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년 8월 27일,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 (Monica, 332 ~ 387) 별세
모니카 (Monica, 332년 ~ 387년, 축일 8월 27일)는 서방 교회의 4대 교회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이다. 로마 가톨릭과 성공회의 성인이다. 축일 (기념일)은 8월 27일이다.
– 성 모니카 (St Monica)
.출생: 332년경, 서로마 제국 누미디야 키르켄시스 타가스테
.선종: 387년 (축일 8월 27일), 서로마 제국 오스티아
.교파: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성공회 연합, 오리엔트 정교회, 루터 교회
.축일: 8월 27일 (라틴 교회, 잉글랜드 국교회, 루터교회 미주리시노드), 5월 2일 (1969년 이전의 로마 보편 전례력, 동방 정교회, 동방 가톨릭교회,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 미국 성공회)
.수호: 기혼 여성, 결혼의 어려움, 간통 및 외도의 피해자, 언어 폭력 피해자, 샌타모니카
그녀의 이름은 어머니 또는 아내를 뜻하는 라틴어 파생단어이다. 회화에서는 종종 아우구스티노회 수녀복을 입은 늙은 여성으로 묘사한다. 상징물은 아우구스티노회의 규율집과 십자가이며, 여성과 어머니의 수호 성녀이다.
모니카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고백록》에서 나온다. 아들인 아우구스티누스가 저술한 바에 따르면 모니카는 그리스도인 어머니의 귀감이 될 만한 여인이었다.
모니카는 오랫동안 남편 파트리키우스의 부도덕하고 난폭한 행실, 함께 사는 시어머니의 음주벽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기독교를 신봉하는 아내의 헌신으로 남편을 설득하여 마침내 세례를 받게 했다.
또한 그녀는 아들 아우구스티누스 때문에 언제나 노심초사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례를 받기는 했으나 예비신자에 어울리지 않는 방종한 삶을 살고 있었다. 아들의 방탕함이 심해지자 어머니 모니카는 스스로 포기하여 아들이 아직 개종할 때가 아니라고 여기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집에서 도망쳐 나와 로마와 밀라노를 여행했다. 모니카는 아들을 따라갔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를 만나 개종하게 되자 아들이 세례를 받는 자리에 있었다.
모니카는 아들이 세례받는 것을 본 뒤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로 가는 배를 타기 전 이탈리아 오스티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 생애 및 활동
모니카 (Monica, 332년 ~ 387년) 332년경 북아프리카 누미디아 (Numidia)의 타가스테 (Tagaste)에서 그리스도교 신자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모니카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 끊임없는 기도와 인내로 남편과 시어머니 개종
모니카는 이교도인이던 파트리키우스 (Patricius)와 결혼했는데, 남편의 성품은 다소 난폭했고 또 방탕한 기질이 있었다고 한다. 이 부부는 3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나비지오 (Navigius) 그리고 페르페투아 (Perpetua)이다.
그녀는 끊임없는 기도와 인내로써 370년경에 남편과 시어머니를 개종시킬 수 있었으나 그 다음 해에 과부가 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그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개종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당시 아우구스티누스는 카르타고 (Carthago)에서 공부하던 중에 마니교에 심취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교 철학을 비롯하여 그릇된 길을 걷고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 아들 아우구스티누스를 위한 동행과 기도
모니카에게는 유년기를 넘긴 세 자녀가 있었다. 그 중 맏이인 아우구스티누스가 가장 유명하다. 파트리치오가 운명한 당시 아우구스티누스는 17세였으며, 카르타 고의 수사학 학생이었다. 모니카는 자기 아들이 마니교도가 되어 비도덕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매우 슬퍼했다. 얼마 동안 아들이 집에서 먹고 잠자는 것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녀는 아들이 신앙을 되찾는 확실한 환상을 보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아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단식하면서 아들 가까이에 머물렀다. 사실 그녀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원하는 것보다 휠 씬 가까이에 머물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29세에 로마로 수사학을 공부하러 가기로 결심했다. 그녀도 함께 가기로 했다. 어느 날 밤, 그는 어머니에게 친구와 작별 인사를 하러 선창에 간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로마로 가는 배를 탔다. 모니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계교를 알았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밀라노를 향해 떠났음을 알았다. 비록 여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지만 모니카는 그를 만나기 위해 밀라노로 갔다. 밀라노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니카의 영적 지도자였던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영향을 받았다. 그녀는 모든 일에 있어 그의 충고를 따랐고 그녀의 제2 본성이 되어 있던 몇 가지 행동을 포기하는 겸손을 가졌다. 모니카는 타가스테에 있었을 때와 같이 밀라노에서 신심 깊은 부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방탕한 생활을 하는 아들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어머니가 주교를 찾아가 한없이 울면서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주교는 “어머니가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한 자녀는 잘못되는 법이 없습니다.” 하였다. 성 암브로시오 주교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어머니 모니카 성녀 사이에 있었던 유명한 일화다.
모니카의 정성은 곧 열매를 맺게 된다. 마니교도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반박할 거리를 찾기 위해 성당에 들러 밀라노의 주교였던 암브로시우스의 강의를 들었는데, 이때 큰 감동을 받게 된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알지 못하는 힘에 이끌려 암브로시우스 주교를 직접 방문하기에 이른다. 논쟁에 있어서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의 명쾌한 논리에 결국 두 손을 들게 된다. 그리고 암브로시우스 주교가 말한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됐다. 분명 어머니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감동은 받았지만, 하느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며 살려는 소망이 불길처럼 치솟았지만, 한편으로는 명예, 재산, 결혼 등 세속적 문제 때문에 내적 갈등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어느날 정원을 산책할 때였다. 하늘에서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을 무심코 펼쳤다. 그곳이 바로 로마서 13장 13절이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롬 13:13)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서 그리스도교의 깊은 진리를 받아들인다. 이때가 서기 386년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해 8월 교수직을 당장 그만둔다. 그리고 그의 친구 성 알리피우스 (Alypius)와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교리를 받고, 387년 4월 13일 부활성야에 밀라노에서 성 암브로시우스 주교 주례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이집트의 은수자들의 전기를 읽게 되고 그 고행의 생활에 매우 감동되어 “이 사람들이 한 것을 어찌 난들 못할 것이냐!”하고 부르짖었다. 그 후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 일종의 수도원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한다.
어머니의 정성과 기도는 드디어 아들의 마음을 움직였으니, 회개하여 교회로 돌아온 아들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의 박사로 불리는 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부이자 영성가가 되었다.
- 운명
어머니 모니카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바라고 갈망하던 것이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 성녀는 눈물로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그 행복한 마음을 안고 마침내 모니카는 아프리카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른다. 그런데 그녀의 역할은 거기까지 였을까. 귀향길에서 중병에 걸린다. 아들 아우구스티누스가 급히 달려왔다.
그녀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아들인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살다가 이탈리아의 로마 근처 오스티아 (Ostia)에서 55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그녀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교육을 받고 있는 동안 끊임없이 아우구티누스를 위해 기도했다. 387년 부활절에 성 암브로시오는 아우구티누스와 그의 친구 몇 사 람에게 세례를 주었다. 얼마 후 아우구티누스와 모니카는 아프리카로 떠났다. 비록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으나 모니카는 자신의 삶이 곧 끝날 것임을 알았다.
그녀는 아우구티누스에게 “얘야, 이 세상에서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지금 내게 남겨진 일이 무엇이며, 왜 내가 아직도 이 지상에 있는지 모르겠구나. 이 세상에서 나의 모든 희망이 다 이루어졌다.” 고 말하였다. 그녀는 곧 병이 들었고, 죽기 전 9일 동안은 심하게 고통을 받았다.
우리가 모니카에 관해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은 아우구티누스가 쓴 고백록에 있는 것이다.
○ 평가
성녀 모니카에 대한 공경은 처음에는 없었으나, 1162년 성녀의 유해가 프랑스의 아라스 (Arras) 근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으로 옮겨지면서 전 교회에 확산되었고, 다른 유물들은 1430년 오스티아에서 로마에 있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당으로 옮겨졌다.
성녀 모니카는 가톨릭 여성 단체의 수호성인이자 그리스도교 어머니상의 모범으로서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어머니의 수호성인’ 모니카의 삶의 자취는 참된 사랑의 기적을 우리 눈앞에 보여준다.
착한 아내요 훌륭한 며느리요, 성인 중의 성인이자 대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를 길러낸 모범적인 어머니인 성녀 모니카는 387년에 세상을 떠나 축일은 8월 27일이다.
아들 아우구스티노의 축일은 8월 28일이다.
모니카를 교회는 ‘경건한 자모의 거울’이라고 부른다.
○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고백록’에서 (Lib. 9,10-11: CSEL 33,215-219)
“영원한 지혜를 찾읍시다”
그녀가 이승을 하직할 날 – 우리는 모르는 채 당신만이 아시던 그날 – 이 가까워 왔을 때, 정녕코 그것은 당신의 그윽한 손길로 마련된 줄 아옵니다만 우연히도 그와 나는 단 둘이서 창문에 기대고 서 있었습니다. 우리 맞은 쪽에 집안의 정원이 내려다 보였습니다. 그 곳은 오스티아 티베리나! 지루하고 고달프던 여행 끝에 속간을 멀리한 우리는 거기서 배를 타려고 쉬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둘이서 주고받는 이야기는 즐겁기만 했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들을 잊고, 눈앞의 일에만 열중하고 우리는 진리이신 당신의 어전에서 더듬어 보는 것이었습니다. 성자들의 영생, “눈에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고,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르지 않은” 그 미래의 생활을 우리는 차라리 마음의 입을 벌리고 당신께 있는 생명의 샘, 그 샘물의 하늘스런 흐름을 목말라했사옵니다.
꼭 이 말 이대로는 아닐망정,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하오나 주여, 당신은 아시나이다. 이런 말을 하고 있던 그날, 말하는 동안 이 세상은 그 온 가지 쾌락과 더불어 하찮게만 보여졌던 것입니다. 그때 그녀는 말하였습니다. “아들아, 내게 있어선 세상 낙이라곤 인제 아무것도 없다. 현세의 희망이 다 채워졌는데 다시 더 할 것이 무엇인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 세상에서 좀 더 살고 싶어했던 것은 한 가지 일 때문이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보겠다고 …… 그랬더니 천주께선 과람하게 나한테 베풀어 주셨다. 네가 세속의 행복을 끊고 그분의 종이 된 것을 보게 되니, 그럼 내 할 일이 또 무엇이겠느냐.”
이 말에 내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아무튼 그런 지 닷새가 다 못 가서 아니, 더래야 얼마 못되어서 그는 열병으로 눕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앓던 어느 날, 실신하여서 잠시 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습니다. 바삐 가서 보니 이내 정신을 회복하고는 나와 내 형이 곁에 있는 것을 익히 보더니 무엇을 묻는 듯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어디 있었더라?” 그는 다시 눈을 들어 슬픔에 당황하는 우리를 보고 말했습니다. “어미를 여기다 묻어 다오.”
나는 말문이 막히고, 울음을 억지로 참고 있었는데 내 형은 무엇인가 중얼거리며 차라리 고향에서 돌아가셔야 마음이 편하지, 남의 땅에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어머니는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고 찌푸린 얼굴로 나무란 다음, 나를 향하여 말하였습니다. “보아라,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어서 또 우리 둘에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몸뚱이사 어디다 묻든지 그 일로 해서 조금도 걱정들 말거라. 한 가지만 너희한테 부탁한다. 너희가 어디 있든지 주님의 제단에서 날 기억해 다오.” 어미는 간신히 이런 말로 그 뜻을 전하다가 뚝 그치고, 치열해 오는 증세 때문에 진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