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5년 6월 2일, 반달족 (Vandals)의 로마 침략 및 교황 레오 1세 (Papa Leone I)와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 (Geisericus, 389 ~ 477) 회담
455년 6월, 훈족의 침략으로 남하를 거듭하다 훈족에게 패해 약해진 로마를 포위한 반달족(Vandals) 군대가 로마 시내로 난입했다.

로마 역사상 세 번째 함락이었다.
첫 번째는 기원전 390년 켈트족의 침입이다.
신흥강국으로 급부상하던 시절이었으나 귀족들의 기득권 집착에 실망한 평민들이 로마를 버리고 떠나자 방어력이 떨어졌다.
프랑스 지역에서 넘어온 켈트족은 무려 7개월 동안 로마를 휩쓸었다.
더 이상 빼앗을 게 없어 켈트족이 떠났을 때 로마는 철저하게 망가졌다.
두 번째는 제국의 퇴조 분위기가 뚜렷하던 410년 게르만의 일족인 서고트족의 침입이다.
6일 동안 교회만 빼고 모든 것이 파괴되고 불탔다. 로마는 화를 자초했다.
게르만족의 침입에 맞서 로마를 지키던 명장 스틸리코를 ‘적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처형한 것이다.
서고트족에게 당한 뒤에도 게르만족에게 시달리던 로마는 재앙을 만났다.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이 약 10년 동안 이탈리아 전역을 유린하며 공포에 몰아넣었다.

아틸라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훈족이 썰물처럼 빠져 나간 뒤, 이번에는 반달족이 찾아왔다.
게르만의 일족인 반달족은 오늘날 기준으로 스칸디아비아반도 남부와 독일 북서부 지방에 살다 훈족의 침입에 밀려 남하를 거듭했던 종족으로 5세기 스페인 지방에 정착하며 함대를 키워 북아프리카에도 진출했다.
439년에는 카르타고를 수도로 삼아 반달왕국까지 세웠다. 바이킹처럼 해상세력으로 성장한 반달족은 지중해의 섬을 차례로 점령하며 로마를 압박해 들어왔다.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 흥망사’에서 ‘교활하지만 탁월한 왕’으로 평가했던 반달 왕국의 국왕 가이세리크의 침략을 앞둔 상황에서 로마 황제 발렌티아누스 3세는 혼인 동맹을 대안으로 여겼다.
가이세리크의 아들과 자신의 딸이 성장하면 성혼하기로 약혼한 마당에 454년 정변이 일어났다.
로마는 두 번째 침공과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다.
‘야만족의 침입’에 맞서 20년간 나라를 지켜온 아이티아누스 장군의 반역을 의심해 황제 손으로 직접 살해한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자른 꼴’이라던 기번의 말대로 로마는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황제 발렌티아누스 3세(26세)는 455년 3월 병사들의 손에 죽었다.

○ 455년 6월 2일, 교황 레오 1세 (Papa Leone I)와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 (Geisericus, 389 ~ 477) 회담
교황 레오 1세 (이: Papa Leone I)는 제45대 교황 (재위: 440년 9월 29일 ~ 461년 11월 10일)이다.
그는 서로마 제국의 귀족 출신으로 ‘대교황’이라는 호칭을 받은 첫 번째 교황이다.
그러한 연유로 대교황 레오, 대 (大) 레오 (이: Leone Magno) 등으로도 불린다.
훈족과 반달족의 침공을 받을 때 용감한 태도로 로마를 구출하여 교황의 위엄과 권위를 크게 드러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게르만족의 대이동 이후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진 서로마 제국은 사방에서 봉기하는 외세의 침공 앞에서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아틸라는 451년 샬롱 전투에서의 패배 (실제로는 서로마 측 피해가 더 많았지만)를 딛고 일어나, 452년 이탈리아 반도를 침략하여 아퀼레이아를 비롯한 일부 도시를 약탈하고 로마로 진격하였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아틸라는 당시 서로마 황제였던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지참금을 보낼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전 유럽을 유린한 훈족의 군대가 로마에까지 당도하자 민심은 극심하게 동요되었고, 황제는 하는 수 없이 아틸라의 요구에 응답하여 세 명의 사절을 보내 그와 협상을 벌였다.
황제가 보낸 세 명의 사절은 집전관 중의 한 명인 젠나디우스 아비에누스와 옛 로마 시 장관이었던 멤미우스 애밀리우스 트리게티우스 그리고 교황 레오 1세였다.

황제의 사절단과의 만남을 가진 후, 아틸라는 군대를 이끌고 철수하였다.
당시 이들이 나눈 협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아틸라가 순순히 물러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에서 많은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교황이 아틸라에게 많은 양의 금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해서 물러났거나, 이탈리아 북부의 역병 및 식량 부족 그리고 다뉴브 전선에서 동로마 황제 마르키아누스와의 전투 등으로 인한 병참 및 전략상의 문제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역사학자들은 당시 레오 1세의 영웅적인 행동과 공로를 인정한다.
레오 1세는 로마를 구출하여 교황으로서의 위엄과 권위를 크게 드러내었다.
아키텐의 프로스페르에 의하면, 아틸라는 자신을 순순히 물러나게 한 레오 1세에게 무척 감명받았다고 한다.
요르다네스는 아틸라가 과거 410년에 로마를 약탈한 직후 급사한 서고트 왕의 운명을 자신도 맞게 될까봐 두려워했다고 한다.
8세기 후반의 파울루스 부제는 아틸라와 레오 1세가 강화 회담을 하던 중에 사제복 차림에 칼을 든 덩치 큰 사람이 나타났는데, 오직 아틸라의 눈에만 그 사람이 보였다고 한다. 그가 아틸라에게 칼을 들이대며 순순히 물러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겁에 질린 아틸라가 승복했다고 주장하였다.
이 이야기가 나중에 각색되어 《황금전설》에서는 아틸라가 레오 1세의 양쪽에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가 칼을 빼들고 함께 오는 것을 보고 놀라 퇴각했다는 이야기로까지 발전하였다.
455년에는 반달족이 로마를 공격해 왔다.
이번에도 레오 1세는 용감하게 나아가 6월 2일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와 대면하고 그와 담판을 벌였다.
불행하게도 반달족의 로마 약탈은 레오 1세의 중재로도 막을 수가 없었지만, 최소한 살인과 방화 행위에 대해서는 제재를 가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공적 덕분에 레오 1세는 순식간에 로마의 구원자로 부각됐고, 로마 시민들은 그에게 절대적인 신뢰와 충성을 보냈다. 대외적으로 교황은 사실상 로마의 수호자로 인식되었다.
이후 위신이 점차 높아져가던 교황직은 단순한 종교적 영역을 초월하여 정치 영역에까지 그 힘이 서서히 미치기 시작하여, 훗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교황이 서로마 황제를 대신하여 로마를 통치하기에 이른다.

가이세리크 / 게이세리쿠스 (Geisericus, 389년 ~ 477년)는 반달족의 왕이며 군데리크의 동생이다.
가이세리크 (Gaiseric), 겐세리크 (Genseric) 또는 게이세리크 (Geiseric)라고도 불렸다.
게이세리쿠스는 서로마 제국 말기의 내전을 이용하여 히스파니아 남부에 자리잡고 있던 반달족 전체를 이끌고 로마 제국의 곡창지대인 북아프리카를 공격, 차지하게 되었다. 이어 동로마 제국과의 전투에도 승리하고, 서로마 제국으로부터 반달 왕국으로 인정받았다.
이후 게이세리쿠스는 북아프리카의 옛 카르타고계 로마인들을 선원으로 부리며 대규모함대를 조직, 사르데냐, 코르시카 등을 점령했다.
455년 6월에는 로마를 공격, 서고트족의 수령 알라리크에 이어 두 번째로 로마를 약탈했다.
이에 455년 6월 2일, 교황 레오 1세와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 (Geisericus, 389 ~ 477)는 회담을 갖는다.
460년, 서로마제국의 황제 마요리아누스는 반달 왕국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추진했다. 그러나 게이세리쿠스는 서로마 제국 함대가 출항하기도 전에 기습적으로 화공을 가해, 함대를 모두 불살라 버렸다.
또한 468년에는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의 연합 함대가 게이세리쿠스를 공격했으나, 이 또한 실패로 끝났다.
게이세리쿠스 사후 아들 훈네리크가 뒤를 이었다.
한편 레오 1세는 461년 11월 10일 선종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재위기간은 21년이었다.
○ 부록 : 반달족 (Vandals) 개관
반달족(Vandals)은 동부 게르만족의 일파로, 오늘날 폴란드 남부 지역에서 거주했던 것으로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며, 이후 유럽 여기저기로 이동하여 서기 5세기에는 스페인과 북아프리카에 성공적으로 왕국을 세웠다.

– 역사
.게르만족의 대이동 : 반달족은 당시 거의 대부분 아리우스주의 기독교로 개종해 있었다. 406년, 반달족은 별 어려움없이 도나우 강을 건너 판노니아로 밀려왔고 라인강 유역의 갈리아 북부에서 이미 로마화 되어있던 프랑크족의 저항을 받았다. 2만 명의 반달족이 전투에서 죽었지만 그해 겨울 라인강이 얼자, 반달족은 대거 라인강을 넘었고 갈리아를 남하하면서 황폐화 시키고 아키텐까지 밀려갔다. 409년 반달족은 계속 남진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히스파니아(지금의 에스파냐)로 들어갔다.
히스파니아에 이미 정착해 있던 로마 제국의 푀데라티 부족과 전쟁을 벌이면서 반달족은 점차 그 영역을 넓혔고 결국 알란족을 굴복시키고 정착하였다. 반달족의 족장 군데리크는 알란족의 왕의 직위를 얻었다. 히스파니아에서 정착한 반달족은 바이킹족처럼 해적으로 변신했고 북아프리카로 진출하기도 했다.
.북아프리카 반달 왕국 : 429년 군데리크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가이세리크는 함대를 조직하여 약 8만명의 반달족을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를 침공했다. 반달족은 북아프리카의 도시 히포 레기우스 성을 포위하고 14개월에 걸쳐 공성전을 벌였고 결국 함락시켰다. 이때 북아프리카교회의 지도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도 히포 레기우스 성안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었는데 아리우스파 이단자들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했으나, 결국 함락되기 직전 성안에서 피난민들을 돌보다가 열병에 걸려 죽었다. 북아프리카에서 반달족은 435년 로마와 평화협정을 맺어 동맹을 맺었으나 가이세리크는 곧 동맹을 깨고 439년 카르타고를 수도로 반달 왕국을 세웠다. 이후 35년 동안 가이세리크의 반달 왕국은 대규모 함선을 조직하고 지중해 연안의 로마 제국 영토를 차례로 침략해 점령하였다.
로마는 그동안 훈족의 침입에 전념하고 있었고 아틸라가 죽자 겨우 반달족에 대한 대책을 세웠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자신의 딸과 가이세리크의 아들의 결혼으로 반달족을 무마하려했으나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발렌티니아누스를 죽이고 황제가 되자 양측의 교섭은 깨졌고 455년 반달족은 로마를 침공했다. 이때 교황 레오 1세는 가이세리크와 담판을 벌여 로마의 약탈을 최소화하는 데 일조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는 않다. 반달족의 로마 침공은 그 자체로 로마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어서 반달리즘이라는 말이 생겨났지만 사실상 대규모 학살과 파괴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반달족은 조직적으로 로마의 재물을 배로 실어 북아프리카로 옮겼다.
462년까지 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은 북아프리카 전역과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 등 지중해의 여러섬들을 지배하는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다른 유럽의 게르만족 왕국과는 달리 그들은 피지배민족과 완전히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종교적, 인종적으로 억압했기 때문에 결국 오래가지 못하고 멸망하게 되었다. 아리우스주의자였던 반달족은 가톨릭을 억압했다.
.반달왕국의 몰락 : 477년 위대한 반달족의 지도자 가이세리크가 죽자 그의 아들 훈네리크가 왕위를 승계했는데 훈네리크는 치세 말기에 가톨릭 교회와 마니교를 심하게 박해했다. 반달 왕국은 가이세리크가 죽으면서부터 점차 쇠퇴하게 되었고 동고트족에게 시칠리아의 거의 대부분을 빼앗겼다. 훈네리크의 아들 힐데리크는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고 가톨릭에 우호적이었고 친로마 정책을 펴서 비잔티움 제국과 평화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533년 겔리메르가 힐데리크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비잔티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반달왕국과 전쟁을 선포하고 벨리사리우스의 지휘 아래 북아프리카로 쳐들어왔다. 벨리사리우스는 반달군의 저항을 받았지만 결국 카르타고를 함락시키고 534년에는 반달왕국의 두 번째 도시인 히포 레기우스마저 정복했다. 겔리메르는 결국 비잔티움 군에게 항복했고 반달 왕국은 무너졌다. 로마는 다시 이 지역을 지배하고 가톨릭 교회를 부활시켰다.

– 반달족의 왕 목록
군데리크가 알라니족을 병합한 이후부터 반달족의 왕의 정식 칭호는 “반달족과 알라니족의 왕”이었다.
고디기젤 (359년–407년)
군데리크 (407년–428년)
가이세리크 (428년–477년)
훈네리크 (477년–484년)
군타문트 (484년–496년)
트라사문트 (496년–523년)
힐데리크 (523년–530년)
겔리메르 (530년–534년)

– 반달리즘 (vandalism)
반달족은 이동하면서 해적질과 각종 약탈 및 파괴 행위를 벌였다고 잘못 알려져 있었고, 그로부터 반달리즘(vandalism)이란 말이 생겼다.
반달족이 로마를 침략했을 당시에도 그들의 행위를 보면, 반달족의 군대는 막시무스가 시민들의 폭동으로 살해된 지 사흘 만에 상륙해 로마를 포위하고 상수도부터 끊었다.
반달 족의 군대를 상대한 것은 로마군단도 시민병도 아닌 로마 교황 레오 1세.
3년 전인 452년 로마 진입을 눈 앞에 둔 훈족의 아틸라와 담판을 벌여 물러나게 만들었던 레오 1세는 아리우스파 기독교도인 가이세리크와 성 밖에서 만나 조건을 내걸었다.
저항하지 않는 시민은 죽이지 않고, 숨진 재물을 찾아내기 위해 고문하지 않으며 방화 금지 명령을 내린다는 약속을 받고 교황은 성문을 열었다.
카이세리크는 반달족 군대에 엄명을 내리는 대신 약탈 기간을 늘렸다.
반달족 군대는 보름 동안 로마를 탈탈 털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