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4일, 배넉번 전투 (Battle of Bannockburn, 1314년) 승전 기념일 : 스코틀랜드
배넉번 전투 (Battle of Bannockburn)는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기간 중인 1314년 6월 23일부터 24일에 걸친 이틀 동안에,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1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2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의 침공을 스코틀랜드 스털링의 배넉번에서 막아 낸 전투이다.
1960년대에 로이 윌리엄슨이 작사 및 작곡한, 스코틀랜드의 사실상 국가인 ‘스코틀랜드의 꽃’ (Flower of Scotland, 스 게: Fhlùir na h-Alba, 스: Flouer o’ Scotland)은 이 배넉번 전투에서의 승리를 다루고 있다.

○ 배경
폴커크 전투의 참패 이후 스코틀랜드 독립군은 잉글랜드군과의 전면전을 극단적으로 회피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받은 에드워드 2세는 1309년과 1310년 2차례 스코틀랜드를 공격했지만 청야전술에 막혀 큰 소득 없이 철군해야 했다.
이후 잉글랜드-스코틀랜드의 싸움은 늪에 빠져드는데, 로버트 브루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북부를 휘젓고 다니다가 이를 토벌하기 위해 잉글랜드군이 쳐들어 오면 북부로 도망치는 상황이 1314년까지 반복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스코틀랜드의 지배권은 점차 로버트에게 조금씩 넘어가고 있었다.
1314년 3월 스코틀랜드군은 에든버러 성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스코틀랜드 땅에서 잉글랜드의 손에 남아있는 것은 보즈웰과 스털링 성뿐이었다.
한편 잉글랜드는 당시 에드워드 2세와 귀족간의 대립으로 내전 직전까지 치달은 상황이었다.
허나 1313년 10월 잉글랜드 귀족들이 형식적으로나마 왕에게 사죄함으로써 갈등은 임시봉합되었고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모든 역량을 모아 역대 최강의 스코틀랜드 정벌군을 조직하였다. 허나 계획만큼 병력이 모이는데 시간이 걸렸고 그 사이 스코틀랜드군이 스털링 성을 포위하고 있다는 소식이 에드워드 2세의 귀에 들어왔다.
그래서 6월 17일 잉글랜드군은 북진을 시작했다. 이때 잉글랜드군은 에드워드 2세가 직접 친정에 나섰고 병력은 스코틀랜드군의 2배가 넘어 압도적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로버트는 고민에 빠졌다.
사실 스코틀랜드군의 게릴라 작전도 이 당시쯤 되면 한계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특히 스코틀랜드 영주들은 잉글랜드군만 쳐들어 오면 도망치는 로버트를 신뢰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서 한번 싸울 필요성이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로버트가 내린 결론은 잉글랜드군과 정면으로 싸우지는 않되 기회가 보이면 언제는 공격할 수 있도록 천천히 조금씩 물러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스코틀랜드군은 배넉번 강이 흐르는 늪지를 앞에 두고 등 뒤에는 뉴 파크 숲 입구를 둔 채로 진을 구축했다. 정면으로는 잉글랜드의 대군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스코틀랜드 독립전쟁 최대의 전투가 다가오고 있었다.

○ 전개
전투 첫날 스코틀랜드군 전초부대는 잉글랜드군의 접근을 확인하고 퇴각해 본대에 합류했다.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이날은 늦었으니 본격적인 전투는 다음 날부터 시작될 것으로 여겼지만, 스코틀랜드군 전초를 추격해온 잉글랜드군 전위부대(주로 기사대)가 독단적으로 스코틀랜드군 본대를 향해 돌격하면서 갑작스레 전투가 시작됐다.
이 와중에 로버트 1세에게 돌격을 건 헨리 드 보헌이라는 기사가 있었는데, 로버트는 그의 랜스를 피한 뒤 곧장 도끼로 상대의 머리를 찍어버림으로써 손쉽게 승리를 챙겼다. 스코틀랜드군의 사기가 충천했음은 불문가지. 드 보헌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군 기사대가 스코틀랜드군을 향해 두 방향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허나 배넉번은 지형이 습지인 데다가 스코틀랜드군의 빽빽한 밀집장창벽(쉴트론)을 뚫을 수는 없었고 이윽고 잉글랜드 기사대는 패퇴했다. 이런 돌격이 두세 번 걸쳐 연속적으로 일어났으나 끝내 잉글랜드군은 스코틀랜드군의 진형을 돌파하는데 실패하였다.
둘째날 스코틀랜드군은 숲에서 나와 전면공세로 전환했다. 이는 잉글랜드 측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움직임이었다. 잉글랜드군이 전황을 파악하느라 시간을 헛되이 쓰고 있을 때 스코틀랜드 궁수들이 선공을 펼쳤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장기인 장궁병으로 응수했고 스코틀랜드 궁수들은 이를 당해내지 못하여 후퇴했다. 허나 그 사이 스코틀랜드 보병들이 창끝을 겨누며 잉글랜드군 목전에 도달해 왔다.
이에 잉글랜드 중기병이 스코틀랜드군을 향해 성급히 돌격해 들어갔으나 그들은 모두 스코틀랜드 보병이 만든 빽빽한 창날의 벽 앞에서 무참하게 붕괴했다. 잉글랜드 기병대를 격퇴시킨 로버트는 전군에게 총공세 명령을 내렸다. 당시 잉글랜드군은 개울과 잡목들으로 가득한 배넉번의 지형에 방해를 받아 진형을 구축하지 못한 상태였고 이에 더해 선두의 기병들과 얽혀 대혼란을 겪고 있었다. 로버트는 잉글랜드군이 수적 우세의 이점을 사용하지 못하게 최대한 밀어붙였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에드워드 2세는 장궁병들을 동원, 스코틀랜드군의 머리 위로 화살비를 쏟아붓도록 명령했다. 아마 이 화살비가 지속되었다면 스코틀랜드군은 폴커크의 참패를 반복했을 것이다. 이때 로버트는 지금까지 아끼고 있던 기병들을 투입했다. 그들은 잉글랜드 기사단보다 경무장이었고 수도 적었기에 정면승부는 승산이 없어 그동안 뒤로 빼놓은 것이었다. 곧 스코틀랜드 기병대가 잉글랜드 장궁병들을 덮쳤고 장궁병들이 전장에서 제거되었다.
양군의 싸움은 점차 절정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잉글랜드군의 숫자는 여전히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들은 점차 상황을 파악하며 진형을 구축하는 중이었다. 반면 스코틀랜드군은 더 이상 예비대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자 로버트는 마지막 카드를 썼다. 일전에 후퇴해 있던 궁수들이었다. 그들은 곧 잉글랜드군의 머리 위로 죽음의 화살 소나기를 쏟아부었고 동시에 스코틀랜드 기병들이 잉글랜드군의 후미를 강타했다. 이를 예상못한 잉글랜드군은 스코틀랜드군의 공격으로 곳곳에서 무너지다가 마침내 패주하기 시작했다.
이후 거대한 승리의 함성이 전장을 뒤덮었다. 14년만에 스코틀랜드군이 야전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한 것이었다.

○ 스코틀랜드 승리의 원인
보병은 머릿수에서 2배나 열세이고, 궁수와 기병은 잉글랜드와 비교할 수 없이 압도적으로 질과 양이 떨어지는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군을 박살낸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유기적인 협동공세에 있었다.
확실히 스코틀랜드의 밀집 장창벽(쉴트론)은 무적의 방어력을 자랑했고, 클랜 중심의 무장화된 수렵, 목축 사회에서 징발된 하이랜더를 주축으로 한 켈트식 보병들의 충격력은 굉장했지만, 장궁병에게 너무나 취약했다. 이전에도 이후로도 인구나 자원, 경제력 등 모든 면에서 훨씬 우월한 잉글랜드를 상대로 야전에서 스코틀랜드가 열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스코틀랜드 측은 보병의 충격력 하나만 우위인 반면, 잉글랜드는 병력은 물론 장궁병 중심의 사격전이나, 기병대를 동원한 기동력 같은 다른 분야에서 모두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버트 더 브루스는 이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아군에 유리한 전장을 선택하고 가지 자르듯이 영국군의 기병, 장궁병, 보병들을 차례차례 격파해 나갔으며 최종 국면에서는 보병-기병-궁병의 총공세로 잉글랜드군의 숨통을 끊었다. 잉글랜드 측 장궁병의 견제 능력을 무효화시키는 한편, 스코틀랜드측의 우위인 보병의 돌격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 밀착시켰고, 또 이 과정에서 주력인 보병의 피해를 최소화시키기 위해 열악한 궁병대를 방패로 내세우는 등, 상대와 자신의 능력을 깊게 파악하고 이에 주도면밀하게 대응한 교과서적인 지피지기 백전불태의 승리였던 것이다.
반면 잉글랜드는 지휘관의 무능 때문에 무작정 공격을 일삼았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 잉글랜드군의 참패는 예상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결과 : 스코틀랜드의 독립
패배한 에드워드 2세는 간신히 전장에서 빠져나와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패배의 대가는 너무나 참담했다. 기사만 1천여 명 가량 전사했고 보병은 반절을 잃었다.
잉글랜드 역사상 손에 꼽을 만한 큰 패배였다.
반면 스코틀랜드는 모든 것이 열세였던 상황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사실상 독립을 확정지었다.
무엇보다도 공식적으로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군을 평야에서 회전을 벌여 승리한 것은 스털링 전투 이후 14년만이라 군사적 자신감을 회복한 것은 물론 로버트 1세의 불안정했던 왕위도 안정되었다.
물론 잉글랜드가 공식적으로 스코틀랜드에 대한 모든 권한을 포기한 것은 1328년에 맺은 에든버러 조약이지만, 사실상 이 배넉번 전투 이후 스코틀랜드는 독립한 상태였다.

* 부록 : 스코틀랜드의 국가 ‘스코틀랜드의 꽃‘ (Flower of Scotland)
스코틀랜드의 대표적인 국가는 ‘스코틀랜드의 꽃’ (Flower of Scotland, 스 게: Fhlùir na h-Alba, 스: Flouer o’ Scotland)이다.
원래는 포크 스타일의 대중가요였다. 1960년대에 스코틀랜드의 2인조 포크 그룹인 더 코리스의 멤버인 로이 윌리엄슨 (1936~1990)이 작사 및 작곡하였다.
이후 1969년 앨범인 ‘The Corries In Concert’, 1974년 앨범인 ‘Live From Scotland Volume 1’ 등 더 코리스의 앨범에 여러 차례 실려 대중가요로 널리 불렸으며, 더 코리스의 최대 히트곡으로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 노래가 스코틀랜드의 비공식 국가로 처음 채택된 것은 1990년 (럭비 국가대표팀 기준)이다.
당시 스코틀랜드 럭비 국가대표팀은 에든버러의 럭비 구장인 머레이필드에서 잉글랜드 럭비 국가대표팀과 그랜드 슬램 자리를 놓고 맞붙었는데, 스코틀랜드는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에 13-7 승리를 기록하면서 그랜드 슬램을 차지했다.
그 이전에 비공식 국가로 불리던 노래는 ‘용감한 스코틀랜드’ (Scotland the Brave)¹, 스코츠 워 헤이 (Scots Wha Hae) 등이 있었는데, 현재는 대부분의 스포츠 및 종교 행사에서 ‘용감한 스코틀랜드’ 대신 이 ‘스코틀랜드의 꽃’이 국가로 불리고 있다.
아직 공식 국가로 채택된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스코틀랜드 국가로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스코틀랜드의 국가는 사실상 이 ‘스코틀랜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축구 협회는 1997년에 ‘스코틀랜드의 꽃’을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대표하는 국가로 채택했다.
또한 2010년 코먼웰스 게임부터는 이 노래가 2006년 대회까지 스코틀랜드 선수단을 대표하는 국가로 불리던 ‘용감한 스코틀랜드’를 대신하여 스코틀랜드 선수단을 대표하는 국가로 불리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흔히 ‘스코틀랜드 용사’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알려져 있기도 하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