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투스트라와 조로아스터교 (Zoroastrianism)
‘자라수슈트라’ 또는 ‘조로아스트레스’ (그: Ζωροάστρης)는 이란 북부지방에서 태어난 예언자로서 그의 이름을 딴 조로아스터교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생애와 출생 연대 및 활동 지역에 관해서 매우 엇갈리는 기록들이 남아 전하고 있다. 더러는 박트리아 지역, 더러는 이란 남부 지역이 예전의 페르시아 지역을 그의 출생지로 보기도 하며, 출생 연대에 관해서는 심지어 기원전 6000년에서 기원전 600년까지 의견이 매우 엇갈리고 있다.
– 자라수슈트라

.생사: 미상, 약 BC 660년경 또는 BC1000-1400년경 출생 (박트리아, 또는 아제르바이잔 ‘Azerbaijan’)
.성별: 남성
.직업: 종교 지도자
.종교: 조로아스터교
.부모: Pourušaspa, Spitāma
.배우자: Hvōvi
.자녀: Freni, Pourucista, Triti, Isat Vastar, Uruvat-Nara, Hvare
고대 페르시아에서 고위 사제 계급으로 태어났다. 자라투스트라의 삶과 출생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BC 660년경 또는 BC 1500년 ~ 1300년 경 태어났다고 추정된다. 조로아스터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그가 아제르바이잔 (Azerbaijan)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란 동부 혹은 중앙아시아 출신이라는 주장이 더 신빙성이 있다.
당시 페르시아는 기원전 3000여년 경에 아리안족이 현재 이란 지방을 정복했다. 이름인 ‘Zaraϑuštra’가 아베스타어로 ‘낙타를 잘 키우는 사람’에서 알 수 있듯이 지배계층인 아리안족은 유목을 중시했으며 자신들의 신들을 모셨다. 기존 이란(페르시아) 땅의 피지배계층들은 농업사회에서 여러 잡신들이 기존의 신앙과 피지배층의 신앙과 연관되어 잡탕으로 섞여 있는 다신교 사회였고 여러 신앙들이 난립한 가운데 종교나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20살에 처음 종교에 깊이 빠지면서 가족과 친구와 멀어졌고 30세에 진리에 빠져들게 되었고 일신교 사상에 가까운 종교를 창시하게 된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40세까지 그가 설득한 사람은 사촌 형제 단 한사람이었다고 한다. 다신교에 빠진 자신의 고향에선 배척과 탄압을 받다가 페르시아 동북부 박트리아로 건너가게 되었고 몇 년 후 박트리아 왕을 설득하여 개종하는데 성공하여 교세가 널리 퍼졌다고 한다.
그의 교리를 일부 설명하자면 ‘지혜의 최고 신’이라는 뜻의 절대자 아후라 마즈다와 그의 대적자 앙그라 마이뉴 (Angra Mainyu, 후에 아흐리만 (Ahriman)이라고 불림)의 이원론적 일신론으로 둘 사이에서의 대립에 인간이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적극적인 행동자로 선을 보호하고 악을 물리치는 자유 의지를 지녔다고 하는것이다.
이런 교리로 당시 유행이었던 짐승을 죽여서 제사를 지내는 것과 식물성 약물로 취해서 정신을 어지럽게 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고 한다. 창조주가 만든 땅, 불, 바람, 물을 깨끗하게 여길 것도 강조했다.
불을 신성하게 여긴다.
훗날 프리드리히 니체가 그의 이름을 빌려 쓴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그 책을 주제로 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관현악 교향시 덕분에 비주류 고대 종교 창시자 치고는 이름이 많이 알려졌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 나오는 현자 자라스트로와 영혼기병 라젠카에 등장하는 박사 짜라스트로가 이 사람의 이름을 따온 인물이다.
○ 조로아스터교 (Zoroastrianism), 마즈다교 (Mazdaism) 혹은 배화교 (拜火敎)

조로아스터교 (Zoroastrianism), 마즈다교 (Mazdaism) 혹은 배화교 (拜火敎)가 창시된 시기는 기원전 1800년에서 기원전 640년경으로 다양하다. 이 종교는 중동의 박트리아 지방에서 자라수슈트라가 세웠다. 차라투스트라 (Zarathustra)가 그리스어에서 변한 게 조로아스터다. 기원전 600년경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 때 오늘날 이란 전역에 퍼졌으며, 기원전 5세기 이미 그리스 지방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조로아스터교는 창조신 아후라 마즈다 (Ahura Masda)를 중심으로 선과 악 이분법으로 세계를 구분한 게 특징이다.
– 조로아스터교의 발생과 전파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조로아스터 (본명 자라수슈트라 스피타마)의 출생 연대는 대개 기원전 660년으로 보는 편이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기원전 1000-1400년경에 살았다고 보기도 한다. 그의 생애는 전설 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조로아스터는 방랑생활을 하다가 서른살에 이르러 천사장을 만났다. 이 천사장은 참된 신은 아후라 마즈다이고 너 조로아스터는 그의 예언자라고 알려주었다. 이때부터 조로아스터는 진리를 전하기 시작했고, 때로 미친사람 취급을 받는가 하면 2년간 투옥되기도 했으나 조로아스터교는 급속히 발전하였다. 조로아스터가 77세가 되었을 때 큰 전쟁이 있었는데, 그는 거룩한 불 (聖火) 앞에 서 있다가 적군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한다.
조로아스터교는 역사가 유구하다. 7세기 이후로 이슬람에 의하여 점차적으로 사회에서 소외되기 전에 수세기 동안 상당수의 이란 사람들의 국가종교 혹은 주 (州)의 종교로 참배되었다. 이슬람 이전 이란 왕조의 정치 세력은 고대에 조로아스터교에 커다란 명성을 안겨 주었으며, 또 그 주요 교리의 일부는 기타의 종교 계통에서 채택하기도 하였다.
.창시와 전파
창시자 자라투스트라의 생몰연도는 확실치 않으나, 평상적으로는 기원전 6-7세기라고 보며, 대부분의 백과나 지식사전에 기원전 6-7세기로 설명한다. 기원전 660년이 정설이다. 극단적인 주장에서는 대략 기원전 1500년~ 1300년 무렵이라고 말한다. 이란 동부 지역에서 활동했다고 하며, 박트리아 출신이라고도 한다. 조로아스터교는 동부 이란을 중심으로 여러 이란계 종족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하고, 조로아스터교를 추종하는 메디아와 아케메네스 왕조가 서아시아의 패권을 쥐면서 급성장했다. 하지만 아케메네스 왕조는 안정적 통치를 위해 토착종교와 관습을 용인하는 태도를 견지했고, 조로아스터교는 이란계 종족들의 범위 이상으로 전파되지 못했다. 물론 일부 소수민족들은 출세를 위해 자발적으로 조로아스터교로 개종하는 경우도 있긴 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아케메네스 왕조가 패망하자 조로아스터교 역시 국교의 지위를 잃고 약화되었다. 이후 헬레니즘 시대와 파르티아의 지배를 거치면서 아나히타나 미트라 등 하위신격들을 숭배하는 변종 분파들이 널리 퍼졌다. 특히 미트라 숭배는 헬레니즘 세계를 거쳐 이후 로마 제국까지 전파되기도 했다.
.사산 왕조 시대
이 추세가 반전된 것이 사산 왕조의 등장이다. 사산 왕조는 그 이전 400년 동안 이란을 지배한 파르티아인들의 유목민적 전통과 느슨한 봉건제도, 타 종교나 문화(특히 헬레니즘)에 대한 호의적 태도 등을 비난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건설을 주창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를 국가권력 강화와 사회 통합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이에 따라 사산 왕조 초기 조로아스터교는 정통 교리와 경전을 확립하는 작업, 국가권력과 연계된 관료적 성직기구의 정비 작업 등을 진행하며 다시 한 번 국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 때 파르티아 동부에서 번영했던 불교는 조로아스터교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으며 중동에서 몰락했다. 이후 제국의 정통 교리에 반하는 마니교, 마즈다크교 등이 등장하여 세력을 늘리거나 고위 성직자들을 견제하려는 황제들의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조로아스터교의 이단으로 몰려 탄압당했다.
조로아스터교의 몰락은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했던 사산 왕조의 멸망과 궤를 같이 한다. 아나톨리아와 유럽 지방을 지켜낸 동로마 제국과 달리 이란은 모든 영토가 궁극적으로 이슬람 세력에 정복당했고, 사산 왕조의 국가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이슬람 시대
조로아스터교와 이슬람 사이의 악연은 예언자 무함마드 때부터 시작되었다. 니샤푸르에서 의학을 배워와서 메카에 병원을 차린 안 나디르 이븐 알 하리스 (An Nadhir Ibn Al Harith)는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포교할 때 잠자코 듣고 있다가, 무함마드의 설교가 끝나면 그 자리에 있던 아랍인 청중들에게 카야니아 왕조 연대기에 나오는 에스판디야르 왕이나 로스탐 신화를 들려준 후 “여러분, 무함마드와 나 중에서 누가 더 재밌는 우화를 말했다 생각하십니까?”라고 말하며 공개적으로 무함마드의 포교를 방해했다 한다. 공교롭게도 나디르는 바드르 전투 때 패배하며 포로로 잡혔는데, 다른 쿠라이쉬 포로들의 경우는 관대한 처우가 내려졌던 것과 반대로 나디르는 무함마드 앞에서 바로 참수당했다. 또한 무함마드와 그의 교우들은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동로마 군이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사산 왕조를 격퇴하자 이를 매우 기뻐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라쉬둔 왕조의 아랍 정복자들도 페르시아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토착 유력자를 포섭해야 했으므로 조로아스터교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토속신앙과 달리 이슬람에 교리상 유대교, 기독교도와 마찬가지로 조로아스터교도 일신교에 해당하는 종교이고 기독교나 유대교와 교리를 공유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원칙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주었다. 8~9세기 정도만 해도 중세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조로아스터교 관련 문서들이 꽤 남아 있다. 심지어는 조로아스터교 특유의 근친혼 풍습까지 허용해줄 정도였다. 그 와중에 조로아스터교 내부에서도 이단취급 받던 마즈다크교는 시아파와 합세해서 제국에 반기를 들었기에 탄압받았다.
그러나 우마이야 왕조의 아랍인 우선주의, 비무슬림에 대한 추가 인두세 부과, 그리고 비무슬림을 차별하지 말라는 공식적 입장과 상관없이 이루어진 비공식적 차별, 특히 가혹한 세금과 더불어 조로아스터교도와 무슬림 형제가 있을 경우 조로아스터교도는 상속을 받을 수 없다는 등의 조치로 인하여 인해 점차 이란에도 무슬림 개종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처음에는 고등종교로 인정하는 조치와 반대로 무슬림들은 점점 조로아스터교도들을 불을 섬기는 이교도로 취급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편견이 조로아스터교가 배화교로 불리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750년 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릴 때 이란의 비 아랍계 무슬림인 마왈리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9~10세기 정도가 되면 조로아스터교는 완전히 소수 종교가 된다. 11세기 셀주크 제국을 위시한 이란 지역의 튀르크화와 순니파 세력의 강화 역시 조로아스터교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사산 왕조 멸망 이후 이란이 지속적으로 이슬람화되자, 조로아스터교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피난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 중 인도 지역으로 피난한 사람들은 아래 서술할 “파르시”가 되었고, 중국으로 피난한 사람들에 의해 배화교, 혹은 현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현대
현재도 적게나마 신자가 있다. 이란, 인도, 중국, 쿠르디스탄을 합쳐서 약 10~30만 명 정도이며 가장 많이 분포하는 곳은 인도다. 밴드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인도의 조로아스터교도인 파르시 출신으로 유명하다.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등 이슬람 극단주의에 질린 쿠르드족이 조로아스터교로 개종하는 숫자가 증가하고 있다.
이란에서는 2011년 인구조사 결과 2만 5천 명가량의 신자가 있다고 하며, 중부 야즈드 (Yazd) 지역이 조로아스터교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다만 워낙 고생이 심해서 성전 아베스타조차도 극히 일부분밖에 남지 않았다. 대략 전성기의 20분의 1 정도 분량. 성경으로 예를 들자면 신약하고 구약 중 한두 편만 남고 죄다 없어졌다. 하지만 그 남은 분량만 해도 꽤 많고, 조로아스터교는 아베스타 이외에도 중세 시기에 작성된 여러 문서도 함께 사용한다.
1906년의 페르시아 헌법 규정에서는 의회 의석 중 1석을 반드시 조로아스터교도에게 할당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이는 이슬람 혁명 이후인 지금도 유효하다.
호메이니는 조로아스터교를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다만 조로아스터교가 과거 대페르시아를 상징하는 점이 있어서 팔레비 왕조 시절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또 1971년 페르시아 건국 기념일에 조로아스터교인들이 대표처럼 나온 적이 있었다. 당시 이걸 이단 행위라고 욕하다가 ‘페르시아를 욕하는 저 식히는 매국노!’라고 엄청난 비난을 받고 부랴부랴 ‘아니 잘못 생각했어요!’라고 변명을 하며 평생 페르시아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야 했던 호메이니였으니 아무리 이교도인 조로아스터라도 함부로 까다가 자칫하다간 페르시아를 까는 것으로 봤기에 그냥저냥 공존하게 놔두었다. 그러나 차별과 박해는 존재했고, 2000년대 이후에 망명하는 조로아스터교도들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한때 부활 운동이 펼쳐졌었다. 위낙 과거 페르시아의 영광을 상징하는 종교이기도 해서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조로아스터교 부활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현 이란인들이 과거 페르시아 제국에 대해서 영광스러운 과거로 생각하기 때문에 한때는 엄청난 기세를 보였지만, 이란 지도부에서 그냥 무시하는 것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그냥 별 성과 없이 끝났고,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조로아스터인들은 소수이긴 하지만, 과거 페르시아가 아랍을 지배하며 호령할 때 종교가 조로아스터교인데, 왜 현대에는 정작 페르시아의 후손인 이란이 아랍인의 이슬람에 정복당해 버린 거냐?’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에 이란에서는 ‘대신 소수 계열인 시아파를 믿으며 아랍과 대립하잖아.’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인도로 피난한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소수민족 집단인 파르시 (페르시아인이라는 의미)가 되어 잔존하게 된다. 힌두교 신자들은 이들을 카스트 제 2계급인 크샤트리아 계급으로 취급했다고 한다. 이들은 인도의 지배종교인 힌두교와 대립하지 않기 위해 교리에 일부 규정을 더하였는데, 현재 그중에 문제가 되는 것이 “파르시와 파르시의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만이 파르시가 될 수 있다.”는 규정이다. 시뮬레이션에 의하면 이 규정을 계속 지킬 경우 현대 사회에서 파르시는 2, 3세대 안에 거의 소멸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때문에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종교개혁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파르시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한 경우가 많은데, 특히 인도의 여러 민족 중에서 파르시들이 영어를 제일 빨리 배우고 익힌 덕분에 영국의 식민 지배를 거친 근현대에 와서 이들의 상권이 더 강화되었다. 현재 인도 최대의 재벌그룹 타타 그룹을 소유한 타타가문이 파르시이다. 의외겠지만 재규어와 랜드로버도 타타모터스 소유이다. 타타모터스뿐만 아니라 타타그룹 자체가 농업에서 항공우주 산업까지 안 하는게 없을 정도로 인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또 영국의 전설적 록그룹 퀸의 프레디 머큐리 역시 파르시 혈통이었다. 그리고 피아노 분야에서 가장 난해하고 연주하기 어려운 작품을 남긴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카이코스루 사푸르지 소랍지도 파르시교도였다.
시체로 불이나 땅을 더럽히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화장을 기피하고, 조장 (鳥葬)을 선호하고 있다.
– 철학
.선악 이원론
조로아스터교는 일반적으로 마즈다교 또는 마즈다이즘 (Mazdaism)과 본질적으로 동의어로 사용된다. 조로아스터교에서, 창시자 아후라 마즈다는 모두가 선하며, 그로부터 어떤 악 (惡)도 기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조로아스터교에서 선과 악은 분명한 근원이 있는데 악 (druj)은 마즈다 (asha)의 창조를 파괴하고자 하고, 선 (善)은 그것을 지속하려고 한다. 이 종교의 가장 중요한 텍스트는 아베스타의 텍스트들인데, 그 중요 부분은 상실되었고, 대부분의 유일한 예배의식만이 존속하고 있다. 상실한 부분은 주로 9세기부터 11세기까지 다만 후기의 작품 속에서의 참고와 간략한 인용문을 통하여서만 알려져 있다.
.아후라 마즈다
조로아스터교도들은 하나의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신 아후라 마즈다만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는 종국적으로 모든 예배가 지향하는 창조하지 않은 창조자로 일컬어진다. 이 종교는 선한 생각, 선한 언어와 선한 행위를 통하여 인생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게 행복을 보장하고 혼란을 막는데 필요하다고 설교한다. 이 능동적인 참가는 조로아스터의 자유 의지 개념에서 중심적인 요소이며, 또 조로아스터교는 모든 형태의 수도원 생활을 거부한다. 조로아스터교에서 아후라 마즈다는 궁극적으로 사악 앙그라 마이뉴 (Angra Mainyu) 혹은 아흐리만 (Ahriman)에 승리할 것이며, 그 시점에서 우주의 혁신을 경험하고 시간이 끝난다는 사상이다.
– 교리
조로아스터교는 흔히 불을 숭상한다 하여 배화교로 알려져 있지만, 불을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조로아스터교도가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하루 5번의 예식에 쓰이는 성스러운 불을 소중히 하는 것이다. 불은 물론 창조자의 피조물인 땅, 불, 물, 사람의 ‘마음’까지도 더럽히지 않으려 한다. 그런고로 당시 유행하던 짐승을 죽여 피로 땅을 더럽히는 제사와 사람의 시신을 땅에 묻는 것, 식물성 마약에 취해서 마음을 더럽히는 것 모두 금기시한 것이다. 불을 소중히 여기는 다른 이유로는 사산 왕조 시기에 조로아스터교식의 ‘성상 파괴’가 일어나서 예술로 쓰이는 것 외에 종교 의식에서 성상을 쓰는 것을 금지하고 불을 사용하도록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주신 아후라 마즈다를 섬기는 종교로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거울의 양면으로 해석되는 “이원론적 일신교 종교”이다.
성경도 비슷한 묘사를 사탄에게 하는데, 욥기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빛의 원리에 필적하는 어둠의 원리를 인정한다.
그러나 둘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동등한 것은 아니고, 악과 어둠은 선과 빛에게 결국 패배하게 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적극적인 자유 의지로 단순히 믿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악에 맞서서 투쟁할 것을 주문한다. 영적전쟁 개념과 다소 비슷하다. 또 조로아스터교는 고대 신화의 여러 신들을 모두 받아들였으므로 신은 여럿 있지만, 결국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만물의 주인, “주신”은 오직 아후라마즈다/오르마즈드뿐이다. 조로아스터교 내의 다른 신들은 유일신인 아후라마즈다를 돕는 보조적인 신이자 선한 영으로, 기독교의 천사들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다시 말해 조로아스터교는 비록 고대의 다신교적 성격이 일부 남아 있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일신교적 성격이 강한 종교이다.
현재 남아있는 아베스타를 보면 평화와 화합, 도덕적 생활을 통한 번영을 중시여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상당수의 에피소드가 자라투스트라의 방문을 받은 마을이 거지처럼 못살다가 자라투스트라의 지도를 받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목축민과 유목민적인 성향이 많이 반영된 유대교와는 달리, 농민과 도시민의 성향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 점은 베다 종교 (=브라만교, 힌두교)와 대비되는 경향이기도 하다.
조로아스터교에서 강조하는 신심은 예언자 자라투스트라가 강조한 세가지의 좋은 행동, 즉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을 하며 살 것을 강조한다. 애초에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면, 즉 아후라마즈다의 길을 따른다면 좋은 생각이 곧 좋은 말을 낳고, 다른 이들에게 좋은 말을 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에게 좋은 행동을 하며 살 수 있다고 보는 것인데, 결국 이러한 행동들이 바로 악을 물리치는 무기가 된다고 본다.
.유일신교
사람들이 조로아스터교에 대해 착각하는 가장 본질적인 내용은, 아후라 마즈다와 앙그라 마이뉴라는 각각의 존재에 의존해 펼쳐지는 것이 이 세계인데 왜 유일신교라고 보느냐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조로아스터교 내에서도 차이가 있는 듯하다. 앙그라 마이누가 창조된 존재인지 아니면 원래 있던 존재인지가 조금 갈리는 듯하다.
앙그라 마이누는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악의 힘인 앙그라 마이누는 창조되지 않았으며 창조주이자 선의 힘인 아후라 마즈다가 나중에 그의 존재를 눈치챈다. 왜냐하면 창조는 그 자체로 선한 행위이기 때문에 악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신교라고 보는 이유는 결과적으로는 빛의 힘에 패배하기 때문이다. 또한 페르시아가 숭배한 대상은 오로지 아후라 마즈다뿐이었다.
즉,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져 악한 짓을 하며 설치고 돌아다닌다 해서 유일신교라 부르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니듯, 조금 더 강한 사탄이라 할 수 있는 앙그라 마이뉴가 존재한다고 해서 조로아스터교가 유일신교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주의해야 할 점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우에는 피조물이 타락한 경우이지만 앙그라 마이뉴의 경우에는 애초에 피조물이 아니었다. 애시당초 유일신교라고 하는 이유는 결과적으로는 빛이 승리하고 아무리 악이 날뛰어도 빛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앙그라 마이뉴와 동급의 존재는 스펜다 마이뉴다. 아후라 마즈다가 만들어낸 쌍둥이로 각각 빛과 어둠을 상징하는 존재. 후대에 오면서 스펜다 마이뉴의 존재감이 사라지면서 변화된 것이다.
경전에 의하면 아후라 마즈다의 성령인 스펜다 마이뉴는 선의 길을 택하고 앙그라 마이뉴는 악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아니면 그냥 아후라 마즈다하고 앙그라 마이뉴가 그냥 쌍둥이 영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다양한 사이트를 참조해보니 사이트마다 주장이 다른 부분이 있다. 앙그라 마이뉴가 창조된 존재인지 아닌지에 대해 이렇게 갈리는 이유는 아무래도 후대에 들어서 종교의 교리가 바뀌거나 아니면 해석의 차이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으로 보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조로아스터교가 대세가 아니다 보니 주류의 의견이 확실하지가 않다.
.파생 종파
이렇게 알려져 있지만 워낙 오래된 종교라서 시대에 따라 교리나 사상에 변화가 많고, 이단 종파나 분파도 많다. 특히 이슬람의 침략 이후 신자들의 수가 격감하여 그 전통이 매우 약화된 탓이 크다. 조로아스터교는 조로아스터교 이전의 고대 페르시아의 토착 신앙과 구분되기는 하나 일부 신들은 그 연장선상에 있고, 향후 수백 년간 나타난 여러 다른 종파와도 모호하게 구분된다.
주르반교 : 주르반교는 흔히 “쌍둥이 신”이라고 설명되는 아후라 마즈다와 앙그라 마이뉴가 세계를 지금과 같이 만들었다면, 그 동등한 쌍둥이를 만들어 낸 태초의 존재가 있으리라는 가정에서 형성되었다. 시간과 관련된 신이었던 주르반이 바로 그 태초의 존재라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주르반 항목 참조.
미트라교 : 조로아스터교의 여러 하위신 가운데서 미트라를 특히 높이 보고 숭배하는 종파. 미트라교에서는 미트라를 아후라 마즈다와 동격, 혹은 아후라 마즈다의 계승자로 본다.
마니교 : 페르시아 출신의 예언자 마니가 조로아스터교에 불교, 기독교, 유대교 교리 등을 접목시켜 창시한 종교. 조로아스터교를 훼손시킨 변종 이단으로 간주되어 조로아스터교 세력으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조로아스터교 주류로부터 탄압받으며 키운 맷집 덕분인지 이슬람 칼리프조 시대에도 주류 조로아스터교보다 더 적극적으로 저항했다고 한다. 심지어 이들은 압바스 칼리프조 시절에도 이슬람에 맞서 마니교를 대놓고 전교하고 다녔으며, 마니교 선교사들과 이슬람 신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중세 무타질라 학파의 시발점이 되었다.
마즈다크교 : 5~6세기경 살았던 조로아스터교 성직자 마즈다크가 내세운 조로아스터교의 개혁 운동. 종교적으로 주류 성직자들과 대립하는 한편, 사회정치적으로 대귀족들을 공격하고 재산의 공동 소유 등을 주장해 큰 인기를 끌었다. 재산의 공동 소유 교리에는 배우자를 공유해야 하는 사항도 포함하고 있었는데 (…) 사산조 페르시아 황실의 하렘을 습격해서 후궁들을 납치해서 마즈다크 교단에 편입시킨 사건 이후 결국 이단으로 몰려 거의 절멸당했다.
– 다른 종교와의 관계
.유대교, 기독교
키루스 2세가 조로아스터교라는 발언이 있었는데, 이 발언에 대해서는 논쟁 중에 있다. 다리우스는 조로아스터교도인 게 확실한데, 키루스 2세는 조로아스터교도라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 오히려 키루스 실린더에서 바빌론 주신 마르두크가 자신을 경외하는 키루스를 바빌론의 새 지배자로 선택하였다는 서두 부분의 정당화 논리를 보고 있으면 더 아리송해진다. Pierre Briant 박사에 의하면 키루스의 종교가 무엇이었는가를 재구성하기에는 무모하다고 서술해놓았다. “it seems quite reckless to try to reconstruct what the religion of Cyrus might have been.” 당시 페르시아는 영토 뿐 아니라 경제, 문화, 군사, 체제 정비 등 다른 나라들을 압도하는 오리엔트 세계의 패자로 확고한 위치에 있었던 시기로 유대인들 역시 종교 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페르시아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유대교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다는 확정적 주장도 있지만 광범위적 영향을 준 것은 맞지만 명확하게 특정 부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양한 사이트를 참조한 결과, 사실 여부가 확실하지 않다. 대부분의 사이트나 공식적 서술의 경우 짐작 혹은 영향을 미쳤다 정도의 서술만으로 그쳐있었다. 확정적 서술을 해놓은 글이라고는 해봐야 블로그 글 정도에 그치는데 블로그 글이라면 오히려 기독교가 조로아스터교에 영향을 줬다는 글도 있기 때문에 신뢰하기가 어렵다.
애초에 시기상으로 봐도 이 두 종교는 좀 미묘하게 겹쳐있다. 바빌론에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게 키루스 2세 때고, 이 때서야 조로아스터교가 유대인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고 보이므로 영향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미지수다. 당장 야훼는 유대인의 신이었을 뿐 유일신이 아니었는데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아 유일신교가 됐다는 주장, 동정녀가 잉태를 했다는 점이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들은 금방 근본적으로 반박이 된다. 유일신 문제의 경우 유대인들을 선택한 민족으로 삼았다고 했지, 히브리의 신이라고 서술한 적은 없었으며, 태초에 야훼만 있었으며, 창조한 것 역시 창세기 쪽을 보면 야훼가 맞다. 그리고 유일신 개념은 유대교가 사실상 1000년 정도 더 빠르게 정립하고 있었다. 게다가 동정녀 잉태의 경우 조로아스터교는 조로아스터의 정액이 보관되어 있다가 여성에게 흘러들어 갔다는 내용이기에 완전한 동정녀 잉태라고 볼 수가 없다. 또한 메시아 신앙의 경우는 오히려 원래부터 있었다. 대표적으로 키루스 2세도 유대교 서술로 보면 키루스 2세도 ‘기름부은 자’, 즉 신이 보낸 구원자 중 하나다. 믿고 버티면 신이 구원해줄 사람을 보내준다는 메시아 신앙의 경우, 키루스 2세에 의해 강화된 것이지, 추가된 내용은 아니다. 또한 메시아 신앙이 강해진 이유는 피지배 시절의 경험으로 인해 메시아 신앙이 강해진 것이 더 크다.
영어 위키에서도 특정 학자들의 경우, 조로아스터교의 악마학이 주로 다른 종교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다는 서술은 확인되지만 다른 서술은 딱히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조로아스터교 역시 다른 민간 신앙이 꽤 많이 혼합되어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순수한 자라투스라의 산물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결국 애시당초 유대교와 접점이 있었던 점은 맞지만 어느 부분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불명확하다는 것이 현재로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조로아스터교가 다양한 종교에 폭넓은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특정 부분에 이렇게 영향을 줬다고 확정지을 수는 없는 듯하다.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확실한 연구와 통일된 견해가 나오기 전까지는 보류의 대상으로 봐야할 듯하다.
게다가 모세오경의 영향은 물론 네부카드네자르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예언자 다니엘의 존재는 역사적 교차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시기 이전까지 모세 5경은 물론 구체적인 신학적 견해도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2004년에 바빌론 유수보다 한 세기 정도 이전 시기의 유대 경전이 일부 발견되어 경전 자체는 부분적으로나마 이미 존재했던 가능성이 있다. 만약 조로아스터교와 대면했을 만한 시기 이전에 이미 유대교 경전이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은 국한적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주의해야 하는 것은 영향을 주었다고 해서, 그 종교가 ‘조로아스터교의 파생 종교’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는 것. 유대교는 아브라함 계통에서 시작됐을 뿐만 아니라, 학자들은 3500년 전부터는 있었다고 추정한다. 모세오경이나 초기 기독교 경전 구약 앞부분의 경우에는 조로아스터교보다 오히려 앞선 시기에 작성되었다. 자라투스트라의 출생이 BC 660년이고, 탈출기 (출애굽기)의 경우 시기가 기원전 1300-1500년 정도이며, 최종 정리가 6-7세기 정도인 것으로 봤을 때는 아무래도 후기에 들어서 영향을 받았을 수는 있어도 기독교와 유대교 자체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권에 있었다고 하기는 힘들다. 특히 창세기나 탈출기 같은 경우에는 조상에 대해 서술하는 것으로 봐서는 구전이 오래 되었을 수도 있으므로 파생 종교라고 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특히 시편의 경우에는 기원전 1400년 전부터 500년대까지 꾸준히 기록되었는데, 상술했듯 조로아스터교보다 일찍 작성된 책 중 하나다. ‘구약성경에 초기에 존재하지 않던 요소들이 등장한다’라는 위의 서술도 있듯이 ‘초기 기독교나 유대교는 따로 있었고 페르시아 시기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게 맞는다. 과연 어디까지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다. 전술한 예시들이 전부 다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는 확신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수의 문제의 경우에도 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다른 부분도 굉장히 많다. 게다가 유일신 신앙적 요소, 천사과 악마의 개념 등은 모세오경에서도 충분히 나온다. 탈출기 때부터 자기 외에는 신이 없다는 말이 나오며 그것은 창세기도 마찬가지이다. 사탄의 원형은 창세기에 나오는 뱀이며 욥기에서 나오는 현대 그리스도교의 사탄과 근본적으로는 같다. 사탄이 40일 동안 예수에게 유혹을 시도한 사건 역시 여기서 예수가 사탄에게 반박을 한 후 예수의 말 몇마디에 줄줄이 쓸려나가버리고 그리고 나머지 악마들 역시 말 한마디면 나가는 걸로 봐서는 대부분 그냥 호구급이다. 따라서 페르시아와의 접촉으로 사탄의 존재감이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모든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나 유대교 역시 인근 문화권의 종교들과 영향을 주고 받은 흔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브라만교, 힌두교
현대에는 아무래도 현대 사회의 관심 분야이기 때문에 유대교, 기독교와의 영향이 가장 주목을 끌지만, 아무래도 조로아스터교와 좀 더 연관성이 깊으면서도 대립성이 강한 종교는 인도의 종교로 브라만교와 힌두교이다.
재미있게도 조로아스터교와 브라만교는 서로의 신과 마가 뒤바뀌어 있다.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 마즈다 (Ahura)는 인도 신화의 아수라 (Asura)와, 조로아스터교에서 저급한 악마로 보는 다에바 (Daeva)는 곧 인도의 신의 데바 (Deva) 신족과 동일한 기원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옛 인도-이란인 (즉, 아리아인)의 원시적인 종교에서 이미 이 같은 신족의 분화가 존재했고, 이란에서는 아후라-아수라 계통의 신앙이 강화되었으나 인도에서는 데바-다에와 계통의 신앙이 강화되면서 이런 대비가 나타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 현대의 조로아스터교와 영향
현대 조로아스터교는 이슬람의 영향으로 교세가 쇠퇴하였다. 2004년에 전 세계의 조로아스터교인들의 숫자는 145,000 명 내지는 210,000 명이 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인도의 2001년 인구조사는 조로아스터 교도의 자손인 파시교도가 69,601 명이었으며, 파키스탄에서는 그들의 숫자가 5,000 명으로 집계되었고 대부분 카라치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고장인 이란에서는 25,000 명의 신도가 있으며, 약 일만 명의 신도들이 한 때 전통적인 조로아스터교의 근거지였던 중앙아시아 지방에 살고 있다.
조로아스터교는 쿠르드 문화와 관련을 갖고 있으며, 2015년 한 해에 이라크령 쿠르디스탄에서 10만 명의 사람들이 조로아스터교로 개종한 것으로 추측된다.
– 유명한 조로아스터교인
아케메네스 왕조의 역대 황제
사산 왕조의 역대 황제
카이코스루 소랍지
프레디 머큐리 (영국 록 밴드 퀸의 보컬)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