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2년 7월 16일, 무함마드 (Mohammed, Muhammad, Mahomet, 570 ~ 632)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거처를 옮겨 이 날 ‘헤지라’는 이슬람력의 원년
무함마드 / 마호메트 / 모하메드 (Mohammed, 570년 ~ 632년 6월 8일)는 이슬람의 예언자이며 성사 (聖使, Holy Prophet, Last Prophet of Islam)이다.

– 마호메트 또는 모하메드 (Mohammed, Muhammad, Mahomet)
.출생: 570년, 아라비아 헤자즈 메카
.사망: 632년 6월 8일, 아라비아 헤자즈 메디나
.거주지: 메디나
.성별: 남성
.국적: 아랍인
.별칭: 라술 (사도)
.직업: 선지자
.종교: 이슬람교
.부모: 아브드 알라 (부), 아미나 (모)
.친척: 아브 딸립 (삼촌)
마호메트 또는 모하메드 (Mohammed, Muhammad, Mahomet) 등은 아랍어 여러 방언의 발음 변이 및 아랍어를 차용한 여러 언어의 발음 차이로 생긴 변이형이다.

○ 생애 및 활동
무함마드 (Mohammed)는 570년, 아라비아 헤자즈 메카에서 출생했다.
목동이었던 무함마드는 가난했던 삼촌 아부 딸립을 생각하여 수익성이 좋은 직업을 구했고, 삼촌 아부 딸립의 소개로 부자이자 과부 디자의 고용인으로 들어가 그녀를 대신해 시리아 지방으로 대상 무역을 떠나게 된다. 이 무역은 큰 성공을 거두고 샴 지방의 특산품을 구해 메카로 돌아왔다. 카디자는 이제 깊은 감명을 받고 15살이나 어린 무함마드에게 청혼을 하였다. 무함마드가 25세, 카디자가 40세에 둘은 결혼을 하였다. 부자였던 카디자와의 결혼은 무함마드에게 부와 명예를 주었고, 무함마드는 삼촌의 재정적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사촌 알리를 입양하였다.
– 진리 추구
경제적인 부는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한 여유를 주어, 무함마드는 금식하며 사색하며 진리를 찾기 시작했다. 사실 이러한 종교적 감수성은 유년시절부터 타고난 것이었다. 무함마드가 어린이일 때에 그의 삼촌은 카바 신전의 관리인이었다. 카바신전에서는 검은 돌을 숭배하였는데, 이를 본 무함마드는 과연 검은 돌이 신인가라는 의문을 가졌다.
그러던 어느날 무함마드는 히라 산 (山) 동굴에서 계시를 받았다. 무함마드는 겁에 질려 집으로 돌아왔는데, 부인 하디자가 무함마드를 진정시키고 자신의 사촌이자 이비아니교의 사제였던 와라카 이븐 나우팔에게 가서 사정을 설명하였다.
와라카 이븐 나우팔은 무함마드가 만난 것이 천사 가브리엘이었다며, 무함마드가 예언자라고 말하였고 하디자는 집으로 돌아와 무함마드에게 모두 말한 후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최초의 무슬림이 된다.
– 설교자
첫 계시를 받은 후 점차 너의 양자들과 노예 그리고 친한 친구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하였고, 3년째 되던해 무함마드는 자신이 ‘알라의 사자’라는 정체성으로 자신의 친구와 친족을 모아놓고, 하늘의 계시에 의하여 유일신 알라의 전지 전능함, 만물의 창조, 최후의 심판 및 천국과 지옥 등을 주장하고 설교를 시작하였다.
– 탄압
하지만 친구와 친족들은 그를 비난하고 모욕하여 무함마드를 무시했고, 무하마드는 치욕적인 비난을 받았다. 그러자 무함마드는 메카로 오는 순례객들에게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유일신 사상을 전하기 시작했고, 메카의 카바신전을 지키며 순례객들로 수입을 얻었던 부족원들이 무함마드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상숭배를 배격하고, 알라 (알라는 하나님을 뜻한다)가 유일신임을 주장했다.

– 메디나로 이전 (헤지라)
622년 그도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갔는데, 이것을 신도들은 ‘헤지라 (성천)’라 하며 그 해를 이슬람의 기원으로 하였다. 메디나 시대에 이슬람의 예언자이며, 정치적 지배자, 무장 (武將)이기도 한 그는 계속 하늘의 계시를 전하였다.
한편 종교법, 사회적·경제적 여러 규정을 정함과 동시에 메카와 시리아의 통상로를 위협하고, 624년 해마다 메디나를 공격하는 메카 군을 메디나 남서에서 격파함으로써 무슬림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이슬람이 세력을 넓혀가자 유럽사람들은 ‘한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어, 마치 이슬람이 강제로 개종하게 한 것처럼 악선전을 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무함마드는 폭력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써 이슬람 신앙을 넒혔다. 무함마드는 메카의 북쪽에 있던 메디나가 아랍계와 유대계의 갈등상태임을 알고는 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신 신앙인 이슬람을 대안으로 제시하여 중재했다.
630년 외교협상으로써 메카에 입성하여 카바 신전의 우상을 모두 파괴하였다. 그는 “진리는 왔고, 거짓은 멸망하였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슬람은 세율이 낮은 조세를 거두고, 평등한 참정권을 보장함으로써 평화적인 방법으로써 피정복민들을 복속하게 했다.

헤지라 (Hegira, 이주) : 예언자 무함마드, 추종자들 이끌고 메카에서 메디나로 피신 (출발 622년 7월 16일, 도착 622년 9월 20일)
헤지라 (Hegira)는 무함마드가 박해때문에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사건이다. 이슬람교의 전설에 의하면 622년 9월 20일의 일로서 메카를 출발한 날이 아니라 메디나에 도착한 날짜를 말한다.
헤지라가 이슬람교 발전의 전환점이었으므로, 뒷날의 이슬람교도들은 이 날, 곧 율리우스력 (뒤엔그레고리오력) 622년 7월16일을 이슬람력의 원기 (元期)로 삼았다.
순태음력인 이슬람력은 이슬람 국가들의 정력 (正曆)이다. 이 달력에 따르면 한 해는 12달이고, 그 가운데 11달은 30일의 달 (6회)과 29일의 달 (5회)이 번갈아 든다.
12월은 29일이 될 때도 있고 30일이 될 때도 있다. 30년 가운데 12월이 30일인 경우가 11회, 29일이 되는 경우가 19회다.
결국 이슬람력의 한 해는 354일 또는 355일로 태양력의 경우보다 10일 이상 짧아 한 해나 한 달의 시작이 계절과 점차 어긋나게 된다. 반면에 이달력은 달의 움직임을 거의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오늘날 서력 (그레고리오력)은 거의 보편적인 달력이 되었지만, 이슬람세계만은 예외다.대부분의 이슬람국가들에서 서력은 병용 달력에 지나지 않는다.
‘헤지라’라 함은 본래 혈연 · 지연관계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것을 의미했으나 이것이 뒤에는 종교적 이유에 의한 이동을 뜻하게 되었다. 이슬람교는 헤지라를 계기로 해서 메카에 있어서의 사적 신앙 단계를 벗어나 하나의 교단을 형성하는 단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로 말미암아 이것이 이슬람교의 역사적 전환점으로서 이슬람교 초기의 교도들에게 인식되어 뒤에 이슬람교 기원 (紀元)의 출발점이 되었다 (헤지라 기원 원년). 무함마드의 헤지라 때 메카의 이슬람 교도들도 집단적으로 메디나로 이주하게 되었다 (하로지룬). 이미 메디나측과는 무함마드와 그의 종교집단을 받아들인다는 협정이 성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메디나측으로서는 메카측과는 달리 다신교를 기초로 하는 기득권이 없었기 때문에 이슬람교를 그들의 정치적·사회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것으로 수용하기가 쉬웠다. 메디나에서 무함마드에 반대한 사람들은 <쿠란>에서 ‘무나휘쿤’이라 하여 경멸적으로 불리고 있다. 반대 이유는 종교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 헤지라 (Hegira)
.날짜: 622년 6월 21일 / 7월 16일 ~ 622년 7월 2일 / 9월 29일
.위치: 아라비아 (메카 ~ 야스리브; 이명 ‘메디나’는 “예언자의 도시” 의미)
무함마드는 610년 첫 계시를 받은 뒤 고향 메카에서 10년간 이슬람 포교를 위해 노력했으나 기득권 계층인 쿠라이쉬족의 박해로 참담한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나 포교 11년째에 접어든 620년, 메카에서 북쪽으로 400km 떨어진 야스리브 (메디나)에서 여섯 명의 순례객이 메카로 왔다가 무함마드의 설교를 들은 뒤 종교적 감명을 받았으며, 그들 중 다섯 명이 다음해에 야스리브의 유력 인사 7명과 함께 메카로 다시 와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이어서 622년 6월 순례 때에 75명의 야스리브 주민이 이슬람을 받아들이는 일이 있은 뒤 무함마드는 신으로부터 이주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
이 계시에 따라 무슬림 모두가 야스리브으로 옮겨가는 이주 (헤지라)를 단행했다. 일족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당시 아라비아 사회에서는 자살행위와 다름없는 짓이었으며, 메카의 쿠라이쉬 부족은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이 친족과 고향을 버린 것에 크게 분노했다. 그러나 622년 7월 16일, 약 200여 명의 무슬림들이 메카에서 나와 무사히 야스리브에 도착했다. 이슬람 역사에서는 이 이주의 해를 이슬람 공동체가 만들어져 이슬람 국가가 태동하는 시점으로 보며, 따라서 이슬람력 (히즈라력)의 원년으로 한다.
무함마드는 가장 늦게 메카를 떠났으며, 그를 살해하려는 쿠라이쉬 부족의 추격을 피해 야스리브로 가는 도중의 한 동굴에서 친구 아부 바크르 (후에 제 1대 칼리프가 됨)와 3일간 숨어 지냈다. 쿠라이쉬 수색대가 동굴 안까지 들어왔으나, 잔뜩 쳐져있는 거미줄을 보고 그냥 되돌아갔으며, 후대 무슬림들은 이 사건을 신의 섭리에 의한 기적적인 일로 설명하고 있다. 결국 무함마드는 추격을 피해 622년 9월 24일에 무사히 야스리브에 도착했으며, 이때부터 야스리브는 ‘메디나 (예언자의 도시)’로 불리게 되었다.

본래 메디나 주민들이 무함마드를 초청하고 받아들인 것은 6세기 초부터 지속되어온 내부분쟁 때문이었다. 메디나에는 나디르, 쿠라이자, 카이누카 세 유대족을 포함하여 11개의 아랍 씨족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모두가 오아시스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수자원을 둘러싼 씨족간의 갈등이 극심해 이를 해결해줄 공정한 조정자를 찾고 있었다. 따라서 메카에서 무함마드의 설교를 들은 순례객들은 무함마드를 적절한 중재자로 인식했으며, 그 이면에는 이미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을 접해본 이들에게 심의 계시와 영감을 받는 종교 지도자에 대한 이해도 어느정도 작용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헤지라를 통해 무함마드는 메카에서부터 그를 따라 이주해온 무슬림들인 무하지룬 (이주자들)과, 메디나에서 그를 지지하고 받아들인 메디나 주민인 안사르 (지지자들)를 형제애로 묶어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인 ‘움마’를 건설했다. 따라서 헤지라는 이슬람 제국의 기초를 마련한 사건이자 이슬람 역사에서 새로운 장을 여는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