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년 9월 14일, 초기 기독교의 교부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 / 요한 크리소스톰 (John Chrysostom, 349? ~ 407) 선종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 / 요한 크리소스톰 (John Chrysostom, 그: Ιωάννης ο Χρυσόστομος 349년경 ~ 407년 9월 14일)은 초기 기독교의 교부이자 제37대 콘스탄티누폴리스 대주교였다.
뛰어난 설교자이자 주해가였던 그는 매우 중요한 기독교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끊임없이 기독교 교리에 대해 설전을 펼쳤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네스는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와 그의 아내 아일리아 에우독시아 등에 의해 박해를 받고 유배를 당해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 이후에 ‘황금의 입을 가진’ (金口, 황금 입) 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크리소스토모스 (그: Χρυσόστομος)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성공회 모두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였으며, 축일은 각각 9월 13일과 11월 13일이다.
대한성공회에서 사용하는《성공회 기도서》의 저녁기도 (만도)에도 성 크리소스톰의 기도가 포함되어 있다.
- 성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 / 요한 크리소스톰 (John Chrysostom)
.출생: 349년, 안티오키아
.선종: 407년 9월 14일, 폰투스 코마나
.교파: 로마 가톨릭교회
.축일: 동방교회) 11월 13일 / 서방교회) 9월 13일
.수호: 콘스탄티노폴리스, 교육, 간질, 강사, 웅변가, 설교자
○ 생애 및 활동
- 초기 생애
요한네스는 349년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로마 군단의 장교였고, 그가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주로 어머니 안투사 (Anthusa) 밑에서 양육되었다.
유명한 이교도 수사학자 리바니우스에게 법학과 수사학 등을 공부하였고, 요한네스는 교육을 마친 뒤에 수사학자가 되었다.
리바리니우스는 요한네스를 자신이 길러낸 최고의 학자로 평했는데, 소조멘에 따르면 훗날 리바니우스가 임종 직전 누가 리바니우스를 계승할지 질문했을 때 리바니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에게서 그를 데려가지 않았다면 요한이였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요한네스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타르수스의 디오도로스 밑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결국 기독교에 헌신하기로 하고 모친이 돌아가시자, 은둔 수사가 되어 성서를 고행을 하였다.
극단적인 고행으로 건강이 나빠지자,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그는 381년 안티오키아의 멜레티우스 주교에 의해 부제서품을 받았고 곧이어 386년 멜레티우스 주교를 계승한 플라비아누스 주교에게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후 12년 동안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사목활동을 하였으며,《사제직》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안티오키아에서 12년 동안 요한네스는 안티오키아 대성당인 황금 교회에서 연설한 웅변, 특히 성경 강해와 도덕적 가르침에 대한 통찰력 있는 해설로 인기를 얻었다.
387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즉위 10주년을 맞아 안티오키아에 특별세가 부과되자, 당시 요한네스의 조각상에 관한 설교를 들은 몹시 격양된 시민들이 납세거부 투쟁을 일으켰는데, 그들은 테오도시우스 1세와 죽은 황후 플라킬라, 아르카디오스, 호노리우스 석상을 시내에 질질 끌고 다니며, 공중목욕탕을 파괴하였다.
이에 분노한 황제는 안티오키아시를 말살해버리겠다고 위협했으나, 플라비아누스 주교의 중재로 안티오키아 시는 말살을 면할 수 있게되었다.
-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
397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넥타리오스가 죽자, 요한네스는 환관 에우트로피우스에게 지명되어, 황제 아르카디우스에 의해 378년 콘스탄티누폴리스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도 그는 공부를 많이 한 신학자다운 특유의 명쾌한 설교와 강의로 그 곳 시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권력자와 부자들의 사치와 인색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예언자적인 설교를 하였기 때문에 많은 물의를 일으켰고, 수많은 적들도 많이 만들었다.
그 중 가장 강력한 대적은 바로 동로마의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황후인 아일리아 에우독시아였다. 에우독시아는 사치스럽고 방탕한 행실로 콘스탄티누폴리스 대주교인 요한네스에게 공공연하게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 요한네스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또한 요한네스는 청빈의 의무를 실천하지 않는 성직자들을 교회에서 추방하고, 그의 감독을 받는 사제, 수녀, 수사들은 모두 독신생활을 해야 하였다.
이러한 강직하고 까다로운 성격은 알렉산드리아 대주교인 테오필로스와도 불화를 일으켰다.
403년 오크 교회회의에서 그는 여러 가지 죄목으로 요한네스 대주교를 기소하였는데, 정작 요한네스가 출두하지 않자 그를 단죄한 뒤 대주교직에서 면직시켜 버렸다.
이를 기회로 에우독시아는 남편 아르카디우스를 부추겨 그를 비티니아로 유배시켰다.
콘스탄티누폴리스 시민들은 그들이 존경하는 요한네스 대주교가 유배되자 폭동을 일으켰고, 테오필로스 대주교의 지지자들과 시가전으로 충돌했다.
그 날 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황후 에우독시아가 유산을 하자, 황후의 촉구로 황제 아르카디우스는 그를 다시 불러들였으며, 오크 종교회의는 무효화되었다.
그러나 이후 에우독시아가 대성당 바깥에 아우구스테움 광장에 세울려는 에우독시아의 은상 (銀像)을 둘러싸고 다시 황후와 요한네스 대주교는 대립했고 결국 다음 해에 벌어진 종교회의에서 알렉산드리아와의 불화와 그의 설교에서의 에우독시아에 대한 비판으로 요한네스 대주교는 퇴임 명령에 불복했다.
404년 부활절 세례의식 중에 황제의 군대가 들이닥쳐 무참히 살해했고, 요한의 지지자들은 희생당했다.
요한네스 그 자신도 다시 해임 및 유배당하였다. 그가 수도에서 유배되자 폭동으로 대성당과 원로원 건물이 잿더미로 변했다.
요한네스 대주교는 유배를 떠나기 직전, 교황 인노첸시오 1세에게 억울함을 호소했고, 교황은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의 도움을 받아 이 사태에 개입을 시도했다.
호노리우스와 교황은 아르카디우스를 압박하여 요한네스 대주교를 돕고자 하였으나 아르카디우스는 응하지 않았다. 406년 서방 황제와 교황은 대표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했으나 아르카디우스는 이들을 도시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고 감금한 후 이탈리아로 다시 돌려보냈다.
407년 가을, 요한네스는 소아시아 폰투스 새롭게 변경된 유배지인 피티우스에 가던 중에 코마나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마지막 말은 “Δόξα τῷ Θεῷ πάντων ἕνεκεν”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말이였다고 한다.
그의 죽음으로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방교회는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그가 죽은 뒤 약 31년 후인 438년 요한네스는 공식적으로 명예 회복을 받았고 그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다.
당시 동로마 황제이자 유독시아의 아들인 테오도시우스 2세가 엄숙히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러나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의 제4차 십자군 세력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하여 약탈을 벌일 때 그의 유해는 십자군에 의해 파헤쳐져 로마로 옮겨졌다.
그로부터 800년 후인 2004년 11월 2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요한네스의 유해는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이장되었다.
δόξα τῷ Θεῷ πάντων ἕνεκεν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_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선종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
○ 설교
현재 전승되는 크리스토무스 대주교의 설교를 보면, 지금 지니고 있는 것을 잃지 않으려거든, 그것을 남들과 나누라거나, 그리스도의 제대가 금으로 된 잔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그리스도께서 굶주림으로 돌아가신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라는 설교처럼 부자들의 인색함과 사치를 비판하는 내용이 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대한 설교에서 3절에 나오는 ‘예수를 저주하는 자’는 그가 악령에 씌어서 눈에 보이도록 또한 난폭하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가난이 말할 자유를 빼앗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가난하게 파견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들의 사명은 완전한 자유로 말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는 강합니다. 아무도 그에게 손해나 손상을 입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온갖 어려움을 겪습니다. 종들, 황금, 재산, 일, 끝없는 욕심, 사회적 야심, 끝없는 필요 등 모든 것이 그를 억누르고 사로잡습니다.” <히브리서 강해>18, PG 63,137
“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재물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탓에 가치가 완전히 뒤집어집니다. 누가 행복하다는 말은 그가 돈이 있다는 뜻이요, 누구를 동정하는 것은 그가 가진 게 없다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누가 재물을 모으려고 어떻게 했다거나, 다른 누구는 어찌하다 파산에 이르렀다거나 하는 것들뿐입니다. 누가 군인이 되거나 결혼을 하거나 무슨 직업을 가지려 할 때는, 그것이 빠른 시일 안에 부자로 만들어주는 일인지 분명할 때만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모인 우리는 이러한 악을 어떻게 쫓아버릴지 고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략)
여러분을 종으로 삼고 있는 맘몬을 언제까지 재갈을 물리지 않은 채 방치할 작정입니까? 여러분은 언제까지 돈의 종 노릇을 할 작정입니까? 언제가 되어야 여러분은 욕망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까? 만일 사람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자유를 얻으려고 온갖 수를 다 쓰겠지만, 돈의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여러분은 이 무서운 종노릇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조차 하지를 않습니다. 돈이라는 폭군에 잡힌 삶은 사람의 종 노릇보다도 더 무서운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서 강해> PG58, 790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공경하고 싶습니까? 그분이 헐벗은 것을 볼 때 못 본체하지 마십시오. 바깥 거리에서 추위와 헐벗음으로 고통당하시는 그분을 돌보지 않는 동안에는 이곳(교회)에서 비단옷으로 그분께 경의를 표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신 분이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분과 같은 분입니다.
제대 위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비단으로 된 제대보가 아닌 깨끗한 마음을 필요로 하시며, 거리에 있는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보살핌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스도의 식탁에 금잔들이 즐비하지만 그분 자신이 굶어 죽으신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먼저 배고픈 이를 먹여 주고 난 다음 그 나머지로 식탁을 장식하십시오. 여러분은 금잔을 만들게 하면서 배고픈 이에게 물 한 잔을 주지 않습니다. 이로써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제대를 금으로 된 제대보로 꾸미면서 헐벗은 이에게 필요한 옷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나그네로서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아 헤매는 사람을 보거든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은 나그네인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성당의 바닥과 벽과 온 기둥을 장식합니다. 등경에다 은으로 된 사슬을 매달면서 감옥에서 사슬에 매여 있는 그분을 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성당을 이런 물건들로 장식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예물과 함께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도록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만 여러분이 예물을 바치기 전에 가난한 이들을 먼저 도와주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성당을 장식하는 데 협조하지 않았다고 해서 고소당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떨어지게 되고 악마들과 함께 고초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당을 장식할 때 고통 받는 형제를 못 본체하지 마십시오. 그는 돌로 된 다른 성당보다 훨씬 가치 있는 성전입니다. <마태오 복음 강해> 50, 3~4
“지금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모든 통치자들이 하느님께서 뽑아 세운 자들입니까? 그렇다면 저들이 제정한 모든 법률과 규정이 선한 것이요 따라서 이의 없이 복종해야 할 텐데, 과연 그렇습니까? 대답은 ‘아니’올시다. 많은 통치자들이 주어진 권력을 남용하여 거대한 재산을 모으느라 백성을 착취하고, 저들의 악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부당하게 처벌하며, 이웃나라와 불의한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게 현실이지요. 저들의 법이 그릇되었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것에 불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는 최고의 권위는 땅의 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법입니다. 만일 이 두 법이 서로 충돌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하느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 평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고대 교회의 뛰어난 개혁가이자 순교자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임명되기 전 안티오키아에서 긴 기간 동안 사제와 설교자로 활동했던 요한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빵 하나만 희사해도 안티오키아에 가난한 이들이 없어지리라고 생각했다.
철저하게 완전함을 추구하였던 그는 공동체에 은거하기도 하고 은수자로 살아가면서 성서 대부분을 암기했다.
그러나 그의 신앙생활은 은둔 수도승으로서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사목적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구현된 것이었다.
요한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설교와 사목이었고, 뛰어난 설교로 5세기부터 “크리소스토무스” (황금의 입)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요한은 금구 (金口, 황금 입)라는 별명에 걸맞게 수많은 명강론과 저서를 남겼다.
그의 강론에는 사도 바오로 (Paulus)의 서한들이 많이 인용되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세 (Innocentius I)는 412년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으며, 그의 유해는 1626년 5월 1일 이후 로마 (Roma)의 베드로 대성전 성가대 경당에 안치되어 있다.
1568년 교황 비오 5세 (Pius V)는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면서 ‘동방의 네 명의 위대한 교회학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특히 동방에서 깊은 존경을 받으며, 대략적으로 서방 그리스도인들이 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위상에 대응한다.
정교회 전례에서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이름을 붙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찬예배 (Η Θεία Λειτουργία του Χρυσοστόμου)가 성 대 바실리오스 성찬예배와 함께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 말기에 동방 교회의 표준 양식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가장 많이 집전된다.
○ 저서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남긴 저서는 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한 학자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중 총 6권으로 된 「사제직」(De sacerdotio)은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대표적 저서로 꼽히는데 우아한 문장과 숭고한 신학적 사상 내용으로 오늘날까지 고전으로 읽히고 있다.
그외 수도생활에 관한 「테오도로에게 권고」 ,「진정한 참회」 등이 있으며 236편의 서간도 전해진다.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저서 대부분은 미뉴 (J. P. Migne)의 교부 전집에 18권 분량으로 전해오고 있는데, 이는 개인적 명성 때문이 아니라 신학적 높은 가치가 인정됐기 때문이다.
당시 교회 정치 사회 문화에 대한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는 저서들은 서방교회의 아우구스티노와 비교될만 하다고 학자들은 밝히고 있다.
한국에는 아침이슬에서 지혜의우물 시리즈 2번째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어록이 <단순하게 살기>가 반역되어 있고, 388년 (혹은 389년)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대해 연속적으로 설교한 내용이 2009년과 2019년에 각기 『부자』와 『라자로에 대한 강해(1-7편)』로 번역되었다.
분도출판사에서 『참회에 관한 설교 /자선 (그리스도교 신앙 원천 7)』를 번역 출간하기도 하였다.
또한 분도출판사에서는 앞서 2016년에 루돌프 브렌들레가 쓴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전기인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고대 교회 한 개혁가의 초상』을 번역 출간하였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가톨릭신문사, 예스24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