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년 5월 16일, 서진의 초대 황제 사마염 (西晉 世祖 武皇帝 司馬炎, 236 ~ 290) 타계
서진 세조 무황제 사마염 (西晉 世祖 武皇帝 司馬炎, 236년 ~ 290년 5월 16일)은 서진의 초대 황제이다. 그의 조부는 위나라의 대신으로 제갈량과 결전을 벌이고 노년에는 정권을 잡은 사마의이며, 백부는 사마사, 아버지는 사마소, 어머니는 왕원희다.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무황제 (武皇帝)이다.
삼국지의 끝을 장식한 인물이며, 중국 역대 통일왕조의 초대군주 중 집안 덕을 가장 많이 본 인물이기도 하다. 반대로 자수성가의 대표격 인물은 빈농 고아 출신의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다.

– 서진 세조 무제 사마염 (西晉 世祖 武帝 司馬炎)
.출생: 236년, 중국
.사망: 290년 5월 16일 (54세), 중국 뤼양시
.매장지: 준양릉 (峻陽陵)
.왕조: 서진
.조부모: 사마의, 장춘화, 왕숙, 양 부인
.부모: 부) 태조 문황제, 모) 문명황후 왕씨
.배우자: 무원황후 양씨, 무도황후 양씨, 효회태후 왕씨, 좌귀빈, 호귀빈, 제갈부인 외 9명
.자녀: 사마궤, 사마충, 사마간, 사마치 외 21명
* 서진의 초대 황제
.재위: 265년 ~ 290년
.전임: 태조 문황제 (추존) / 후임: 진 혜제 (사마충)
.휘: 사마염 (司馬炎) / 별호: 안세 (安世)
.묘호: 세조 (世祖) / 시호: 무황제 (武皇帝)
서진 (西晉)의 초대 황제로 자는 안세 (安世). 위의 대신 사마의의 손자이며 사마소의 장남이었다.
사마염처럼 통일왕조를 인계받은 군주도 없다. 역시나 부친의 죽음 이후에 마치 당연한 절차를 밟듯이 선양받은 조비의 경우는 10살에 종군했다가 죽을 뻔했던 적이 있었고 한참 뒤에 본인이 20대에 들어설 때에야 조씨가 패권을 잡지만, 사마염은 11살 때 조부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서 사마씨가 실권을 잡는다.
조비는 이릉 대전을 겪고 동오와 촉한을 무찌르지 못했지만 사마염은 난까지 진압하고 오나라도 무찔러 천하 통일을 이뤘다.
하지만 말년에 사치와 향략응 일삼는다.
머리카락이 땅까지 닿을 만큼 길고 두 팔이 무릎까지 왔다고 한다.

○ 생애 및 활동
– 건국 이전
사마염의 조부인 사마의가 정적인 조상을 물리침으로써 정권을 획득한 사마씨 일족은 조위의 3대 황제 조방과 4대 황제 조모를 폐위했다. 조위의 마지막 황제인 원제 조환의 대에 이르러서는 사마씨의 수장인 대장군 사마소가 승상에서 진공 (晉公)을 거쳐, 진왕 (晉王)으로 승작되자, 사마염은 왕세자가 되었다. 사마소에게 황위에 오를 기회는 많이 주어졌으나, 그는 주공과 조조의 선례를 따르고자 황좌에 오르지 않았다.
– 건국
265년, 사마소가 죽고 진왕직을 승계한 사마염은 조환을 겁박하여 선위를 요구했다. 선위받은 이후에 조환을 진류왕 (陳留王)으로 봉하며, 낙양에서 국호를 진 (晉)으로 바꾸고 황좌에 오른다. 훗날 사마예가 건업에 건설한 동진과 구별하기 위하여, 흔히 사마염이 건설한 진을 서진이라 부른다.
– 동오 정복과 삼국 통일
280년, 명장 두예(杜預)와 왕준(王濬)의 분투로, 손호가 다스리고 있던 오나라를 멸망시키면서 60년의 삼국 정립의 시대의 막을 내린다.
– 몰락
삼국을 통일한 뒤, 그는 성군 (聖君) 노릇을 하며 검소한 생활을 입으로 말하면서도, 말년엔 부패한 정치를 하여, 서진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에 사마염의 뒤를 이은 사마충의 정실 부인이며, 가충의 딸인 가남풍은 정권을 잡고 전횡을 일삼아, ‘팔왕의 난’의 맹아 (시초)가 되는 등 서진 왕조를 몰락하게 했다.
참고로 그에 대한 평가로서 잘 알 수 있는 부분들을 보면 그가 어느 날 신하들에게 ‘왜 짐은 공명 같은 신하가 없느냐’고 묻자 ‘폐하께서는 공명이 여럿 있어도 답이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었고, 어떤 사람은 그를 당대에 이미 후한 말기의 황제들이던 환제와 영제와 맞먹는다고 하였다.

○ 가족 관계
.증조부 : 사마방(司馬防)
.조부 : 고조 선황제 사마의(高祖 宣皇帝 司馬懿)
.조모 : 선목황후 장씨 장춘화(宣穆皇后 張氏 張春華)
.백부 : 세종 경황제 사마사(世宗 景皇帝 司馬師)
.백모(정처) : 경회황후 하후씨 하후휘(景懷皇后 夏侯氏 夏侯徽)
.백모(후처) : 경헌황후 양씨 양휘유(景獻皇后 羊氏 羊徽瑜)
.외증조부 : 왕랑(王朗)
.외조부 : 난릉후 왕숙(蘭陵侯 王肅)
.부황 : 태조 문황제 사마소(太祖 文皇帝 司馬昭)
.모후 : 문명황후 왕씨 왕원희(文明皇后 王氏 王元姫)
.황후(정후) : 무원황후 양씨 양염(武元皇后 楊氏 楊艶) (237년~274년)
제1황자 : 비릉도왕(毗陵悼王) 사마궤(司馬軌)
제2황자 : 황태자 사마충(司馬衷) (서진 혜제)
황태자비(정후) : 혜문황후 가씨 가남풍(惠文皇后 賈氏 賈南風)
황태자비(계후) : 혜헌황후 양씨 양헌용(惠獻皇后 羊氏 羊献容)
제3황자 : 진헌왕(秦獻王) 사마간(司馬柬)
제7황녀 : 평양공주(平陽公主)
제8황녀 : 신풍공주(新豊公主)
제9황녀 : 양평공주(陽平公主)
.황후(계후) : 무도황후 양씨 양지(武悼皇后 楊氏 楊芷) (259년~292년)
제16황자 : 발해상왕(渤海殤王) 사마회(司馬恢)
.황후(추존) : 효회태후 왕씨 왕원희(曉懷太后 王氏 王媛姬)
제 17황자 : 예장왕(豫章王) 사마치(司馬熾) (서진 회제)
황자 비(정후) : 회황후 양씨 양난벽(懷皇后 梁氏 梁蘭璧)
.빈 : 귀빈 좌씨 좌분(貴嬪 左氏 左芬)
.빈 : 귀빈 호씨 호방(貴嬪 胡氏 胡芳)
제11황녀 : 무안공주(武安公主)
.궁인 : 부인 이씨(夫人 李氏)
제9황자 : 회남충장왕(淮南忠壯王) 사마윤(司馬允) (272년~300년)
제15황자 : 오효왕(吳孝王) 사마안(司馬晏)
황손 : 진왕(秦王) 사마업(司馬業) (서진 민제)
.궁인 : 부인 제갈씨 제갈완(夫人 諸葛氏 諸葛婉)
제13황자 : 여음애왕(汝陰哀王) 사마모(司馬謨)
.궁인 : 미인 심씨(美人 審氏)
제4황자 : 성양회왕(城陽懷王) 사마경(司馬景) ( ~270년)
제8황자 : 초은왕(楚隱王) 사마위(司馬瑋) (271년~291년)
제12황자 : 장사여왕(長沙厲王) 사마예(司馬乂) (277년~304년)
.궁인 : 미인 진씨(美人 陳氏)
제11황자 : 청하강왕(淸河康王) 사마하(司馬遐)
.궁인 : 미인 조씨(美人 趙氏)
제18황자 : 대애왕(代哀王) 사마연(司馬演)
.궁인 : 재인 서씨(才人 徐氏)
제5황자 : 성양상왕(城陽殤王) 사마헌(司馬憲)
.궁인 : 재인 궤씨(才人 匱氏)
제6황자 : 동해충왕(東海沖王) 사마지(司馬祗)
.궁인 : 재인 조씨(才人 趙氏)
제7황자 : 시평애왕(始平哀王) 사마유(司馬裕)
.궁인 : 재인 정씨(才人 程氏)
제14황자 :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궁인 : 보림 장씨(保林 張氏)
제10황자 : 신도회왕(新都懷王) 사마해(司馬該)
.아우 : 제헌왕(濟獻王) 사마유(司馬攸)
.아우 : 성양애왕(城陽哀王) 사마조(司馬兆)
.아우 : 요동도왕(遼東悼王) 사마정국(司馬定國)
.아우 : 광한상왕(廣漢殤王) 사마광덕(司馬廣德)
.누이 : 경조장공주(京兆長公主)

○ 평가
– 후세 학자의 평가
“진(晉) 나라 무제(武帝)가 주군(州郡)의 군병 제도를 없앤 것은 ‘무(武)는 억누르고 문(文)을 닦는다.’라는 뜻을 모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왕(武王)의 덕이 없으면서 무왕의 사업을 본받으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덕과 인(仁)을 쌓은 공이 없을뿐더러 음탕하고 시기하는 정사(政事)를 가지고 나라에 임했던 것이니, 그의 몸이 죽자 나라도 따라서 혼란해지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진 무제(晉武帝)는 혜제(惠帝)의 혼약(昏弱)함에 대해서는 알면서도 교체시키지 않았고, 가후(賈后)의 악함에 대해서는 몰라서 폐위시키지 못했으며, 양준(楊駿)이 제 마음대로 정권을 뒤흔들었어도 물리치지 아니하였으니, 스스로 난을 끼친 것이라고 하겠다.” _ 홍대용
홍대용 평가의 마지막 줄은 제대로 핵심을 찌른 건데, 당시 서진의 상황으로 볼 때 문제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냥 사마염 수준정도는 되는 황제가 후대에 왕위에 올랐거나, 혹은 양준이 번대자들을 적당히 찍어누르고 포섭해 가면서 혜제를 명목상 황제로 만들고 전횡을 할 만한 정치력이 있었거나, 아니면 사마염 유언에 맞도록 사마염 자신이 애시당초 위관과 사마량에게 힘을 좀 실어줬거나, 혹은 가남풍 대신 위관의 딸이 혜제의 황후가 되었거나 해서 가남풍이 나서지 못하게 했거나, 이도저도 아니었으면 가남풍이 사마휼을 죽인다는 선택지만 아니었어도 팔왕의 난이 영가의 난으로 이어질 정도로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점에서 사마충과 가남풍, 그리고 양준을 막지 못한 사마염의 처신은 서진 왕조의 약점이었던 것이다.
당장 팔왕의 난에서의 왕들 행보만 봐도 사마염의 아들인 장사왕 사마애나 성도왕 사마영, 혹은 회제 사마치 정도만 해도 대단한 능력자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국가가 어느정도 안정적일 때 사마염 수준의 통치력을 발휘할 수준의 인물은 되었으니 황태자를 바꾸고자 하면 인물이 없다고 할 수도 없었다. 위관 정도면 보신주의자 기질이 있기는 해도 나라를 안정적으로 굴려가면서 혜제를 적당히 보필해 갈 수준은 되는 인물이었으니 가충이나 양준과는 비교할 수 없었고 사마량도 사마염의 아들로 황실에서 촌수도 꽤 높은 축에 들어갔던 데다, 성인군자는 아니어도 다른 원로인 사마륜이나 사마융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에 황족들을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장화나 배외, 하다못해 가남풍의 사촌오빠 가모 정도만 되어도 나라를 다스려 갈 능력과 사직을 보존할 수 있는 충성심 정도는 충분히 있는 인물들이어서 가남풍이 나서던 시절에도 나라가 그런대로 평온하게 만들어 놓은 인물들이었다.

– 부여와 재조지은 (再造之恩)
夫餘國 在玄菟北千餘里, 南接鮮卑, 北有弱水, 地方二千里, 戶八萬, 有城邑宮室, 地宜五穀.
부여국은 현도 북쪽 1천여 리에 있으며, 남쪽으로는 선비(鮮卑)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약수가 있으며, 땅의 둘레가 2천 리인데, 호(戶)는 8만이고, 성읍(城邑)과 궁실(宮室)이 있으며, 땅은 5곡에 마땅하다.
(중략)
武帝時, 頻來朝貢, 至太康六年, 爲慕容廆所襲破, 其王依慮自殺, 子弟走保沃沮. 帝爲下詔曰:「夫餘王世守忠孝, 爲惡虜所滅, 甚愍念之. 若其遺類足以復國者, 當爲之方計, 使得存立.」 有司奏護東夷校尉鮮于嬰不救夫餘, 失於機略. 詔免嬰, 以何龕代之.
무제(武帝) 때에 자주 와서 조공하였는데, 태강(太康) 6년(285) 때에 모용외(慕容廆)에게 습파(襲破)당한 바가 되어, 그 왕 의려(依慮)가 자살하였고, (의려의) 자제들은 옥저(沃沮)로 달아나 지켰다. 황제가 조를 내리기를, “부여왕은 세세로 충효를 지켜 왔는데, 못된 오랑캐들에게 멸망당한 바가 되었으니 심히 가엾게 생각한다. 만일 그 남은 무리 중에 족히 나라를 회복할 자라면, 마땅히 이를 위해 방계를 세우고, (나라를) 존립(存立)할 수 있게 하라.” 하였다.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호동이교위(護東夷校尉) 선우영(鮮于嬰)이 부여를 구하지 않아 빠르게 대처함을 잃었다 하였다. (이에) 조를 내려 영을 파면하고, 하감(何龕)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明年, 夫餘後王依羅遣詣龕, 求率見人還復舊國, 仍請援. 龕上列, 遣督郵賈沈以兵送之. 廆又要之於路, 沈與戰, 大敗之, 廆衆退, 羅得復國. 爾後每爲廆掠其種人, 賣於中國. 帝愍之, 又發詔以官物贖還, 下司·冀二州, 禁市夫餘之口.
이듬해 (286), 부여의 후왕(後王) 의라(依羅)가 감에게 사람을 보내어 지금 남은 사람[見人]들을 거느리고 돌아와 옛 나라를 회복할 것을 구하며, 이에 (지원을) 청원하였다. 하감은 상열(上列)하고, 독우(督郵) 가심(賈沈)을 보내 군사로서 (부여 사람을) 호송하도록 하였다. 모용외[廆] 또한 길에서 이를 기다리고 있다가 하감과 더불어 싸웠다가 크게 패하였다. 모용외의 무리가 물러나자 의라는 다시 나라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에 늘 모영외가 그 종인 (種人)들을 노략질하고는, 중국에 팔았다. 황제가 이를 가엾게 여기니, 또 조를 내려 관청의 재물로써 (팔려온 부여 사람들을) 속환하게 하였고, 사주 (司州) · 기주 (冀州)의 2주에 명을 내려 부여의 인구의 거래를 금하였다. _ 진서 동이전 부여조
사마염에게 의외의 면모가 존재하는데, 바로 한국사에 재조지은 (再造之恩, ‘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 ‘거의 망하게 된 걸 구해준 은혜’라는 뜻)을 행했다는 점이다. 부여가 모용외에게 당하자 호동이교위 선우영이 부여를 구하지 않았다고 파면하고, 모용외로부터 부여를 구하여 나라를 회복시켰으며, 사주 (司州) · 기주 (冀州)의 2주에 명을 내려, 중국으로 인신매매 당한 부여인들을 속환시켰다. 자국에서의 암군이 한국에 재조지은을 행했다는 점에서 만력제와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