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3년 6월 5일, 백제 무령왕 (武寧王, 462 ~ 523) 타계
무령왕 (武寧王, 462년 음력 6월 1일 ~ 523년 6월 5일 / 음력 5월 7일)은 백제의 제25대 국왕 (재위: 501년 음력 12월 ~ 523년 음력 5월 7일)이다.
무령왕릉 지석에 따르면 462년 태어났고 이름은 사마 (斯麻) 또는 융 (隆)이다.

– 무령왕 (武寧王)
.출생: 462년 음력 6월 1일, 일본 사가현 가라쓰시 가카라시마
.사망: 523년 6월 5일 / 음력 5월 7일
.묘지: 대한민국 공주시 무령왕릉
.부모: 동성왕
.자녀: 성왕, 순타태자, 사아군
.손주: 위덕왕, 혜왕, 법사군
《백제신찬》에 따르면 무령왕의 아버지 개로왕은 근친상간을 했다고 기록되나, 이것은 왕위의 정통성을 위한 거짓이라는 설이 있다.
또한 《백제신찬》과 《일본서기》에는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이고, 동성왕은 이복형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키가 크고 외모가 험했으나, 성격이 관대하였다고 한다. 501년 동성왕이 위사좌평 백가의 계략으로 살해되자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는 재위 23년, 나이 62세에 죽고 그의 아들 성왕이 즉위하였다.
후일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호령왕’ (虎寧王)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고려의 제2대 왕 혜종의 이름인 무 (武)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 생애 및 활동
무령왕 정권의 탄생은 동성왕의 시해라는 정변을 통해 이루어졌다.
501년 12월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苩加)가 보낸 자객에게 동성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 정변에는 왕족과 한성(漢城)에서부터 내려온 귀족, 웅진(熊津)에 기반을 둔 신진세력 등 다양한 세력이 연루되었다.
무령왕은 이듬해 1월 가림성(加林城)에 웅거해 저항을 꾀하던 백가를 토벌했다. 그리고 고구려와 말갈과의 전쟁을 준비는 등 북방정책을 추진했다.
501년 달솔(達率) 우영(優永)을 보내 고구려 수곡성(水谷城)을 습격하고, 503년 마수책(馬首柵)을 태우며 고목성(高木城)에 쳐들어온 말갈을 격퇴하였다. 그 뒤 506년 말갈이 다시 고목성에 쳐들어오자, 이듬해 고목성의 남쪽에 두 개의 책(柵)을 세우고 장령성(長嶺城)을 축조해 이에 대비하였다.
고구려 · 말갈과의 싸움은 그 뒤 계속되어 507년 고구려 장군 고로(高老)가 말갈과 합세해 한성을 치고자 횡악(橫岳) 방면으로 쳐들어오자 이를 격퇴하였다.
512년에는 고구려가 가불성(加弗城)과 원산성(圓山城)을 함락시켜 약탈을 자행하자, 친히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위천(葦川)의 북쪽으로 진출해 고구려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523년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 등에게 명해 한북주(漢北州)의 15세 이상 장정을 동원,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했는데, 이 때 이를 독려하기 위해 친히 한성에 행차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구려 · 말갈의 침입에 착실히 대처하는 한편, 중국 남조의 양(梁)과도 외교 관계를 강화해 512년과 521년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냈다.
521년 양으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았다.
한편, 512년 상차리(上哆唎) · 하차리(下哆唎) · 사타(娑陀) · 모루(牟婁) 등 네 현을 합병했다고 하는데, 이는 섬진강 유역의 어느 곳이거나 가야 지역으로 짐작된다.

513년과 516년에는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를 각기 왜국에 보내 문화를 전파하였다.
무령왕은 정치 형태를 바꾸는 근본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무령왕 때 추진된 정치적 변화 중의 하나는 직책을 가진 좌평이 등장하지 않는 점이다. 천도 이후 일어난 두 차례 반란은 모두 병관좌평(兵官佐平), 위사좌평이라는 관직을 가진 좌평에 의해 일어났다. 그 원인은 지배귀족 세력이 자신들의 세력을 바탕으로 좌평이 되었고, 다시 좌평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정치구조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좌평제의 변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좌평을 지배귀족들의 신분서열을 나타내는 관등적 성격으로 변화시키고 행정 업무는 22부사(部司)가 전담할 때 최고의 신분을 가진 귀족이 실권마저 장악하는 사태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좌평제를 22부사제로 개혁하는 안이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무령왕은 지배층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정책도 추진하였다.
506년 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창고를 풀어 이를 구제했고, 510년 영을 내려 제방을 수축하는 한편,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고먹는 사람들을 구제하여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였다. 백성들의 유망(流亡)은 세수(稅收)의 감소 뿐만 아니라 인력 동원 등 여러 면에서 국력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있다. 이에 무령왕은 적극적인 진휼을 하여 농민층의 안정을 추진하고 국가재원의 확보로 이어지는 경제정책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대민정책은 한강 유역의 상실 이후 축소된 경제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수리시설을 확충 · 완비함으로써 금강유역권을 개발하고 농업생산의 증대를 도모하여 왕정의 물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백성들의 안정을 통해 강력한 국가를 재건하고자 한 것이다.
또 509년(무령왕 9)에는 임나(任那) 지역에 도망가서 호적이 끊긴지 3∼4세대가 지난 자를 찾아내서 호적에 올리도록 하였다. 도망간 백제의 백성을 찾아내서 다시 백제로 옮기어 호적에 편입시키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나 지역에 대한 호구조사(戶口調査)를 하고 있다면 백제 영역 내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 대해서는 그 이전부터 호구를 조사하여 호적을 만드는 조치들이 이미 실시되었음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무령왕 때에는 전국적인 호구조사 사업을 실시하여 호적체계를 정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제반정책의 추진으로 민심이 크게 그를 따랐다.
523년 5월 7일 62세를 일기로 승하했으며, 2년 뒤인 525년(성왕 3) 8월 12일 공주 송산리에 안장되었다.
시호는 무령(武寧)이다.

○ 백제 무령왕릉 (武寧王陵, 1971년 7월 7일 처음 발굴)
무령왕릉 (武寧王陵)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 가운데 7번째로 발견된 고분으로, 백제 무령왕과 그 왕비의 능이다.
1971년 7월 7일 처음 발굴되었다.
지석이 발견되어 축조연대를 분명히 제시해주었기 때문에 삼국 시대 고고학 편년연구의 기준 자료가 되고 있으며, 국보로 지정된 금제관식, 금제뒤꽂이, 금제 심엽형이식 (귀걸이), 지석, 석수, 청동신수경 등을 포함하여 총 2900여 점의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유물은 국립공주박물관이 대부분 보관하고 있다.
무령왕릉의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사적 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치는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옛지명 : 송산리)이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