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6월 4일, 중국 천안문 사건 (天安門事件, 1989년 4월 15일 ~ 6월 4일) 강제 진압
1989년 6월 4일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계엄군이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시위 중인 시민을 무력으로 진압한 톈안먼 / 천안문 사건 (天安門事件)의 종료즈음이다.

– 천안문 사건 (天安門事件)
.날짜: 1989년 4월 15일 ~ 1989년 6월 4일
.장소: 베이징을 비롯한 중화인민공화국 전역의 400개 도시
.결과: 시위의 무력진압 결정, 유혈사태 발생, 민간인 대량학살
톈안먼 / 천안문 사건 (天安門事件) 또는 제3차 천안문 사태 (第三次天安門事態), 또는 6·4 사건은 1989년 6월 4일, 후야오방의 사망 이후 발생한 톈안먼 광장 등지에서 시위대와 인민이 전개한 반정부 시위를 중화인민공화국의 개혁개방 정권이 유혈 진압한 사건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일반적으로 이 사건을 1989년 춘하계 정치풍파라 지칭하는 반면, 비판적인 반체제 세력 및 서방세계에서는 톈안먼 광장 저항시위 또는 톈안먼 광장 도살, 89년 민주운동이라고 칭한다. 중국의 검색엔진에서 톈안먼 사건을 검색하면 접속이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에, 5월 35일 (5월 31일+4일), VIIV (로마숫자 64), 82 (64=6월 4일) 등을 은어로써 사용하기도 한다.
애초 공식 발표로는 민간인 사망자 300여 명, 부상자 7천여 명이 발생한 사건이다. 국제적십자협회는 2,600 여명으로 사망자를 발표했다. 비공식 집계로는 1만여 명 사망, 그 후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가 1990년 7월 10일 제5차 국무원 보고에서 정식 발표한 것을 따르면, 민간인 사망자는 875명, 민간인 부상자는 약 14,550명이었으며, 군인과 전경은 56명이 사망, 7,525명이 부상당했다.

– 영향
사건 이후 서양 세계와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덩샤오핑이 새로운 후계자를 물색하게 되었다. 보수파의 압력으로 덩샤오핑은 권좌의 중심에서 물러났고 그가 추진했던 중국의 개혁, 개방 정책들이 하나 둘씩 뒤집혔다. 시위 혼란을 확대시킨 혐의로 자오쯔양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중국 정치 무대에서 떨어져 나가며 연금에 처해졌고, 중국의 시장경제 개혁 노선은 지체되었다. 1991년, 문혁파의 전 지도자, 1972년 리처드 닉슨과 마오쩌둥 간의 중-미 정상회담의 참여자, 문화대혁명의 정통성을 상징했던 장칭이 연금 상태에서 결국 자살을 선택하면서 덩샤오핑은 ‘우(右)도 경계해야 하지만 주로는 좌 (左)를 더욱 경계해야 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발표하고 베이징을 떠나 군과의 유대 관계를 공고히 한 뒤, 이듬해 남순강화 (南巡講話)를 통해서 개혁, 개방의 확대에 나서자고 했다. 자오쯔양의 후임에 장쩌민이 승계하였으며, 2~3년 간 조심성 있는 길을 걸어야 했다. 자오쯔양의 정치적 동료였던 리펑은 사태 뒤 중국 국무원 총리를 계속 역임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1980년대와 달리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주의를 지식분자, 농민, 노동자들의 정치적 주선율 (主旋律)에 직접 놓지 않게 하는 등의 큰 변화를 가하면서도, 이후 덩샤오핑 이론, 장쩌민 삼개 대표론을 통해서 중국 공산당 체제의 개혁개방 영도를 이어갔으며, 이로부터 학생들의 계급투쟁 운동의 기반을 차단하는 한편, 톈안먼 인민들의 위법 폭력 시위 가중에 따른 진압의 결정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