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년 3월 5일,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 (Flavius Claudius Iulianus, 331 ~ 363년)가 안티오크에서 9만명의 군대를 동원해 사산 제국 (Sassanid Empire, 224 ~ 651) 공격
363년 3월 5일,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 (Flavius Claudius Iulianus, 331 ~ 363년)는 안티오크에서 9만 명의 군대를 동원해 사산 제국을 공격했다.
율리아누스 (Flavius Claudius Iulianus, 331년 8월 7일 ~ 363년 6월 26일)는 로마의 49대 황제로 최후의 비기독교인 로마 황제다. 기독교도들에겐 배교자 율리아누스 (Iulianus Apostata, Julian the Apostate)라고 불리는 황제다.

– 율리아누스 (Flavius Claudius Iulianus)
.황명: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Flavius Claudius Iulianus)
.생사: 331년 8월 7일 ~ 363년 6월 26일
.재위: 361년 ~ 363년
.가문: 콘스탄티누스 왕조
오, 신들과 인간들의 어머니이시여. 위대한 제우스와 왕위를 공유하는 분이시여. ··· 오, 생명을 주시는 여신이시여. 지혜이자 섭리이자 우리 영혼의 창조자이시여. ···· 모든 인간에게 신들이 누리는 최고의 행복을 주시고, 로마인들이 스스로에게서 불경스러운 부분을 정화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 율리아누스, ‘대모신 키벨레에게 바치는 찬가’ 중에서
그는 최후의 비기독교인 로마 황제로, 쇠락하는 제국의 재부흥을 위해 로마의 전통을 부활시켜 개혁하려고 노력하였고 이 때문에 후세의 기독교로부터 “배교자 율리아누스”라고 평가되었다.
○ 생애 및 활동
– 초기
율리아누스는 331년 비잔티움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복동생인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어머니는 그의 두 번째 부인 바실리나였다. 그의 친할아버지는 황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고 할머니는 그의 두 번째부인이자 막시미아누스의 딸인 테오도라였다.
337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자 그 혼란 속에서 콘스탄티누스 일가에 대한 대학살극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율리아누스의 사촌형인 콘스탄티우스 2세가 자신의 확실한 권력을 위해 뒤에서 조종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테오도라 사이에서 태어난 핏줄은 거의 전부가 몰살을 당했는데 콘스틴티누스 왕가의 핏줄중에서 남은 사람은 딱 5명의 남자뿐이었다. 그 다섯사람은 콘스틴티누스 1세의 아들들인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 삼형제와 율리아누스(당시 6살), 그리고 율리아누스의 사촌인 갈루스 부제(당시 12살)였다.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 삼형제에 의해 3등분 되고 콘스탄티우스 2세는 살아남은 갈루스와 율리아누스에게 엄격한 아리우스 기독교 교육을 시키며 감시했다.
처음에 율리아누스는 비사니아에서 외조모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다. 7살에 니코메디아의 주교인 아리우스주의자 유세비우스에게 교육을 받았고 마드니우스라는 고트족 출신 노예에게 길러졌는데 이 노예는 그리스 고전문화에 정통하여 율리아누스에게 호메로스같은 그리스 고전을 많이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 집권
340년 콘스탄티누스 2세는 그의 동생 콘스탄스와 다투다가 죽었고 이어 350년 콘스탄스도 마그넨티우스에게 죽었다.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콘스탄티우스 2세는 마그넨티우스와 대처하는 데 전념하기 위해 율리아누스의 형인 갈루스 부제를 부제(Caesar)에 임명하고 동방을 통치하게 했다.
351년 콘스탄티우스 2세가 마그넨티우스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자 그는 354년 갈루스에게 반역죄를 씌워 처형해 버리고 혼자 제국을 통치했다. 그러나 사산조 페르시아의 위협이 다가오자 그는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율리아누스를 밀라노로 불러 여동생 헬레나와 결혼시키고 부제로 삼아 제국의 서방을 통치하도록 했다.
처음 부제가 되어서 율리아누스가 맡은 임무는 제국을 침범한 야만족을 격퇴하는 일이었다. 갑자기 부제가 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그리스 철학에 심취한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갈리아에서 게르만 부족들과의 전투에서 그는 엄청난 군사적 재능을 보여주었는데 4차례의 원정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고 특히 스트라스부르 전투에서는 대승을 거두고 프랑크족, 알란족을 거의 궤멸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에 그의 성공에 위기를 느낀 콘스탄티누스 2세는 자금 지원을 거부하였다.
360년 율리아누스가 갈리아에서 야만족과 대처하고 있을 때 사산조 페르시아의 샤푸르 2세가 메소포타미아를 침범해 아미다를 함락시켰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에게 갈리아의 병력을 차출해 동부 전선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은 율리아누스의 군대의 반감을 가져왔고 그의 군대는 율리아누스를 파리에서 황제(Augustus)로 추대했고 콘스탄티우스 2세는 격노했다.
같은 해 6월 콘스탄티우스의 군대가 아퀼레이아를 점령하고 이제 두 황제의 부대사이에 내전이 불가피하게 되었는데, 11월 콘스탄티우스 2세가 죽었다. 죽기 직전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가 유일한 황제라는 유언을 남겼고 율리아누스는 정식 황제로 등극했다.
율리아누스는 집권과 동시에 콘스탄티우스의 치세동안의 악정을 단죄했다. 비대해진 황궁의 지출을 대폭 삭감하고 모든 환관을 황궁에서 몰아내었다. 또한 황궁의 사치스러움을 제거하고 노예들과 경비병을 줄여서 황궁생활을 크게 간소화하고 그 비용을 줄였다. 그는 또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모범으로 삼아 철학인 황제로서 통치하겠다는 포고령을 발표하였다.
– 율리아누스와 종교
362년 2월 4일 율리아누스는 모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포고령을 발표한다. 이 포고령에서 모든 종교는 법앞에서 평등하며 모든 로마의 영토에서 로마 제국이 특정종교를 강요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기독교를 공인한 밀라노 칙령 이후 특정종교를 박해하던 정책을 멈추고 로마가 가진 본래의 종교적 관용정신을 반영한 것이었다.
율리아누스 황제는 대모신 키벨레에게 ‘로마 사람들이 불경하게 굴었던 과오를 씻어낼 기회를 달라’고 청원하는 내용의, 1만 7천 자나 되는 긴 찬송가를 작사한데 이어 하룻밤 동안에 그것을 작곡까지 해다고 한다. 또한 학교에 관한 포고령 에서 기독교인 교사는 이교도의 저작물(《일리아드》같은 비기독교 저술)을 사용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로써 기독교 학교의 힘을 약화시키고 재정적 타격을 주기 위함이었다. 또한 관용에 관한 포고령에서 비 기독교 신전을 다시 열게 하고 재산을 반환하는 한편, 교회의 분쟁으로 추방되었던 기독교 사제, 주교들을 다시 복직시켰다.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율리아누스가 안티오키아에 도착했을 때 아폴로 신전이 불에 타는 일이 일어났다. 율리아누스는 이를 기독교인의 소행으로 보고 안티오키아의 가장 큰 교회를 폐쇄했다.
율리아누스는 기본적으로 철학자였고 로마의 몰락 원인이 관용 없는 기독교와 그 제도에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의 기독교는 제국의 영향력을 이미 뛰어넘고 있었고 수많은 특권과 소모적인 논쟁으로 제국의 힘을 좀먹고 있었다고 율리아누스는 판단했다. 율리아누스가 이단의 논란으로 추방된 기독교 주교들을 복직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게 하는 등의 조치는 모두 기독교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 죽음
363년 율리아누스는 전임 황제인 콘스탄티우스 2세가 준비하다가 끝내 이루지 못한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원정을 떠났다. 안티오키아에서 9만명의 병력을 모아 그중 3만명을 프로코피우스에게 주어 아르메니아로 보내고 거기서 아르메니아 동맹군과 합세해 북쪽에서 사산제국의 수도로 진격하게 했다. 율리아누스 자신은 직접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사산제국의 영토로 쳐들어가 몇번의 전투에서 승리하고사의 수많은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진군하였으며 트라야누스황제가 250년 전에 만든 운하까지 이용하였다. 그러나 사산왕조의 수도인 크테시폰에서 사산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였다 게다가 프로코피우스의 제2군은 갈라진 지 5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율리아누스는 퇴각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퇴각의 행군중이던 6월 23일 사산 병력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율리아누스는 갑옷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전위와 훙위를 돌아다니며 용맹하게 싸우다가 적의 창에 복부를 깊숙이 찔렸다 (기독교도인 로마 병사의 창에 찔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율리아누스의 개인 주치의이자 친구였던 오리바시우스가 모든 조치를 다 취했으나 결국 율리아누스의 부상을 치료할 수 없었고 젊은 황제는 죽었다. 죽기 전 황제는 “갈릴리 사람 (기독교도)아, 네가 이겼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율리아누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로마의 사산 제국 원정은 실패했고 로마 군단은 후임으로 기독교인인 요비아누스를 황제로 세웠다. 요비아누스와 그 뒤를 이은 발렌티니아누스 1세, 발렌스의 치세에 율리아누스의 모든 반 기독교적인 정책은 폐기되었고, 로마 다신교적인 로마제국의 역사는 율리아누스를 끝으로 막을 내린 셈이 되었다.

○ 저술가 율리아누스
율리아누스는 초기에 그리스 철학과 사상에 심취하였다. 아테네에서 공부하면서 신플라톤주의자가 되었다. 그의 저술은 단편적으로 몇편이 전해져 내려온다.
.미소포군 (Misopogo) : 턱수염을 증오하는 자들-안티오키아에서 자신의 턱수염(그리스적인 외모를 빗댐)을 놀리는 주민들에게 맞서 저술함
.갈릴래아인들에 반대하며 : 기독교인들에 대한 비판
.황제들 : 기독교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를 비롯한 몇몇 로마 황제들에 대한 우화적인 내용
이외에 그리스어로 쓰인 몇 편의 철학적 사변과 콘스탄티우스에게 바치는 찬가와 같은 난해한 저술이 있다.
○ 삶
1. 불행한 어린시절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카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황제로 임명되면서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와 이혼하고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의 의붓딸인 테오도라와 재혼하는데, 그 사이에서 아들 둘을 보았으며 그 중 차남인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가 두번째 아내에게서 본 둘째 아들이다. 그가 첫번째 아내에게서 본 첫째 아들은 갈루스. 이 둘은 그러니까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복 동생의 아들이 되는데, (이 둘은 또 서로 이복이다) 이런 미묘한 위치가 율리아누스와 갈루스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는 조카가 넷이 있었는데, 그 중에 나이가 어렸던 갈루스와 율리아누스를 제외한 두 사람을 자신의 세 아들과 함께 공동 후계자로 삼아 제국을 다섯등분하여 다스리게 할 예정이었다. 제국의 혼란기이니만큼 황제가 많으면 그만큼 방어에 유리하기도 하고, 두 조카가 두 황제의 후손이기 때문에 내란의 우려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은 후, 갑작스레 닥친 숙청으로 인해 수십여명이 살해되었고, 이 때 차기 황제인 두 조카와 콘스탄티누스의 두 이복 동생도 살해되었다. 겨우 살아남은 율리아누스와 갈루스는 그 당시 나이가 고작 6세와 12세였다.
이렇게 고아가 되어버린 두 형제는 어린 시절을 니코메디아에서 동방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의 감시 하에 지냈다. 콘스탄티우스가 아리우스파였기 때문에 유명한 아리우스파 성직자였던 에우세비오스에게 기독교 교육을 받으면서 세례까지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와 함께 스키타이 출신의 고트족 거세 노예였던 마르도니우스에게서 고전 문학과 철학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이 때 당시에 받았던 교육은 율리아누스의 인격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생애 전반에 걸쳐 그 영향이 드러난다.
이렇게 6년을 지내다가 342년, 이들은 카파도키아의 마르켈룸에 유폐되고 만다. 콘스탄티우스의 감시가 워낙에 철저했던 탓에, 이들은 바깥 세계와 격리되다시피 한 생활을 해야 했다. 거의 감금된 거나 다름 없는 상황에서 형제들의 선생님이었던 마르도니우스도 오지 못하게 했기에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고, 물론 친구도 노예의 자식 정도 밖에 없었던 삶이었다고 한다.
2. 비극의 부제 갈루스
이러한 삶은 마그넨티우스가 로마의 두 황제 중 한명인 콘스탄스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끝나게 된다. 콘스탄티우스는 한창 전쟁 중이던 사산조 페르시아와 강화를 맺고 반란 진압에 나섰으며, 그 때 동안 자기를 대신해서 동방을 맡아줄 부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 부제의 자리에는 자신이 오랫동안 유폐해왔던 두 사촌 중에 형이었던 갈루스가 임명되었다. 그와 함께 율리아누스도 자유를 얻어 소아시아에서 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이 바라던 삶을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율리아누스는 자유를 얻었지만, 갈루스는 그렇지 못했다. 콘스탄티우스의 누이동생이었던 콘스탄티나와 결혼하여 안티오크를 수도로 삼아 동방 황제로서 통치를 하게 되었지만, 인생의 절반을 콘스탄티우스 때문에 억압받으며 살아왔던 갈루스는 그에 대한 분노가 장난이 아니었었다.
게다가 그의 아내가 된 콘스탄티나 또한 오빠 콘스탄티우스에 대한 분노가 컸었다. 그녀는 원래 아르메니아 왕국 지역의 황제가 되기로 했던 한니발리아누스의 아내로 황후가 될 예정이었으나 위에서 말했듯이 그는 숙청으로 살해당했고, 그 때문에 빡쳐서인지 한창 반란 중인 마그넨티우스에게 접근해서 그와 결혼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이렇게 자기를 싫어하는 둘을 뭉쳐놨으니 콘스탄티우스도 당연히 갈루스를 열심히 견제해댔고, 이에 두 황제 사이의 갈등은 커져만 가고 동방은 갈수록 혼란에 빠진다. 시리아 속주 총독이 살해될 정도로 사태가 심각했던 안티오크의 대규모 식량 부족 사태라던가,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도시 하나를 몰살시킨다던가, 정제가 보낸 두 고관을 살해해서 오론테스 강에 시체를 던진다던가. 즉 그대로 내버려뒀다가는 갈루스만 욕먹는 걸로 끝나지 않고, 콘스탄티우스 자신의 통치 자체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제국민 모두가 속주민이 아니라 로마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 때문에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이 진압된 후 콘스탄티우스는 갈루스를 제거하기로 마음 먹었고, 354년 갈루스를 밀라노로 불러들인 다음 긴급히 체포하여 갈루스를 반란죄로 처형해버린다. 갈루스는 그 전에 자기 아내를 밀라노로 보냈었지만, 여행 중에 병이 들어 죽었다고 한다.
3. 부제 율리아누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갈루스의 동생이었던 율리아누스도 의심을 받아 밀라노로 불려오게 된다. 하지만 황후 에우세비아의 도움으로 황제와 직접 대면하여 자신을 변호함으로써 살아남아 그리스로 유학을 가게 된다. 하지만 반년 후 사산조 페르시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되고, 그렇다고 마그넨티우스의 반란 때문에 커다란 공백이 생긴 서방을 비워둘 수도 없었던 콘스탄티우스는 결국 그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남자 혈육이었던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삼게 된다.
서방 부제가 된 율리아누스는 정제의 또 다른 여동생인 헬레나와 결혼했지만, 제대로 된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사산조와의 싸움을 위해 병력을 증강 중인 콘스탄티우스가, 자신이 죽인 삼촌의 아들이자 자신이 죽인 부제의 동생인데다 군사 경험은 커녕 일체의 공직 경력이 없는 일개 철학도에게 지원을 줄 여유는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아무런 지원 하나 받지 못한 채로 한겨울에 알프스를 지나 갈리아로 가게 된 율리아누스는, 모두의 우려와는 다르게 자신이 맡은 바를 잘해내게 된다. 제대로 지원도 받지 못하고 병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갈리아의 군무장관인 살루스티우스의 도움을 받아, 그 적은 병력을 긁어모아 적극적으로 군사 활동을 펼치면서 견실하게 운영하여 5년 동안 4번의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담당 구역인 갈리아와 라인강 방어선의 게르만족들을 격퇴하였으며, 적극적인 감세 정책과 농경 활성화 정책으로 갈리아의 부흥을 꾀했다.
4. 정제로 추대되다
부제 율리아누스가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리는 동안, 정제 콘스탄티우스는 도나우 강 방어선을 지키면서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페르시아 측이 국경지대에 있던 도시인 아미다를 점령하면서 국경선에 구멍이 나고, 이로 인해 큰 손실을 보면서 정제는 부제 율리아누스에게 지원병을 요청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율리아누스를 경계하고 견제하고 방해했던 이 정제는 이를 빌미로 크게 한방 먹일 생각이었고, 하필 이 때 쯤에 콘스탄티우스의 방해를 막아주던 부제의 황후 헬레나와 정제의 황후 에우세비아가 죽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부제 율리아누스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요구를 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이 차출의 대상이 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이들 앞에 나선 율리아누스를 큰 방패에 태워 자기들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려 정제로 추대해버렸다! 그리고 율리아누스는 이들의 정제 추대를 받아들이고 콘스탄티우스와 맞서기로 함으로써 다시금 내전이 발발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율리아누스는 정제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 해명하려 했고, 라인 강 너머의 야만족들과 싸우면서 1년을 보낸다. 그리고 콘스탄티우스가 페르시아와 강화를 맺고 기어이 자기를 치러 오자 재빨리 군사를 이끌고 시르미움에 도달하여 평화롭게 도나우 강 방어선을 손에 넣는다. 그렇게 로마 제국의 양대 정예를 손에 넣은 율리아누스는 정제와 한판 붙기 위해 군사를 편성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는데 콘스탄티우스 2세가 죽어버렸다. 갑작스레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콘스탄티우스 2세는 자신을 치러 오는 부제 율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그는 자기 후계자를 얻기 위해 결혼을 세 번이나 하였으나, 그가 죽고 난 뒤에서나 태어난 유일한 아이는 여자아이였다고 한다. 이 여아는 이후 그라티아누스 황제 대에 황후가 된다.
5. 정제 율리아누스
제위 찬탈자로 나섰다가 졸지에 정통 황제가 되어버린 율리아누스는 자신의 확고한 지위를 이용하여 로마 제국을 개혁하기 시작한다. 그 첫번째는 황궁의 입을 줄이는 것. 재정이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그 때 당시 황궁의 사치가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발사를 불렀더니 고관 대작의 행렬이라도 되어보이는 화려한 행차를 할 정도였다나. 그래서 쓸데없이 많은 고용인들을 모조리 쳐내고, 특히 환관들은 모조리 쫓아냈다고 한다. 물론 쓸모없는 인원들을 쳐내면서 이들에 들어가는 비용에 대해서도 손을 보았다. 또한 갈리아에서 했던 것과 같이, 재정 지출을 대폭 감소하고 정리한 다음 세금 감면책을 펼치고 복잡해져 있던 세금 체계를 간소화시키는 등의 세제 개혁을 펼쳤다.
1) 배교자 율리아누스
하지만 무엇보다도 율리아누스를 유명하게 만든 개혁은, 바로 배교자 율리아누스라는 별명을 그에게 붙여준 반기독교정책이다. 예전 황제들의 박해처럼 대놓고 사람을 잡아다 죽이는 식은 아니었지만, 한창 진행되고 있던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를 거스르는 정반대 방향의 정책을 펼쳤다. 어쩌면 이 때문에 율리아누스가 죽었다고 봐도 될 정도로 그의 정책은 커다란 반발을 불러왔으며, 그가 만약 좀 더 오랫동안 통치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선 그는 모든 종교를 공인하는 칙령을 내린다. 이는 밀라노 칙령 이후로 한창 성장하는 기독교에 밀리고 있던 다른 종교들의 숨통을 트여줬을 뿐만 아니라,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로 이단으로 몰리고 있던 기독교 내 다른 종파들에게도 믿음의 자유를 주었다. 이로 인해 기독교 내부로는 종파 간 다툼을 부추기고, 외부로는 다른 종교들의 재기를 노린 조치였다. 게다가 밀라노 칙령 이후로 사실상 면세였던 교회의 재산에도 세금을 매겼다. 밀라노 칙령 이후로 세금 감면을 받기 위해 교회에 재산을 바치거나 성직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러한 사례들을 끊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기존의 방치된 다른 종교들의 신전과 도중에 중단되었지만, 오래 전에 불타버린 유대교의[7] 예루살렘 성전을 복구하고 지원해 주어 다른 종교들의 제례를 부활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옛날에 이교도들의 성지에 있는 교회에 여러 이교도들의 상들을 세우고 기독교의 성유물을 치웠다. 콘스탄티우스 2세가 폐쇄했던 원로원 내의 승리의 제단(Altar of Victory)도 다시 복원했다.
하지만 단순히 기독교와 다른 종교 간의 균형만 맞춘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탄압도 열심히 가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 교사들이 교재로 그리스 고전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 기독교도이면서 어떻게 이교도의 신들을 다룬 책으로 교육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이런 대놓고 벌이는 차별에 반대하는 이교도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기독교도들을 공직에서 내쫓고, 황제 자신이 옛 로마 방식대로 희생제를 지냈으며, 교회가 불타고 주교가 추방되는 일도 빈번히 일어났다고 한다. 이러한 반기독교 정책은 이미 제국 내에서 상당한 기반을 구축한 기독교 세력의 거센 반발을 일으켰고, 그래서 로마의 기독교화를 부정적으로 보았던 에드워드 기번은 율리아누스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로마는 대규모 종교 내전에 직면했을 것이라고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주장했다.
반기독교 정책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부분은, 전문 성직자와 교리를 갖도록 로마 종교를 재조직한 부분이다. 아이러니한 이유는 재조직의 방향에서 기독교의 영향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교를 기독교라는 혐오스러운 대적의 본을 따서 조직해야만 그 적의 공격에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조직의 방향이 저 모양이 되어버렸다. 거기에 황제 자신이 매우 금욕적인 사람이었고, 이런 까탈스러운 삶을 새로 생긴 종교의 성직자에게 강요했으며, 이런 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게 그리스와 로마의 종교였다. 그렇다 보니 기독교를 싫어하는 만큼 율리아누스를 사랑하는 시오노 나나미도 이 부분은 로마 문명을 알기는 하냐면서 비판한다.
여담이지만 이러한 그리스 로마 종교의 부흥책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흐름은 이미 늦었는지, (후대의 날조라는 설도 있으나) 율리아누스가 델포이의 신탁을 묻자 다음과 같은 답을 얻었다고 한다.
“Tell the emperor that my hall has fallen to the ground. Phoibos no longer has his house, nor his mantic bay, nor his prophetic spring; the water has dried up.”
(나의 궁전이 땅으로 추락하였다고 황제에게 전하라. 포이보스는 더 이상 그의 집에도, 예언의 샘에도, 예언의 월계수에도 기거하지 않노라. 물은 이미 말라버렸노라.)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이 것이 델포이 신전이 폐쇄되기 전에 내려진 마지막 신탁이었다고 한다.
2) 동방 원정 그리고 전사 혹은 암살
363년 율리아누스는 전임 황제인 콘스탄티우스 2세가 준비하다가 끝내 이루지 못한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원정을 떠났다. 안티오키아에서 9만명의 병력을 모아 그중 3만 명을 프로코피우스에게 주어 아르메니아로 보내고 거기서 아르메니아 동맹군과 합세해 북쪽에서 사산 제국의 수도로 진격하게 했다. 율리아누스 자신은 직접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사산제국의 영토로 쳐들어가 몇 번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사산의 수많은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진군하였으며 트라야누스 황제가 250년 전에 만든 운하까지 이용하였다. 그러나 수도 크테시폰에서 사산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였다 게다가 프로코피우스의 제2군은 갈라진 지 5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율리아누스는 퇴각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퇴각 행군 중이던 6월 23일 사산군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율리아누스는 갑옷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전위와 훙위를 돌아다니며 용맹하게 싸우다가 적의 창에 복부를 깊숙이 찔렸다. 율리아누스의 개인 주치의이자 친구였던 오리바시우스가 모든 조치를 다 취했으나 결국 부상을 치료할 수 없었고, 율리아누스는 향년 만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율리아누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로마의 사산 제국 원정은 실패했고 로마 군단은 후임으로 율리아누스의 근위대장 출신이자 기독교인인 요비아누스를 황제로 세웠다. 요비아누스와 그 뒤를 이은 발렌티니아누스 1세, 발렌스의 치세에 율리아누스의 모든 반기독교적인 정책은 폐기되었고, 다신교적인 로마 제국의 역사는 율리아누스를 끝으로 완전히 막을 내렸다. 실제로 30년도 안 되어 테오도시우스 1세 때 그리스도교는 국교가 된다.
이란국 / 사산 왕조 / 사산 제국 (Sassanid Empire, 224 ~ 651)
이란국 또는 사산 제국 (Sassanid Empire, 224 ~ 651년)은 아르다시르 1세가 세운 고대 이란 왕조로 아르다시르 1세의 조부가 속한 Sāssān족의 이름을 딴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의 한 왕조라는 뜻으로 사산조 페르시아 (사산 왕조 페르시아) 또는 사산조 (사산 왕조)로 불리기도 한다.

– 이란국 / 사산 제국 (Sassanid Empire)
.존속기간: 224 ~ 651년
.수도: 크테시폰
.정부 형태: 전제군주제
.샤한샤: 224년 ~ 241년 (아르다시르 1세), 632년 ~ 651년 (야즈데게르드 3세)
.왕조: 사산 왕조
.지리 (621년): 어림 면적 6,600,000 km2
.공용어: 중세 페르시아어
.국교: 조로아스터교
.기타 종교: 마니교, 불교, 기독교, 유대교
.주요 황제: 아르다시르 1세, 샤푸르 1세, 샤푸르 2세, 호스로 1세, 호스로 2세
.성립 이전: 아르사케스 왕조 / 멸망 이후: 정통 칼리파 시대

○ 이란의 역사
* 이슬람 이전 / 기원전
.자얀데 강 문명, 선사시대
.시알크 문명, 7500~1000
.원시 엘람 문명, 3200~2800
.지로프트 문명 (아랏타), 3000~?
.엘람 제국, 2800~550
.박트리아 마르기아나, 2200~1700
.만나이 왕국, 10~7세기
.메디아, 728~550
.아케메네스 제국, 550~330
.셀레우코스 제국, 330~150
.그리스 박트리아 왕국, 250~125
.파르티아 제국, 248~기원후 224

* 기원후
.쿠샨 제국, 30~275
.사산 제국, 224~651
.에프탈, 425~557
.카불 샤히 왕조, 565~670
* 이슬람 이후
.라시둔 칼리파국, 637~661
.우마이야 칼리파국, 661~750
.아바스 칼리파국, 750~1258
.사만 토후국, 819~999
.타히르 토후국, 821~873
.알라비 토후국, 864~928
.사파르 토후국, 861~1003
.제야르 왕국, 928~1043
.부와이 제국, 934~1055
.가즈나 술탄국, 963~1187
.셀주크 제국, 1037~1194
.화레즘 제국 1077~1231
.샨사브 왕국, 1149~1212
.일 칸국, 1256~1353
.무자파르 왕국, 1314~1393
.카르트 왕국, 1335~1381
.추판 왕국, 1337~1357
.잘라이르 술탄국, 1339~1432
.티무르 제국, 1370~1506
.아크 코윤루 투르크멘, 1378~1508
.카라 코윤루 투르크멘, 1407~1468
.사파비 제국, 1501~1722 또는 1736
.무굴 제국, 1526~1857
.호타키 토후국, 1722~1729
.아프샤르 제국, 1736~1802

* 근대
– 아프가니스탄
.두라니 제국, 1748~1823
.영국과 러시아 세력, 1826~1919
.독립과 내전, 1919~1929
.바라자이 통치기, 1929~1973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1973~1978
.공산 통치기, 1978~1992
.1992년 이후 아프가니스탄, 1992~현재
– 아제르바이잔
.독립한 칸국, 1722~1828
.러시아 통치기, 1828~1917
.민주 공화국, 1918~1920
.아제르바이잔 SSR, 1920~1991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1991~현재
– 바레인
.포르투갈 통치기, 1521~1602
.대 (對) 영국 협정, 1820~1971
.바레인 왕국, 1971~현재
– 이란
.잔드 왕국, 1750~1794
.이란 숭고국, 1781~1925
.이란 제국, 1925~1979
.이란 혁명, 1979
.과도 정부, 1979
.이란 이슬람 공화국, 1979~현재
– 이라크
.오스만 제국, 1632~1919
.하심 왕국, 1920~1958
.쿠데타와 공화국, 1958~2003
.이라크 공화국, 2004~현재
– 타지키스탄 (SSR =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부하라 토후국, 1785~1920
.부하란 / 우즈베크 SSR, 1920~1929
.타지크 자치 SSR, 1929
.타지크 SSR, 1929~1991
.타지키스탄 공화국, 1991~현재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토후국, 1785~1920
.우즈베크 SSR, 1924~1991
.독립, 1991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1991~현재

○ 역사
226년 서부 이란 지역에서 통치기반을 굳힌 파르티아의 지방영주 아르다시르 1세는 동부지역으로 진출하여 여러 부족들을 차례로 정복했다. 그는 자신을 ‘아케메네스 왕조의 정통 후계자’로 자처하고 ‘이란족의 왕 중 왕’이라 칭하면서, 티그리스 강변의 고대도시 셀레우키아를 ‘아르다시르의 착한 행위’라는 이름으로 재건하여 크테시폰과 함께 그의 위세를 떨쳤다.
그의 아들 샤푸르 1세는 영역을 더욱 넓혔다. 여러번 로마군과 싸워 로마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 (238 ~ 244년)를 전사시켰고, 황제 발레리아누스 (253 ~ 260년)를 포로로 잡을 정도로 샤푸르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래서 그는 ‘이란족과 비 (非) 이란족의 왕 중 왕’이란 칭호를 사용했으며, 이 칭호는 사산 왕조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사산 왕조의 영역은 파르티아 때보다 훨씬 광대했는데, 이것은 그 행정력이 효율적이었고 군사력이 막강했음을 뜻한다. 중앙 아시아 쪽의 동북부 국경지역에서 아르다시르 1세와 샤푸르 1세는 쿠샨 왕조의 서부지역을 정복했다. 이후 사산 왕조의 외교정책은 변방의 방어와 영토확장에 목적을 두고 추진되었다.
사산 왕조는 파르티아 왕조의 세습적인 자치왕국을 폐지하고, 대신 왕족 가운데서 총독을 임명 또는 해임했다. 따라서 왕위계승자는 보통 가장 큰 주의 총독직을 맡게 되었으며, 그 결과 중앙집권이 매우 강화되었다. 더구나 황제 개인에게보다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강조되어서 왕실의 집단지도제와 유사하게 되었다. 사산 왕조시대 로마와의 분쟁이 가장 첨예했던 곳은 아르메니아 인페리오르였다. 바흐람 2세의 사후 (293년) 왕위 계승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 아르메니아는 296년에 로마의 수중에 떨어졌다. 아르메니아와 로마에서 기독교화가 진행되자 이것은 이란과 로마-비잔티움 사이의 종교적 분쟁으로 확대되었다.
샤푸르 2세의 아르메니아 실지회복 (失地回復)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으나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2세 사후 (361년), 티그리스 강변과 아르메니아 대부분의 영토는 페르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약 20년간의 혼란기 (아르다시르 2세, 샤푸르 3세, 바흐람 4세)가 지난 후 야즈데게르드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기독교에 관대한 정책을 폈는데 이것으로 인해 귀족들의 원성을 샀으며, 이때문에 그의 사후 (420년) 아들 바흐람 4세의 계승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는 동부에 에프탈의 침입 때문에 동로마 제국과 100년간의 평화조약을 맺고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다. 카바드 1세 (488 ~ 531년)는 정통 조로아스터교를 재정립했으며, 과세제도의 신설과 토지세의 개혁 등을 이룬 명망 있는 통치자가 되었다. 또한 군대를 강화하여 그의 세력은 흑해까지 다다랐다.
투르크족은 560년경 이란 동부지역에서 출현하여 중근동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으나 아직 사산 왕조의 영역에 심각한 위협은 되지 않았다. 호스로 1세로 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호르미즈드 4세 (재위: 579 ~ 590년)는 로마와 평화협상에 실패했지만, 기독교에 관대한 정책을 폈다. 이러한 정책은 그의 아들 호스로 2세에까지 이어져 결국 조로아스터교도들의 반란을 야기시켰다. 호스로 2세는 로마로 도피했으며, 로마 제국의 황제 마우리키우스 (582 ~ 602년)의 도움으로 591년 크테시폰에서 다시 왕위에 올라 그의 통치기간 안에 번영을 누렸다.
마우리스 황제가 암살되자 (602년) 로마와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호스로 2세의 군대는 안티오크 (611년) · 다마스쿠스 (613년) · 예루살렘 (614년) · 이집트 (619년) 등을 차례로 정복했다. 610년 왕위에 오른 로마의 헤라클리우스는 보복공격을 시작하여 627년에는 티그리스 강 유역까지 진출했다. 이후 호스로 2세는 자신의 아들 카바드 2세에게 살해되었고 (628년), 카바드의 사후 그의 손자인 야즈데게르드 3세가 왕위에 올랐다 (633년).
동로마 제국과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사산 왕조의 세력은 쇠퇴했고, 이슬람화된 신흥 아랍족의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페르시아군은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있었던 네하벤드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고, 야즈데게르드 3세도 651년에 메르브 근처에서 암살되었다. 이로써 이슬람 이전의 이란 역사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제국의 몰락과 함께 조로아스터교도 점차 쇠퇴일로를 걸었으나, 그 당시 이슬람교도들은 조로아스터교에 관용을 베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로아스터교는 이란에서 점차 사라졌으며, 현재 야즈드 및 봄베이 등지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 문화
– 종교
조로아스터교의 절대신 아후라 마즈다와 이란의 전통적인 신들의 결합이 파르티아 시대에 이루어졌는데 사산 왕조 때는 불과 빛의 숭배의식과 아후라 마즈다에 대한 경배의식이 강조되었다. 조로아스터교는 사산 왕조시대에 체계적인 종교로 발전했다. 최고사제는 종교관할권뿐만 아니라 후대에 왕위계승자의 선정과 국사 (國事)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선과 악, 즉 아후라 마즈다와 아리만의 대결에서 선한 신령과 천사는 모두 전지전능한 아후라 마즈다의 지휘를 받았다. 여기에 사산 왕조의 근거지인 파르스 지역의 관행도 종교의례 속에 상당히 스며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태양신 미트라도 조로아스터교와 결합된 것이다.
샤푸르 1세 치하에서 마니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나타났다. 창시자 마니 (216년? ~ 274년?)는 바빌로니아에 살던 파르티아 왕족의 후손이었지만 이란어를 사용했고 그의 교리는 그노시스교의 사상과 철학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또한 마니는 조로아스터교와 기독교의 사상을 함께 결합하려 애썼다. 이러한 마니의 가르침은 샤푸르 1세의 지원을 받아 이란과 외부지역까지 널리 전파되었으나 그의 아들 바흐람 1세의 탄압정책으로 마니는 처형되었고 신자들은 박해를 받았다. 그 후 마니교는 호라산 지역과 사산 왕조의 동부 및 중앙 아시아에서 명맥을 유지했다.
신학도 발전되어 아후라 마즈다, 즉 오르미즈드와 아리만을 무한한 시간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여 종래의 이원적 (二元的) 개념을 수정하려는 주르반 종파가 나타났으나, 호스로 1세 (재위: 531년 ~ 579년)가 이를 이단으로 선언함으로써 사산 왕조의 조로아스터교는 의례와 순수한 교리를 정교하게 다듬어갔다.
기독교는 3세기 중반 이후 티그리스강와 유프라테스강변의 아람어 사용공동체에 전파되었다. 로마 제국에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에는 사산 왕조는 기독교를 관용했으나, 마니교나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적대적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로마가 점차 기독교화된 339년 이후 기독교인들은 샤푸르 2세와 그의 후계자들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란의 기독교는 사산 왕조가 멸망한 후에도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 건축
사산 왕조 예술의 가장 뛰어난 작품은 석회석 절벽위에 새겨진 거대한 부조물이다. 페르세폴리스 근처에 있는 나크시에 로스탐과 나크시에 라자브 등이 현존하는 유적 중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부조물들의 모습을 통해 사산 왕조 통치자의 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현존하는 건축물로는 호스로 2세 (591 ~ 628년)가 크테시폰에 세운 거대한 궁전이다. 일부가 남아 있는 이 궁전은 구운 벽돌로 돔 형식의 천장을 반드는 사산조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 문학
사산 왕조시대에는 문학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 왕조가 문학보다 종교 우선정책을 추진한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외국종교의 영향과 더불어 외국문학도 들어와 중세 팔라비어로 번역되었다.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번역작품은 호스로 1세 때 완성된 ‘칼릴라와 딤네’ (Kalilag and Dimnag)인데 인도의 전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외에도 헬레니즘의 낭만주의 문학도 소개되었다.
○ 사산 제국 연표
– 224~241: 아르다시르 1세의 치세:
224: 파르티아 멸망.
229–232: 로마 제국과의 전쟁
조로아스터교가 국교로 제정되다.
아베스타 젠드라고 알려진 경전이 발간되다.

– 241~271: 샤푸르 1세의 치세:
241–244: 로마와 제1차 전쟁
258–260: 로마와 제2차 전쟁. 에데사 전투에서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포로로 잡음.
215–271: 마니교창시.
271~301: 왕조의 내전 기간.
– 309~379: 샤푸르 2세 의 치세:
337–350: 로마와의 1차전쟁 : 별 성과없음.
358–363: 로마와의 2차전쟁. 대승을 거두고 동방과 서방의 국경을 확장하다.
– 399~420: 야즈데게르드 1세의 치세:
409: 기독교도, 공개적 예배와 교회 건설 허락되다.
416–420: 야즈데게르드 초기의 명령을 뒤엎고 기독교 박해하다.
– 420~438: 바흐람 5세의 치세:
420–422: 로마와 전쟁.
424: 다드이수 종교회의, 동방정교회 콘스탄티노폴리스교회로부터 독립을 선언
– 438~457: 야즈데게르드 2세:
441: 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
451: 아르메니아의 반란이 진압되다.
483: 기독교 관용 포고령 발표.
– 491: 아르메니아 교회, 칼케돈 신조를 부정하다:
네스토리우스 기독교, 사산 왕조의 주류 기독교가 되다.
– 531~579: 전륜성황, 호스로 1세의 치세:
532: 로마 제국과 “영구 평화조약” 체결
540–562: 로마 제국과 전쟁.
– 590~628: 호스로 2세의 치세:
603–628: 로마 제국과 전쟁. 시리아, 아나톨리아, 이집트를 수복하다. 비잔티움 제국의 헤라클리우스에게 패배할 때까지 사산 왕조가 아케메네스 왕조의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여 최대 영토를 보유하다.
610: 아랍, 사산 왕조의 군대를 격파하다.
626: 아바르족과 연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으나 실패
627: 헤라클리우스,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침공, 니네베 전투에서 사산조 군대가 로마군에게 대패하다.
628–632: 황제의 난립으로 인한 혼란기
– 632~642: 야즈데게르드 3세의 치세:
636: 이슬람의 정복기간에 사산조 군대가 알카디시야 전투에서 아랍 무슬림군에게 대패하다.
642: 최종적으로 아랍군이 니네베에서 승리하다.
651: 마지막 황제 야즈데게르드 3세가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살해당하고 제국이 막을 내리다. 그의 아들과 다른 많은 유민들은 중국으로 망명하다.

○ 사산 왕조의 황제 목록
– 순서, 샤한샤, 재위 기간(년)
초대, 아르다시르 1세, 224 – 242
제2대, 샤푸르 1세, 240 – 270
제3대, 호르미즈드 1세, 270 – 271
제4대, 바흐람 1세, 271 – 274
제5대, 바흐람 2세, 274 – 293
제6대, 바흐람 3세, 293
제7대, 나르세스 1세, 293 – 302
제8대, 호르미즈드 2세, 302 – 309
제9대, 아두르 나르세, 309
제10대, 샤푸르 2세, 309 – 379
제11대, 아르다시르 2세, 379 – 383
제12대, 샤푸르 3세, 383 – 388
제13대, 바흐람 4세, 388 – 399
제14대, 야즈데게르드 1세, 399 – 420
제15대, 샤푸르 4세, 420
제16대, 호스로, 420
제17대, 바흐람 5세, 420 – 438
제18대, 야즈데게르드 2세, 438 – 457
제19대, 호르미즈드 3세, 457 – 459
제20대, 페로즈 1세, 457 – 484
제21대, 발라시, 484 – 488
제22대, 카바드 1세, 488 – 496
제23대, 자마습, 496 – 498
제24대, 카바드 1세(복위), 498 – 531
제25대, 호스로 1세, 531 – 579
제26대, 호르미즈드 4세, 579 – 590
제27대, 호스로 2세, 590
제28대, 바흐람 추빈, 590 – 591
제29대, 호스로 2세(복위), 591 – 628
제30대, 비스탐, 591 – 595
제31대, 카바드 2세, 628
제32대, 아르다시르 3세, 628 – 629
제33대, 샤흐르바라즈, 629
제34대, 호스로 3세, 629
제35대, 푸란도흐트, 629 – 630
제36대, 샤푸르 샤흐르바라즈, 630
제37대, 페로즈 2세, 630
제38대, 아자르미도흐트, 630 – 631
제39대, 파루크 호르미즈드, 630 – 631
제40대, 호르미즈드 6세, 630 – 631
제41대, 호스로 4세, 631
제42대, 파루카자드 바흐람 5세, 631
제43대, 푸란도흐트, 631 – 632
제44대, 야즈데게르드 3세, 632 – 651

○ 사산 왕조의 가계도
– 사산왕조의 지배자
(지배자 / 연도)
아르다시르 1세, 224년 – 241년
샤푸르 1세, 241년 – 272년
호르미즈드 1세, 272년 – 273년
바흐람 1세, 273년 – 276년
바흐람 2세, 276년 – 293년
바흐람 3세, 293년
나르세스 1세, 293년 – 302년
호르미즈드 2세, 302년 – 310년
샤푸르 2세, 310년 – 379년
아르다시르 2세, 379년 – 383년
샤푸르 3세, 383년 – 388년
바흐람 4세, 388년 – 399년
야즈데게르드 1세, 399년 – 420년
바흐람 5세, 420년 – 438년
야즈데게르드 2세, 438년 – 457년
호르미즈드 3세, 457년 – 459년
페로즈 1세, 457년 – 484년
발라시, 484년 – 488년
카바드 1세, 488년 – 531년
쟈마습, 496년 – 498년
호스로 1세, 531년 – 579년
호르미즈드 4세, 579년 – 590년
바흐람 코빈, 590년 – 591년
비스탐, 591년 – 595년
호스로 2세, 591년 – 628년
카바드 2세628년
아르다시르 3세, 628년 – 630년
샤흐르바라즈630년
푸란도흐트 (여제), 630년 – 631년
페로즈 2세, 631년
아자르미도흐트 (여제), 631년
호르미즈드 6세, 631년 – 632년
야즈데게르드 3세, 632년 – 651년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