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1일, 리투아니아 (Lithuania) 국권 회복일
3월 11일은 리투아니아 (Lithuania)의 구권 회복일이다. 리투아니아는 1990년 3월 11일, 소비에트 연방에서 탈퇴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리투아니아 공화국 (Republic of Lithuania, 리: Lietuvos Respublika) 줄여서 리투아니아 (Lithuania, 리: Lietuva)는 북유럽에 있는 공화국이다. 수도는 빌뉴스 (과거에는 카우나스)다.
동쪽과 남쪽은 벨라루스, 서쪽은 발트 해, 남서쪽은 러시아 (월경지 칼리닌그라드주)와 폴란드, 북쪽은 라트비아에 닿아 있다. 발트 3국 국가 중에서는 인구와 영토가 가장 많고 넓다.

– 리에투바 공화국 (Lietuvos Respublika)
.표어: 국가의 힘은 단결에 있다
.수도: 빌뉴스 (리투아니아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
.정치: 공화제, 단일제, 이원집정부제
.독립: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 1918년 2월 16일, 불법 점령 1940년 6월 15일, 재독립 1991년 9월 6일
.면적: 65,300km2
.공용어: 리투아니아어
.인구: 278만 여명
.통화: 유로 (EUR)
18세기 말 폴란드 분할 때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립했으나 1940년 다시 소련에 강제 점령 병합되었다.
1941년부터는 독일의 지배를 받다가 1944년 다시 소련군에 점령되면서 소비에트 공화국의 일원이었다.
1991년 8월 소련 쿠데타 실패 후 독립을 선언, 9월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독립국가연합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발트 3국의 최남부에 있다.

– 리투아니아 개관
민족 구성은 리투아니아인이 83%이다.
전체 산업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식품 및 담배가 29.6%, 기계 장비가 18.3%, 섬유 의복·가죽 제품이 17%이다.
6세부터 11년간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1990년 종교교육을 도입하는 등 교육개혁을 단행했다.
로마 가톨릭 문화권에서는 리투아니아가 제일 북쪽에 위치한다.
현재 유럽 연합 (EU), 북대서양 조약 기구 (NATO),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가입국이다.
리투아니아라는 이름은 1009년의 라틴 연대기 Annales Quedinburgenses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1253년 7월 6일 민다우가스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처음으로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1386년 요가일라 (Jogaila)가 폴란드의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하면서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는 동군연합 (同君聯合)을 형성하게 된다.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은 1410년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튜턴 기사단을 무찌름으로써 독일인들의 동방 팽창을 저지하였고, 리투아니아는 이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동일한 운명을 걷게 되어, 폴란드 분할 결과 1795년 리투아니아 지역은 러시아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고 말았다.
리투아니아인들은 1795년, 1830년, 1863년 등 세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리투아니아는 1918년 2월 독립을 선언하였다.
애초에는 뷔르템베르크 공국 출신의 군주를 영입해 군주제로 독립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러시아 혁명과 독일 제국의 패망으로 독립되어, 공화국으로 출발한 것이다.
리투아니아는 1918년 독립을 선언한 이후에, 공산당 세력, 보수 세력, 농민 세력 등 복잡한 이념 세력들의 정권 쟁탈 투쟁으로 국내사정은 극히 혼란하여 정권 교체가 잦은 불안이 계속되어왔었다.
그 틈새를 타서 민족주의자가 점점 세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하게 되었는데, 1930년대 즈음 들어오면서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발트 3국 국가들은 민족주의자가 반란으로 집권하여 반소, 반공 독재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1939년 8월 23일 소련은 나치 독일과 리벤트로프-몰로토프 밀약을 맺어 중앙유럽을 독일과 소련이 각각 분할하기로 하는 비밀 의정서를 만들었다.
리투아니아는 1939년 9월 두 번째 밀약에서 소련의 몫으로 추가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 이후, 소련이 리투아니아를 처음으로 점령한 것은 1940년 6월 15일이었는데, 소련의 내무인민위원회 요원은 리투아니아의 국경 초소를 급습하였고, 리투아니아군을 몰아낸 뒤 소비에트 간부단으로 대신하였다.
의회와 여타 정부 부처의 공직자를 뽑는 선거에서는 명부에 후보자가 한 명씩밖에 없었는데, 선거의 공식 결과에서 친 (親)소련 후보가 99.2%의 표를 얻었다.
그렇게 구성된 의회는 곧 소비에트 연방에 가입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소련의 승인을 얻어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소련에 병합되었다.
국제 사회는 소련의 리투아니아 병합을 불법으로 보고 비판하였다.
1941년 독-소 개전 이후 독일군에 점령되기도 하였다.
1944년 나치 독일이 패퇴하면서 다시 리투아니아를 점령한 소련군은 독일에 협조하였다는 이유로 리투아니아인들을 박해하여 29,923가구가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되었고, 12만 명이 국외 추방되거나 북유럽, 미국 등지로 망명하였다.
1990년 3월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1991년 1월 소련군이 리투아니아를 침공하여 13명이 사망하고 700여명이 부상하였으나, 리투아니아는 1991년 9월에 독립했고 1991년 9월 17일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와 함께 유엔에 가입하였다.
현재 리투아니아는 반러시아적인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다.
2008년 11월 27일에 리투아니아는 신임 총리로 안드류스 쿠빌류스가 새총리로 당선되었다.
2009년 5월 17일에 대선에서 첫 여성대통령이 탄생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