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인문학
제13장 음식문화에 드러나는 종교 이야기
(인문학으로 읽는 기독교 이야기 / 손호현 저 / 동연출판사 / 2015년)
이 장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는가?”라는 질문은 사실 “우리는 어떤 세계를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음식은 생존을 위한 물질이면서 동시에 문화적 상징입니다. 사람은 단순히 배고파서 먹지 않습니다.
음식을 무엇을 먹고, 누구와 먹으며, 언제 먹고, 어디서 먹고, 무엇을 금하고, 누구와 함께 먹는가가, 그 사람의 종교·문화·계급·민족·정체성·윤리· 세계관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음식은 인간의 몸 안으로 들어오는 가장 구체적인 문화입니다. 이 점에서 이 장은 상당히 중요한 명제를 던집니다. “음식을 이해하면 인간을 이해할 수 있고, 인간을 이해하면 종교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음식은 축소된 세계지도
음식은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작은 세계지도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는가는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음식에는 자연환경, 기후, 경제, 역사, 종교, 계급, 민족, 정치, 교역, 식민주의 등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의 김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닙니다. 배추와 고추, 마늘이라는 재료의 역사, 농경문화, 저장문화, 겨울이라는 기후, 공동체의 노동과 나눔이 들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의 빵과 포도주는 지중해 농업문화와 연결되어 있고, 유대교의 음식법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정체성에 연결됩니다. 따라서 음식 한 접시는 사실상 하나의 문화적 지도입니다.
음식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인간은 자연에서 먹을 것을 얻지만, 동시에 자연을 문화적으로 분류합니다. “이것은 먹어도 된다.”“이것은 먹으면 안 된다.”“이것은 거룩하다.”“이것은 부정하다.” 이렇게 자연의 세계가 인간의 문화적 분류체계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음식은 자연과 문화가 만나는 경계입니다.
1) 초기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라는 자신의 종교적 신앙을 ‘익투스 / ΙΧΘΥΣ’ [I (ΙΗΣΟΥΣ, 이에수스): 예수; Χ (ΧΡΙΣΤΟΣ, 크리스토스): 그리스도; Θ (ΘΕΟΥ, 테우): 하나님의; Υ (ΥΙΟΣ, 휘오스): 아들; Σ (ΣΩΤΗΡ, 소테르): 구세주]라는 물고기 상징을 통해 음식은 생존의 연명수단을 넘어 자신의 문화종교적 가치로 표현했습니다.
2) 한방에서 몸의 체질을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으로 구분합니다. 서양의 클라우디우스 갈레노스 (129?-199?)는 물, 불, 흙, 공기의 배합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따뜻하고 습한 음식은 건조하고 찬 음식과 함께 먹어야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3) 율곡 이이 (1536~1584) “격동요결”제 7장 제례에서 음식배열에 대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우동상과 좌서하, 홍동백서, 조율이시, 좌포우혜, 어동육서, 두동미서, 영혼이 된 조상의 건강까지 챙기면서 후들에게 제사는 올바른 식사생활의 방식을 가르쳐 주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2. 滿醉악마
여기에서 음식문화의 범위가 술로 확장됩니다. 술은 음식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에서 매우 오래된 문화적 산물입니다. 그런데 술은 특별합니다. 음식은 대체로 인간의 몸을 유지하지만, 술은 인간의 의식과 감정과 행동의 상태를 변화시킵니다. 따라서 많은 종교와 사회가 술을 둘러싸고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술 자체가 악한 것인가, 아니면 술을 사용하는 인간의 방식이 문제인가?’ 이 질문은 한국 개신교의 음주 문제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성서에는 포도주가 등장합니다. 포도주는 기쁨의 음료이기도 하고, 축제의 음료이기도 하며, 치료의 수단이기도 하고, 때로는 방탕과 취함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관점은 단순한 “술 = 죄”라는 등식으로 환원하기 어렵습니다.
1) 중세기 때는 알콜은 기호 식품을 넘어 식료품이었습니다. 유럽 중부 및 북부에서 빵과 함께 주요 식품이었습니다. 17세기 후반 커피가 상류사회에 들어오던 시기, 영국에서는 아이들도 술을 마셨는데 한 사람당 평균 매일 3리터를 마셨습니다.
2) 18세기 말엽에는 맥주를 수프로 끓여 먹었습니다. 이처럼 유럽에서 술을 과도하게 마신 것은 영양을 공급해 주는 기능을 했기 때문입니다.
3) 사회적 기능도 했습니다 (서로를 축배, 건강위한 건배, 받은 잔에 대한 답례, 우애를 위한 축배 그리고 술 마시기 겨루기).
4) 종교개혁시대는 마틴 루터가 16세기 ‘만취악마’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술대결의 금지를 호소했지만 금욕적인 이데올로기로는 한계가 있어서 대치 식품으로 커피를 권장하기까지 했습니다.
3. 보스턴, 일요일에 술을 팔지 않는 도시
이 부분에서는 종교적 금기가 어떻게 사회제도와 법률로 발전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청교도 전통이 강했던 미국 사회에서는 종교적 절제와 금주가 개인적인 신앙 문제를 넘어 사회적 규범이 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보스턴 사람들이 술을 싫어했다.”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종교적 가치가 사회의 공적 규범으로 전환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종교가 개인의 생활방식을 규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법과 제도까지 규정하기 시작하면, 신앙의 윤리와 사회적 강제 사이의 경계가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음식문화가 단순한 개인의 식습관이 아니라 권력의 문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1) 보스던은 청교도가 처음으로 도착한 도시였습니다. 미국의 술 금주법은 처음으로 1851년 메인 주에서 처음으로 실시해서 1846년에서 1855년 사이 13개 주가 금주법을 통과시켰습니다.
2) 그후 밀주와 밀수에 의해 부작용이 발생하자 남북전쟁이 끝나자 1865년에서 1866년 사이 거의 금주법이 사라졌다가 세계 1차 대전으로 식량이 부족하자 1919년 ‘전시금주법’을 발령하여 1920년 1월에 실시했습니다.
3) 1933년 마침내 연방의회의 결의로 금주조항은 폐지되고 1966년 모든 주는 금주법을 폐지합니다.
4. 왜 한국 기독교인은 술을 거부하는가?
이 부분은 한국교회에서 특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많은 한국 개신교인들은 “기독교인은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성서의 보편적 명령이라고 말하기에는 역사적·문화적 검토가 필요합니다.
한국 개신교의 금주 전통에는 서구 기독교의 금주운동뿐 아니라 한국의 근대화 과정, 선교사들의 생활규범, 사회개혁운동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따라서 질문은“성경이 술을 금했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국 기독교는 왜 술을 금하는 문화를 형성했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이렇게 질문하면 성서와 문화가 구별됩니다. 이것은 역사비평의 중요한 태도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것과 후대의 기독교 문화가 만든 규범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1)한국기독교의 금주운동은 초기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에서 금주법이 발의되고 폐기되는 과정에서 음주를 반대하는 절제운동이 꾸준히 전개되면서 한국에까지 전파됩니다.
2) 미국감리교 선교부는 한국감리교 선교부 내에 ‘절제위원회’를 설치하고 1910년 이 위원회를 통해 [금주에 대한 규칙]을 제정합니다.
3) 한국감리교 선교부는 단지 사회적 혹은 신체적 이유만이 아니라 종교적 이유에서도 금주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4) 일제강점기 때의 권주정책과 한국기독교의 절제운동 사이 1909년의 주세법, 1916년 주세령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일제는 아편과 공창제도를 장려했습니다.
5)절제회가 한국에 소개된 해는 1923년 틴링 (C.I Tinling) 파송되고 1924년 ‘조선 여자기독교 절제회 연합회’가 결성됩니다. 이화학당 교사 손메레가 초대 총무로 선임됩니다.
6) 1930년 [기독교 조선감리회 사회신경]에 잘 나와있고 1931년 [신정 찬송가 230장 / 기독예수교서회]에도 금주에 대한 찬송이 나옵니다.
7) 1935년 김폴린은 [기독신보]에 금주와 금연에 대한 사회운동의 중요성을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1930년대의 금주와 금연 운동은 작금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서 새롭게 재해석해야한다는 것이 손교수의 질문입니다.
5. 쉬어가기 – 천상병의 「술」
천상병의 「술」을 삽입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술을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인간의 실존과 감정의 상징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문학은 종교가 금지하거나 허용하는 것을 넘어, ‘인간은 왜 술을 마시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외로워서, 기뻐서, 슬퍼서, 친구와 함께하기 위해, 삶의 고통을 잠시 잊기 위해, 혹은 존재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마십니다. 그러므로 술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의 욕망과 고독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1) 인문학모임의 기독교인인 나는 술에 대한 견해는 무엇입니까?
6. 유대인의 코셔 (kosher) 음식
이제 음식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종교적 정체성의 문제로 들어 갑니다. 코셔 (kosher)는 단순히 “깨끗한 음식”이라는 의미로만 이해하면 부족합니다. 유대교의 음식법은“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1장, 신명기 14장 등에서 음식에 대한 분류가 나타납니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분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생적인 건강법만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음식법은 공동체의 경계를 형성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먹는다.”라는 행위 자체가“우리는 이런 사람들이다.”라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음식법은 정체성의 언어입니다.
1) 해외에서는 코셔 (kosher)가 붙은 음식 / 레스토랑 / 소금 / 와인 / 등등 다양하게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코셔는 유대인의 성서에 기록된 음식 규범에 따라 만든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와인은 어떤 지역이나 포도 품종의 이름이 아니라 네 가지 규범을 지켜 만든 것을 말합니다.
첫째는 포도나무를 심은 지 4년이 지난 뒤부터 수확한 포도로 만듭니다
둘째는 포도원은 성서가 가르치는 농작법대로 7년에 한 번 1년씩 땅을 쉬게 한다 (레 25:3-5 / 안식년법과 희년법)
셋째는 포도원에는 포도나무만 재배합니다.
넷째는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유대인이 100% 코셔 재료를 사용해 와인을 만들고 숙성시켜 병입하는 모든 과정을 말합니다. 특히 유월절 만찬으로 만드는 와인은 더 엄격하게 유월절 규정을 지켜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7. 음식 터부
‘터부 (taboo)’는 단순한 금지보다 훨씬 깊습니다. 어떤 음식은 단순히 맛이 없어서 먹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금지는 인간에게 강력한 감정을 만듭니다. 혐오, 두려움, 죄책감, 수치심, 거룩함 따라서 음식 터부는 인간의 심리와 사회구조를 동시에 형성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인류학적 통찰은 “더러운 음식”이라는 것은 음식 자체가 본질적으로 더럽다는 뜻이 아니라, 특정 문화가 그 음식에 의미를 부여한 결과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영국의 쿡 (James Cock / 1728~1779) [남태평양군도 여행기]에서 [터부]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a) 예루살렘에 처음으로 문을 연 맥도날드 가게에서는 왜 치즈 버거를 사용하지 못했는가? 유대인들은 왜 돼지, 고기와 오징어, 새우튀김, 미역이나 김도 먹지 않았습니다.
2) [터부]는 두 개의 서로 관련된 사회적 기능을 합니다
첫째로 울타리 역할을 했습니다. 지키는 안쪽과 지키지 않는 밖의 경계를 구분하게 위해 나눈 것입니다. 이것은 집단의 행동양식이며 누가 적이며 누가 아군인가를 구별하며 이를 통해 개인이나 사회를 유지하고 방어하는 기능을 말합니다. 이런 울타리는 사회적 안전유지를 위해 사회 통합 기능을 동시에 합니다.
둘째로 터부를 지켜야 한다는 일종의 종교적 혹은 제의적 규범은 사회적 복종의 메커니즘과 그 성격이 매우 닮아 있습니다 / 유대교: 돼지고기 / 힌두교: 소고기
8. 돼지고기 혐오증
유대교에서 돼지는 대표적인 금기 음식입니다. 레위기 11장에서는 돼지가 굽이 갈라졌지만 되새김질하지 않기 때문에 부정한 동물로 분류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현대인의 관점에서 “유대인들이 비위생적이어서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라고 단순화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음식 금지는 종교적 분류체계 안에서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질문은 “돼지고기가 실제로 더러운가?”가 아니라 “왜 어떤 공동체는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분류했는가?”입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순간 음식은 생물학에서 문화와 종교의 영역으로 이동합니다.
1) 이집트인들은 양고기를 협오감으로 먹지 않았고, 앗시리아와 바벨로니아는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는 특수한 날이 있다고 했으며 힌두교인들은 육식을 삼가 했습니다.
2) 유대인들은 되새김하는 위가 있으며 동시에 발굽이 갈려진 동물만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1:3,7). 탈무드에서는 돼지라는 말 자체를 금직시켰습니다. 그리스 신을 섬기도록 한 안티오쿠스 4세 (BC 175~164)는 신전에 바친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했습니다.
3) [금기의 수수께끼]의 저자 최창모는 성서가 돼지고기를 금지하는 이유에 대한 다섯 가지 가설을 소개합니다
첫째 ‘위생이론’ 가설은 돼지고기가 물리적으로 더럽다는 이유입니다
둘째 ‘토템이론’ 가설은 돼지가 신성한 동물이기에 먹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셋째 ‘신의 음식 이론’ 가설은 이교도가 거룩하게 여기는 동물들은 먹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넷째 ‘분류학 이론’ 가설은 더글러스 (1921~2007)는 당시의 문화적 분류법에 들어맞지 않는 모든 비정상적인 동물들은 금지시켰다는 겁니다.
다섯째 ‘환경이론’ 가설은 돼지 혐오증이 어떤 환경적인 조건들 때문에 생겼다는 겁니다.
이런 가설들을 참조하면 돼지고기 금지령과 같은 음식 터부는 유대교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는 수단을 넘어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을 가지게 됩니다. 오랜 세월 동안 타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타민족과의 동화를 막고 자민족의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 구약성서의 종교적 음식규정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9. 유대인은 돼지의 자손이라는 ‘유덴자우’
이 부분은 음식 금기가 어떻게 타자화와 혐오의 언어로 바뀌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례입니다.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을 돼지와 연결하는 반유대주의적 이미지인 Judensau (유덴자우)가 등장했습니다. 유대교에서 돼지가 금기라는 사실을 이용해 유대인을 모욕하고 비인간화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위험한 과정을 봅니다. 음식 금기→ 종교적 차이→ 타자화→ 혐오→ 비인간화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식문화는 단순한 식탁의 문제가 아닙니다. “너와 나는 다르다”라는 경계가 “너는 열등하다”라는 차별로 변하는 순간, 음식은 폭력의 도구가 됩니다. 이 지점은 손호현 교수의 책 전체가 추구하는‘폭력 없는 기독교’라는 문제의식과도 연결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1) 특정한 음식에 대한 조롱이 한 민족을 악마화하는데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개고기와 프랑스의 개고기 그리고 유대인의 돼지고기가 있습니다.
2) 돼지고기와 반유대주의는 바로 이처럼 음식을 통해 한 민족을 악마화하는 예가 있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진짜 돼지에서 출생한 종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돼지고기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다는 악의적 이야기를 지어내기까지 했습니다.
3) 중부 유럽의 교회들을 보호하는 가고일 (gargoyle / 이무깃돌)들 가운데 ‘유텐자우 (Judensau / 유대인의 돼지)’라는 기묘한 형상이 등장하기 시작하여 유대인이 돼지의 후손이라는 전설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건축을 통해 승인하기에 이릅니다.
4)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유텐자우’는 1546년 독일의 비텐배르크에서 발행된 인세물에 나오는 나이 많은 랍비가 돼지 엉덩이에서 나오는 배설물을 먹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5) 마틴 루터도 유대인의 증오심을 부축이는 상징이나 해설을 서슴없이 했습니다.
6) 히틀러는 사이비 과학이었던‘우생학’을 통해 유대인들을 학살하는데 장당화했습니다 (1 아리아인 우월주의, 2 강제불임주의, 3 T4작전의 안락사 프로그램, 4 홀로코스트와 대량학살).
10. 치즈버거 없는 맥도날드
아주 재미있는 문화적 사례입니다. 유대교의 음식법에서는 고기와 유제품을 함께 먹는 것이 금지됩니다. 그 배경에는“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는 성서의 명령이 있습니다 (출 23:19; 34:26; 신 14:21).
따라서 쇠고기와 치즈가 결합된 치즈버거는 정통적인 코셔 규범과 충돌합니다. 그래서 미국과 같은 다문화 사회에서 맥도날드라는 세계적 음식문화와 유대교의 음식문화가 만나면서 흥미로운 문화적 충돌이 생깁니다. McDonald’s의 치즈버거는 세계화의 상징이지만, 유대교의 음식법 앞에서는 단순한 패스트푸드가 아니라 종교적 경계를 침범하는 음식이 됩니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세계화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먹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 문화가 세계화를 자기 방식으로 번역한다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음식은 세계화와 지역문화가 만나는 장소가 됩니다 (McDonald’s의 맛이 국가마다 다 다릅니다).
1) 인간과 송아지의 우유에 대한 경쟁 가설입니다.
우유와 송아지의 친밀 관계에 금기를 만들어 둠으로써 경쟁관계에서 인간이 유리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2) 우유와 고기의 근친관계 이론도 있습니다
근친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문화적 금지가 식품의 근친관계까지 영양을 끼쳤다는 가설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근친상간의 금지와 함께 음식의 근친관계도 금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1. 기독교와 음식 터부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에는 음식 금기가 없는가?”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의 음식법과 깊은 긴장관계 속에서 출발했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서는 음식의 정결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등장하고, 사도행전 10장에서는 베드로의 환상이 등장합니다. 특히 사도행전 10장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선언은 음식의 경계를 넘어 사람의 경계를 흔드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을 수 없는 음식을 구분했던 것처럼, 사람도 유대인 / 이방인, 깨끗함 / 부정함, 우리 / 그들로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음식의 장벽을 허무는 것은 결국 인간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행위가 됩니다.
1) 사도 바울은 (고전 10:27-28) 존재하지 않는 우상에 받친 제물일지라도 자유롭게 먹을 수 있으며 제물로 바쳐진 음식은 바치기 이전이나 이후에도 똑같다고 말합니다.
2) 초대한 주인이 그 음식은 우상에 드린 제사음식이라고 고지하면 그 주인의 양심을 위해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초대한 사람의 성의와 상식을 위해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3) 기독교는 어떤 특정 음식에 대한 규제보다는 음식의 양에 대한 규제가 있었습니다. 폭식에 대한 규제는 음식이 희소했기 때문에 중세기 상황에서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4) 단테의 [신곡]에는 폭식하며 음식에 탐욕을 부린 자는 아홉 개의 지옥 중에 세 번째 지옥에 가는 형벌을 받습니다
복음무문 (福音無門)과 상당히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부분입니다.
12. 육식주의와 채식주의
이 부분에서 음식은 종교의 문제를 넘어 윤리와 생태학의 문제로 확장됩니다. 고기를 먹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 취향일까? 아니면 동물의 생명, 환경, 기후, 산업적 축산, 인간의 욕망, 경제적 불평등 과 연결된 윤리적 문제일까요?. 채식주의 역시 단순히 “고기를 먹지 않는 식습관”으로 만 볼 수 없습니다. 그 안에는“인간은 다른 생명을 어디까지 먹을 권리가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식탁은 생태윤리의 현장이 됩니다.
1) 아랍인들은 이슬람 시대가 오기 전에는 낙타의 털과 혈액을 잘 섞은 다음 불 위에서 요리한 음식을 잘 먹었다는 겁니다.
2) 구약성서에 따르면 태초에 하나님은 채식만을 허락했습니다 (창 1:29)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이 노아의 홍수 이후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고기를 그 생명되는 피째 먹지 말지니라’ (창 9:4)
첫째 피에 생명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생각하는 피는 ‘네피쉬 (창 2:7) 즉 생명, 생기, 살아가는 힘, 목숨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생명 존중사상이 음식 기준이 되었습니다.
둘째 종교적 제의에서 희생물의 피는 인간의 속죄를 위한 하나님의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판매하는 모든 고기는 짠데 그 이유는 고기 속에 있는 피를 제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3) 기독교인들은 제한 없이 고기를 먹었지만 사순절 기간 동안은 참회의 마음으로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사순절 시작 일주일 전에는 카니발을 즐기며 고기를 마음껏 먹었습니다. 카니발 (Carnevale)은 원래 라틴어 ‘카루넴 레바레 (carnem levare)에서 나왔는데 ‘고기 (carne)’를 ‘중단하다 (levare)’는 뜻에서 유래했습니다.
4) 인도는 세계 종교의 요람입니다. 힌두교와 불교의 발생지입니다. 이 두 종교는 모든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죽이지 않는다는 ‘아힘사 (ahimsa)’ 사상에 기초한 채식주의를 권장합니다.
5) 인도내에서 가장 채식주의를 철저하게 지키는 종교는 힌두교와 불교가 아니라 자이나교 (바르다마나 창시자)입니다. 철저한 고행을 통해 업으로부터 해탈을 추구하여 살생, 도둑질, 음행, 망언, 소유의 거부를 강령으로 삼습니다.
6) 힌두교에서 채식주의 습관이 중요한 것은 고기와 피는 살생에서 얻어진 것이어서 본질적으로 불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7) 인도의 채식주의자들은 식습관을 기준으로 하여 사람들을 오등급으로 정했습니다.
8) 사람들 뿐만 아니라 신도 3등급으로 정했습니다 / 전적으로 악한 신 / 선악 혼재의 신 / 전적으로 선한 신.
9) 불살생 원리와 채식주의로 동남아 지역에 불교가 발전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13. 커피 – 신이 보내준 구원의 음료
이 부분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커피는 현대인에게 너무 일상적이어서 종교적 의미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커피는 인간의 생활시간과 사회적 공간을 변화시켰습니다. 커피를 마시는 공간은 대화, 사교, 지식, 토론, 정치, 문학, 사상이 교차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커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근대적 공론장의 문화와도 연결됩니다. “구원의 음료”라는 표현은 커피가 사람을 실제로 구원한다는 신학적 명제가 아니라, 인간의 피로와 삶의 리듬을 새롭게 해주는 문화적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하나 나옵니다. “우리는 무엇을 마시면서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가?”. 커피 한 잔이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하고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면, 그것 역시 인간을 연결하는 문화적 매개체가 될 수 있습니다.
1) 1582년에 출간된 레오하르트 라오볼트의 책 [아침의 나라로 가는 여행]에서 커피가 유럽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습니다.
2) 역사학자들은 커피는 아프리카 에디오피아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고 봅니다. 그러나 어떻게 아랍문화권에서 기호음료로 자리잡았는 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무함마드가 커피를 통해 병적인 수면증을 치료했다는 전설도 있고,
3) 17세기 중엽부터 커피는 초콜릿, 차, 담배와 함께 유럽 기호문화의 무대에 등장하게 됩니다.
4) 1660년 제임스 하우엘의 말에 의하면 청교도적인 영국에서 커피가 지니는 사회적 의미가 컸었는데 그것은 커피의 각성제 효과였습니다. 청교도적인 커피관은 ‘알콜에 빠진 인류를 위해 하나님의 보내신 위대한 구원의 음료’로 여겼습니다.
5) 프랑스의 역사가이자 시인이었던 쥘 마슐레는 “흥분된 성적 감성 대신에 정신을 자극하는 반색정적인 커피”에 대해 주장합니다. 즉 이성으로 상징되는 계몽주의 시대의 커피 하우스 문화를 염두해 두고 말한 것입니다.
6) 포도주에서 커피로의 전환은 중세 가톨릭 시대에서 근대 개신교의 시대로의 전환을 알리는 상징적인 기호품의 혁명이었습니다.
7) 18~19세기에 와서는 유럽의 가난한 민중들에게 설탕과 럼주, 커피와 차는 굶주림을 덜어주고 육체적 고통을 잠시 잊게 하고 성격을 유순하게 하는 마취제 혹은 “마약과도 같은 식품”이었습니다. 종교만이 아니라 커피도 ‘민중의 아편’으로 그들의 고단한 삶으로부터 견디게 했습니다.
14. 금식하는 요한과 잔치하는 예수
제13장의 신학적 핵심에 가까운 부분입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금식과 절제의 삶을 살았습니다. 반면 예수는 복음서에서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예수는 비판자들에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식의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이 대비가 매우 중요합니다. 요한 = 금식, 예수 = 식탁, 이라는 상징적 대비가 만들어집니다.
여기서 예수의 복음은 단순히 금욕주의적인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예수의 식탁에는 죄인, 세리, 가난한 사람, 사회적으로 배제된 사람, 종교적으로 경계 밖에 있던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따라서 예수에게 식사는 단순한 식사가 아닙니다. 사람을 받아들이는 환대와 섬김의 행위였습니다.
1) 세례요한은 금욕과 고행을 하는 수행자들의 정신적 지도자였습니다. 광야에서 낙타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습니다. 정상적인 생활인 빵과 포도주는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자신의 예언자운동으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2) 예수는 금욕하지 않았고 오히려 잔치집에 초대를 받아 참석했다는 겁니다. 예수가 최초의 기적은 혼인잔치집에서 행합니다 (요 2:1-11).
3) 예수는 ‘무엇을 먹었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먹었느냐?’가 중요했습니다
4) ‘누구와 함께 먹었느냐?’가 그의 계급을 말해 줍니다 (단원 김홍도의 그림 ‘들밥’), (단원 김홍도의 그림 ‘기로세련계도’ / 개성상인들의 잔치).
5) 예수의 밥상공동체에서 ‘죄인’은 가난하여 생계를 위해서는 율법이 요구하는 규칙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버림받은 민중들이었습니다.
이런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밥상공동체를 만들어 갔습니다.
6) 기득권자들 입장에서는 예수가 가난한 민중들과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종교적 도발이며 혁명의 함의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즉 유대사회의 이분법적 신분질서에 대한 도전이고 전복이었습니다. 예수의 밥상공동체는 곧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7)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신분의 구분을 넘어서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화해하는 평화의 밥상 공동체였습니다. (김지하의 시 / ‘밥’)
15. 성만찬 / 우리의 음식이 되신 하나님
그리고 이 13장은 결국 성만찬으로 끝납니다. 여기에서 음식의 의미가 가장 높은 신학적 단계로 올라갑니다. 예수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준 분이 아닙니다. 성만찬에서는 자신을 빵과 포도주라는 음식의 형태로 내어줍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서 매우 놀라운 이미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나를 믿어라.”라고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먹어라.”라는 방식으로 자신을 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만찬의 신학적 의미를 문자적 식인 행위로 이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가장 구체적인 행위인 먹음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우주와 인간의 관계를 표현한다는 뜻입니다.
1) 기독교인은 식인종인가? (성만찬의 오해)
2) 예수의 성만찬에서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모두 돌려가며 이 잔을 마셔라, 이것은 죄를 사하려 주시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마태복음 26:26-28)
3) 성찬식을 통한 기독교인들의 ‘예수의 삶과 죽음’에 동참하는 방식들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
루터의 ‘공제설’
츠빙글리의 ‘상징설’또는‘기념설’
4) 테레사 수녀는 “세상이 하나님을 배고파 한다”라고 했습니다
제13장 전체의 흐름을 한눈에 보면………
손호현 교수의 논의는 다음과 같은 흐름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음식 문화 종교 금기 정체성 타자화 혐오와 배제 세계화와 문화충돌 윤리와 생태 환대 예수의 식탁 성만찬 하나님 자신을 음식으로 내어주심으로 담론을 만들어 갑니다.
따라서 이 장의 핵심은 결국“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먹느냐”로 이동합니다.
특히 중요한 신학적 전환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질문이“무엇이 정결한 음식인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에게 오면 질문이 바뀝니다.“누가 우리의 식탁에 앉을 수 있는가?”그리고 성만찬에서는 더 깊어집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자신을 내어주시는가?”
이렇게 보면 음식문화의 역사는 사실상 경계의 역사였습니다. ‘누가 먹을 수 있는가?’ ‘누가 먹으면 안 되는가?’ ‘누구와 함께 먹을 수 있는가?’ ‘누구를 식탁 밖으로 밀어내는가?’ 그리고 예수는 바로 그 식탁의 경계를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전현구 목사의 ‘복음무문 (福音無門)’과 만납니다
손호현 교수의 제13장을 “福音無門”이라는 관점에서 읽으면 상당히 아름다운 신학적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코셔→ “이것은 먹어도 되고 저것은 먹으면 안 된다.”
음식 터부→ “이 사람은 우리와 다르다.”
종교적 경계→ “이 사람은 식탁에 들어올 수 없다.”
그런데 예수의 ‘식사공동체’에서는 경계 (Boundary)가 흔들립니다.
“식탁에는 문이 없는가?”
그리고 성만찬에서는 더 급진적인 질문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음식으로 내어주신다면, 하나님의 식탁에 누가 감히 문을 세울 수 있는가?”
복음은 인간이 만든 종교적 문을 통과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소유물이 아니라, 문을 만들고 사람을 구분하려는 인간의 욕망 자체를 질문하는 사건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13장의 마지막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음식은 인간이 세운 가장 오래된 경계이지만, 예수의 밥상 공동체에는 그 경계를 넘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 다시 한 식탁에 앉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음식문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묻는 이야기였습니다.
기독교가 ‘음식을 규제하는 종교인가?’ 아니면 ‘사람을 식탁으로 초대하는 복음인가?’ ‘금지의 종교인가?’ 아니면 ‘환대의 종교인가?’ ‘문을 세우는 종교인가?’ 아니면 ‘복음무문 (福音無門)의 종교인가?’ 더 나아가 ‘기독교의 복음인가?’ ‘복음의 기독교인가?’
전현구의 정리와 질문들…
발제자 = 전현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