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2년 4월 5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유티키우스 (Eutychius of Constantinople, 512 ~ 582) 별세
유티키우스 (Eutychius of Constantinople, 512년 ~ 582년 4월 5일)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이다.
브루기아의 테이움에서 출생, 아마세아의 수도원에서 생활한 (542) 후 메나스 총대주교의 뒤를 이어 총대주교에 임명되었다 (552). 한편 수난불가능론의 교리를 주장하는 황제 유스티아누스의 입장을 거부함으로써 체포되었다가 (564)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호소로 복귀되었다.

○ 콘스탄티노플공의회 주재
제1차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제2차 에큐메니컬 공의회(381)로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소집해 콘스탄티노플에서 모였다. 이 공의회에서 니케아 신조를 공포했으며, 성령이 성부 및 성자와 동등하다는 삼위일체 교리를 최종적으로 공포했다. 이 공의회가 내놓은 법령들 가운데는 ‘콘스탄티노플이 새로운 로마이기 때문에’ 로마 주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주교들에 우선하는 명예를 콘스탄티노플 주교에게 부여한다는 내용의 법령이 있었다. 이 공의회에는 동방교회 주교들만 참석했지만 (모두 150명 정도), 그리스 교회는 이 공의회를 에큐메니컬 공의회라 불렀다. 로마 교황 다마수스 1세는 이 공의회가 공포한 니케아 신조는 받아들이되 법령들은 받아들이지 않은 듯하며, 적어도 콘스탄티노플의 우월성을 주장한 법령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제로 로마는 13세기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콘스탄티노플에 세워진 라틴 제국이 존속하는 동안만 콘스탄티노플에 로마에 버금가는 지위를 부여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방과 서방 모두 이 공의회를 에큐메니컬 공의회로 인정하게 되었다.
제2차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제5차 에큐메니컬 공의회 (553)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유티키우스의 주재로 열렸다.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당한 로마 교황 비길리우스는 이 공의회에 반대하고 5~12월에 한 교회에서 숨어 지냈으나, 결국에는 굴복하고 554년 2월 23일 이 공의회 법령들을 정식으로 승인했다. 이 공의회는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이 그리스도 안에 통일되어 있음을 더욱 강조함으로써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배척하는 14가지 파문령 (아나테마)을 공포했다. 그밖에 다른 중요한 조치는 이전에 오리게네스에게 내린 단죄를 재가한 것이 있다. 553년의 공의회 법령들을 교황이 받아들였는데도 칼케돈 공의회의 법령에 충실하던 서방교회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아프리카에서는 동로마 제국의 군대가 이 법령들을 강제로 받아들이게 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북부의 주교들은 로마 교황청에 충성하기를 거부하고 프랑스와 스페인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이러한 반발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7세기말까지 지속되었다. 그때까지는 지중해 동부와 아프리카에 밀려드는 이슬람 세력 때문에 타협 가능성이 없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