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7월 19일, 덴버에서 시카고로 향하던 유나이티드항공 여객기가 비행 중 심각한 엔진 고장을 일으켰습니다. 조종이 거의 불가능해진 비행기는 아이오와주의 한 공항에 비상착륙을 시도했고, 활주로에 닿는 순간 기체가 부서지며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지만, 일부 승객들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생존자 가운데 한 여성은 사고 직후 부서진 기체 사이로 들어오는 불빛을 향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고 합니다. 위험한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마치 누군가가 말하는 것 같은 강렬한 메시지가 떠올랐습니다. “기다리지 마. 지금 가! 불빛을 향해 가! 불길이 오기 전에 나가야 해!”
그녀는 그 메시지를 따라 움직였고 결국 비행기 밖으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가족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역시 각각 항공 사고에서 살아남은 경험이 있었고, 사고 직후 지체하지 않고 비행기 잔해에서 빠져나온 것이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한 세대가 경험한 극심한 두려움과 생존의 지혜가 다음 세대에도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줄 수 있을까? 트라우마는 한 개인에게서 끝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한 세대가 경험한 상처가 다음 세대의 불안과 두려움, 관계 방식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반대로 위기를 극복하며 배운 생존의 지혜와 회복의 방식이 다음 세대에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동물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흥미로운 결과가 보고된 적이 있습니다. 특정 냄새를 맡을 때 전기 충격을 경험하도록 조건화된 생쥐의 후손들이 직접 전기 충격을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그 냄새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상이 관찰되었습니다. 이러한 연구는 경험과 환경이 후성유전학적 변화를 통해 후손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이것을 인간의 복잡한 기억이나 트라우마가 유전자에 그대로 저장되어 전달된다고 단순하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트라우마가 다음 세대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에는 생물학적 요인뿐 아니라 부모의 양육 방식, 가족관계, 침묵과 비밀, 반복되는 행동 패턴과 사회적 환경 등 여러 요소가 함께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트라우마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학자들도 해결되지 않은 가족의 상처가 다음 세대의 삶과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가족치료에서는 때때로 이러한 현상을 가족 구성원 사이의 ‘얽힘’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피터 A. 레빈(Peter A. Levine) 역시 트라우마와 기억에 관한 논의에서 우리의 몸과 신경계가 과거의 위협 경험을 기억하고 반응할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최근에는 후성유전학과 스트레스 생리학 연구를 통해 심각한 트라우마를 경험한 세대와 그 후손들에게서 나타나는 생물학적 변화의 가능성도 계속 연구되고 있습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그 자녀들을 연구해 온 레이첼 예후다(Rachel Yehuda)의 연구 역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일부 연구에서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후손에게서 스트레스 호르몬 체계와 관련된 차이가 관찰되었습니다. 이러한 연구들은 한 세대의 극심한 경험이 다음 세대의 스트레스 반응과 어떤 관련을 가질 수 있는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세대에 걸친 죄와 그 영향에 대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34장 7절에는 죄악의 영향이 자손 삼사 대까지 미칠 수 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을 단순히 하나님께서 부모의 죄를 아무 책임도 없는 자녀에게 기계적으로 벌하신다는 의미로만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보면 한 세대의 죄와 상처가 가족과 공동체 안에서 다음 세대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이러한 세대 간 영향을 제 삶에서 경험했습니다. 저의 외할아버지는 전쟁을 경험한 세대였습니다. 매우 다혈질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셨고, 그로 인해 가족 전체가 적지 않은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어머니가 직접적인 폭력을 경험하지 않은 경우에도 가족 안에 형성된 불안과 긴장, 예민함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우울감과 불안, 예민함이 어느 정도 제게도 전달되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저를 돌아보면 많이 우울했고, 많이 불안했습니다.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할 때가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그것을 단순히 ‘내 성격이 원래 이런가 보다’라고 생각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지금까지도 그 감정과 행동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감사하게도 상담을 공부하면서 저는 제 감정과 행동만 바라보지 않고 그것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기독교 공동체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 오랜 시간 치유와 회복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습니다. 우리에게 상처만 대물림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처를 이해하고 극복하면서 얻은 지혜도 다음 세대에 전해질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 받은 불안을 그대로 자녀에게 전달할 수도 있지만, 그 불안을 이해하고 치유한 부모는 오히려 자녀에게 안정감을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분노를 물려받은 사람이 자신의 분노를 이해하고 다루는 법을 배우면 자녀에게 감정을 건강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면 다음 세대에게는 자신이 받지 못했던 사랑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트라우마를 다루는 것은 단순히 나 한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치유되는 것은 다음 세대의 삶을 바꾸는 일이기도 합니다. 트라우마 연구가 우리에게 주는 희망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뇌와 신경계는 과거에 완전히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새로운 관계를 경험하고,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안전한 경험을 반복하면서 오래된 두려움의 기억과 반응은 변화할 수 있습니다.
과거는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가 오늘의 나를 지배하는 방식은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내가 만들어 가는 새로운 경험은 자녀와 다음 세대가 살아갈 이야기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가족 안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온 두려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 반복되는 분노, 관계의 단절, 지나친 예민함, 수치심이나 회피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무조건 나의 성격이라고 받아들이기보다 한 번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감정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우리 가족은 어떤 아픔을 지나왔을까?”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 어떻게 전달하고 싶은가?” 우리가 윗세대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그대로 물려줄 필요는 없습니다. 상처는 나에게 왔지만, 나에게서 멈출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상처를 극복하며 얻은 지혜와 사랑, 믿음과 회복은 다음 세대로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써 내려가는 새로운 회복의 이야기는 나 한 사람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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