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0일, 티베트 민족 봉기 기념일 (Tibetan Uprising Day)
3월 10일은 티베트 민족 봉기 기념일 (Tibetan Uprising Day)이다.
티베트의 3월 10일 대거 봉기로는 ‘1959년 티베트 봉기’와 ‘2008년 티베트 소요 사태’가 있었다.

○ 1959년 티베트 봉기
1959년 티베트 봉기는 1959년 3월 10일 중국공산당의 강압적인 티베트 통치에 반발한 티베트인에 의하여 일어난 반중국, 반공산주의 봉기이다. 봉기가 일어난 날인 3월 10일은 매년 티베트 망명 정부 등 티베트 독립 운동 단체들이 티베트 민족 봉기 기념일이라는 이름으로 기념하고 있다.
- 봉기의 원인과 발생
1959년 티베트의 캄 지방과 암도 지방에서 티베트인에 의한 무장 반란이 시작되어 티베트 동부 지역에 인민해방군이 증파되었다. 티베트에 진주한 인민해방군은 티베트의 마을이나 사원에 대해서 공격을 강화하였다. 인민해방군 사령관은 티베트 게릴라 부대를 굴복시키기 위해, 포탈라 궁과 제14대 달라이 라마를 폭격하겠다고 위협했다.
한편 3월 1일 라싸 교외에 있는 인민해방군 사령부에서 달라이 라마에게 연극 관람을 제안하였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그 제안을 미뤘지만, 최종적으로는 3월 10일에 연극을 관람하기로 합의하였다.
3월 9일 약속 하루 전 인민해방군 장교들이 전통에는 어긋나는 것이지만 달라이 라마가 연극 관람을 할 때 무장 경비대를 동행시키지 않는 조건과 포탈라 궁에서 인민해방군 주둔지로 이동할 때에 어떠한 공식적인 의식을 실시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이 요구가 라싸에 있는 티베트 사람들에게도 퍼져 중공 당국이 달라이 라마 14세의 납치를 꾀하고 있다고 생각한 티베트 사람에게 공포감을 조성하였다.
다음 날인 3월 10일에 티베트인 약 30만 명이 인민해방군 측이 달라이 라마를 포탈라 궁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궁전을 둘러쌌다. 3월 12일에는 라싸에 모인 항의자들이 티베트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라싸의 큰 길에는 바리케이트가 만들어지고 티베트독립군과 인민해방군은 충돌에 대비해 각각 라싸 내외에 거점을 요새화하기 시작하였다.
3월 15일 상황이 악화되자 달라이 라마의 피난 준비가 시작되었는데 3월 17일에 달라이 라마의 궁전 근처에 인민해방군이 발사한 2발의 포탄이 명중해, 이것이 그의 인도 망명과 망명 정부 수립의 방아쇠를 당기게 되었다. 달라이 라마가 라싸를 탈출하고 난 뒤인 3월 19일에는 라싸의 주요 사원에 대한 포격을 포함한 전투가 시작했다. 티베트군은 인민해방군에 비해 숫자와 무장이 빈약해, 이 전투는 이틀만에 종료되었다.
- 봉기의 결과
티베트 망명 정부의 추정치에 의하면 1959년 봉기때 티베트인 약 86,000명이 인민해방군에 의해 사망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중국 정부는 이 주장에 반대하고 있다. 반군이나 게릴라에 관여하지 않은 무고한 티베트인들도 상당히 많이 죽었다는 주장도 있다.
라싸의 주요 사원과 절은 중국군의 폭격에 의해서 심한 손상을 입었고 약탈, 파괴되었다. 당시 티베트 반군 역시 중공의 항공전력에 의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라싸에 남은 달라이 라마 14세의 무장경비원과 무기를 숨기고 있었던 티베트인들은 무장 해제가 되어 공개처형이 되었다.
○ 2008년 티베트 소요 사태
2008년 3월 10일 1959년 티베트 독립운동 49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티베트 승려 (수도승) 600여명의 중국 정부에 대한 항의 시위로 시작되어 2008년 3월 14일 티베트 독립운동 시위대가 중국 경찰과 충돌하면서 유혈사태로 번지게 되었고, 중국 정부의 무력진압으로 사태가 격화되었다.

○ 부록 : 아시아에 고원 지역에 위치한 티베트 (Tibet) 개관
티베트 (Tibet)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티베트 고원의 지역으로, 토착 티베트인들의 고향이다. 평균 고도는 약 4,900m이며, 지구상의 육지에서 가장 높은 곳이어서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린다. 티베트에서 가장 높은 곳은 해발 8,848미터의 에베레스트 산이다.
행정 구역 상 티베트의 서부와 중부는 티베트 자치구 (시짱 자치구), 동부는 쓰촨성과 칭하이성 등의 민족자치주로 나뉜다.
티베트는 중국과 인도의 사이에 위치해 있으나 히말라야 산맥과 티베트 고원에 둘러싸여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히말라야 산맥의 북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역의 평균 고도가 4900m가 넘어,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컬어진다. 티베트는 지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고립된 지역이다.
– 역사
- 선사시대
1만여 년 전부터 티베트 지역에서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있다. 티베트버마어파의 티베트인들은 선비족 지배층들이 이끌었고 티베트고원에서 생활을 했다.
철기시대의 구릉지 마을과 매장지가 티베트 고원에서 발굴되었는데, 티베트의 고대 문서를 따라 샹슝 (象雄 Zhang Zhung)문화로 명명되었다. 이들은 뵌 (Bön) 지역 문화의 기원으로 알려졌다.
- 티베트 왕조 (토번)
티베트에는 옛부터 지속적으로 국가가 존재했는데 한자로 기록된 역사는 7세기초에 남리루쩬 (囊日論贊)왕이 중국에 사신을 보냈음이 확인된다(중국 사서로 보면, 「신당서」엔 4세기 첸뽀 (贊普, 토번 왕을 이르는 명칭) 라토토리넨쩬 (拉托托日年贊)이 ‘줘떠투두’ 로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2세기에 티베트에 여러 국가가 등장하였으나 티베트 최초의 통일 국가는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왕국으로서 다스린 송첸캄포 (松贊干布, 581 ~ 649년)로부터 시작된다. 구당서에 의하면 송첸캄포와 토번제국은 선비족 탁발씨의 후손이다. 그는 633년 수도를 라싸로 정하고 티베트 왕조를 열었고 당 태종의 조카인 문성공주 (文成公主, 625~680)을 첩으로 삼고 네팔의 공주인 브리쿠티 데비와 혼인하였다. 티베트의 군대는 663년 ~ 672년에는 동북방의 칭하이와 간쑤 지방의 토욕혼 왕국을 점령하였다.
670년 ~ 692년에는 당나라와 대비천 전투 (669년)를 통해 타림 분지와 인접한 신장과 카슈가르시를 점령하고 사천 지방을 정복하였다. 승풍령 전투 (678년)에 승리해 지위를 확고히 하였고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유린했으며 장안 바로 옆까지 정복하였다. 당나라는 토번을 공격하였으나 가르친링 (대비천, 승풍령 전투 승리시의 지휘관)에 의해 소라한산에서 패하고 돌아가게 되었다. 토번은 당나라 서쪽 지역을 모두 정복하였다.
티베트인들은 아랍, 투르크와 위구르와 동맹을 맺었다. 고선지는 서쪽 토번에 의해 길이 막혀 위구르의 영토를 우회하였으나 751년 탈라스 강 전투에서 아바스 왕조와 칼룩스의 연합군에 패하였고, 티베트는 북부 인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고, 763년 안사의 난으로 당나라가 혼란한 것을 틈타 당시의 첸뽀 치쏭데쩬 (赤松德贊)이 다짜뤼공 (達札樂宮)을 동정원수로 임명해 20만 대군을 이끌고 당나라의 도읍인 장안을 점령 하였다. 이후 토번 20만 대군은 장안에 오래 정주하며 장안을 학살을 하고 유린하였다. 당왕실의 황후와 당나라 여성들을 모두 취하고 귀족들을 농노로 끌고가 장안은 황폐화되었다.
821년 또는 822년에는 당나라는 굴욕적인 평화협정을 맺었으며, 두 나라의 국경에 대한 설명과 함께 양국 언어로 기록된 이 조약은 라싸의 조캉사원 앞의 돌기둥에 새겨져 있다. 티베트는 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중앙아시아에서 왕국을 유지했다. 이 시기의 티베트는 토번 (吐蕃)이라 불렸고, 티베트 문자를 사용하였으며, 3세기 동안 9대의 왕이 다스렸다. 토번이 멸망한 이후에는 한자로 기록된 기록이 존재하지 않으나 티베트인과 투르크인들의 국가가 지속적으로 토번의 땅을 지배하였다.
- 몽골과 청나라
1920년과 1925년 사이에 사용된 티베트 국기
이후 티베트는 13 ~ 14세기에는 원나라의 간접적 지배를 받기도 하였으며, 정복된 한족들보다 훨씬 높은 지위를 확립했다. 1750년에는 청나라 건륭제에 의해 보호령이 되었고 한족보다 우대받아 만주족 동급의 지위를 확립했다.
- 티베트 왕국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티베트의 13대 달라이 라마는 중화민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언한다. 하지만 중화민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 따라 1913년 몽골과 양측이 독립 국가로 국제적인 승인을 받기 위해 협력한다는 내용으로 몽장 조약을 체결하였다. 당시 몽골에는 러시아 제국, 티베트에는 영국이 무기, 차관을 제공하는 등 외부의 지원이 있었으나, 영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당시의 제국주의 열강 속에서 몽골과 티베트를 독립국으로서 인정하는 나라는 없었다.
독립 이후 중화민국의 역대정권과 군사적인 긴장상태가 유지되었으며, 티베트 달라이 라마 정부의 실효적 지배 영역 내에서는 어떠한 중국의 기관도 설치가 승인되지 않았다. 1918년과 1930년에는 티베트 영내로 침입한 중국 군대를 격퇴하는 등 사실상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향유했다. 그러나, 1940년 달라이 라마 14세의 즉위식에 참석한 중화민국은 몽장위원회를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의식 후에도 귀국하지 않았고 1948년에 강제로 퇴거되기까지 ‘중화민국 행정원 몽장위원회 주 티베트 대표처’라는 이름으로 라사에 계속 머물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연합군의 일원이 되었고, 영국령 인도로부터 이주해 온 영국군에 의해 갼세, 라싸와 카무 지방 각지에 통신기지가 건설되었다. 이 기지들은 중국 인민해방군이 티베트를 무력 점령할때까지 영국군의 무선기사에 의해 운영되었다.
- 중국의 지배
청나라의 멸망 이후, 중화민국의 역대정권은 독립국으로서 존재한 티베트를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하였으나, 북경정권의 시대에는 군벌의 혼전, 남경국민정부 시대에는 대일전쟁으로 독립을 주장하는 티베트에 대하여 압력은 행사하였으나 본격적인 군사적 침략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게되면서 중국은 티베트와 타이완을 포함한 중국의 옛 영토를 회복하겠다고 발표한다. 1950년 10월 중국 인민해방군은 티베트를 침공하여 점령하였다. 하지만 중국은 티베트의 평화적인 해방이라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서 1951년 5월 23일 티베트와 십칠조협의를 체결하여 강제 합병하였다. 이로써 티베트는 최초로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 많은 티베트인들이 정치적인 이유 또는 탄압을 피해 인도로 망명했다.
중국공산당은 티베트인에 대한 고문과 학살로써 티베트를 지배하였고, 1960년대에는 중국 전역을 강타한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3,700개나 되던 사찰은 13개만 남고 모조리 파괴되었다.
이후 시짱자치구 (서장자치구, 西藏自治區)가 설립되어 티베트인의 자치를 허용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한족이 통치를 유지하였다. 티베트의 중국 귀속 이후로 망명을 떠난 티베트인들의 일부는 동화정책에 따라 티베트로 돌아와서 살고 있다. 한족의 이민을 실시하여 한족의 인구 비율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최근 중국 정부는 포탈라 궁을 보수하는 공사를 시행하였고, 2005년에는 티베트로 연결되는 철도가 완공되었다.

○ 중화인민공화국, 티베트 자치구 성립 선언 (1965년 9월 9일)
티베트 자치구 (티: Bod-rang-skyong-ljongs) 또는 시짱 자치구 (西藏自治區)는 중화인민공화국 서남부의 티베트에 있는 자치구이다. 1950년대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에 합병되었으며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많은 사찰들이 파괴되기도 했다. 오랫동안 독립 투쟁을 벌이고 있으나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압으로 인해 번번이 진압되고 있다.
1912년부터 1950년까지 현재의 티베트 자치구(위창 지방과 서부 캄 지방)는 달라이 라마가 수장으로 있는 티베트 정부의 지배를 받았다. 역사상의 티베트의 다른 부분(동부 캄 지방과 암도 지방)은 20세기에 티베트 정부의 관할이 아니었다. 오늘날 티베트의 다른 부분은 칭하이성, 간쑤성, 쓰촨성, 윈난성에 분포되어 있다.
소비에트 연방의 전략에 따라 티베트 통치자 회의는 티베트족으로 이루어진 반면, 지역 공산당 위원회의 총서기들은 외지인, 대개 한족으로 구성되었다.
1950년 중공군은 최소한의 저항을 분쇄하고 창두 지역으로 침공했다. 1951년 중화인민공화국이 티베트에 무력으로 17개조 협정 조약을 체결하도록 하여 실지배자인 달라이 라마가 아닌 대신이 중국으로 가 정부의 인장조차 위조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티베트 통치권을 인정하는 십칠조협의에 서명하였다. 협정은 몇 달 후 라싸에서 비준되었다.
1959년 노부링카 궁 앞에서 중국에 대한 시민 봉기로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하고 인도에서 달라이 라마는 17개조 협정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강압에 체결된 협정이므로 폐기한다고 공포하였으며 독립된 티베트 정부 창설도 알렸다. 그 후 언론의 노출로 세계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마오쩌둥의 사망 후 자본주의적 역개혁의 필요성을 느낀 덩샤오핑과 현 14대 달라이 라마가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중국 정부가 근본적 자치문제에 대해선 언급을 회피하여 협상이 매번 결렬되고 국제문제로 부상하게 되었다. 1989년 당시 티베트 자치구의 당 서기로 임명받은 후진타오는 병력을 티베트에 집결, 2년동안 티베트인들의 대항과 중국의 강경진압이 시작되었다.
1989년 12월 달라이라마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후에도 달라이 라마는 비폭력 운동에 근거한 중국 내에서의 티베트의 진정한 자치를 목표로 티베트인들의 독립운동은 계속 되고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