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1년 4월 9일, 동로마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제논 / 제노’ (Flavius Zeno) 타계
제논 (Flavius zeno, 425년경 ~ 491년 4월 9일)은 로마 제국의 황제로 474년 2월부터 491년 죽을 때까지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원래 이름은 타라시코디사이며, 도중에 장인 레오 1세의 처남인 바실리스쿠스가 그의 제위를 찬탈하여 약 1년간 궐위상태에 있었으나 곧 다시 제위를 되찾고 죽을 때까지 황제로 통치했다.
야만족 출신 최초의 로마 제국 황제, 정확하게는 소아시아의 이사우리아인 출신으로, 이사우리아인은 제국 영내의 로마인이지만 그리스•로마적인 의미에서의 비문명적 산악민족으로서 게르만족 등과 다를 바 없는 야만인으로 간주되었다.
이사우리아 족장으로 본명은 ‘타라시코디사 루숨블라데오테스’였다. 레오 1세의 딸 아리아드네와 결혼한 이후, 동로마식의 이름인 ‘제논’으로 바꿨다. 레오 1세는 사위 외국인가 내란을 일으키자 제노는 이사우리아로 도피하였고, 바실리스쿠스가 일시적으로 제위에 오른다. 내란 당시 제노는 경마장에서 전차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는데 군대가 오고있으니 당장 도망가는 게 좋을 거라는 쪽지를 받았다. 제노는 그것을 읽자마자 저항도 하지 않고 뒤도 보지 않으며 도피했다고 한다.
그렇게 제위에 오른 바실리스쿠스는 베리나의 애인을 암살하여 베리나의 지지를 잃었고, 수도에 남아있던 이사우리아 군인들을 학살하였으며, 과세 정책으로 인해 민심도 잃었다.
바실리스쿠스는 쿠데타를 도운 일루스라는 이사우리아인 장군에게 제노를 잡아 올 것을 명령한다. 일루스는 제노의 동생을 인질로 잡아 제노를 조종하려 했지만 바실리스쿠스가 이사우리아인들을 학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노의 편이 되었다. 제노는 또 바실리스쿠스의 조카 하르마티우스를 구슬려서 20개월 만에 제위를 되찾는다. 제위를 되찾은 후 제노는 하르마티우스를 제거한다. 또 제노는 교회로 피난처를 찾은 바실리스쿠스에게 너그럽게도 피를 흘리지 않을 것을 약속해 밖으로 유인한 다음 그와 그의 가족들을 굶겨 죽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키아누스가 연이어 일으킨 반란 (479년)을 제압하였다.
제노가 복위한 476년 서로마 제국은 오도아케르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다. 제노는 제국 영토 내 거주하던 동고트족의 테오도리쿠스와 동고트족이 오도아케르를 타도하면 그 영토를 동고트족에게 주겠다는 협약을 맺었다. 로마로서는 통제하기 힘들어진 고트족을 서방으로 보내버릴 수 있었고, 동고트족으로서는 안정된 영토를 얻을 수 있어 서로에게 득이 되는 것이었다. 이로써 이탈리아 반도에 동고트 왕국이 성립되었다.
네 차례의 공의회를 통해 칼케돈 교리 (삼위일체론)가 정통 교리로 확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세계, 즉히 로마 제국 동부에서는 단성론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484년 제노 황제와 아카키우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헤노티콘’이라는 문서를 통해 양측을 절충하려 하였으나 이 조치는 교황를 격노케 하였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양대 총대주교가 서로를 파문하는 아카키우스 분열 사건이 일어났다. 이 분열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에 이르러서야 봉합되었다.
제노의 황권 강화에 큰 공을 세운 일루스는 승진하여 권력을 잡게되었지만 베리나의 미움을 받았다. 베리나와 그녀의 딸이자 제노의 아내인 아리아드네는 차례대로 일루스의 암살을 시도하지만 그의 귀를 자르는 것만 성공했다. 황후의 암살 작전 뒤에 제노도 가담했으리라고 생각한 일루스는 484년 레온티우스의 반란에 참여했다. 또한 일루스는 유배지로 간 베리나로 하여금 레온티우스를 황제로 추대하게 만들었는데 제노는 4년간의 내전 끝에 겨우 이들을 제압하고 일루스와 레온티우스는 처형당했다. 재위 중 일어난 반란만 3번이나 되었다.
491년 제노는 사망하였다. 제노가 생전 인기가 없었던 만큼 시민들은 로마인이자 정통파 황제를 요구하였고 황후 아리아드네와 원로원은 그 후임으로 디라키온 출신의 재무관 아나스타시우스 1세를 추대했다.

– 제논 (Flavius Zeno)
.이름: 휘타라시스 코디사 로우솜블라다디오테스 (460년대 중반까지), 플라비우스 제노 (황제)
.존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플라비우스 제노 아우구스투스
.출생: 425년 경, 제노폴리스
.사망: 491년 4월 9일, 콘스탄티노폴리스
.가문: 레오 가문
.부모: 부) 코디사, 모) 랄리스
.배우자: 아르카디아, 아리아드네
.자녀: 제논 (아르카디아에게서), 레오 2세 (아리아드네에게서)
* 동로마 제국의 황제
.재위: 1) 474년 2월 9일 ~ 475년 1월 9일, 2) 476년 8월 ~ 491년 4월 9일
.공동재위: 레오 2세 (474년 2월 9일 ~ 474년 11월 10일)
.전임: 1) 레오 2세, 2) 바실리스쿠스
.후임: 1) 바실리스쿠스(반란), 2) 아나스타시우스 1세
○ 생애 및 활동
– 초기 생애
제논은 이사우리아 출신으로 레오 1세가 막후 실력자인 아스파르와 군대 내의 게르만족을 견제하기 위하여 발탁한 인물이다. 레오는 제논을 자신의 딸 아리아드네와 결혼시켰는데 원래 제논의 이름은 타라시코디사 루숨블라오테오테스로 결혼한 뒤에 그리스적인 이름인 제논으로 바꾸었다. 이후 이사우리아인들은 레오의 비호를 받으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 첫 번째 즉위와 퇴위
474년 레오 1세가 죽으면서 후계자로 사위인 제논 대신에 7살짜리 제논의 아들이자 레오의 외손자인 레오 2세를 차기 황제로 지명했는데 제논은 아들의 즉위와 동시에 공동 황제가 되었고 그해 11월 아들이 죽자 단독으로 황제가 되었다. 제위에 오르자 그는 북아프리카의 반달왕국과의 전쟁을 마무리 지었으나 제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장인 레오 1세의 처남인 바실리스쿠스와 황태후 베리나의 음모로 제위를 빼앗기고 이사우리아의 산악지대로 도망쳤다.
– 두 번째 통치와 죽음
이후 바실리스쿠스는 황제가 되었으나 거듭된 실정으로 민심을 잃었고 그사이 제논은 이사우리아에서 돌아와 477년 7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제위를 약 20개월 만에 되찾았다. 당시 서로마 제국은 그 몰락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제논이 궐위되었을 때 제논이 직접 서로마 제국 황제로 임명한 율리우스 네포스가 퇴위 되었고 제논은 이에 대해 화를 내었으나 오도아케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적으로도 바실리스쿠스의 조카인 하르마티우스를 제거해야 했고 479년에는 황실의 서열이 제논보다 높다고 주장하는 마르키아누스의 반란은 이사우리아 출신인 일루스의 도움으로 물리쳤다. 또한 483년에는 자신의 황궁의 집사장으로 승진한 일루스와 불화가 생겨 반란이 일어났다. 제논은 동고트족의 족장의 아들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인질로 있던 테오도리쿠스를 시켜 이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이 무렵 동고트족은 로마 제국 내에서 푀데라티로 거주하고 있었으나 제논은 이들을 점점 통제하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488년제논은 테오도릭 대왕과 협약을 맺어 서로마 제국의 오도아케르를 쫓아내면 그 영지를 동고트족에게 주기로 하고 그들은 서방으로 보낼 수 있었다. 테오도릭은 모든 동고트족을 이끌고 서방으로 떠났고 제논은 비로소 평화로운 통치를 할 수 있었다. 제논의 제위 말기는 고질적인 비잔티움 내 종교 문제가 골칫거리였다.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 이후 그리스도 단성론 (單性論)은 이단으로 지목되었으나 여전히 제국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482년 황제는 ‘헤노티콘’ (Henotikon) 이라는 문서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카키우스와 함께 발표하여 양측을 중재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교황 심플리치오와 그의 후임자 교황 펠릭스 3세의 분노를 샀고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가 서로를 파문하는 아카키우스 분열로까지 번졌다. 491년 4월 9일 제논은 뇌전증로 죽었고 제논의 미망인 아리아드네는 디라키온 출신의 아나스타시우스를 다음 황제로 추대했다.
○ 제논과 아카키우스 분열
네 차례의 공의회를 통해 칼케돈 교리 (삼위일체론)가 정통 교리로 확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세계, 즉히 로마 제국 동부에서는 단성론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484년 제노 황제와 아카키우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헤노티콘’이라는 문서를 통해 양측을 절충하려 하였으나 이 조치는 교황를 격노케 하였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양대 총대주교가 서로를 파문하는 아카키우스 분열 사건이 일어났다. 이 분열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에 이르러서야 봉합되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