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 (墓碑銘), 묘갈 (墓碣)과 묘비 (墓碑)
묘비 (廟碑), 비석 (碑石, 문화어: 비돌)은 무덤 앞에 세워진 돌로 된 비문으로, 이름이 쓰여져 있다. 비석의 받침돌을 가리키는 빗돌받침 또는 비대 (碑臺)가 있는 경우가 있다.
○ ‘세상에 건네는 마지막 인사‘ 묘비명 (墓碑銘)
묘비명 (墓碑銘) 또는 에피타프 (epitaph)는 죽은 사람을 기리는 짧은 문구이다. 에피타프라는 낱말은 추도 연설을 뜻하는 그리스어 낱말 ἐπιτάφιος (에피타피오스)에서 온 것으로, 위를 뜻하는 ἐπί(에피)와 묘를 뜻하는 τάφος (타포스)의 결합이다. 묘비에 새겨진 문구를 가리킨다. 일부 묘비명들은 사망 전에 자기 자신이 직접 쓰기도 하며, 그 외에는 매장을 책임지는 사람들에 의해 선택된다. 묘비명은 산문이나 운문 형태로 작성될 수 있다. 시인은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했던 것처럼 자신이 죽기 전에 자신의 묘비명을 쓰기도 한다.

묘비명 중에서 가장 위트가 넘치는 것 중 하나는 영국 작가 버너드 쇼의 묘비명이다.
“어영부영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_ 영국 작가 버너드 쇼의 묘비명
“일어나지 못해 미안하네” _ 헤밍웨이의 묘비명
“에이, 괜히 왔다” _ 중광의 묘비명
“Cast a cold Eye On Life, on Death. Horseman, pass by. (삶과 죽음에 차가운 눈길을 던져라. 말 탄 이여, 지나가라)” _ 영국 시인 예이츠의 묘비명
“생각하면 할수록 내 마음을 늘 새로운 놀라움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이요, 다른 하나는 내 속에 있는 도덕률이다.” _ 철학자 칸트 (1724 ~ 1804)의 묘비명
○ 묘갈 (墓碣)과 묘비 (墓碑)
묘갈 (墓碣, 무덤=墓, 우뚝 선 돌=碣)과 묘비 (墓碑, 무덤=墓, 네모가 난 돌기둥= 碑)는 죽은 사람의 성과 이름, 신분, 출생 및 사망 연월일, 자손 관계 기록, 행적 등을 새겨 묘소 앞에 세운 비석 (碑石)이다.
보통 비석은 네모난 형태에 받침과 몸통, 덮개돌의 3부분으로 이루어지며, 윗머리가 둥글고 가첨석 [加檐石=蓋石 (덮개돌)]이 없는 것은 묘갈이라 하고 윗머리에 지붕 모양의 네모진 가첨석을 얹은 것이 묘비 (墓碑)이다. 외형적으로는 碑와 碣의 구분이 확연히 드러나지만 비문의 내용은 비와 갈의 차이는 별로 없다고 할 수 있다.
후한서 (後漢書)의 주 (注)에 “네모진 것이 碑, 둥근 것이 碣이다.”하였고 원나라 진역증 (陳繹曾)은 “碑의 체제는 웅혼전아 (雄渾典雅, 기운차고 원숙하며 고상함)하고, 碣의 체제는 질실전아 (質實典雅, 소박하고 고상함)하다.”고 하였다. 당나라 시대에 와서는 관직이 5품 이상은 碑를 세울 수 있고 5품 이하는 방부원수 (方趺圓首)인 碣을 세우도록 규제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후대에는 비와 갈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또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 남동쪽에 따로 세우는 비를 신도비 (神道碑)라 하는데 종2품 이상의 관직과 품계를 지녔던 사대부에게만 신도비를 세우는 것이 허용되었다고 한다.
묘갈은 서사 (敍事)를 위주로 하는 정체 (正體)와 의론 (議論)을 위주로 하는 변체 (變體)가 있다. 또는 선계(先系)를 먼저 서술하고 다음에 공덕과 손록 (孫錄, 후손들의 계보를 기록 함)을 기술하는 경우가 있고 혹은 공덕부터 먼저 표양하고 선계와 손록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명 (銘)은 운문으로 사언이 주축을 이루고 있으나 오언·칠언 장단구 (長短句)로 된 것도 적지 않았다.
즉 묘비에 새기는 글을 명 (銘)이라고 하는데 주로 고인의 행적을 설명한 뒤에 운문으로 칭송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고인의 생애는 물론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묘비를 세울 때는 문장이 뛰어난 사람에게 글을 받고 서예를 잘하는 사람에게 글씨를 받아 돌에 새겼기 때문에 문학적·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 인사들의 묘비명
–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 Andrew Carnegie)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들을 주위에 모으는 방법을 알던 사람, 여기에 잠들다.”
– 근대인의 고뇌를 그린 장편 철학시 ‘오디세이아’,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등으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 (Νίκος Καζαντζάκης)는 평소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잘 담아낸 묘비명을 남겼다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Δε φοβόμαι τίποτα. Είμαι λεύθερος.”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 인간의 존재와 고독을 평이하고 자연스런 언어로 표현한 시인 조병화는 자신의 묘비명에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담았다.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칭송받는 스탕달 (Stendhal). 카이사르의 명언을 패러디했다.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
– 대철학자이자 계몽주의 사상가 이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의 묘비명은 윤리의식 강한 학자의 사상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날이 갈수록 내게 더욱더 새로워지는 것은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과 내 마음속의 도덕률이다.”
– 영국의 극작가이자 비평가, 소설가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조지 버나드 쇼 (George Bernard Shaw)의 묘비명은 CF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작품과 생활 속에서 늘 풍자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그인만큼 묘비명도 익살적이다.
“내 언젠가 이 꼴 날줄 알았지.”
– 통계역학의 기틀을 설립한 열/통계물리학의 아버지인 이론물리학자 루트비히 에두아르트 볼츠만 (Ludwig Eduard Boltzmann)의 묘비명은 극단적으로 짧으면서도 지극히 강렬하고 아름답다.
“S=klnΩ”
– 대수학의 아버지인 디오판토스의 묘비에는 수학 문제가 적혀 있는데, 방정식을 풀면 디오판토스의 사망 당시 나이가 나온다. 정규 교육과정에서 다들 한 번씩은 보게 되는 유명한 묘비명 덕분에 간혹 고인드립의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보라 ! 여기에 디오판토스의 일생의 기록이 있다. 일생의 6분의 1은 소년이였다. 그리고 12분의 1 후에 수염이 자라고 다시 7분의 1이 지나서 결혼을 하였다 5년이 지나 아들을 낳았고 아들은 아버지의 나이의 꼭 반을 살았으며 아들이 죽은후 4년뒤에 죽었다.”
–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오명으로 잘 알려진 니콜로 파가니니의 묘비명은 의외로 평범하다.
“제노바 태생의 천재 음악가 니콜로 파가니니 여기에 잠들다.”
– 미국 제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의 묘비명은 이렇다. 대통령을 지냈으면서도 자신이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을 넣지 않았다는 게 포인트. 사실 이 생몰년을 제외한 문장은 제퍼슨이 사망하기 전에 직접 정한 묘비명인데 이렇게 정해 놓은 후 가족들에게 여기서 단 한 단어도 추가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미국 독립 선언서의 기초자, 버지니아 종교 자유법의 제안자, 버지니아 대학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이 여기 잠들다. 율리우스력 1743년 4월 2일 나서 1826년 7월 4일 졸하다.”
– 조선시대의 대학자 퇴계 이황의 묘비명은 이렇다. 이 묘비명은 퇴계가 죽기 직전에 직접 정한 묘비명이라고 하는데, 이게 특이한 이유는 퇴계도 조정에서 벼슬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직함들을 다 빼고 적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묘비명에는 죽은 사람이 관직에 몸담았을 경우 그의 관직들을 다 넣는 것이 관례다.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도산에서 물러나 만년을 숨어산 진성 이씨의 묘)”
– 고대 그리스 (정확히는 시칠리아)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의 묘비에는 원통에 내접하는 구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사망 당시 로마군의 시라쿠사 함락으로 난리통인 상황에서 여전히 그는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기하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고 한다. 때마침 약탈하러 온 로마 병사에게 ‘그 그림에 손대지 말라’라고 말했고, 이에 분노한 로마 병사의 칼에 죽었다고 한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사령관 마르켈루스는 이 소식을 듣고 애석해하며 아르키메데스의 묘비명에 그가 마지막으로 연구했던 것을 묘비명을 새겨줬다고 한다.
“원통의 부피와 원구의 부피의 비는 3:2다.”
– 아동문학가 소파 방정환의 묘비명은 소파의 일생을 간결하지만 확실하게 보여주는 묘비명이다.
“童心如仙 (동심여선)
아이의 마음은 신선과 같다 _ 어린이의 동무 소파 방정환의 묘.”
– 미국의 위대한 흑인 인권 운동가 마틴 루서 킹의 묘비에는 그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의 마지막 대목이 살짝 바뀌어 적혀 있다.
“Free at last! free at last! thank God Almighty, I’m free at last!
(드디어 자유가, 드디어 자유가! 전능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제가 마침내 자유로워졌나이다!)”
– 1666년 대화재로 전소된 런던 시가지와 세인트 폴 대성당 복구 작업에 참여한 크리스토퍼 렌은 자신이 설계한 세인트 폴 대성당에 안장되었는데, 그의 묘비명에는 건축가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바쳐졌다.
“여기 이 토대에 이 교회와 도시의 건축가이며 사익이 아니라 공익을 위하여 90년 넘게 살았던 크리스토퍼 렌이 누워 있다. 읽는 이여, 그의 기념비를 찾고자 하거든 그대의 주위를 둘러보라. 1723년 2월 25일, 91세를 일기로 사망.”
– 덕혜옹주의 묘비명은 대한제국의 황녀로 태어나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세상을 떠난 옹주의 일생을 함축적으로 나타냈다.
“大韓 德惠翁主之墓
(대한 덕혜옹주지묘)”
– 대한민국의 공수특전사령관 정병주 장군의 묘비명은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은 백비. 이게 특이한 이유는 정병주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데, 원래 국립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된 묘에는 간단한 약력이나 추모 글귀가 새겨져 있기 마련이지만 정병주의 묘비에는 계급과 이름만 적혀 있고 이런 것이 하나도 적혀 있지 않다. 이는 유족들의 뜻인데 “명령을 생명으로 여기는 군인들이 상관에게 총질을 하고도 버젓이 살아 있는 세상에서 돌아가신 분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는 뜻이라고 한다.
“육군소장 정병주의 묘(앞면)
一九八九년 三월 四일 경기도 고양군 산중에서 별세(뒷면)”
– 코미디언 김미화가 미리 지어놓은 자신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웃기고 자빠졌네”
– 실제 아이작 뉴턴의 묘비명이 아니지만, 알렉산더 포프의 찬사는 너무나 유명해서 묘비명으로 잘못 알려져있다.
“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신이 ‘뉴턴이 있으라!’ 하시자 세상이 밝아졌다.”
– 고려 말의 명신 포은 정몽주의 묘비명은 이렇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무미건조하고 특이점도 없는 평범한 묘비명이지만 영원한 고려의 충신으로 남은 그의 삶은 물론이고, 그를 존경했던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심정이나 평가도 모두 엿볼 수 있는 묘비명이다. 덧붙여 정몽주의 묘비는 조선 중종 때 유학자들이 세운 것인데, 원래 당대의 묘비명에는 추증된 관직이나 생전에 몸담은 관직까지 모두 넣는 것이 관례이지만 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이라는 이유로 조선 태종이 추증한 관직명은 빼고 이렇게 지은 것이라고 한다.
“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
(고려 수문하시중 정몽주지묘)”
– 신라 삼국통일의 제1공훈자인 김유신의 묘비는 두 개이다. 모두 당대가 아니라 후대인 조선시대에 세워진 묘비지만 살아서는 태대각간이라는 최고 직위를 누렸고, 죽어서는 ‘흥무대왕’으로 추존된 그의 입지를 잘 보여주는 묘비명이다. 덧붙여 두 번째 김유신의 묘비에 물이 묻으면 ‘능(陵)’이라는 글자가 ‘묘(墓)’로 바뀐다는 사실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
(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
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
(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
– 이소룡의 묘비명은 본명인 ‘이진번’이 한자로 표기되어 있고, 그 옆엔 아들 브랜든 리의 묘비가 나란히 있다.
“founder of jeet kun do
(절권도의 창시자)”
– 조선의 독립과 조선인의 인권 보장을 위해 일본인임에도 발벗고 나섰던 변호사, 후세 다쓰지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그의 인생 역시 이 한 마디로 요약된다.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 한때 전 세계의 절반을 호령하던 사상인 공산주의의 창시자, 카를 마르크스의 묘비명은 공산당 선언에서 따 왔다. 짧고 강렬하며 자신의 사상을 가득 담은 묘비명이 특징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미국이 크게 자랑스러워하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묘비명은 작가답지 않은 하나의 문장이다.
“일어나지 못해 미안하오.”
– 중국 역사상 유일의 여자 황제인 측천무후의 묘비에는 아무런 글자도 없다. 이를 무자비 (無字碑)라고 한다. 이는 측천무후의 유언을 따른 것으로, 이유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내 업적은 참으로 크니 도저히 글로써 남길 수 없다’라는 극도의 자만에서 비롯한 것인지, 아니면 차마 글로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겸양의 표현인지 확실하지 않다. 비슷한 것으로 명나라 만력제의 묘비 또한 무자비인데, 이 쪽은 확실히 전자의 자만이 맞다. 각 인물에 대한 평가도 측천무후는 ‘잔혹한 정치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부 통치는 잘했다’라는 재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만력제는 부정할 수 없는 명나라 최악의 암군으로 평가받는다.
– 터키의 국부이자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묘비는 그가 생전에 남긴 말을 담고있다.
“Benim naçiz vücudum, bir gün elbet toprak olacaktır. Fakat Türkiye Cumhuriyeti, ilelebet payidar kalacaktır.
(나의 미천한 몸은 언젠가 당연히 흙이 될 것이다. 하지만 터키 공화국은 앞으로도 영원히 남아 있으리라.)”
–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였던 레오나드 메틀로비치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When I was in the military, they gave me a medal for killing two men and a discharge for loving one.
(군은 내가 두 명의 남자를 죽였다는 이유로 훈장을 주었고, 한 명의 남자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나를 전역시켰다.)”
– 셜록 홈즈 시리즈의 저자로 유명한 아서 코난 도일의 묘비명은 이렇다.
“STEEL TRUE BLADE STRAIGHT
(강철처럼 진실하고 칼날처럼 곧다)”
– 천왕성의 발견자이자 별빛이 곧 과거를 보는 것임을 처음 깨달은 천문학자 윌리엄 허셜의 묘비명은 이렇다. 빛의 속도가 유한함을 생각해본다면 참으로 적절한 문장이다.
“그는 하늘의 장벽을 돌파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