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9일, 러시아의 제2차 세계대전 승전기념일
러시아의 ‘승리의 날’ (러: День Победы)은 나치 독일이 소비에트 연방에게 무조건 항복을 한 날로, 모스크바 시간 기준 5월 9일이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 독립 국가 연합 공화국들도 5월 9일을 승리의 날로 지정하고 있다. 러시아의 공휴일이고 승리의 날이 토요일이나 일요일이면 월요일이 공휴일이 된다.

그리고 나는 외치고 싶었다. 러시아, 벨라루스, 폴란드의 땅 속에 누워 있는 이들. 우리가 거쳐온 땅에서 영원히 잠든 이들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동무들, 우리가 해냈소!” – 바실리 그로스만 (소련 종군기자), “전쟁의 해들 (Годы войны, Years of the war)” 중
소련 및 옛 공산권 국가에서는 서방 국가들과 달리 5월 9일이 승리의 날이다. 항복이 서유럽 시간으로 5월 8일 오후 11시라 시차를 감안하면 동유럽에서는 5월 9일이었기 때문이다.
소련 시절에 기념이 시작된 러시아 및 과거 소련의 구성국이었던 국가들의 기념일 중 하나로, 제2차 세계대전, 러시아 중심의 표현으로는 대조국전쟁의 승전을 기념하는 날이다. 러시아에서 거의 대부분의 소련 시절의 기념일들이 사라지거나 이름이 바뀐 와중에도 아직도 기리고 있는 기념일이다. 러시아는 나치 독일의 침략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국가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국제질서에서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등장,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소련 시기에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 공휴일이었다가 해제되었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집권한 직후인 1965년부터 다시 공휴일이 되었다.
“소련군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 날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의 말에 따르면, ‘소련 인민의 삶에서 ‘영광의 순간’이 되었다. 이는 소련 역사상 사람들이 조국의 승리와 자유를 위해 감당한 상실의 의미가 명약관화했던 유일한 시기다.” – 역사학자이자 라디오 방송 ‘베스티 FM’의 정치 평론가인 안드레이 스베텐코의 말

사실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가 소련 시절보다 더 성대히 기념하는 기념일이다. 단순한 기념일을 넘어 현대 러시아인들의 국가적 자긍심, 긍지의 원천이다. 단순히 러시아 민족주의로 과거 초강대국의 승리를 추억하는 추억팔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피할 수 없는 적과의 생사를 건 결전에서 승리했고, 아주 큰 희생을 치르며 승리했다. 상상 이상의 아주 큰 피해를 입었고, 거의 패배 직전까지 갔지만, 그런 어마어마한 피해에도 무너지지 않고 반격하여 기적적으로 역전해 결국 적의 수도를 함락시키며 극적으로 완벽하게 승리했기 때문에 더없이 찬란하게 빛나는 감격스러운 승리가 되었다.
승리의 날이 참전국들 중 유독 러시아에서 중요하게 대접받는 이유는 단순히 한 전쟁에서 이겨서만이 아니다. 2차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쟁이였고 그런만큼 승리의 순간을 맞이하기 전까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피를 봐야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사실 그 자체도 기념하는 것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목적은 그 승리를 얻기 위해 피를 흘린 순국선열들을 기린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 이 때문에 실제로 전쟁에 참가했던 유가족들이나 실제 참전용사들이 아직 많이 살아있는 러시아인들에겐 매우 특별한 날일 수 밖에 없다. 실제로도 5월 9일이 조국 러시아에 자긍심을 느끼는 계기가 된다고 인정하는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있다.
세계적으로 봐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고 러시아 역사를 봐도 역사상 비견할 예가 없는 가장 위대한 승리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러시아는 이른바 조국전쟁에서는 일단 나폴레옹을 막기는 했지만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고, 크림 전쟁부터는 열강에 얻어맞기만 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 언제냐는 질문에 압도적으로 대조국전쟁에서의 승리라고 답한다.

정리하면,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에서 멸망 직전까지 몰렸던 소련의 기적적인 대역전승은 극적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신화적인 승리였고, 그런 신화적 서사를 가졌기 때문에 제1의 건국신화인 혁명보다도 신성시되는 제2의 건국신화가 된 것이다.
소련 시절 붉은 광장에서 10월 혁명 기념일 (11월 7일)에는 매년 열병식이 실시되었고 1968년까지 노동절에도 매년 실시되었지만 지만 승리의 날에는 1945년, 1965년, 1985년, 1990년 단 4차례만 실시되었다. 1948년부터 니키타 흐루쇼프가 실각할 때 까지는 공휴일도 아니었다. 역사학자인 데니스 바비첸코에 따르면, 이오시프 스탈린과 그 사후 소련을 이끈 니키타 흐루쇼프는 대조국전쟁을 승리로 이끈 군사령관들이 정치적으로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때문에 군사령관들과 참전용사들의 공적을 치하하는 일에 인색했다.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집권한 1965년에야 승리의 날은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열병식이 실시되었다. 승리의 날을 국가적 차원에서 전국적 규모로 성대하게 기념할 수 있도록 한 최초의 소련 지도자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였지만 붉은 광장에서의 열병식은 1968년 노동절 열병식을 폐지한 이후 혁명 기념일에만 매년 실시했고 승리의 날에는 1965년에만 치러졌다. 소련 해체 이후 10월 혁명 기념일은 없어졌고 1995년 승리 50주년 열병식 이후 매년 5월 9일에만 대규모 열병식이 실시된다. 다만 모스크바에서는 10월 혁명 기념일이 아니라 1941년의 모스크바 전투 기념일로 소규모 열병식을 연다.
서방과는 달리 기념일이 1945년 5월 9일 (9 мая 1945г.)이다. 왜 서방보다 하루가 느리냐면, 히틀러의 자살 이후 나치 독일의 대통령이 된 칼 되니츠가 아이젠하워 휘하 서방 연합군에게 항복했지만 스탈린이 소련측 역시 항복협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되니츠를 베를린으로 소환해 항복을 받았는데 베를린 표준시로는 5월 8일이었지만 모스크바 표준시로는 5월 9일 0시 43분이었기 때문이다. 되니츠의 의도는 항복 협상에서 소련을 배제하고 서방 연합군에게만 항복한 뒤 서부전선의 병력을 동쪽으로 돌려 소련군의 진공을 막아내거나, 소련과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는다는 것이었는데, 서방 연합국과 소련이 동맹을 맺고 독일과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독일 좋을대로 한 쪽에게만 항복하겠다는 주장은 독소전쟁으로 2천만 명의 사망자를 낸 소련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시 유럽 전선의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도 이런 독일의 의도를 말도 안 된다고 여기고 동서 전선 동시에 무조건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약 4년간의 독소전쟁 기간 동안 군인과 민간인 합쳐서 대략 2,80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쟁기간의 대혼란 때문에 정확한 수치는 아무도 모른다. 참고로 다른 나라는 독일 900만, 폴란드 600만, 프랑스 60만, 영국 45만, 미국 40만 정도이다. 전쟁 막바지에는 스탈린조차도 게오르기 주코프에게 “이제 우리나라엔 전쟁으로 친지를 잃지 않은 사람이 없을걸세.”라며 그의 몇 번 안되는 진실로 침통한 표정을 보였다고 한다. 이오시프 스탈린조차도 큰 아들을 독일군에게 잃었다. 스탈린은 종전 후 승전 축하연에서도 “우리의 승리에 저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모든 것은 소련 인민들의 피와 땀이 이룩한 것입니다.”하고 연설을 했다.
이 날이 되면 당시 전쟁에 참가했던 노병들에게 꽃을 선물하고 꺼지지 않는 불 앞에 꽃을 바치며 전쟁 당시 사망한 전몰용사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관례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