 중 한 사람인 사르트르 (Jean Paul Sartre 1905-1980)를 공부했다. 나는 그의 출생과 성장, 교육과 삶의 여정, 활동과 저서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하여 사르트르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세개의키워드 (key word)로 첫째는 <계약결혼>, 둘째는 <앙가주망>, 셋째는 <노벨문학상 거부>를 꼽아서 이야기했다.
(2) 처음은 그의 <계약결혼 Marriage Contracted>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지난 날 인간사에서 겪어왔던 여러가지 결혼 이야기를 펼쳐 본 후 사르트르의 <계약결혼> 이야기를 나누었다.
(3) 지난날 서구에서의 결혼 역사를 더듬어 본다. / 원시시대엔 혼인개념 자체가 없었다. 인간들도 다른 짐승들과 마찬가지로 짝짖기를 통해서 생식과 출산을 거듭하고 종족을 보존해왔다. / 그러다가 농경시대에 접어들자 혼인이라는 형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때 결혼은 노동력의 증가와 재산의 안전한 승계를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혼인은 법적제도로는 자리를 잡지 못했다. 인류의 오래된 법전 중 하나인 하무라비법전에도 혼인에 대한법적 구속력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 시대엔 一夫多妻나 一妻多夫 및 근친혼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풍습은 구약성서의 족장들에게도 나타난다. 이삭은 자기 4촌 리브가와 결혼하고 야곱은 4명의 아내를 두었는데 그 중 레아와 라헬은 6촌 자매였다. 이집트의 라암세스2세는 자기 딸과 결혼했고 크레오파트라는 자기 남동생과 결혼했다. / 결혼이 사회적 및법률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그리스-로마 시대에 들어서였다. 이 시기의 결혼은 일종의 <계약> 혹은 <거래>였다. 사르트르가 말한 <모든 결혼이란 계약에서 출발하여 계약을 지키는 것으로 유지되는 계약체결>이라는 말은 이를 근거로 한 말이다. 이 때의 결혼은 주로 <가문과 가문 사이의 계약>으로 왕족은 왕족과, 귀족은 귀족과, 천민, 농민, 노예들은 그들과 걸맞는 상대와 결혼하였다. 이런 풍습은 르네상스 이후 근대 까지 이어져왔다 (지금도 영국이나 북유럽 처럼 아직도 왕실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그들 왕족들 사이에서의 결혼이 유지되고 있으며 재벌들이나 권력자들 역시 그들 사이에 서혼인하는 모습 역시 비슷한 형태라고 할수 있겠다). 이런 전통에 따라 서구에서의 결혼은 같은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근친혼과 거래 형식으로 치루어지는 계약결혼적 성격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 로마 시대 후기엔 결혼이 강력한 법적 구속력을 지니게 되었다. 16세 이상의 성인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지 않으면 국가는 독신세 (Single Tax)나 징집 같은 것을 통해 결혼을 강제화했다. 그것은 보다 강력한 국방력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 중세시대에 접어들자 결혼에 교회가 개입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신부의 집례에 따라 성당에서 결혼하는 것이 의무화 되기 시작했다 (이런 역사는 지금도 호주를 포함한 일부 유럽 기독교 국가에서는 자연스럽게 신부나 목사에게 공인된 주례자의 자격, The Authorized Celebrant을 주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4) 한국사회에서의 결혼 역사도 비슷하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의 결혼은 철저하게 근친혼이 주류를 이루었다. 가문의 혈통을 유지하고 가문의 재산이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다른 가문과 결혼하는 것은 천민들 사이에서나 하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조선시대 말까지 결혼은 법적으로 제도화되어 있지 못했다. 결혼신고를 받는 기관 (관아)도 없었다. 그러나 혼인 자체는 장려되어서 결혼한 사람만이 어른으로 취급되어 비록 10살짜리라도 결혼을 했으면 존댓말을 쓰며 어른대접을 하였고,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30이 넘었어도 아이로 여겨서 반말을 했다. 혼례식도 왕족이나 양반들 사이에서만 있었고 평민이하에서는 그냥 정한수 한그릇 떠놓고 양측이 인사하는 것으로 치루어졌다. 양반가문에서 혼례식을 통하여 태어난 자식들은 ‘적장자’라 불리웠고, 혼례식도 없이 태어난 자식들은 ‘서자’ 혹은 ‘첩의 자식’이라 불리웠다. 부모의 재산을 물려 받거나 관직에 나갈 수 있는 신분은 오직 적장자들 뿐이었다. 조선시대엔 본처와 구분되는 첩제도가 자리를 잡아 양반들 사이에서는 일부다처 제도가 당연시 되었다. 한국에서의 법률적 결혼은 20세기 들어 일제 강점기로 부터 시행되었다. 1909년 처음 혼인신고가 시작되었고, 1920년 이후 부터는 법적 강제성을 띠게 되었다. 해방 후 <호적법>이 확립됨으로 현재는 중혼금지, 6촌 이내의 근친결혼 금지, 18세 이하 (여자는 16세)는 부모의 동의를 받아야 결혼이 성립되게 되었다. 요즘은 종례의 호적제도도 개선되었고 동성동본의 결혼도 추진되고 있다.
(5) 앞에서 언급한대로 오스트랄리아에서는 결혼식을 치른 후 정부기관 (The Authority of the Birth, Death and Marriage)에 결혼신고를 하는 것은 결혼 당사자가 직접 할 수는 없게 되어 있다. 출생신고는 의사가, 사망신고는 의사로 부터 사망확인증을 받은 장의사가 하고, 결혼신고는 허가된 결혼주례자 (The Authorized Marriage Celebrant) 만이 할 수 있다. 결혼 주례는 보통 직업적 종교인들 (신부, 목사, 이맘 등)이나 교육을 통해 별도로 주례자 허가를 받은 Civil Celebrant 만이 할 수 있다. Authorized Celebrant는 자신의 교단으로 부터 정식으로 목사나 신부가 된 사람에게 일정한 교육과정을 거친 후 주어진다.
(6) 나는 호주에서 The Authorized Celebrant가 된 후 지금까지 약 180여 쌍의 결혼주례를 했다. 거기에는 수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다. 이민자들 사이의 국제결혼식 부터 영주권을 얻기 위해서 치룬 결혼식들과 5번이나 하는 재혼식 까지 여러가지 경험을 해 보았다. 그런 이야기들은 따로 나누고 싶다. 호주에서는 결혼식을 하기전 혼인신고를 위해서 미리 준비해야 할 서류들이 있다. The Notice of Intended Marriage를 비롯하여 재혼자들에게는 다른 서류들을요청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서류는 Certificates of Marriage이다. 이 서류에는 자신의 이름, 주소, 직업, 초혼인지, 이혼 후 재혼인지, 사후 재혼인지, 혼인법에 어긋남은 없는지, 친인척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나이는 18살 이상인지 등 여러가지 물음이 있다. 자세히 읽은 후 신랑과 신부는 반드시 주례자 앞에서 서명을 해야한다. 나는 결혼식을 앞에 두고 신랑과 신부를 두 번 만난다. 처음은 혼인신고를 위한 서류를 준비하기 위해서이고 두 번째는 결혼교육을 하기 위해서이다. 결혼교육을 할 때, 나는 이런 물음으로 시작한다. <당신들은 왜, 무슨 목적으로 결혼을 하려고 합니까?> 대부분 머뭇거리며 대답을 잘 못한다. <우린 서로 사랑하니까?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인간 사회와 우리 나라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자손을 얻기 위해서? 우리들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등등 여러가지 질문을 던지며 소크라테스적 문답법을 이어간다. 이후 나는 결혼의 의미와 중요성, 결혼의 역사와 결혼 후의 삶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눈다. 끝으로 나는 신랑과 신부에게 YMCA나 YWCA, 혹은 교단본부에 있는 Marriage Education Program이나 Marriage Counselling Program에 참여하여 필요한 성격검사를 비롯한 보충교육을 받도록 권장한다.
(7) 보통 교회에서의 결혼서약은 이렇게 되어 있다. <그대는 ***를 그대의 남편 (아내)으로 받아드리며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하든지, 건강 할 때나 병들 때나, 부 할 때나 가난 할 때나, 잘될 때나 어려울 때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죽음이 그대들을 갈라놓을 때 까지, 오직 이 여인 (남자) 만을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고, 도와주고, 위로하며, 신실한 남편 (아내)의 책임을 다 하며 일정한 부부의 대의와 정조를 굳게 지키기로 하나님 앞에서 서약하십니까?>
(8) 그러나 사르트르가 시몬 드 보부아르와 체결한 <계약결혼>은 우리가 보통 해 왔던 것 처럼 하나님 (신)의 이름으로 혹은 하나님 앞에서 맺는 결혼 서약이 아니라 피차 상대방을 향하여 인간적 약속을 하는 것으로 일종의 부동산 매매계약서를 작성하는 것과 흡사한 성격을 지닌다. 이들의 계약결혼은 크게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함으로 오늘 결혼계약을 맺는다. 그러나 우리는 피차 독립된 개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만 동시에 다른 것이나 다른 사람도 사랑 할 수 있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계약을 맺고 결혼하다고 해서 서로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것은 실존주의 철학의 핵심이다. 실존주의에서는 인간을 결코 일반화하지 않는다. 인간을 generalize하여, 어떤 규정이나 틀 속에 가두어 두는 것은 인간을 왜곡하게 만든다고 본다. <우리는 결혼하여 부부가 될지라도 어디까지나 개별적이고 독립적 존재다. 우리는 한 몸이 아니라 두 몸이다>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결혼 후에도 다른 남자나 다른 여자, 다른 음악이나 미술, 다른 사상이나 학문, 다른 정치나 이데올로기 등을 제각기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시한 것이다. 이들이 맺은 결혼계약서의 두 번째 핵심사항은 <우리는 피차 상대방에 대해서 정직하게 말하고 정직하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혼 후 내가 사랑하는 것들과 더 나아가 다른 애인이 생긴다 하더라도 결코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말하고, 이 정직한 생각과 행동을 피차 인정하고 그대로 존중해 준다는 내용이다. 셋 번째 핵심사항은 <우리는 경제적으로 독립한다. 우리는 부부이지만 피차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는 독립된 수입과 지출, 독립된 은행계좌를 갖는다>고 명시한다. 넷째는 <우리의 결혼계약은 매 2년에 한번씩 재검토한 후 합의하여 갱신, 혹은 연장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하여튼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이 <결혼계약>을 통하여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다> <인간은 주체적 존재다> <우리는 상호 존중한다> <우리는 정직하게 말하고 행동한다>는 원칙을 갖고 50년이 넘게 이 <계약>에 따라 부부로 살다가 죽은 후에는 나란히 옆 자리에 묻히어 있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그들의 신념과 철학에 입각하여 계약결혼을 했다. 오늘 나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오래 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약속했던 그 종교적 결혼서약이 사르트르와 보브아르가 맺은 인간적 계약결혼 보다 더 진지하고 성실했다고 확신하는가?
(9) 사르트르의 계약결혼 이후 우리 사회는 많은 변화를 경험해 왔다. 자유결혼, 동거, 여성해방, 만혼, 비혼을 비롯하여 결혼이란 해도 되고 않해도 되는 것이 되었고 한번 했지만 물릴 수도 있는 것이 되었다. 결혼신고 또한 꼭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고 결혼의 목적 또한 꼭 사랑이나 행복이 아니라 반려동물이 아닌 반려인간을 얻고 싶은 마음 같은 것으로 새롭게 변화되어 왔다. <나는 진정 왜, 무엇 때문에 결혼을 했고 지금도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는가?> (추천하는 한국 드라마 : 2016년 한국에서 방영되었던 드라마 <계약결혼>) (*)홍길복 (2026. 10.5)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