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년 1월 24일, 로마제국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Claudius,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BC 10 ~ AD 54) 등극
클라우디우스 (Claudius, BC 10년 8월 1일 ~ AD 54년 10월 13일)는 로마 제국의 제4대 황제 (AD 41년 1월 24일 ~ 54년 10월 13일)이다.
– 클라우디우스 (Claudius)
.출생: BC 10년 8월 1일, Lugdunum
.사망: AD 54년 10월 13일, 이탈리아 로마
.재위: 41년 1월 24일 ~ 54년 10월 13일
.본명: Tiberius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황제명: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전임: 칼리굴라 / 후임: 네로
.기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손자, 티베리우스의 조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손자이며,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손자이기도 하며, 티베리우스의 조카이기도 하다.
전임 칼리굴라 황제의 친삼촌이기도 하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속한다.
○ 생애 및 활동
고대 로마 제국의 제4대 황제이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4번째 황제로 고대 로마 원수정 시기의 역사가이기도 하다.
태어날 당시의 이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제위에 오르기 전의 본명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 (Tiberius Claudius Nero Germanicus), 즉위 후 제호로 취한 이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가 부른 애칭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다.
– 즉위 이전
로마의 장군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와 소 (小) 안토니아 사이에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드루수스나 형 게르마니쿠스와는 달리 그는 원래부터 병약하고, 말을 더듬고 한쪽 발을 질질 끄는 버릇 때문에 황실 안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지만, 형인 게르마니쿠스가 그를 배려해 주었고, 클라우디우스의 역사에 대한 재능과 흥미를 찾아낸 역사가 리비우스의 영향으로 에트루리아나 카르타고의 역사를 저술하여 역사가로서의 측면을 갖게 되었다.
– 즉위
칼리굴라가 황제로 즉위한 후, 원로원에 의해 칼리굴라와 함께 집정관으로 취임하는 명예를 안게 되었다.
41년 1월 24일 칼리굴라가 암살되자 1월 25일 황제가 되었다. 즉위에 임하기 전에 로마 원로원의 승인을 받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근위군단의 군사력에 의해 즉위한 것인지라, 이후 군사력이 로마 황제를 결정하는 군인황제 시대의 최초의 예가 되었다.
교양을 갖춘 역사가였던 그는 지혜로운 정책으로 로마에 대한 저항이 극렬했던 유대의 통치 문제 등을 해결하였지만, 시민들로부터의 인기는 낮았다.
클라우디우스는 갈리아인이나 아니우니족 출신의 해방 노예 등을 등용하여 다양한 행정 분야를 감독할 권한을 부여했다.
이것은 비(非)원로원 의원의 정치 참여를 증대하여, 황제에게의 권력 집중이나 관료제의 발달로 이어졌다.
45년에 이탈리아의 유대인들을 강제추방하는 반유대주의정책을 실시하여 약 2만5천명의 유대인들이 그리스의 코린토스로 이주하였다.
– 사망
54년 독버섯에 중독되어 사망했다고 하지만, 4번째 아내이자 다음 황제인 네로의 어머니인 소 (小) 아그리피나에게 암살되었다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 업적
클라우디우스는 13년의 통치 기간 동안 친위대나 원로원이 전혀 예상치 못한 훌륭한 정치를 폈다. 새 황제에게 합당한 칭호와 존경을 바치기로 결정한 원로원은 곧바로 클라우디우스의 전임자 칼리굴라를 불명예스럽게 할 조치를 취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클라우디우스가 이를 만류하고 그 대신 칼리굴라의 이름과 업적을 모든 공식 기록에서 삭제하게 하였다. 칼리굴라의 축출이 과대한 칭호와 영예의 요구 때문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클라우디우스는 의례적이면서도 적절한 몇몇 칭호,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예식, 자기 가문과 제국의 평화를 위한 제사 이외에는 원로원과 시민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만한 어떤 칭호나 영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성전과 사제직은 신들에게만 유보된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에게 성전을 지어 바치거나 사제직을 맡기는 전통을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인간적 한계를 똑바로 인식한 동시에 과도한 영예를 요구한 뒤에 닥칠 결과를 올바로 내다보았다.
클라우디우스의 가장 큰 업적은 제국의 질서와 안정을 되찾은 것이었다. 이집트 북부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를 보면, 그가 로마 제국의 평화를 위하여 얼마나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그 당시 알렉산드리아에는 유다교의 전통과 관습을 고수하는 유다인들과 그 밖의 다른 민족들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다. 양쪽에서 황제에게 대표들을 파견하여 자신들의 입장과 이익을 알렸다. 클라우디우스는 한편으로 오래 전부터 이 도시에 자리잡아온 유다인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그들이 고유한 종교 전통을 지키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유다인들에게 그들이 이 지역에서 이방인들임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을 환영하지 않는 다른 민족들의 모임이나 행사에 공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자제하라고 경고하였다.
수에토니우스는 크레스투스(Chrestus) 때문에 계속 소요가 일어나자 클라우디우스가 유다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였다고 기술한다. 여기서 말하는 크레스투스는 크리스투스일 가능성이 높고, 결국 로마에서 일어난 이 소요는 나자렛 예수를 ‘기름 부음 받은 자’ (Chrisrus), 곧 메시아로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들과 이를 부인하는 유다인들 사이의 갈등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짧은 통치 기간에 비하여 로마의 질서와 안정을 위하여 놀랄만한 업적을 많이 남긴 클라우디우스는 불행하게도 자신의 아내이자 네로 황제의 어머니인 아그리피나에게 독살되었다. 로마 역사가들은 아그리피나가 독버섯을 먹여 남편을 살해하였다고 증언한다. 생전에 자신의 신격화를 단호하게 거절한 클라우디우스의 소신과는 달리 원로원은 그가 죽은 다음 곧바로 그를 신으로 인정하였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